칼럼 ㅡ 21세기 종교의 조건
김 대 환ㅡ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 정문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잘못을 낱낱이 고발하는 95개 조항의 질의서가 나붙었다. 서른네 살의
수도사였던 마틴 루터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점점 더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스물두 살 되던 해인 1505년 수도승이 되겠다
고 결심하고 격렬한 신앙적 고투를 하면서 성서를 학문적으로 조명하기 시작
했다.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서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하였는데, 이를 면죄부를 팔아서 충당하려고 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구원은 선행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교회에 기부하는 행위
도 선행의 한 가지라고 하였다.
또 연옥(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남은 죄를 씻기 위하여
불로써 단련받는 곳)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친척을 위해서도, 교회가 중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말하자면 면죄부를 사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이
연옥에서 보낼 시간을 사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다.(메리풀브룩).
루터가 볼 때 면죄부 판매를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수탈하는 것도 문제였지
만, 그것은 교리적으로도 깨끗하지 못한 것이었다. 루터는 신앙만이 구원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믿었다. 성서를 공부할 수록 이러한 그의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그리하여 그는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작성
하고, 자신이 있던 대학의 교회 정문에 내걸어 일대 신학 논쟁을 유발하였다.
이것이 바로 올해로 500주년에 이르는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종교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초기의 종교지도자들은 기존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이 발견한 참신한 영적 세계를 행동으로 보여준 자들로서, 당시
종교인들에게 이단이나 무신론자로 낙인찍히거나, 동료들로부터 메시아나
성인으로 추대받았다고 한다(배철현). 따라서 당연히 그들에게는 종교집단의
권위라고 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단(異端, heresy)이라는
개념은 원래 선택이나 학설을 의미했을 뿐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종교집단
이 부유해지고 종교의 열정과 이상이 점점 안주와 타협으로 변질되어, 이들은
이단을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비난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루터는 그것을
탄핵한 것이고, 기꺼이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주님의 포도밭을 망치는 멧돼지'
라는 비난을 자초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옥스퍼드대학의 저명한 교수 시어
도어 젤딘은, 이단은 '작은 혁명으로서 아직 이루지 못한 이상을 일깨우는
장치'라고 하였다.
결국 17세기에 이르러 서구는 그리스도교가 가톨릭과 개신교로 분열되면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토인비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그리스도
교의 후퇴로 생긴 공백을 세 개의 종교가 메웠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과학
기술의 신봉과 함께 진보의 필연성에 대한 신앙, 국가주의 그리고 공산주의
였다. 그런데 토인비가 지적하였듯이 그가 살았던 20세기에 이미 인류의 새로
운 이 세 종교는 모두 아무런 종교적 대안이 될 수 없음이 드러났다. 과학기술
에 대한 맹신은 무분별한 개발과 자연파괴를 가져와 결국은 그 재앙이 현대에
속출하고 있으며, 국가주의는 자국우선을 앞세워 약소국가를 짓밟고 공존의
세계를 대립과 각축의 세계로 변모시켰다. 또 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는 독재국가로 종결되어 그 최후를 맞이했다.
더구나 이 종교 공백의 상태에서 현대는 세계가 일체화되어가는 전대미문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고, 일찍이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 인류를
이끌고 있기 때문에, 이 새로운 문명을 이끌어나갈 인류의 미래종교는 무엇
인가를 토인비는 고뇌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21세기의 종교'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늘 존재하면서 인류의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탐욕과
전쟁, 사회적 불공정, 그리고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파괴적인 인위적 환경들과
같은 여러 악과 대결하여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종교'여야 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와 더불어 아널드 토인비 박사가 생전에 겪어보지 못한 21세기는 여전히
탐욕이 지배할 뿐 아니라 종교적 대립이 격화되는 새로운 상황들에 직면하고
있는 만큼, '21세기의 종교'는 우선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 공존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지난 세기 인류가 겪은
체험에서도 분명히 드러났거니와, 인류는 새로운 것을 수용하여 지적으로
늘 발전할 수 있다는 유연성을 수용하여야 한다. 과거의 사상과 철학에
지나치게 경직되어 의존하면 원리주의와 교조주위에 빠지기 쉽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그것이 인간의 정신을 속박하는 본말전도에 빠지게 되기 때문
이다.
한 저명한 종교가는 현대에서는 종교인이나 비종교인, 무신론자가 크게 다르
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갑갑한 교리나 조직지상
주의에 매달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21세기의 종교는, 이러한 현대인의 삶의 태도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저명한 종교지도자 이케다 다이
사쿠 박사의 다음과 같은 말을 되새기고 싶다. "종교는 인간의 행복과 사회
번영 그리고 세계평화를 위해 존재한다. 종교의 복권은 종교본연의 사명을
완수하는 일이며, 그러려면 종교의 올바른 모습을 되묻는 작업이 늘 필요하다.
왜냐하면 종교가 스스로 끊임없이 개혁하고 향상해야, 사회를 개혁하는
위대한 힘이 되기 때문이다."
학회는 따뜻한 격려의 세계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성실한 대화 속에 우정이 맺어진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승리의 기쁨을 이야기하는 회원들의 체험을 들어보면,
한결같이 자신의 소감을 이렇게 말한다. "학회의 선배 덕분이다"라고.
성훈에 "강한 지주를 세우면 넘어지지 않으나" "도와주는 자가 강하면 넘어
지지 않으나" (어서 1468쪽)라고 씌어 있는 그대로다. 주로 어떤 말이 힘이
되었는지 물으면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누구나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겠다' '내 고민을 알아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한다. 사실 상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동안 가슴
속에 쌓였던 고민이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는 데에 '아,
이 사람은 나를, 나의 이야기를 존중해주는구나' 하고 느낀다. 그런 성실한
대화 속에 우정이 맺어진다. 용기 있는 '한 사람'의 행동은 어떤 말보다 웅변
이다. 이케다 선생님은 법화경에 설해진 관세음보살의 행동을 말하며
"한사람 한사람의 절실한 마음을 '들어주고' '알아주고' '달려가주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가족처럼 들어주는 것이 삶의 격려가
된다"고 말했다. 지역 공헌을 목표로 행동하는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사람들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고 격려의 파동을 넓혀가야 하겠다.
어느 여자부원은 직장 관계로 가족과 떨어져 홀로 생활을 했다. 가족을
떠나본 경험이 없는 이 여자부원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었고, 직장 일도 힘
들었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어느 날 초인종이 울렸다. 나가보니 생일케이
크를 들고 함박 웃음을 짓고 서있는 학회 선배였다. 힘들 때마다 선배가 찾아
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걱정해주고, 격려해주었다. 때로 가족
조차도 불안하게 바라보던 그에게 선배는 '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일찍 피는 사람, 늦게 피는 사람의 차이는 있어도, 자신의
'행복의 꽃'을 반드시 피울 수 있어요"라고 몇 번이고 말해준 선배가 있었기에,
이제는 지역에서도, 직장에서도 후배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격려하며 멋지게
활약하고 있다.
이 여자부원은 고민을 말하는 처지에서, 고민을 듣고 다가가 격려하는 처지로
바뀌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케다 선생님은 '법화경의 지혜'에서 이렇게
통찰했다.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 괴로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실은 자기자신의 괴로움이
치유되어 갑니다. 타인을 받아들이고 격려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격려를
받고 열립니다." 하고 말했다. 학회는 따뜻한 격려의 세계다. 격려는 '무엇을
말해주었나'가 아니고, '무엇을 들어주었나' 하는 것에 깊은 의미를 둔다.
사람들은 모두가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한다. 그 고뇌의 음성 속에 이미
'불계(佛界)'의 싹을 품고 있다. 소리를 듣는 데서부터 변혁의 드라마는 시작
된다. 괴로워하는 벗에게 다가가, 그 안에 감춰진 불성(佛性)을 철저히 믿는
'강한 지주'가 되었으면 한다.
오늘의 용기 내일의 희망
우리에게는 해야 할 '사명'이 명확하게 있다. '광선유포'라는,
전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 '최고의 일'이 있다. 이 사명의 길
에서 노고하며 학회 활동에 힘쓰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그것을 자각하느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