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 신부님을 평생 동안 ' 아버지'라여기며 가끔은 아버지라 불렀고 신부님도 나를 가끔씩" 자식아 '하고 불렀다. 헝거리 출신 주교 학자 신부님인 히아친또 성인의 이야기도 들려주셨고 내가 그 성인처럼 열심히 신앙공부를 하기를 바라시기도 하셨다. 갈 신부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은 내인생에서 한층 신앙생활을 성숙시킨 참으로 보석같이 빛나던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당시에는 라틴어 미사가 일반적이었고 신부님의 강론역시 라틴어를 혼용하던 시기였다. 바티칸 공의회(2차) 의 전파가 속속들이 전파되던 시절이 아니어서 제대쪽 난간이 존재했고 미사 제대가 신부님이 신자를 등진채 제사를 드리던 때이기도 하였다. 일반신자들에게 100%의 의사 소통과 하느님 말씀의 이해가 어려운 때 이기도 했다. 난간이 권위주의 상징임을 알게 된것은. 프린트물로 제공된 이후 상당기간이 지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해설 요약 을 읽어 보고. 알게된 것이다.
당시 공의회를 계기로 이루어진 전례개혁은 [1]. 성당앞에 벽에 붙어있던 제대 (祭臺)를 사제와 신자들 사이 가운데로 옮긴것. [2]. 제단과 신자석(信徒席)을 가로막던 난간울 없앤것. [3]. 난간에 꿇어서 혀로 받던 영성체식을 손바닥으로 받는 방식으로 바꾼것. [4].밤 12시부터 지켜야 했던 공복제를 성체를 영하기전 한시간전 공복제로 바꾸어 영성체를 훨씬 용이하게 한것. [5]. 라틴어로 집전되던 미사와 칠성사(七聖事)를 현지어로 바꾼것등이 었다. 한국 교회는 이런 개혁들을 받아 들였을 뿐만아니라 1971년에는 힌국 주교단은 '전례의 토착화'를 위해 3가지 추가적인 개혁을 시도하여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1). 존경의 의미로 무릎을 끓는 대신에 깊이숙여 절 하는 것. (2). 제대와 성경에 친구(親口)하는 대신에 머리를 숙여 절 하는것. (3). 평화의 인사를 위해 어떤 동작보다는 절하면서 "진심으로 축복합니다."라는 말을 하는것이 그것이다. =========================== ● 칠성사(七聖事)란? 1. 세례성사
이마에 물을 부으며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에게 세례를 줍니다.”라는 예절을 통해 받는 성사이며, 원죄를 포함한 모든 죄를 용서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일원이 되게 하는 성사이다.
2. 견진성사
세례 받은 신자를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성령의 은혜를 받는 성사로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세상에 증거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게 하는 성사이다.
3. 성체성사
교회의 일곱성사 가운데 으뜸이 되는 성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의 재현과 우리에게 넘겨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뜻하며 우리 영혼 생명의 양식이 된다.
4. 고해성사
영세 후 하느님과 이웃을 거슬러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교회와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제에게 그 죄를 고백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받는 성사로서 죄로 인해 끊어진 하느님과 이웃과 교회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해의 성사이다.
5. 혼인성사
가톨릭 신자인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본당 신부와 증인들 앞에서 자유로이 사랑의 원의를 드러냄으로써 이루어지는 성사로서 부부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사랑에 일치케 하며 그들로 하여금 자녀 출산과 교육을 통해서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성사이다.
6. 신품성사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계승하여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고 복음을 선포하도록 사제들을 교회의 권위로 축성하는 성사로서 이 성사를 통하여 성직자들에게 필요한 은혜가 베풀어 진다.
7. 병자성사
죽을 위험에 처한 병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파스카 신비)에 특별한 모양으로 참여하며, 그분의 위로와 용기를 받으며, 필요한 경우 육신의 건강과 영혼의 건강을 얻게 하는 성사이다. ===========================
신부님은 가끔씩 나에게 강론의 초고를 주시고는 한글로 강론을 눈에 잘 띄개 정서 해주는 일을 부탁하셨다.. 나는 아주 열심히 기쁘게 생각하며 그 일을 했고. 그로 인해 나의 글씨체도 정서체로 바뀌어 주변으로 부터 가끔 글씨 잘쓴다는 이야기룰 듣기도 했다. 그 일을 통해 아을러 강론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인지하며 신앙심을 키워가는 힌 부분이 되기도 하였다. 신부님의 의식 세계와. 신앙심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매일미사를 참여했고 한동안은 새벽미사 복사를 도맡아 하기도 했다. 당시는 제대와 신자들간에 난간이 존재했으며 재대마루가 작은 높이 층을 이루고있어서 무릎을 끓게되면 모서리에 박히는 일이 많아 아프긴 했지만 이 시간 역시 예수님의 고난을 함께하는 시간이라 생각하며 견디며 미사참례를 하였다.
그런가운데 항상 내 주변엔 영세 동기인 정헌수 로베르또 형제와 박스테파노 사진사인 서안드레아 미카엘등 청년 활동을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고 당시 본당에는 딱 하나 있었던 남녀 혼성 레지오마리에 (기억하기로는 영원한 동정녀 마리아라는 쁘레시디움) 단장은 이금림 (스테파노 모친)테레사 부단장엔 나 이 히야친또 서기는 정헌수 로배르또 형제님이 맡아 활동울 하던 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