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저 제 성향대로 목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롭지 않은 그림 하나를 소개합니다. 아니 은혜로울 수도 있으니 양해하시고 글을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그림은 황금빛 가득한 '키스'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누다 베리타스(벌거벗은 진리)'이라는 작품입니다. 누드의 여성은 제목 그대로 벌거벗은 진리를 상징합니다. 진리는 아래쪽 뱀에 의해 위협을 받습니다. 그림의 윗쪽에 독일 작가 프리드리히 쉴러의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대략 이런 의미의 독일어 문장입니다. '당신의 예술작품으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면, 소수의 사람을 만족시키도록 하라' 글쎄 제 마음대로 이 그림을 해석해 보자면 진리는 늘 세상의 도전을 받고, 많은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으니, 소수의 영혼들이라도 만족시킨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대략 내 목회를 잘 설명하는 그림입니다. 저는 그저 교리를 동의하는 정도의 공동체, 소위 종교적인 공동체를 목회하고 싶지 않습니다.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은 소수이며, 의무적으로 봉사하거나 적당히 종교생활하는 분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교회보다,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교회 문화가 분명히 느껴지는 공동체를 섬기고 싶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성도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킹덤컬처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작은 공동체를 목회하는 제 목회를 변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목회는 제 성격과 깊은 관련이 깊습니다. 교회를 다니려면 제대로 다니자... 뭐 이런 생각이 저를 지배합니다. 이런 제 나름의 이상과 제 능력 부족이 만나 교회는 비교적 작은 편입니다. 그런데 저는 만족합니다. 제가 만족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을 만족시킬만한 대중적인 교회를 제가 선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달란트와 맞지 않는 것이지요. 세밀하게 의미를 이야기하자면 좀 숫자를 희생해서라도 주님 나라를 구현하는 성도들이 다수가 되는 교회를 이루기 위한 나름의 벽이 우리 교회에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불편하더라도 감수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저와 다른 교회론을 가진 다양한 분들이 있는 것도 참 다행입니다. 사람의 성향을 다양하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종교를 이용하는 사람, 이 교회 저 교회 돌아다니는 사람, 자신이 복음으로 변화되려고 하지 않고 교회 문화를 좌지우지하려는 사람(이 중직자가 되려는 것을, 그래서 교회 문화를 주도하려는 것)을 극도로 경계합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분들이 맞지 않아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교회 문화는 확실히 저에게 만족스럽습니다. 한 200명 남짓 공동체를 구성하는데, 어떤 분들에게는 큰 교회라고 할 수도 있고, 어떤 분들은 무시할 수도 있는 숫자입니다. 물론 아직도 초신자, 어중이 떠중이 신자들도 약간 있습니다. 그래도 성도들의 문화는 대체로 균일한 편입니다.
하나 확실한 제가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교회가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이라도 주님을 잘 믿는 문화로 변화되는 공동체라면 내 성격에는 만족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작은 교회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목회적 부족함이 교회의 큰 걸림돌이 되는 것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저 저는 성격적으로 <누다 베리타스>라는 그림이 의미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성격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내 성격에 맞는 목회를 하는 것에 대체적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봉사하고 선교하고 가정을 건강하게 만들어가는 일에 성도들이 하나되어서 감사하고, 분에 넘치는 재정적 헌신을 하는 분들도 많아서 감사합니다. 세례 받는 분들 대부분이 시간과 물질을 헌신하여 확실한 회개의 증거를 보여줘서 감사합니다. 어제도 다섯 분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두서 없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네요.
이종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