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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지몽(莊周之夢)
장자(莊子)의 꿈으로,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자기가 나비인지 나비가 자기인지 알 수 없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자아와 외계와의 구별을 잊어버린 경지를 뜻한다.
莊 : 엄할 장(艹/7)
周 : 두루 주(口/5)
之 : 갈 지(丿/3)
夢 : 꿈 몽(夕/11)
출전 :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나와 외물(外物)은 본디 하나이던 것이 현실에서 갈라진 것에 불과하다는 이치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말이다.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가 깬 뒤에 자기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는지 원래 나비였던 자기가 꿈속에서 장주(莊周)가 되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로, 장자(莊子) 사상의 으뜸을 이룬다.
주(周)는 장자(莊子)의 이름이며 자(字)는 자휴(子休)이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니 유쾌했지만, 자기가 장자인지 알지 못했고, 꿈을 깨니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꿈에 장자로 되었던 것인지 분간 못 하겠더라 했다. 나와 외물(外物)은 원래 하나라는 이치를 설명한 말이다. 장생호접몽(莊生胡蝶夢)이라고도 한다.
周與胡蝶則必有分矣(주여호접즉필유분의)
此之謂物化(차지위물화)
장자와 나비는 반드시 분별이 있을 것인데, 이를 한 물건이 다른 물건으로 변화하는 물화라 이른다.
- 장자(莊子) 내편(內篇) 제물론(齊物論)
莊生曉夢迷胡蝶(장생효몽미호접)
望帝春心託杜鵑(망제춘심탁두견)
장자는 새벽꿈에 나비 되어 헤매었고, 촉蜀의 망제는 춘심을 두견새에 붙이었네.
- 이상은(李商隱) 금슬(錦瑟)
蘇武書回深塞盡(소무서회심새진)
莊周夢逐落花忙(장주몽축낙화망)
소무의 글은 깊은 변방에서 돌아왔고, 장자의 꿈속 나비는 낙화를 좇아 바쁘구나.
- 최치원(崔致遠) 모춘즉사화고운우사(暮春卽事和顧雲友使)
참고로 호접몽(胡蝶夢)을 보자. 중국의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았다는 고사로, 나와 사물은 결국 하나라는 뜻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서 장자는 말하고 있다. "언젠가 내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나비였다. 내 스스로 아주 기분이 좋아 내가 사람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윽고 잠을 깨니 틀림없는 인간 나였다. 도대체 인간인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이 인간인 나로 변해 있는 것일까. 인간 장주(莊周)와 나비와는 분명코 구별이 있다. 이것이 이른바 만물의 변화인 물화(物化)라는 것이다."
장자는 또, "하늘과 땅은 나와 같이 생기고, 만물은 나와 함께 하나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한 만물이 하나로 된 절대(絶對)의 경지에 서 있게 되면, 인간인 장주가 곧 나비일수 있고 나비가 곧 장주일 수도 있다. 꿈도 현실도 죽음도 삶도 구별이 없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생각으로 느끼고 하는 것은 한낱 만물의 변화에 불과한 것이다. 호접춘몽(胡蝶春夢), 장주지몽(莊周之夢)이라고도 한다.
호접몽(胡蝶夢) 호접춘몽(胡蝶春夢), 장주지몽(莊周之夢)
장자(莊子)의 제물편(齊物篇)에 나오는 글이다. "내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 내가 사람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잠을 깨고 보니 나는 틀림없는 인간이었다. 인간인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인간인 나로 변해 있는 것일까?"
장자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았는데 그 구별이 없이 나비와 하나가 되었다는 뜻으로 호접춘몽(胡蝶春夢), 장주지몽(莊周之夢) 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피아(彼我)의 구별없이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비유한 것인데 인생의 덧없음을 말할때 쓰기도 한다.
만물은 구별없이 하나인데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만물의 변화에 불과하고 그에 따라 희노애락 등의 감정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현실과 꿈, 삶과 죽음의 경계도 없고 우주만물과 하나가 되는 경지가 본질이기 때문에 현실세계에서 느끼는 것들은 허상이요, 의미가 없는 일인 것이다.
인생이란 길고 긴 마라톤 속에서 어느 순간 문득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작은새 한마리를 보면서 그제서야 앞만보고 달려왔던 자신의 객관적 실체를 자각하고 그때 느껴지는 허무함과 덧없음은 호접춘몽을 떠오른게 한다. 한편으로 내가 살고 있는 이세상은 꿈이여 죽음이란 그때야 비로서 꿈에서 깨어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부귀와 영달을 꿈꾸며 세상을 제로섬 게임의 전장터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삶의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화려하게 치장된 현상들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과 현실적인 욕망만 쫒고 있는 지금 진정 자신이 바라는 행복은 무엇이고 의미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장주지몽(莊周之夢)과 장자(莊子)
상선약수(上善若水)는 약수터 명칭이 아니다. 노자(老子)는 인생의 끝자락 즈음, '물처럼 살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이 간단한 결론에 도달했다. 봄이 나무라면, 여름은 불이다. 물은 겨울을 상징한다.
노자는 약 5000 자 분량의 도덕경(道德經)을 남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물소의 등에 걸터앉은' 삽화 등 신비로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인물이다. 어쩌면 노자는 신화와 역사의 경계에 영원히 머물지도 모른다. 그의 젊은 시절이나 생몰(生沒) 연대를 아직 확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는 도가(道家) 사상의 발제문만 남기고 속세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로부터 약 200년 후 장자(莊子)가 혜성처럼 등장한다. 본명은 장주(莊周), 초(楚)나라 귀족 출신이다. 사연이 있어 초나라를 떠나 송(宋)나라 등 이국을 떠돌았다. 그의 생애는 경제적으로도 궁핍했다. 때론 끼니를 잇기도 어려웠다. 장자는 실존 인물이다. 근대화 이전 중국에서 단순히 문장력이라면 장자와 맹자를 으뜸으로 꼽는다.
장주지몽(莊周之夢)이다. 앞의 두 글자 '장주(莊周)'는 '장자의 이름'이다. '지몽(之夢)'은 '~의 꿈'을 뜻한다. 이 둘을 연결하면 '장자의 꿈'이 된다. 이 사자성어는 장자가 꾼 꿈에서 유래했다. 장주지몽을 호접지몽(胡蝶之夢)으로 쓰기도 한다. '호접'은 '호랑나비'의 한자어다. 호접지몽을 세 글자로 '호접몽(胡蝶夢)'으로도 쓴다.
하루는 장자가 꿈을 꾸었다. 너무 생생한 장면들이었다. 자신이 나비가 되어 허공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그런 내용이었다. 꿈이 깨고 장자는 의심한다. '나비도 수면을 취하긴 하니까 꿈도 꾸겠지. 그렇다면 거꾸로 지금 이 현실은 혹시 나비의 꿈 속 세계가 아닐까?'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장자 내편(內篇) 제물론(齊物論)에 우화(寓話)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약 10만 자 분량의 장자는 내편(內篇), 외편(外篇), 잡편(雜篇)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내편은 장자의 저술이고, 외편은 장자와 제자의 공저다. 잡편은 후세 사람들이 편집한 것으로 본다. 장자는 구체적인 이슈를 두고 유가(儒家)든 명가(名家)든 누군가와 논쟁을 펼쳤다.
일부 우화에서 비유가 과하거나 괴이한 것을 빼곤 그를 솜씨 좋은 소설가로 볼 수도 있다. 인간세(人間世), 소요유(逍遙游) 등 자신의 글 속에서 전무후무한 판타지 초현실 세계와 현실 사이를 장자는 깃털처럼 가볍게 왕래한다.
수학자들은 안 보이는 세계를 보는 재주를 갖고 있다. 그들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수월하게 왕래한다. 심지어 '각각 어디쯤이고, 서로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일까'를 암산으로 얼추 짐작한다. 과거에 이런 경지까지는 오직 수학자만이 해낼 수 있었다. 요즘은 컴퓨터가 눈 깜짝할 사이에 마무리해 보여준다.
장자의 '호접지몽' 우화에는 수학적 요소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장자가 꿈 꾸기 전의 일상을 기준으로 삼으면 우리가 늘 목격하는 이 세상이 '실수(實數)의 세계'다. 나비가 꿈을 꾸기 전의 그 세계를 기준으로 삼으면 우리의 이 일상이야말로 허수(虛數)의 세계일 수 있다. 우주의 눈으로 보면 음양(陰陽)의 기호만 바뀌는 셈이다. 수학과 철학, 그리고 문학의 절묘한 교집합 텍스트 사례다.
철학자 장자는 도덕경을 통해 노자와 대화하며 깊이 깨우친 바가 있었다.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 깨달음을 더 쉽게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방법이 막막했다. 장자가 이론보다 우화에 집중한 이유다. 직관에 기반한 지혜 전수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노자는 물소를 타고 미개간지의 밭을 쟁기질했다. 장자는 나비가 되어 구만 리 장천(長天)을 날며 씨를 뿌렸다. 지금 AI 시대에도 이 동방불패의 무위(無爲) 사상은 동양적 사유의 튼실한 한 축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서양에는 기원전 323년 사망한 디오게네스가 있다. 플라톤의 고급 침실에 들어가 자신의 맨발에 잔뜩 묻은 흙을 닦았다는 이 노숙(露宿) 철학자에게도 필요한 것은 많지 않았다. 장자가 남긴 우화와 디오게네스가 남긴 일화는 '초월(超越)과 놀라움'에서 서로 맥이 통한다.
공동 환상
'우리'에 대한 환상이라는 것이 있다. '나'와 '너'를 묶어주는 '우리'라는 관념을 형성하고 나면 이 '우리'에 대한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이 생겨난다. 필자만의 독특한 생각이라기보다 1960년대의 어느 일본 철학자의 생각을 빌린 것이다.
인간은 본래 환상, 환각의 존재다. 인간은 늘 진리를 찾아 헤매지만 '가상'에 휩싸여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다. 바로 그런 까닭에 이 가상의 동굴 속의 사람들은 진리의 빛을 '힐끗'이라도 쏘여본 사람들을 오히려 비웃는다. 환상, 환각의 힘이 너무 센 나머지 오히려 진리를 가상처럼 느끼는 단계에 다다른 까닭이다.
'장주지몽(莊周之夢)'이라는 말도 있다. '장주', 곧 장자의 꿈은 내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지금 '나'의 꿈을 꾸는 것인가를 묻는다. 요즘 우주론 가운데에는 정말로 현실을 사는 우리가 가상 세계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이론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달리는 현실이라는 것에 그토록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지 모른다.
'우리'에 대한 환상은 실로 강력해서 '나'의 가족은 절대적인 '진리'가 된다. 이름하여 가족주의다. 또 이 가족을 묶는 큰 가족, 위대한 가족으로서 민족, 국가는 '나'들의 희생을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게 하는 초월적 존재가 된다. 종교적 믿음으로까지 격상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보다는 단위가 작은데도 그 못지 않게 큰 힘을 발휘하는 환상적인 '우리'의 단위가 있다. 진보파다, 보수파다, 좌파다, 우파다 하는 논리가 그것이다.
이 논리는 환상이며 환각이 아닌지 따져 보아야 한다. '나'는 진보인가 보수인가? 인간의 삶은 수없이 많은 차원과 국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의 혼은 순수한 좌 또는 우가 되고 싶겠지만, 인간이란 수많은 차원과 국면의 통합체요, 때문에 그렇게 순수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것에서는 진보적이지만 어떤 것에서는 보수적이다. 인간 전체뿐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나'는 모순적 존재요, 모순적인 것들의 통합체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정치적 존재인 것만은 아니다. 좌다, 우다, 진보다, 보수다 하는 정치적 논리로는 인간의 삶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현대인들은 자신을 정치적 차원의 존재로 압착시키기를 즐긴다. 그 환상적, 환각적 믿음에 자기를 맡기고 나서 비로소 안도감을 느낀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총격을 받은 것은 확실히 암살 미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사건이 토머스 크룩스 한 사람의 소행이든, 그 배후에 어떤 조직적 음모가 도사리고 있든, 이것은 확실히 '공동환상'의 결과일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편, '우리'는 옳고 저쪽은 틀리다는 믿음이 확산되고 굳어지면 어떤 수단도, 방법도 정당할 수 있다는 신념이 형성된다.
트럼프를 파시스트나 나치로 이해하는 방식이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어 있다. 이들은 트럼프가 지난 수십년 사이에 증대한 백인 하층민들의 곤궁한 처지를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한다. 트럼프의 보수적인 측면에 주목하고 이를 과대평가하면서 그의 진보적인 측면은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의 '신념파'들이 초거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최근 문제가 되는 두 정당의 정치 '팬덤'들은 이 신념파들의 수중에 들어 있는 다중 '군대'인 셈이다. 이 정치적 팬덤은 좌우, 진보 보수의 어디가 옳다는 시각에서 훌쩍 더 나아가 이를 어느 한 정치인만이 대변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행동한다. 나머지는 다 '가짜'요, '수박'이요, 보수를 구할 자는, 정의를 실현할 자는 '그' 인물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믿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신념파들은 '중간파'니, '회색인'이니, '기회주의자'니들 한다. 그러나 진리에 가까운 빛깔은 오히려 회색이라고,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양극단의 사회에는 중재의 힘도 필요한 법이다.
장주몽접(莊周夢蝶), 그리고 나비는?
장주몽접(莊周夢蝶)이라고 있지요. 이를 풀면, 장주가 꿈꾼 나비, 즉 '장자의 나비 꿈'이라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장자몽접'이지 왜 '장주몽접'인가? 그건, 장자(莊子)에 붙는 자(子)는 공자, 맹자처럼 '높은 가르침을 주시는 선생'이라는 존경의 칭호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고, 장자의 본래 이름이 '주(周)'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장자인가 장주인가가 문제는 아니고, 그 꿈 이야기가 대체 무엇이기에 우리에게 그토록 오랫동안 전해져 오는 것인지 그 까닭이 궁금합니다. 그 이야기의 대강은 세상에 이미 잘 알려지긴 했으나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잠이 든 장자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펄럭이면서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 다녔던 것이다. 나비는 자신이 장자인지를 까맣게 잊었든지, 또는 모르는 채였다. 그러다 불현듯 꿈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은 나비가 아니라 장자로 돌아와 있다.
하여 장자는 생각에 잠겼다. 아까 꿈에 나비가 되었을 때에는 나는 내가 장자인지 몰랐다. 그런데 지금 꿈에서 깨어보니 나는 분명 장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정말 장자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깨어나 장자가 된 것인가? 지금의 나는 과연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나로 변한 것인가?
이 이야기는 흔히들 거론하듯이 인간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 또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보다 깊게 던지게 만든 장자의 화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꿈속의 나비가 자신이 장자인 것을 모르는데, 그렇다면 꿈을 깬 장자가 자신이 혹 나비인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이를테면 '꿈과 각성상태의 경계선을 의식하면서 진실을 응시할 수 있는 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또한 더 확대 해석해 보자면, '일체의 만물이 너 나의 구별 없이 다 하나가 아닌가'라는 생각에 이르는 매우 동양적인 명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장자는 자신의 장례식과 관련하여 제자들에게 그저 자신의 몸을 들판에 두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묻게 되든지 결국 하늘을 나는 새의 몸, 아니면 땅에 있는 벌레의 몸이 되거나 할 텐데 그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내 몸이 온 세상을 향해 열려 있고, 온 세상이 또한 내 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니 그런 존재의 마음의 크기는 그야말로 우주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이와 같은 제법 고풍스러운 논의와는 달리, 장자 개인에게로 집중해 보면 이 꿈의 정체는 세속의 이런 저런 굴레에 묶이지 않고 자유스럽게 삼라만상을 즐기며 날개를 펄럭이고 훨훨 날아다니는 삶을 꿈꾸어 온 열망의 표현이기도 하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마음은 하늘을 날아 다니지만, 언뜻 정신을 차려보면 현실의 여러 제약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부정할 수 없어 그로 인해 고뇌하는 장자가 떠오르는 듯 합니다. 그래서 어느 것이 진정 자신의 정체일까 하고 묻게 되는 것이겠지요.
인간이란 사실 내가 누구인가를 아예 물을 이유도 없이 꽃 사이를 유쾌하게 날아다니는 나비로 살고 싶지만, 정신을 차리고 깨어 마주하게 되는 현실은 꿈과는 사뭇 다른 것임을 부인하기 어렵게 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부터 인간은 나비로서 살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장자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늠하고 부단히 결정해가야 하는 운명에 처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장자가 나비 꿈을 꾸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비 꿈을 꾸지 않는 장자'는 장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여 나비와 장자의 관계는,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장자가 되었는가?'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라기 보다는, '장자가 어느 날엔가는 과연 나비가 될 수 있을까?'로 이어지는 질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라크 저항 단체의 한국인 인질 납치, 교육인적자원부총리 인사 패착, 어느 골목길에선가 실종된 개혁, 경제논리로 무장한 신자유주의 교육철학으로 말미암은 대학의 인문학적 위기, 참여정부의 사라지고 있는 '참여', 무너지는 민생경제, 어물쩍 부패한 언론 그리고 참담한 사회적 양극화. 오늘의 장자가 목격하고 있는 우리 현실의 이름입니다. 그 어디에도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가 될 애벌레의 유체(幼體)가 보이지 않는 듯 합니다.
꿈꾸기를 멈추어버린 정부가 있다면, 그러고도 계속 자신이 이 시대의 고민을 성찰하는 장자라고 여긴다면, 그건 이런 동요를 습관처럼 부르는 아이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 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오너라.' 장주몽접(莊周夢蝶)이야 옛날에 망각한 것 같고, 정작 나비가 오고 싶을 만한 꽃밭일랑은 제대로 가꾸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나비의 꿈이냐 장주의 꿈이냐
호접지몽(胡蝶之夢) / 장주지몽(莊周之夢)
흔히 인생의 덧없음을 뜻하는 말로 일장춘몽이나 남가일몽과 같은 뜻이라고 풀이한다. 하지만 우화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이야기에서 후회나 회한이 감정은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 속에서는 장주가 매우 즐거운 꿈을 꾼 것으로 보인다. 깨고 나서도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모르는 장주와 나비라는 구분이 무의미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나와 나비의 구분은 인간이 하는 분별의 세계일 뿐이지 자연이 변화하는 원리에서 보면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해석을 하게 된다.
昔者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예전에(昔者) 장주가(莊周) 꿈에(夢) 나비가 되었는데(爲胡蝶), 경쾌하게 훨훨 나는(栩栩然) 나비였다(胡蝶也).
自喩適志與!
스스로 유쾌하고(自喩) 뜻에 들어맞았다(適志與)!
不知周也.
(자기가) 장주인 줄 알지 못했다(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갑자기(俄然) (꿈에서) 깨어나니(覺, 則) 놀라는 장주였다(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장주가(周之) 꿈에(夢)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爲胡蝶與) 나비가(胡蝶之) 꿈에(夢) 장주가 된 것인지(爲周與) 알지 못했다(不知).
周與胡蝶則必有分矣.
장주와(周與) 나비라면(胡蝶則) 반드시(必) 구분이 있다(有分矣).
此之謂物化.
이것을(此之) 만물의 변화라고 한다(謂物化).
(註)
* 栩栩(후후)然 : 나비가 펄럭펄럭 경쾌하게 나는 모양. 가볍게 움직이는 모양을 나타낸 표현이다. 田子方 편에는 숨이 조용히 들락날락하는 모양을 栩栩然으로 표현하였다. '栩'는 황홀한 모양, 기뻐하는 모양이란 뜻이다.
* 胡蝶(호접) : 나비목에 딸린 곤충(昆蟲)의 무리. 두 쌍의 넓적한 날개가 있는데, 겉에 분가루가 많고 갖가지 무늬가 있음.
* 自喩適志與 : 전혀 어색함 없이 자연스러웠다는 뜻. 達生 편에 '발을 잊어버리는 것은 신발이 꼭 맞기 때문이다(忘足 屨之適也 忘要 帶之適也 忘是非 心之適也)'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바로 여기에 나오는 適자와 꼭 맞는 뜻이다.
* 俄然(아연) : 갑작스럽게
* 蘧蘧然周也 : 成玄英은 蘧蘧然을 '놀라 움직이는 모습(驚動之貌)'이라고 하여 꿈에서 깨어나는 모양으로 풀이했는데, 羅勉道, 蔣錫昌, 池田知久, 方勇‧陸永品 등은 모두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 반면 李頤는 '형체가 있는 모양(有形貌)'이라고 풀이했는데, 앞의 ‘栩栩然’이 나비의 경쾌한 모양을 표현한 것이라면 여기의 蘧蘧然은 장주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 주장도 배제할 수는 없다.
* 周與胡蝶則必有分矣 : 정말 구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세속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구분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 莊(씩씩할 장/전장 장)은 형성문자로 荘(장)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 풀, 풀의 싹)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성하다의 뜻을 가진 壯(장)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莊(장)은 풀이 무성(茂盛)하다는 뜻이 전(轉)하여 성(盛)하다, 엄(嚴)하다의 등의 뜻으로 ①씩씩하다 ②풀이 성(盛)하다(기운이나 세력이 한창 왕성하다) ③단정(端整)하다 ④바르다 ⑤엄(嚴)하다(매우 철저하고 바르다) ⑥장중(莊重)하다 ⑦정중(鄭重)하다 ⑧꾸미다 ⑨전장(田莊: 귀척, 고관 등의 사유지) ⑩영지(領地) ⑪봉토(封土) ⑫장원(莊園) ⑬별장(別莊) ⑭마을, 부락(部落), 촌락(村落) ⑮가게, 상점(商店) ⑯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장엄하고 정중함을 장중(莊重), 규모가 크고 엄숙함을 장엄(莊嚴), 씩씩하고 깨끗함을 장결(莊潔), 씩씩하고 공경스러움을 장경(莊敬), 의기양양한 말을 장언(莊言), 공경히 생각함을 장유(莊惟), 단단히 간직하여 둔 돈을 장강(莊鏹), 머리를 아름답게 꾸밈을 장수(莊首), 배나 수레 등에 짐을 꾸려서 실음을 장재(莊載), 혈기가 왕성한 남자를 정장(丁莊), 별장을 맡아서 관리함 또는 그 사람을 지장(知莊), 엄숙하고 장중함을 엄장(嚴莊), 조심성 있고 엄숙함을 긍장(矜莊), 시골에 있는 별장을 향장(鄕莊), 산 속에 있는 별장을 산장(山莊), 살림집 밖에 경치 좋은 곳에 따로 지어 놓고 때때로 묵으면서 쉬는 집을 별장(別莊), 개인이 소유하는 논밭을 전장(田莊), 서울 사람이 시골에 가지고 있는 농장을 경장(京莊), 황폐한 농가를 황장(荒莊), 시냇가에 지은 별장을 계장(溪莊), 개인이 소유한 땅이나 농장을 맡아서 관리함을 관장(管莊), 자아와 외계와의 구별을 잊어버린 경지를 이르는 말을 장주지몽(莊周之夢), 의복에 주의하여 단정히 함으로써 긍지를 갖는다를 이르는 말을 속대긍장(束帶矜莊), 너그럽고 도량이 넓으며 위엄이 있고 장중하다를 이르는 말을 관홍장중(寬弘莊重) 등에 쓰인다.
▶️ 周(두루 주)는 ❶회의문자로 週(주)와 통자(通字)이다. 用(용: 쓰다)과 口(구: 입)의 합자(合字)이다. 본디 뜻은 입을 잘 써서 말을 삼가는 일을 말함이 전(轉)하여, 周密(주밀)의 뜻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周자는 '두루'나 '골고루', '둘레'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周자는 논밭을 그린 상형문자이다. 周자의 갑골문을 보면 田(밭 전)자에 점을 찍어놓은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밭의 둘레를 표현한 것이다. 당시 논밭을 뜻하던 田자가 단순히 밭의 도랑만을 그린 것이었다면 周자는 밭의 둘레를 표현하기 위해 벼가 심겨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었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口(입 구)자가 더해지게 되는데, 이는 '주(周)나라' 처럼 고유명사를 표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지금의 周자는 중국의 고대국가인 주나라'나 '둘레'나 '두르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周(주)는 (1)몇 개의 곡선으로 둘린 평면 도형에 있어서의 그 곡선, 또는 그 곡선의 길이 둘레를 도는 번수를 세는 말 (2)중국의 옛날 왕조. 섬서성(陝西省)에서 일어나, 문왕(文王) 때에 번영했음. 아들인 무왕(武王)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쳐부수고 나라를 세워 호경(鎬京)에 도읍(都邑). 전국에 일족, 공신의 식민 국가를 세워 지배했음. 이른바 주(周)나라의 봉건제도임. 기원전 770년에 만족(蠻族)의 침입을 피하여 동방의 낙읍(洛邑)에 천도했음. 이 천도 이전을 서주(西周), 이후를 동주(東周)라 이름. 기원전 256년에 진(秦)나라에게 망했음.(1100?~ 256 B.C) (3)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조의 나라 서위(西魏)의 뒤를 이어 우문각(宇文覺)이 세운 왕조 북제(北齊)를 치고 진(陣)나라도 정벌하려 했으나 황제가 죽어, 실권은 새 황제의 황후의 아버지인 양견(楊堅)(수隋나라의 문제文帝)에게 돌아가, 결국 망했음. 북주(北周) (557~581) (4)중국 당(唐)나라의 고종(高宗)의 황후인 측천 무후(則天武后)가 세운 나라 남편인 고종이 죽은 후, 아들인 중종(中宗), 예종(睿宗)을 폐위시키고, 왕족, 공신을 죽여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을 시조로 하여 건국한 것임 (5)중국 오대(五代) 마지막 왕조. 시조는 후한(後漢)의 절도사 곽위(郭威)임. 2대의 세종(世宗)은 영명하여, 조세(租稅)의 평균화를 꾀하고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통일 사업을 진행시켜, 명군이라 일컬어졌으나 나이 젊어 죽고, 그 아들 공제(恭帝)가 어려, 3대 9년 만에 조광윤(趙匡胤 : 송宋나라 태조太祖)에게 망함. 후주(後周) (951~960)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두루 ②골고루 ③널리 ④둘레 ⑤모퉁이, 구부러진 곳 ⑥진실(眞實), 참 ⑦주(周)나라 ⑧돌다, 두르다 ⑨두루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⑩둥글게 에워싸다 ⑪끝내다, 온전(穩全)히 다하다 ⑫더할 나위 없다, 지극하다 ⑬친하다, 가까이하다 ⑭구하다, 구제하다, 베풀어 주다 ⑮합당하다, 알맞다 ⑯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라 국(圍)이다. 용례로는 주위의 가장자리를 주변(周邊), 어떤 곳의 바깥을 주위(周圍), 일이 잘 되도록 이리저리 힘을 써서 변통해 주는 일을 주선(周旋), 여러 사람이 어떤 사실을 널리 아는 것을 주지(周知), 1년을 단위로 하여 돌아오는 그날을 세는 단위를 주년(周年), 나이 만 60세를 가리키는 말을 주갑(周甲), 조심성이 두루 미쳐서 빈틈이 없음을 주도(周到), 두루 돌아다니면서 유람하는 것을 주유(周遊), 죽은 뒤 해마다 돌아오는 그 죽은 날의 횟수를 나타내는 말을 주기(周忌), 겉을 둘러 쌈을 주과(周裹), 죄인을 심문할 때 두 발목을 한데 묶고 다리 사이에 막대기를 끼워 엇비슷이 비트는 형벌을 주리(周牢), 다각형의 둘레의 각을 주각(周角), 썩 다급한 형편에 처하여 있는 사람을 구하여 줌을 주급(周急), 두루 돌아다님을 주력(周歷), 허술한 구석이 없고 매운 찬찬함을 주밀(周密), 빠짐 없이 두루 갖춤을 주비(周備), 두루마기로 우리나라 고유의 웃옷을 주의(周衣),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름을 주장(周章), 빈틈이 전혀 없고 온전함을 주전(周全), 두루 살핌을 주찰(周察), 원의 둘레를 원주(圓周), 주위를 에워쌈을 환주(環周), 주위의 반이나 한 바퀴의 반을 반주(半周), 바깥쪽의 둘레를 외주(外周), 한 바퀴를 돎을 일주(一周), 궁핍한 사람은 도와주고 부자는 보태 주지 않는다는 말을 주급불계부(周急不繼富), 자아와 외계와의 구별을 잊어버린 경지를 말함 또는 사물과 자신이 한 몸이 된 경지를 이르는 말을 장주지몽(莊周之夢), 소인은 사사로움에 치우치므로 특이한 사람만 친할 뿐이지 널리 사귀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비이부주(比以不周), 뭇사람들이 두루 앎을 일컫는 말을 만인주지(萬人周知), 어떤 일을 할 마음이 두루 미친다는 뜻으로 마음의 준비가 두루 미쳐 빈틈이 없음 또는 무슨 일에든지 주의와 준비가 완벽하여 실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용의주도(用意周到), 음악을 잘못 연주하면 주랑이 곧 알아차리고 돌아본다는 뜻으로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을 고곡주랑(顧曲周郞)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일컫는 말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말을 지남지북(之南之北),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아주 빼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비유적 의미의 말을 낭중지추(囊中之錐), 나라를 기울일 만한 여자라는 뜻으로 첫눈에 반할 만큼 매우 아름다운 여자 또는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말을 경국지색(傾國之色), 일을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을 결자해지(結者解之), 알을 쌓아 놓은 듯한 위태로움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로운 형세를 이르는 말을 누란지위(累卵之危), 어부의 이익이라는 뜻으로 둘이 다투는 틈을 타서 엉뚱한 제3자가 이익을 가로챔을 이르는 말을 어부지리(漁夫之利), 반딧불과 눈빛으로 이룬 공이라는 뜻으로 가난을 이겨내며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하여 이룬 공을 일컫는 말을 형설지공(螢雪之功), 처지를 서로 바꾸어 생각함이란 뜻으로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봄을 이르는 말을 역지사지(易地思之),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부귀영화는 일장춘몽과 같이 허무함을 이르는 말을 한단지몽(邯鄲之夢), 도요새가 조개와 다투다가 다 같이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다는 뜻으로 제3자만 이롭게 하는 다툼을 이르는 말을 방휼지쟁(蚌鷸之爭),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이미 돌아가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풍수지탄(風樹之歎), 아주 바뀐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 또는 딴 세대와 같이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비유하는 말을 격세지감(隔世之感), 쇠라도 자를 수 있는 굳고 단단한 사귐이란 뜻으로 친구의 정의가 매우 두터움을 이르는 말을 단금지교(斷金之交), 때늦은 한탄이라는 뜻으로 시기가 늦어 기회를 놓친 것이 원통해서 탄식함을 이르는 말을 만시지탄(晩時之歎), 위정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을 믿게 한다는 뜻으로 신용을 지킴을 이르는 말을 이목지신(移木之信), 검단 노새의 재주라는 뜻으로 겉치례 뿐이고 실속이 보잘것없는 솜씨를 이르는 말을 검려지기(黔驢之技), 푸른 바다가 뽕밭이 되듯이 시절의 변화가 무상함을 이르는 말을 창상지변(滄桑之變),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라는 뜻으로 범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것처럼 도중에서 그만두거나 물러설 수 없는 형세를 이르는 말을 기호지세(騎虎之勢), 어머니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문에 의지하고서 기다린다는 뜻으로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르는 말을 의문지망(倚門之望), 앞의 수레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 뒤의 수레는 미리 경계한다는 뜻으로 앞사람의 실패를 본보기로 하여 뒷사람이 똑같은 실패를 하지 않도록 조심함을 이르는 말을 복거지계(覆車之戒) 등에 쓰인다.
▶️ 夢(꿈 몽)은 ❶형성문자로 夣(몽)과 梦(몽)은 통자(通字), 梦(몽)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저녁 석(夕; 저녁)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몽(어둡다의 뜻)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본뜻은 저녁이 되어 시계(視界)가 침침하여 뚜렷이 보이지 않는 일이나, 밤이 어둡다의 뜻이다. 꿈의 뜻으로도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夢자는 '꿈'이나 '공상', '흐리멍덩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夢자는 艹(풀 초)자와 目(눈 목)자, 冖(덮을 멱)자, 夕(저녁 석)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夢의 갑골문을 보면 단순히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잠자리에 들어 꿈을 꾸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후 눈과 눈꺼풀은 艹자와 目자로 변하였고 침대는 冖자가 대신하게 되었다. 소전에서는 여기에 夕자가 더해지면서 夢자가 '밤'과 관계된 글자라는 뜻을 표현하게 되었다. 그래서 夢(몽)은 ①꿈 ②공상(空想) ③꿈꾸다 ④혼미(昏迷)하다 ⑤흐리멍덩하다 ⑥똑똑하지 않다 ⑦마음이 어지러워지다 ⑧뒤숭숭하다 ⑨사리에 어둡다 ⑩흐릿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어두울 매(昧)이다. 용례로는 잠을 자며 꿈을 꿈을 몽매(夢寐), 자다가 가위에 눌림을 몽염(夢魘), 꿈에 나타나는 길흉의 징조를 몽조(夢兆), 꿈속의 생각이나 꿈 같은 헛된 생각을 몽상(夢想), 꿈에 여자를 가까이 하여 정액을 쌈을 몽정(夢精), 꿈 또는 꿈속을 몽경(夢境), 꿈속에까지 생각한다는 몽사(夢思), 헛되이 살다가 죽음을 몽사(夢死), 꿈처럼 허망한 세상을 몽세(夢世), 꿈과 환상이라는 뜻으로 허황한 생각을 뜻하는 몽환(夢幻), 무섭거나 기괴하거나 불길한 꿈을 악몽(惡夢), 좋은 조짐의 꿈을 길몽(吉夢), 기분이 상쾌한 꿈을 쾌몽(快夢), 무엇에 홀린 듯 생각이나 정신이 똑똑하지 못하고 얼떨떨한 상태를 미몽(迷夢), 아기를 밸 징조의 꿈을 태몽(胎夢), 허황한 꿈을 환몽(幻夢), 꿈에 나타난 일의 좋고 나쁨을 풀어 판단함을 해몽(解夢), 죽은 사람이나 신령이 꿈에 나타남을 현몽(現夢), 잠을 깨고도 어렴풋이 꾸는 꿈의 세계를 잔몽(殘夢),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 동안이라는 뜻으로 사물을 좀처럼 잊지 못함이나 이룰 수 없는 일에 너무 지나치게 몰두함을 이르는 말을 몽매지간(夢寐之間), 꿈 속에 꿈이야기를 하듯이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함 또는 그런 말을 몽중몽설(夢中夢說), 꿈속에서 꿈 이야기를 한다는 뜻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요령을 종잡을 수 없게 이야기함을 이르는 말을 몽중설몽(夢中說夢), 꿈속의 꿈이란 뜻으로 덧없는 세상살이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몽중몽(夢中夢), 꿈에도 생각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몽상부도(夢想不到), 천만 뜻밖의 일을 일컫는 말을 몽외지사(夢外之事), 몹시 그리워서 꿈에서까지 서로 찾는다는 뜻으로 매우 친밀함을 이르는 말을 몽중상심(夢中相尋), 꿈과 허깨비와 거품과 그림자와 같다는 뜻으로 인생의 헛되고 덧없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몽환포영(夢幻泡影), 남쪽 가지에서의 꿈이란 뜻으로 덧없는 꿈이나 한때의 헛된 부귀영화를 이르는 말을 남가일몽(南柯一夢),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부귀영화는 일장춘몽과 같이 허무함을 이르는 말을 한단지몽(邯鄲之夢), 노생의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영고성쇠는 한바탕 꿈처럼 덧없다는 뜻 또는 한때의 헛된 부귀영화를 일컫는 말을 노생지몽(盧生之夢), 한바탕의 봄꿈처럼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이란 뜻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일장춘몽(一場春夢), 같은 침상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으로 겉으로는 같이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각기 딴 생각을 함을 이르는 말을 동상이몽(同床異夢), 장자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닌 꿈으로 현실과 꿈의 구별이 안 되는 것 또는 인생의 덧없음의 비유를 이르는 말을 호접지몽(胡蝶之夢), 남쪽 가지 밑에서 꾼 한 꿈이라는 뜻으로 일생과 부귀영화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남가지몽(南柯之夢), 밥 지을 동안의 꿈이라는 뜻으로 세상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일취지몽(一炊之夢), 같은 침상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으로 겉으로는 같이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각기 딴 생각을 함을 이르는 말을 동상각몽(同床各夢), 밥 지을 동안의 꿈이라는 뜻으로 세상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일취지몽(一炊之夢), 같은 침상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으로 겉으로는 같이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각기 딴 생각을 함을 이르는 말을 동상각몽(同床各夢), 대낮에 꾸는 꿈이라는 뜻으로 실현될 수 없는 헛된 공상을 이르는 말을 백일몽(白日夢), 나부산의 꿈이라는 뜻으로 덧없는 한바탕의 꿈을 이르는 말을 나부지몽(羅浮之夢), 자아와 외계와의 구별을 잊어버린 경지를 말함 또는 사물과 자신이 한 몸이 된 경지를 일컫는 말을 장주지몽(莊周之夢), 장자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닌 꿈으로 현실과 꿈의 구별이 안 되는 것 또는 인생의 덧없음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호접몽(胡蝶夢), 덧없는 꿈이나 한때의 헛된 부귀영화를 이르는 말을 황량지몽(黃粱之夢), 꿈인지 생시인지 어렴풋한 상태를 일컫는 말을 비몽사몽(非夢似夢), 무산의 꿈이라는 뜻으로 남녀의 밀회나 정교를 이르는 말을 무산지몽(巫山之夢), 술에 취한 듯 살다가 꿈을 꾸듯이 죽는다는 뜻으로 아무 의미 없이 이룬 일도 없이 한평생을 흐리멍덩하게 살아감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취생몽사(醉生夢死), 물 위에 뜨는 거품과 꿈이라는 뜻으로 삶의 덧없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포말몽환(泡沫夢幻)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