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명치료를 끝끝내 거부하신 아버지는 일단 응급중환자실 병상에서 하루를 머무셨다. 그날 꼭 아버지 곁에 있어 드려야 평생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서 응급실 간병 경험이 많았던 내가 밤을 지키기로 했다.
기침 때문에 숨을 쉬기 힘드셨던 아버지는 자꾸 뒤척거리시며 얕은 잠을 반복하셨다.
너는 왜 계속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냐.
발을 만져 드리고, 손을 잡아드리고, 담요를 연신 고쳐 덮어드리고, 계속 쏟아져 나오는 당신의 가래를 닦아내 드리며 쪽잠도 자지 않고 완벽한 아침을 맞았건만.
아버지와 나는 언제부터 대척점에 서게 되었던가. 밤새 나는 아버지와 나의 사이를 다시 한번 반추해 보고 있었다.
한때는 피아노를 전공하고 싶었던 내가 어릴 때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 <작은 별 변주곡>을 칠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늘 말씀이 없으셨다.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시인이 되었을 때도, 큰아이를 힘들여 낳았을 때도.
좋다. 잘했다.
열세 살 소녀가, 머리가 희끗해지는 딸내미가, 아버지께 꼭 한번 듣고 싶었던 말 한마디.
편지를 써서, 글을 써서 칭찬을 받고 싶어졌다.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 메워주신 분은 국어 선생님들. 나의 문학은 그렇게 아버지의 부재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핸드폰을 뒤적거려, 오랜 친구분들이 모여 계시던 단체 채팅방에 아버지의 부음을 알려드리자, 많은 분들이 아버지를 추억하기 시작하셨다. 검소하고 성실하셨다는 아버지의 청춘들이 뭉텅이로 쏟아져 나왔다. 딸들에게는 단 한 번도 들려주신 적이 없던 시절이었다. 아버지의 핸드폰은 간결했다.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도 많지 않았다. 속해 계신 단체 채팅방도 얼마 없었다. 그때서야 나는 아버지께서 치밀하게 죽음을 준비하고 계셨음을 알아차렸다. 짙어지는 기침을 내색하지 않고 더 깊어지도록 놓아두고 계셨음을.
아버지를 입관할 때, 아니 그 모든 장례 절차를 마무리할 때까지 나는 가슴이 너무 아파, 내내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승화원에서 아버지의 어깨뼈로 추정되는 조각을 목도하면서도 틈 없이 울었다. 입원한 지 닷새 만에 패혈증으로 차디차지신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내게 남기신 말씀 때문이었을 것이다.
너는 왜 계속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냐.
그날 밤 아버지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나는 이제서야 모두에게 털어놓는다.
나는 나중에 어떤 나비가 될까.
꼭 듣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너무 빨리 4월의 나비가 되어 버리신 아버지. 화해할 틈도 주지 않으시고 훌쩍 날아오르신 아버지. 아버지, 도대체 내게는 왜 그러셨나요. 뭐가 그리 마뜩잖으셨나요.
하지만 이 길목에서, 놓쳐서는 안 될 틈이 하나 더 있음을 나는 자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께서도 꼭 듣고 싶으셨을 한마디가 있음 직하기 때문이다. 임종 직전에야 귀밑에 속삭여 드렸던, 비겁한 한마디가 있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끝끝내 마음의 사이를 좁히지 못했던 고집불통 두 부녀. 빈틈없이 빼닮은 두 사람. 사진 속의 나는 아버지의 완벽한 그늘이어서 요즈음 나는 도무지 사진마저 찍고 싶지 않다.
최초의 시계. 내 최초의 일력이자 달력이자 계절력인 아버지.
아버지께 결국 듣지 못했던 말, 건네 드리지 못했던 그 한마디의 말들 때문에 나는 아무래도 하염없이 시를 쓰게 될 것 같다. 통한(痛恨)의 힘으로 다른 이들에게는 아낌없이 잘했어, 죄송해요, 좋아요, 미안해요, 잘했어요, 미안해, 퍼부어댈 것 같다. 나중에는 놓치지 말고 꼭 말 건네는 나비가 되어야겠다. 아빠 나비 곁을 졸졸 맴도는, 착한 나비가 되어야겠다.
여전히 철이 들지 못한 이유를 안다. 아직도 오랜 집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울고 있을는지 모를 열세 살 소녀가 아슴푸레하다. 아버지마저 4월에 훌쩍 자리를 비우셔서 “봄만 남기고 다 봄”이 되어 버린 나의 봄에게 부디 ‘봄다운 봄’을 건네줄 수 있기를. 그래서, 그리하여, 아버지께 건네 드리지 못했던 한마디의 말 같은 ‘단 한 편의 시’를, 어떻게든 써서, 꼭 써서, 아버지의 날개 밑에 한 땀 한 땀 새겨드리고 싶다.
1995년 월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일 년 만에 쓴 시』, 『슬픔은 귀가 없다』, 『봄만 남기고 다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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