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약국 김 약사 (외 1편)
정병근 그는 아저씨가 아니고 선생님이다. 꼬마들이 무심코 아저씨라고 부르기라도 하면 그는 일단 미간부터 찡그린다. "아저씨가 뭐야. 약사 선생님이라고 해야지." 눈치 빠른 엄마의 핀잔을 확인하고서야 "어이쿠, 우리 꼬마 환자님. 감기 걸리셨군요."하며 활짝 웃는다. 이를테면 옆집 슈퍼 아저씨나 세탁소 아저씨 할 때의 그 아저씨들과는 뭔가 달라야 한다는 우월감 같은 것이다. 문제는 남자들인데 이들은 대개 처방전도 없이 불쑥 들어와서는, "아저씨 술 깨는 약 좀 주세요." 한다든지, "뭐 좀 확 풀리는 거 없어요?" "우루소 두 알하고 휘청수나 하나 줘 봐요." 약사 선생님으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래도 남자들은 시원시원해서 좋다. 기껏해야 만 원 미만인 약값을 따지고 드는 쩨쩨한 남자는 없으니까. 드링크제를 마시고 트림까지 하는 남자라면 정상가격보다 천 원 정도 더 받아도 상관없다. 기분이다. 남자들이 회사에 나가고 없는 낮에는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이 위층 가정의학과에서 받은 처방전을 들고 와서는 "아이고, 내가 아파서…" 한참씩 수다를 떨다 가곤 하는데, 그는 이때야말로 선생님으로서의 권위를 한껏 과시하면서 건강에 관한 어드바이스를 해주는 척하다가, "아이고, 나하고 똑같네!" 상대방이 맞장구를 세 번 정도 칠 때쯤이면 슬그머니 "이걸 한번 복용해 보시죠."라며 권한다. 대개 외국 이름의 알약이나 건강 보조 약품들이다. "어서 오세요"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던 그가 일어나며 오늘의 열두 번째인가 열세 번째 고객을 맞는다. 며칠 전에 호주산 로열제리 농축 캡슐 한 세트를 사 갔던 단골 아주머니다.
구두 아저씨
〈대한구두미화중앙협의회 한강 2지회〉 코딱지만 한 공간에 쪼그리고 앉아 ‘두 번 다시는 못할 짓’을 하고 있다. “구두약은 맨손으로 탁탁 먹여야 훨씬 약발이 좋지.” 하루 백 켤레만 잡아도 일 년이면 삼천육백 켤레, 30년 동안 백만 켤레 정도 될까… 대통령 출마하면 백만 표는 굳었다며 실실 웃는다. 문득, 그를 거쳐 간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여기 있다 보면 희한한 사람들 많이 만나.” 그의 씩씩한 팔뚝에 마음이 동해서 다짜고짜 여관 가자고 조르던 여자 이야기를 슬슬 꺼내면서 구두 속에 손을 넣고 침을 퉤퉤 뱉는다. “불 광, 물 광 해도 침 광이 최고지. 지문은 닳아서 없어진 지 오래야.” 구두약을 문지르느라 반들반들한 손을 들어 보인다. 일이 끝나면 좍 빼 입고 이태원을 쓸고 다녔다는 ‘물 반, 고기 반’ 시절의 무용담을 들으며 백만 명의 구두를 닦느라 결 없이 맨들맨들해진 그의 손이 성수聖手처럼 거룩해 보여서 나도 실실 웃음이 나는 것이었다.
―시집 『우리 동네 아저씨들』 (2024) ----------------------- 정병근 / 1962년 경북 경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88년 계간 《불교문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 『번개를 치다』 『태양의 족보』 『눈과 도끼』 『중얼거리는 사람』 『우리 동네 아저씨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