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국제영화제의 프레스 룸 게스트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고 궁금증이 생겼다. 그는 왜 방콕에 왔을까? 자료를 뒤져봐도 [007 다이 어나더 데이] 이후 그가 새로운 영화를 찍었다는 흔적은 없었다. 릭 윤이라는 이름은 지금,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계 배우로써 그에게 보내던 지지는 [007 다이 어나더 데이]의 자오 역으로 등장하면서 수그러들었다.
릭 윤의 한국 이름은 윤성식. 그는 이민간 한국인 부모에 의해서 미국에서 성장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와톤 비즈니스 스쿨에서 금융 기업경영을 공부할 때 모델로 발탁되었고, 랄프 로렌이나 베르사체의 모델로 국제적 지명도를 갖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대학 졸업 후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주식 및 선물 중개업을 하는 증권거래인으로 일했다.
릭 윤이 영화에 데뷔한 것은 [샤인]을 만든 스콧 힉스 감독의 [삼나무에 내리는 눈]이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국내에도 번역된 데이빗 구터슨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 한 이 작품에서, 릭 윤은 젊은 미국계 일본인으로 등장했다. 조연급이었지만 186cm 65kg의 잘 다져진 몸매와 인상적인 연기로 그는 배우로서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루었다. 릭 윤의 다음 작품은 [The Fast and the Furious](2001년)였고 세 번째 작품이 문제의 [007 다이 어나더 데이](2002년)다.
방콕국제영화제의 게스트 인터뷰 담당은 미국인이었다. 지난해 방콕국제영화제의 디렉터로 팜스프링스 영화제에 관련한 미국인들을 영입했기 때문에 영화제의 주요 스텝들 중에는 미국인들이 많았다. 인터뷰 요청을 한 다음날 전화가 왔다. 우리는 영화제 본부가 있는 상그리라 호텔의 게스트 룸에서 만났다.
노타이 차림으로 방에 들어온 그는 지난번 한국을 방문했을 때보다 훨씬 편안한 표정이었다. 나는 [삼나무에 내리는 눈]이 국내 개봉할 무렵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서 개최된 기자회견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그때는 약간 상기된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인상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부드러운 인상 속의 눈매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의 동생 칼 윤(윤성권) 역시 릭 윤과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칼 윤은 로레알 광고 모델로 이름을 알린 뒤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을 하고 지난 해 드와이트 리틀 감독의 [아나콘다2:사라지지 않는 저주]로 영화에 데뷔해서 지금은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나는 먼저 왜 그가 방콕영화제에 참여했는지 물어보았다. 2월부터 그가 출연하는 새로운 액션 영화 [5번째 계율]이 태국에서 촬영에 들어간다고 했다. 올해 방콕국제영화제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지만 지난번 영화제에서 [007 다이 어나더 데이]가 소개된 것을 인연으로 또 다시 방콕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 동생 칼 윤은 첫 번째 영화가 성공적이었다. 지금은 점점 더 잘하고 있다. 브로드웨이에서 연극도 했으며 벌써 단편을 포함해서 8편의 영화를 찍었다.]
2남 1녀인 그에게는 누이가 하나 더 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할리우드에서 가장 성공한 배우는 릭 윤이다. 그러나 앵글로 색슨계와 달리, 출연하거나 맡을 수 있는 배역에 한계가 있고 인종적 장벽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나는 내 피부가 다르다는 것에 대해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제대로 할 수 없다. 물론 영화시장 안에서는 조금 더 도전해야 하고 노력도 필요하다. 하지만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다는 의례적인 답변만을 기록한다면 가장 재미없는 인터뷰다. 나는 데뷔 이후 그가 느낀 구체적 어려움을 다시 물어보았다. 그는 인종적 차이에 대해 질문 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표정이다.
[미국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많은 기회가 많다. 당신의 질문은, 만약 내가 흑인이라면,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느냐와 똑같은 질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제한은 있다. 나는 어려운 것을 자주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살았어도 힘든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자라지 않았는데 한국에서 활동한다면 한국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음식이 안 맞거나 말라리아 때문에 걱정하거나 그런 게 어려운 게 아니냐. 아무도 나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고 도움을 받은 적도 없다. 다만 나에게 도전의 기회가 주어졌고 나는 열심히 노력을 했다. [007] 이후로도 많은 도전이 있었다.]
모델 출신인 그는 체계적인 연기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분명히 배우로서 느끼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액팅 클라스에 가려고 했었다. 지금 하고 있는 연기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거다.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연기에 대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내가 깊은 영감을 받아 연기를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 느낌이 전달되지 않겠는가. 연기는 과학 같은 게 아니라서 자기 자신이 실수도 하고 그러면서 깨달아야 한다. 이 분야가 세계에서 제일 힘든 비즈니스다.]
그가 연기를 할수록 더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진정한 배우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뜻이다. 가장 영향 받은 감독이나 영화가 무엇인지 듣고 싶었다.
[모든 감독이나 배우들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짐 캐리가 하는 것을 내가 할 수 없고 내가 하는 것을 짐 캐리가 할 수 없듯이, 모든 배우에게는 그만의 독특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언제나 변한다. 나도 그렇다.]
최근에 한국 영화가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을 자주 하고 할리우드에서도 한국 영화의 판권을 사서 리메이크를 시도하는 작품이 많다. [조폭마누라][올드보이][달마야 놀자] 같은 영화들의 판권이 할리우드에 팔린 것을 알고 있는지, 또 최근 본 한국영화 중에서 인상적인 영화는 무엇인지 질문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원빈이 인상적이었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영화들을 보며 나는 깜짝 놀랐다. 좋은 영화들이 그 나라의 산업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올드보이]나 [조폭마누라] 같은 영화에는, 관객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는 2001년 부산영화제에 참가한 적이 있다고 했다. 한국에 오고 싶은 데 007 사건으로 불편해서 못 오는 것은 아닐까?
[부산영화제는 아시아의 칸느 영화제다. 한국에 가고 싶은데 나도 내 스케줄을 알 수 없다. 방콕에 오는 것도 이틀 전에 정해져서 오게 된 것이다. 일정에 관한 것은 모두 내 에이전시에서 하고 있다.]
그는 [007 다이 어나더 데이]에 관련해서 차인표 및 한국 네티즌들과 잠시 설전을 벌인 적이 있다. 릭 윤이 할리우드에 기반을 둔 한국계 배우라는 것을 인정해도, 우리 국민들이 실망한 것은 [007 다이 어나더 데이]의 왜곡된 북한 묘사가 릭 윤을 통해서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미선이 효선이가 미군 탱크에 죽은 것도 알고 있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화가 났다. 그러나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도 북한군 병사를 연기한 배우가 있지 않느냐. 그런데 내가 북한 군인을 연기한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연기는 허구다. 현실이 아니다. 내가 이 역할을 맡지 않았으면 중국계나 베트남계나 다른 아시아 배우들이 누군가 이 역할을 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배역에 내가 처음 캐스팅 된 사람이고 제일 먼저 연락을 받았다.]
송강호나 신하균이 맡은 북한군 병사와 릭 윤이 맡은 자오 역은 전혀 다르다. 미국의 입장에서 악의 축인 북한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자오가 동원되었다면, [공동경비구역JSA]의 북한측 병사는 통일의 물꼬를 트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007 다이 어나더 데이]와 관련해서 국내에서 처음에 잠시 혼란이 있었다. 차인표가 거절한 역을 릭 윤이 맡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차인표도 자신이 제의받은 배역은 문대령 역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릭윤이 맡은 배역은 자오다. 아마 그는 그 점을 다시 강조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한국 관객들이 [007 다이 어나더 데이]에 출연한 그에 대해서 느끼는 불만의 강도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나의 거듭된 질문에 그는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연기는 아니라고 느꼈다. 그 영화가 우리에게 일으킨 정서적 반응이 그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배역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런 선택이 있다. 나는 그런 비난 자체가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내가 무엇을 잘하고 있는지 잘못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면 나는 잘못된 부분을 빨리 고치고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
릭 윤은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그는 런던에도 집이 있어서 자주 왔다 갔다 한다. 오는 2월부터 미국의 ABC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드라마에 변호사로 등장할 예정이다. 벌써 촬영은 다 마쳤다고 했다. 그리고 2월부터는 새로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 [5번째 계율]을 촬영한다. 나는 그가 동생인 칼 윤과 함께 등장하는 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웃으면서 자신도 그럴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곧바로 방콕국제영화제의 본부가 있는 상그리라 호텔 야외수영장에서 영화제의 부대 행사인 방콕필름마켓의 개막식이 시작되었다. 나는 파티 도중 태국관광청장과 인터뷰를 했는데, 릭윤이 다가와서 다시 내 손을 꼭 잡더니 인터뷰 정말 고마웠다고 했다. 007 사건 이후 국내 언론과 제대로 된 인터뷰 없이 간접적으로 그의 입장이 소개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