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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로선생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이항로선생 생가 전경 |
조선말기 성리학자였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의 생가가 있는 벽계마을은 서종면 노문리 535번지에 소재하며 주변에 작은 개울을 끼고 산속으로 들어와 있다. 마을의 명칭이 벽계(蘗溪)인 것은 벽진 이씨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에는 이항로 생가 외에도 경기도 기념물 제43호인 노산사(蘆山祠)가 있어 이항로선생의 높은 학식과 유학을 전승하고 있다. |
이항로선생 생가(경기 유형문화재 105호) |
▲ 생가 앞에 위치한 비석 |
▲ 생가 우측에 위치한 벽계 강당 |
또한 노산팔경(蘆山八景)이라 하여 마을 주변에 8가지의 풍경인 제월대(霽月臺), 제월대 시(詩), 명옥정(鳴玉亭), 낙지암(樂志岩), 분설담(噴雪潭), 석문(石門), 쇄취암(鎖翠巖), 일주암(一柱岩)이 있다. 이것은 이항로 선생이 남기거나 이름 지은 것으로 벽계의 주인공은 화서선생이요 ‘화서의 벽계’라고 볼 수 있다. |
▲ 이항로선생 유적지 안내도 |
이항로선생 조상이 이 마을로 입향하게 된 경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항로 선생의 고조부가 이조 참판을 지내면서 그 이전에 살았던 지금의 일산과 파주의 경계지 근처에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항로 생가의 건립연대는 안채의 경우 대략 300년 이전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사랑채와 가옥 아래에 지어진 강당은 최근에 지어진 것이다. |
▲ 이항로선생 생가 입구 전경 |
가옥의 배치는 현재 역‘ㄱ’자형의 안채와 역‘ㄷ’자형의 사랑채가 가운데 담장을 두고 가로로 긴 ‘ㅁ’자 형태를 가진다. 안채의 경우 경기지방의 전형적인 평면에 건넌방인 노산정사와 마루방사이에 부엌을 두고 있어 덧달아낸 형식으로 추측된다. 안방과 웃방의 바깥쪽 뒤란에 툇마루가 있고, 또 대청의 안쪽과 건넌방인 노산정사 전면에도 툇마루가 이어져 있다. |
▲ 이항로선생 생가 내부 전경 |
안방의 안쪽과 대청의 뒤편은 쪽마루가 있는데, 이처럼 툇마루와 쪽마루가 많이 나있는 것은 내부 공간과 외부공간의 완충적인 역할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안채의 부엌은 잘 사용하지 않고, 웃방을 부엌으로 사용하며, 냉장고는 대청에 두고 사용한다. 안채는 평사량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기단과 주초는 자연석으로 덤벙주초이다. |
▲ 우측에서 바라 본 이항로선생 생가 |
대청의 중앙부 가구는 고주와 후면 평주에 대량을 걸었고, 낮은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고 있다. 툇칸은 툇보를 사용하지 않고 처마서까래만 고주와 툇기둥에 걸어놓았다. 사각의 툇기둥 상부는 목침 크기의 보아지와 처마도리가 사괘맞춤으로 결구되어 있다. 사랑채는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에 새롭게 지었는데, 예전의 모습인지 새롭게 계획하여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
▲ 생가 우측에 위치한 벽계 강당 전경 |
가옥의 부엌쪽 뒤란에는 삼량가구의 4칸 규모로 된 초가 한 채가 있는데, 현재 1칸은 변소, 2칸은 광으로 사용하고 있고, 나머지 1칸은 작은 대문간이다. 초가의 뒤쪽에는 우물이 아직 남아 있으며, 식수는 물론이고 우물터에서 물을 담아 그릇을 씻는 개수대 같은 것이 만들어져 있다. 가옥과는 별도로 아래쪽에 지어진 강당은 사랑채를 짓고 난 후에 건립되었다. |
▲ 벽계 강당 측면 및 후면 모습 |
강당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장대석 기단위에 잘 다듬은 원형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익공계이며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린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현재 이항로 선생의 직계 종손이 인근마을인 정배리로 이주함에 따라 벽진 이씨 문중에서 선별된 사람이 가옥을 관리하면서 살고 있다. |
노산사지(경기 기념물 43호) |
▲ 생가와 강당 중앙의 산길을 돌아 올라가면 노산사지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
이곳은 1954년에 유림들이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화서 이항로( 1792∼1868) 선생의 학문과 뜻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으로,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장소이다. |
▲ 노산사 입구 전경 |
이항로 선생은 벽계 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많은 벼슬길을 사양한 채 오로지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는데, 특히 주희와 송시열을 따르고 그 학문을 잇고자 하였다. 건물은 1985년 보수하였으며 현재 주희와 송시열의 초상화와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고 매년 제사를 지낸다. |
▲ 노산사 내부 사당 모습 |
▲ 묘역으로 오르면서 내려다 본 사당 후면 모습 |
노산사터(蘆山祠址)는 능선을 따라 올라서면 네모난 담장의 중앙에는 좌우에 기둥 1개씩을 세우고 지붕을 이은 일각대문을 세워놓고, 그 안에 남향하여 사당을 세웠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1칸 반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이다. |
▲ 사당에서 50여 미터 정도 가파르게 오르면 묘역군이 보입니다. |
주선 후기의 주자학자인 이항로(1792~1868) 선생은 화서학파(華西學派)를 형성하여 한말 위정척사론과 의병 항쟁의 사상적 기초를 다져놓았다. 본관은 벽진(碧珍). 초명은 광로(光老).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이다. |
▲ 이항로선생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묘역군 상단에 신도비가 있는 묘역이 이항로선생 묘역입니다. |
아버지는 회장(晦章)이다. 3세 때 〈천자문〉을 떼고, 6세 때 〈십구사략 十九史略〉을 읽고 〈천황지황변 天皇地皇辨〉을 지었으며, 12세에는 신기령(辛耆寧)에게 〈서전 書傳〉을 배웠다. 부친의 뜻을 받들어 과거준비에 몰두하여 1808년(순조 8) 한성초시에 합격했으나 과거급제를 구실로 한 권력층 고관자제와의 친교를 종용받고 환멸을 느껴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그후 서울의 임로(任魯)와 지평의 이우신(李友信) 등 당시 이름있는 학자들을 찾아가 그들과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경학상의 제문제에 관한 토론을 벌였다. |
▲ 이항로선생 묘역 전경 |
25~26세에 연이어 양친을 여읜 뒤 더욱 학문에 몰두하여 4서(四書)에 관한 주자(朱子)의 집주(集註)나 장구(章句)를 반복연구하면서 주자의 학문에 심취했다. 그는 〈주자대전 朱子大全〉의 미언대의(微言大義)를 궁구하면서 점차 〈송자대전 宋子大全〉으로 나아가 송시열이 주자 이후의 정종(正宗)을 이룬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840년(헌종 6) 학행으로 천거되어 휘경원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그뒤에도 조인영(趙寅永)을 비롯한 실력자들로부터 지방 수령 등의 교섭을 받았지만 고사하고 향리에 머물며 강학에 전념했다. |
▲ 이항로선생 묘역내 상석과 신도비 모습. 이항로선생 묘역 언덕 뒷편에 선조들의 묘역도 위치하고 있습니다. |
한말 위정척사론자들로 의병 항쟁을 주도하기도 했던 최익현(崔益鉉)·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 등이 이무렵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1862년(철종 13) 이하전(李夏銓)의 옥사 때 김순성(金順性)의 무고로 체포되었다가 무죄임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1864년(고종 1) 조두순(趙斗淳) 등의 천거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에 제수되고,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지평·장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
▲ 이항로선생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1866년 프랑스 군함이 침입하여 강화도를 약탈한 병인양요가 일어나 이에 대한 대책을 놓고 조정에 의견이 분분할 때 노성한 사람의 의견을 듣자는 김병학(金炳學)의 제청에 따라 동부승지로 부름을 받자 입궐하여 흥선대원군에게 척화론(斥和論)을 건의, 이를 국론으로 채택하게 했다. |
▲ 이항로선생 묘역 뒷편 능선에는 선조들의 묘역으로 추측되는 묘가 3기 있습니다. |
며칠 후, 공조참판으로 승진발령되고,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의 중지와 과중한 세금 부과의 시정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만동묘(萬東廟)의 재건을 상소하는 등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대해 정면 공격을 가한 것이 문제가 되어 삭탈관직을 당하고 낙향하여 말년을 보냈다. - 다음 백과사전 내용 발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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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로선생 묘역 위치도 |
빨간선을 따라서 300여 미터를 가파르게 오르면 이항로선생 묘역에 도달합니다. 소재지 : 경기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535-6 |
지도 중앙의 A 지점에 이항로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서종IC나 설악IC를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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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세한 말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동사택 서사택을 설명하시면서 괄호안에 있는 가족과 숫자는 무슨 의미인지요?
글쎄요... 저도 읽어 보면서 그 항목이 궁금했습니다만, 신문 기사를 그대로 발췌하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