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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나님을 보리라
욥기 19:21-26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이다. 지난 주일에 성령강림주일을 맞아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등 세 가지 모습의 하나님이 온전히 우리 가운데 드러났다. 그리스도교에서 ‘삼위’(三位)는 셋으로 표현되나, ‘일체’(一體)이다. 유대교의 숫자가 ‘하나’라면, 그리스도교의 숫자는 ‘셋’이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God for us),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God with us) 그리고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God in us)이다. ‘삼위일체 신앙’과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란 고백’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체계이다.
삼위일체는 참 어렵다. 그래서 아일랜드의 목자 성 패트릭은 그 땅에서 가장 흔한 세 잎 토끼풀(클로버)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였다. 가장 어려운 교리를 가장 가까운 삶의 자리에서 풀어낸 것이다. 그 보잘 것 없는 토끼풀은 명예롭게도 현재 아일랜드의 국화 ‘샴록’이다. 아일랜드 기념품 가게에는 샴록이 넘쳐난다. 신앙은 이렇게 내 삶의 가장 가까이에서 표현할 수 있다.
흔히 삼위일체란 말은 ‘영어의 왕도’처럼 관용구처럼 사용된다. 여러분도 자신에게 소중한 세 가지를 정리해 보라. 신앙생활이든, 삶의 원칙이든, 미래의 비전이든 남달라 보일 것이다. 그 안에 내 소중한 삶의 목표와 원칙과 의미를 담아, 헤아려 보라.
예를 들어 나는 목회자로 살면서 세 가지 덕목을 정리해 본 일이 있다. ‘지혜, 용기, 사랑’이다. 내게 남 다른 점이 있다면 우선순위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이들의 신앙공동체 떼제는 ‘기쁨, 소망, 자비’ 이 세 가지를 지향한다. 색동교회도 ‘젊고, 따듯하며, 평화로운’ 세 가지가 있다.
유대인들의 신앙이 그리스도교인과 다른 이유는 그들이 선택한 우선순위 때문이다. 유대인은 세상을 지탱하는 세 가지 기둥이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 친절한 행동’이 그것이다. 수도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청빈, 독신, 순명을 선언하였다.
나는 트라이앵글 신앙이라고 부른다. 성경에서 우리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정립(鼎立)한 ‘삼 세대 신앙’, 늘 대안적 모습을 찾는 ‘제3의 신앙’, ‘회개, 용서, 구원’의 ‘삼 세 번의 신앙’을 배운다. 삼위일체주일을 맞아 자기 신앙의 삼위일체를 정리해 보라. 그런 복 있는 삶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존재한다.
1)
욥기는 바로 그런 ‘제3일의 신앙’과 ‘삼 세 번의 신앙’을 보여준다. 고난 중에도 욥은 하나님의 현존하심과 구원을 믿는다. 오늘 본문은 그런 당당한 신앙의 고백을 담아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25-26).
톨레레게 22주로, 우리는 지금 욥기란 깊고 푸른 강을 건너고 있다. 욥기는 ‘고대와 현대의 가장 위대한 시’, ‘구약의 셰익스피어’라는 찬사를 받아왔다. 루터는 욥기를 “성경의 어떤 책보다 장엄하고 아름답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욥기의 내용에 대하여 피상적인 이해에 머물러 있다. 대개 욥은 ‘인내의 귀감’이나 ‘경건의 모범’으로 인식되었지만, 사정이 다르다. 그는 엄청난 고통 중에 몰락할 위험에 처해있는 인간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참변 중에 묵묵히 인내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향해 탄식하며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아는 욥은 큰 불행에도 불구하고 “입술로 범죄 하지 아니 하”는(2:10) 온순한 사람이다. 그러나 점점 본문이 전개되면서 욥의 태도가 달라진다. 마치 프로메테우스처럼 하나님께 도전하는 듯하다.
정통 유대인들의 눈에 이러한 욥의 대담한 태도는 하나님께 불경한 이단의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욥은 자신에게 죄와 흠이 없음을 밝히면서, 하나님과의 공정한 논쟁을 요구하고 나선다. 왜 악인이 잘 살고, 의인이 고통을 겪는가? 욥기는 무죄한 사람의 고난이라는 인간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욥, 하나님께 항변하는 사람 욥, 마침내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침묵하는 사람 욥, 우리는 그런 욥을 통해 매우 인간적인 모습을 느낀다. 공감한다.
2)
욥이 뜻밖의 삶의 위기에 빠졌을 때 세 친구가 찾아왔다. 의리 있는 친구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비탄에 빠진 친구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한다. 차라리 안 오면 더 좋을 뻔했다. 인간이 겪는 실존 앞에서 너무 교과서 같은 이야기를 하니 오히려 욥의 마음이 닫혔다.
욥은 세 친구를 향해 이렇게 호소한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21).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가장 소중한 태도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가장 기본적인 고백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은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세 친구는 마치 율법학자처럼, 심문관처럼 욥의 상태를 진단하고, 고통은 죄의 결과라고 단정 짓는다. 그들은 ‘상벌론’에 정통하다. 그러나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연단시키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욥기는 ‘의인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다. 세 친구는 권유, 주장, 고발 형식으로 욥과 주거니 받거니 쟁론하지만, 해답을 찾지 못한다.
욥과 세 친구의 삼 라운드에 걸친 논쟁은 평행선을 긋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세 친구의 주장과 욥의 말이 전혀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서 있는 자리가 다를 뿐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 고통당하는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자리에 서 봐야 한다. ‘즐함우함’(롬 12:15)을 실천하는 일, 그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럼에도 욥은 세 친구와의 논쟁하면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강을 발견한다. 비록 지금은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하나, 언젠가는 다리가 놓이고 화해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중재자를 찾는다. 자신을 변호해 주실 변호인을 고대한다. 그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욥은 자신의 변호자가 자기 처지를 대변해 주고,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시켜줄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가 대속자이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25).
대속자(고엘)는 구약시대 가족법에서 친척의 빚을 대신 갚아 주고, 원수를 갚아 줄 속량자를 의미한다. 욥은 하나님께 부탁드린다. 내 대속자가 되소서. 내 고엘이 되셔서 자신의 의로움을 옹호해 달라고 호소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진실은 하나님께서 약하고 억압받는 백성들의 권리를 옹호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모든 고엘의 대표자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탄원하고, 호소하며, 소망을 아뢸 수 있는 배경이다.
욥의 고백은 오늘 설교 후 부를 찬송가 170장에 담겨있다. 존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가 가사를 썼다. 헨델은 오라토리아 메시아를 작곡하면서, 1부는 예언과 탄생, 2부는 수난과 속죄, 3부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 구성하였다. 욥의 고백은 메시아 3부의 첫 곡(소프라노 아리아)이다.
이 노래는 그리스도인의 장례곡으로 불린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이 한 구절에 담겨있다. 구약 속에 감춰진 대표적인 신약인데, 바로 부활신앙이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25-26).
가장 위대한 고백은 부활신앙이다.
3)
우리는 욥의 고백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부활신앙은 얼마나 어려운가? 마틴 루터는 부활신앙이 없는 믿음에 대해 이렇게 경고한다. “불확실한 믿음은 흔들리는 그릇과 같아서 원하는 것을 담기가 힘들 뿐 아니라 그릇안의 것까지 쏟아버릴 위험이 있다”.
우리도 그런 위기를 맞는다. 네 신앙을 똑똑히 들여다보라. 처음부터 의로운 욥에게 고통을 주자던 시험자 사탄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온통 물질의 대가로 맞바꾸려고 하지는 않는가? 상벌론으로 무장한 율법학자들처럼 독선적인 교리로 정죄하지는 않는가?
그러기에 바울은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예수님은 천국을 차지할만한 가난한 마음을 지니라고 하신다. 우리가 육체의 욕망을 따르게 되면 죄의 지배를 받게 되고, 교만하게 되면 악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예전에 독일에서 어떤 집사님이 이렇게 말한다. “저는 살기 위해 혈압 약을 먹으면서부터 니코틴도 끊고, 알코올도 끊고, 카페인도 끊고, 글루타민산도 다 끊었습니다. 인생의 즐거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물질적 욕구의 포기가 아니다. 몸의 요구였다. 신앙의 변화는 그런 것이다. 신앙은 나에게 온전한 삶의 회복을 위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바울은 부활신앙을 지닌 사람은 율법이 아니라, 은총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좋은 선생님이 계셨다. 성함이 변선환인데 그 분의 가르침 중에 “인생은 너무나 짧은 하나님의 은총”이란 말씀이 기억난다. 그 말씀 가운데 어려운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생의 소망이 담겨있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존재이다.
변선환 교수님은 진지한 신학적 논쟁도 없이, 그가 사용한 개념에 대한 자유로이 해명도 하지 못한 채 감리교에서 마치 중세시대처럼 출교처분까지 받았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신학적 신념과 하나님에 대한 자기 방식의 고백을 꺾지 않았다. 그리고 1995년, 강연원고를 쓰다가 책상 위에서 소천하셨다.
올해가 20주기인데, 나는 심광섭 교수님과 함께 추모식 공동준비위원장을 맡았다. 이 분의 직계 제자들은 대부분 우등생, 모범생들인데, 왜 낙제생인 내게 그런 무거운 직책을 맡겼을까, 싶다. 아마 더 많은 낙제생, 불량학생들과 공감하려는 의미일 것이다. 여전히 그 분의 생애와 공감하지 못한 채 두려움으로 가득한 현실 때문일 것이다.
그분은 한 마디로 경계선을 연 신학자였다. 학장직에서 물러나면서 마지막 강연을 할 때에 이런 말씀을 하였다.
“허나 인생이란 우리가 사랑으로 관계하였던 모든 것들,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헤어지고, 나중에는 이 손도 이 몸과도 헤어져야 하는, 이별과 죽음을 날마다 연습하는 실험장이 아닙니까? 추풍낙엽처럼 모든 것은 떨어짐 속에 헤어짐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 떨어짐을 밑에서 한없이 부드러운 손으로 받아주시는 주님의 은총과 사랑의 손길이 있기에, 헤어짐 저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그분이 계신다고 하는 소망 있기에, 우리는 넉넉하게 이 어지러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리아 라이너 릴케의 시를 인용한 슬프면서도 기막히게 아름다운 신앙고백이었다. 이 구절에서 욥의 고백을 듣는다.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26).
욥은 절망 한가운데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을 건져주실 분임을 믿는다. 욥은 죽음 앞에서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26)며 고백한다. 욥은 죽음의 두려움 한 복판에서 부활신앙을 고백한다. 부활신앙은 부정적인 두려움으로 가득한 사람이 긍정적인 인간을 만들었고 두려움을 타파하여 하나님을 향하는 신앙의 문을 열게 하였다.
성경에서 ‘제3일’은 하나님의 때를 의미한다. 선지자 호세아는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호 6:2)라고 예언하였다. 제3일은 하나님의 구원의 시간이다.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눅 13:33)라며 ‘제3일’의 길, 곧 십자가와 부활신앙을 가르쳐 주신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제3일은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시간이다.
우리 신앙의 최고봉은 부활신앙이다. 나를 새롭게 하고, 현실을 뛰어넘게 한다. 세상에 욥만큼 고통을 겪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 진지하게 성찰하며, 깊은 곳에서 부르짖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그런 믿음을 배우길 바란다. 그런 은총을 사모하길 바란다.
하나님의 은혜가 늘 삶의 무게를 느끼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삼위일체 주일을 맞아 들려주신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저의 서툴고 연약한 믿음을 회개했어요.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고 마침내 땅위에 서실것이며내가 육체 밖에서도 하나님을 보리라는 욥의 고백처럼, 저도 그런 신앙의 고백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