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동감이 넘쳐나는 날씨 탓인지 영화 ‘파이란’의 막바지 촬영이
활기차게 진행되고 있었다. 취재진의 눈에 가장 먼저 띈 장백지는
남편 이강재(최민식)를 찾아가는 길을 촬영 중이었다. “어! 장백
지다. 그런데 어디 아파 보이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춰서게 한 그녀는 분명 어딘가 아파 보였다.
몸이 아픈 상태를 연출하기 위한 분장 때문이라는 추측은 어느 정도
적중했지만 실제로 아프다는 한 스태프의 말에 반가움보다는 안쓰러
운 마음이 들었다. 중국배우인 그녀가 한국이라는 낯선 장소에서 고
생스런 영화촬영을 시도하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
다.‘파이란’은 위장 결혼해 한국에 온 중국 여인 파이란과 볼품
없는 한량 이강재의 사랑을 담은 멜로영화다.
그러나 남녀 주인공은 서로 만나지 못하는 운명에 처하고 파이란은
사진으로만 본 그에게 사모하는 감정을 키우며 강원도에서 세탁소
일을 하게 된다. 몸도 마음도 지친 그녀는 결국 이강재를 찾아 나
서고 그가 운영하는 ‘희망비디오’ 가게까지 다다른다. 오늘 촬영
하는 부분이 바로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둘이 마주치는 극적인 부
분이다.
그래도 둘은 말조차 하지 못하고 이별을 하게 된다. 카메라는 금방
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낡아빠진 ‘희망비디오’ 간판이 단번에 이
강재 성격을 알 수 있게 하는 그의 가게로 옮겨졌다. 최민식은 이
미 바지 한쪽을 걷어 붙인 채 자리에 퍼지르고 앉아 만화책 ‘이나
중 탁구부’를 읽고 있었다. “와 이거 재미있는데. 당장 빌려봐야
겠다.” 그는 최민식과 이강재가 구분되지 않는자태로 취재진에게
첫마디를 건넸다.
‘이강재는 무식하고 시간을 허비하며 살아가는 무위도식의 결정
판’이라는 그의 설명이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옷맵시부터 촬영장
에서의 행동까지 최민식은 이강재 그 자체를 연상시키며 극중 인
물에 몰입해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염려스러웠던 의사소통 문제
는 비교적 원활히 해결되고 있었다. 외국 배우와 작업하는 게 부
담스러웠다고 밝히는 송해성 감독은 장백지의 연기지도를 그녀가
아닌 통역사에게 전달해야 했다.
비록 번거로운 작업을 거쳐야 했지만 영화에 대한 연대감은 더욱
두터워졌을 것이다. “전 여복이 없어요. 영화 속 캐릭터들이 여
자배우와 좋은 결말을 맺은 경우가 없었거든요. 이번도 마찬가지
예요. 영화 속에서 장백지와 두 번 만나는데 오늘 그 두 번째 만
남을 찍고 있습니다.
하지만 둘은 서로 알아볼 시간도 없이 헤어지죠. 만나려고 하지만
만나지지 않는 사랑이 우리 영화의 멋이자 묘미입니다.” 최민식
의 말처럼 영화 속에서 파이란과 이강재가 서로 눈을 마주볼 수
있는 시간은 너무도 짧다.
하지만 이 짧은 순간을 만들기 위해 배우와 스태프들은 꼬박 하루
를 투자하고 있었다. 전혀 ‘희망’적이지 않은 ‘희망비디오’의
이강재와 ‘희망’을 갖고 찾아온 파이란의 사랑은 분명 ‘희망’
적 사랑을 제시할 것이라는 성급한 추측을 해본다. ‘파이란’은
4월중 우리앞에 찾아올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