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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사상의 이해 – 20230121 / 2002년 9월 박영호선생 강의(성천문화재단)
이르기를 하느님을 생각하라. 命窮神
아침 서울에서 저녁 광주니 하루 길게 차 탓네 朝京暮光日長乘
온 하늘 눈 오려는 듯 강과 산에 안개 걸치었네 滿天雪意霧江山
나는 삶, 드는 죽음 사이 하느님 생각하라 일러 出生入死命窮神
맘 비워 하느님 모시니 추위 더위도 시쁘기만 極一無心易署寒
이어진 산 이리저리 뻗었고 강경엔 눈 하얀데 連山紛紜江景白
구도자의 속탐인 양 기차는 연기 뿜으며 바삐 달려 小乘煩惱火輪急
김제 만경 들 누렇게 익은 벼로 풍년 들기 바라고 金堤萬頃願黃登
이대로 봄이면 눈 녹은 물이 사방 논에 못을 이루리 從此春水滿四澤
차 안에서 하루동안 일이 꿈에 듣고 본 것인가 車中一日夢聞見
세상에서 일생동안 무엇을 보고 듣는다던가 世間一生何視聽
잡다한 것 듣고 봐도 맘은 고요하기만 聞見雜駁心閑散
깊은 속 헤아리니 밝은 참(하느님)을 생각 視聽深奧思明誠
(1959.1.15)
窮神(궁신) :하느님을 생각하다. 窮 :궁구할 궁 易 :홀하게 여길 이 紛 :많을 분. 紜: 어지러울 운. 紛紜(분운) 부산함. 小乘(소승) :개인의 수도를 위주로 하는 불교의 종파. 黃登(황등) :누렇게 익다. 登 :익을 등 四 :사방 사 雜駁(잡박) :잡다한. 雜:섞일 잡 駁 :섞일 박. 閑散(한산) :조용하고 한가한. 奧:속 오. 明誠(명성): 밝은 참 하느님의 얼.
“사람은 생사(生死)의 제나를 벗어나야 한다. 몸과 맘의 제나(自我)를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빛나고 힘있게 살 수 없다. 사람은 좀더 빛나고 힘있게 살아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을 깊이 감추어두었다.이 영원한 생명(얼나)의 씨앗을 잘 길러서 생사를 초월해야 한다." (다석어록) 생사란 무엇인가. 개체라고 하는 것은 생사다. 개체를 초월하면 니르바나 영원한 생명이다. 개체라고 하는 것은 생사 에고다. 사람은 생사를 벗어나야 한다. 개체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체를 초월하려면 예수님이나 부처님처럼 니르바나의 뜻을 내뜻으로 삼고 사는 것이다. 나침판이 북극을 딱 맞추듯이 내의지와 하나님의 뜻이 딱 맞아떨어지게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은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에고의 나에서 벗어나야 한다. 몸의 나도 마음의 나도 참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원 본부대와 떨어진 군인은 낙오병 아니면 패잔병이다.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러나 전체에 포괄되어있는 군인은 진짜 나라의 간성이다. 우리가 전체에 속해있는 개개인이 될 때는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고 부처가 될 수 있는 배경이 있는 것이지만 나자신을 위해서 살 때는 똥구덩이만도 못하다. 아무 쓸데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내가 움직일 때는 오줌 똥싸고 살아야하는 나이지만 거룩한 빛을 낼 수 있다. 그러나 나자신의 에고를 위해서 산다고 하면 똥무더기만 못하다. 사흘만 목욕을 한해도 냄새나는 것이 몸뚱이다. 이런 몸뚱이를 가지고 있어도 예수님과 부처님처럼 개체의식을 초월한 전체의식으로 살게되면 하나님 아들소리도 들을 수 있고 부처님 소리도 듣는 것이다. 나자신을 위해서 살려고 하면 보잘 것 없고 초라해 진다. 하나님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산다고 할 때 빛이 나는 것이다. 완전히 바꾸어야한다. 톨스토이나 간디가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보잘 것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살겠다고 전환을 한데 인간으로서 빛이 나는 것이다.
나는 삶, 드는 죽음 사이 하느님 생각하라 일러 出生入死命窮神
맘 비워 하느님 모시니 추위 더위도 시쁘기만 極一無心易署寒
"나오니 삶이요, 드니 죽음이라"(出生入死)는 말은 『노자』 50장』에 나온다.
사람이란 작게 보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와 무덤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크게 보면 없(無)에서 나와 없(無)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루 동안의 나들이나 일생 동안의 나들이나 나들이라는 점은 같다. 류영모는 숨 한 번 내쉬고 들이쉬는 것도 나고 드는 생사(生死)와 같다고 하였다. "사람은 일생 동안 9억 번을 호흡한다. 숨을 들이쉬는 것이 사는 것이요, 숨을 내쉬는 것이 죽는 것이다. 그러니 한 번 들이마시고 한 번 내쉬는 것이 한 번 낫다가 한 번 죽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결국 9억 번을 숨쉰다 해도 들이쉬었다 내쉬는 것이지 그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한 번 내쉬는 것이 곧 생명의 내용이다. 한 번 숨쉬는 데 생(生)의 덧없음과 명(命)의 보통 아님을 볼 수 있다." (다석어록) ”내가 숨을 쉬는 것은 성령이 숨을 쉬는 것이다. 그리하여 참인 하느님을 체득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기도하는 데 있다. 기도는 생각하는 것이다. 성령은 하느님 아들이 되는 권능이 있다. 성령을 숨쉬고 하느님 아들로 솟나는 것이다. 우리의 숨은 목숨인데 이렇게 할딱할딱 숨을 쉬어야 사는 몸 생명은 참 생명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숨쉬는 얼생명이 참 생명이다. 얼 생명은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으로 하느님 아들이다. 숨 안 쉬면 끊기는 이 목숨은 가짜 생명이다. 숨쉬지 않아도 끊기지 않는 얼숨이 있다"(다석어록)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고 늘 현재 nowandhere로 존재한다. 우리 개인적인 삶이란 꿈꾸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 죽은 사람 가만히 생각해보자. 전부 꿈꾼 것이다. 무덤앞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이 살아생전의 희로애락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꿈속의 꿈이다. 그러면 현실중에서 현실은 하나님이다. 결국 우리가 돈오한다는 것은 꿈깨는 것이다. 꿈깨는 것이란 니르바나를 보았고 하나님을 만났으면 꿈깨는 것이고 돈오했다는 것이다. 니르바나를 알고 하나님 아는 것이 돈오 한 것이다. 성불한 것이다. 이세상 사람들은 목사들이 교회만 해도 4만개가 넘는다. 전도사 목사만 해도 7만명이 넘을 텐데 뭐하는 건지 모른다. 알 수가 없다. 몇사람이 돈오를 했는가. 스님들이 얼마나 많은가. 몇사람이 돈오를 했는가. 쓸데없는 데 신경을 쓰고 있다. 서로가 잘났다고 싸움만 한다. 돈오한 사람은 니르바나를 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도신경이 주춧돌이다. 그 위에 교의신학의 집이 지어져있다. 내가 사도신경이 거짓말이라고 하면 주춧돌을 뽑아버린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현 기독교가 다 무너지는 것이다. 한사람도 항의 하는 사람이 없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신경을 집어치워야 하는데 아직도 사도신경을 주일마다 읽고 있다. 현 불교에서는 니르바나 열반든다고 하면 죽는 것을 말한다. 서경보는 적멸을 어떤 법열의 지경이라고 했다. 진리를 깨달은 어떤 기쁨이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그 정도밖에 니르바나를 모른다. 방신부가 동국대학교에서 석사논문을 쓰면서 니르바나가 하나님과 같다고 하니 지도교수 목정배교수가 그럴 수가 있느냐 펄쩍 뛰었다. 현불교로서는 인정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니르바나가 하나님이라고 해도 아무 반응이 없다. 유영모 박영호가 미미한 존재라 그렇다고 하면 별문제지만 어떻게 그럴수가 있는가. 그러니 엉터리라는 것이다. 김용*이 강의를 하면서 다석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달라이 라마 만나고 이제 잡아함경 사가지고 갔다고 한다. 이제 잡아함경 보면서 뭘 불교를 잘 안다고. 덜 됬으니 달라이 라마 만나고 오고 그러지 달라이라마 아무것도 아니다. 원 부처님의 불교가 있는데 대승불교로 한번 굴절이 되어서 한번 타락했다. 지금 우리나라 대승불교는 다르마불교를 소승불교라고해서 낮추워 보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변질된 것이다. 1차 타락한 것이다. 2차 타락한 것이 섹스종교 밀교다. 밀교가 티벳불교다. 그런 섹스종교에서 무슨 부처님의 옳은 가르침이 나오는가. 섹스불교를 부정을 해야한다. 그런 다라이라마를 세계적인 불교학자라고 세계가 떠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 배꼽이 웃을 일이다. 그런 달라이라마 만나고 왔다고 책쓰고 글쓰고 자랑하고 한다. 이 세상은 엉터리 세상이다.
전차가 늘 전선에 닿아 있어야 한다. 그런 것처럼 진리의 선이 있는데 우리의 의식이 이 줄에 늘 닿아있는 것이 기도다. 그러면 참선할 때만 기도하고 딱 떨어지면 우리는 참된 생활이 정지가 된다. 전철이 가면서 늘 붙어있어야 되듯이 우리는 진리의 선에 늘 나의 의식이 붙어 있어야 내가 탐진치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아들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지 떨어지면 금방 탐진치가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전천후 비행기가 있듯이 전천후 기도라야한다. 24시간 잠시라도 하나님과 떨어지면 탐욕이 들어오고 진성이 일어나고 음욕이 일어난다. 그야말로 접선이 되어있어야 그게 기도의 생활이지 명상하고 있는 동안에만 하나님과 통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안통해도 좋다는 것인가. 무슨 명상법 자꾸 이야기 하는데 쓸데 없는 소리다. 하나의 훈련은 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군인도 훈련소에서 훈련을 하는데 수시로 훈련을 하기는 해야되지만 그런 역할만 하는 것이지 훈련이 군인의 역할인가. 싸워야 군인이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시간만 있으면 제자들과 떨어져 혼자서 명상한다. 내가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진다든가 여기에 충전 된것이 떨어졌다 싶으면 혼자서 명상하고 제자도 필요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핫라인을 가동해서 하나님의 영을 내속에 충전시키는 것이다. 나의 잡된 생각 대신에 거룩한 마음 거룩한 생각이 의식의 성화聖化.. 의식이 내 본능에 연결이 되면 금방 탐진치가 일어나고 발동한다.우리가 냉수를 틀면 찬물이 나오고 온수를 틀면 더운물이 나오듯이 하나님과 연결되면 거룩한 생각이 나오고 개인의 의식에 연결되면 짐승생각이 나온다. 그래서 항상 짐승생각을 누를 수 있도록 영성과 연결이 되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예쁜 색시 보면 음란한 생각이 들고 돈보면 탐욕 생기고 금방이다. 먼 것이 아니다. 세속적으로도 부모님과 늘 가까이 있어야한다.멀리 있는 효자란 있을 수 없다.그야말로 혼정신성昏定晨省을 해야 효자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도 혼정신성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떨어지면 안된다. 하나님과 늘 가깝게 내 마음가운데 모시고 내가 아버지 속에 있고 아버지가 내속에 있는 그런 밀접한 관계로 유지를 해야한다. 하나님과 떨어지면 짐승밖에 안된다. 칠십살이 되었다고 예쁜 색시를 보면 예쁘게 안보이겠는가. 그러나 영적인 생각 거룩한 생각이 딱 있으면 부처님처럼 피자루 똥자루로 보인다. 영적인 연결이 끊어지면 금방 유혹을 받는다.
그리스도란 이름 基督名義
그리스도란 뜻 바로 풀기 어려워 基督意義正解難
비슷한 정의는 어디서나 만나지만 定義如之何處到
기름 부은 제나는 믿고 따를 푯대요 傅油小我信順標
얼을 부어주심이 큰 나로 자라날 길 注靈大我成長道
(1958.12.21)
名義(명의) :이름. 解 :풀 해 定義(정의) :규정된 뜻. 傅油(부유) :기름붓다 傅 :베풀부 注靈(주령) :얼을붓다.
그리스도란 뜻 바로 풀기 어려워 基督意義正解難
비슷한 정의는 어디서나 만나지만 定義如之何處到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4복음중에서도 마가 누가 마태복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메시아로 만들려고 무진 애를 썼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공관복음 연구에 권위자는 정양모 교수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름붙혀진 것도 꼭 그 사람이 지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한다. 주교 신부가 2백년 지난 다음에 붙였다. 톨스토이에 의하면 자료가 4만가지도 넘는데 그중에서 4가지를 뽑은 것이다. 뒤에 사람이 추정해서 붙였기 때문에 확실한 근거가 없다. 그러려니 하고 믿는 것이지 확실한 근거가 없다. 마가복음이 모복음이고 그것을 큐자료라고 한다. 다른 복음에서 마가복음을 인용을 하니까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생겼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진실성이 제일 많은 것은 요한 복음이다. 그야말로 수수께끼다. 톨스토이에 의하면 4복음 안에도 카트될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로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다고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있을 수 없는 소리다. 광신자들이나 그따위 소리를 하는 것이다. 성령이 주동이 되어서 말씀을 했기 때문에 받아적었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틀릴 수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오늘도 전철을 탔는데 어떤 여자가 예수를 믿어야 천당을 가고 천당을 가시겠습니까 지옥을 가겠습니까 협박을 한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런다.
지금도 창세기에 엿세만에 천지를 창조 하시고 그런 소리가 있는데 하나님이 무엇이 답답해서 다른 별에 가면 하루의 길이가 다 다른 것이다. 지구에서나 24시간이지 다른 별에 가면 밤과 낮이 다르다. 해쪽으로 보는 쪽이 낮이고 가려지면 밤인데 자전 속도가 다 다른데 크기가 다르다. 달에 가면 중력이 1/5이 된다. 그러므로 몸무게가 1/5로 줄어들어서 걸어다니지를 못하니 펄쩍펄쩍 뛰어다닌다. 화성은 지구 중력의 1/3밖에 안된다. 몸무게가 1/3로 줄어든다. 그러니 저절로 뛰게 된다. 복음기자들은 에수를 메시아로 만들려고 무진 애를 썼다. 지금 유대교믿는 신자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을 하지 않는다. 인정할 까닭이 없다. 예수를 그냥 선지자의 한사람으로 인정을 하지 메시아로 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메시아관은 이스라엘민족은 선민의식이 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특별히 은혜받는 선택된 민족이다라고 하는 선민의식이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을 숭배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에게 특별히 은혜를 주시리라는 의식이 있는 것은 특별대우를 받고 싶어서다. 선민의식이 있는 것은 특별대우를 받고 싶어서 그렇다. 그런데 실제로는 약소민족이 되어서 주위의 민족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림을 당한다. 우리가 중국 일본 소련에 시달리듯이 이스라엘 민족도 그렇다. 이란쪽 메소포타미아쪽에 이집트쪽에서 침략을 당해 식민지가 되고 수난을 당하니 선민을 받았다면 그런 명분이 서지를 않는다. 현실로는 선택된 민족이 아니라 날마다 시달림만 받는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것이 만날 남의 민족에 천대받고 압박받고 무엇이 선민이냐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종말관이다. 우리가 죄를 많이 지어서 시련을 받는데 우리가 정신만 바짝 차리면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오시든지 아들을 보내서 천년왕국을 세워서 그때는 여러 민족들은 전부 멸망하고 우리만 천년왕국을 세워서 하나님의 친정이 시작되어서 천년동안 복락을 누린다. 그래서 종말관은 다른 민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어떤 보상으로 천년동안 이루어지는 것인데 우리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런데 한국사람이 왜 종말관을 갖고 예수재림이니 하는데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지금도 사도신경을 외우면 심판하러 온다는 종말관이 있다. 거짓말중에 거짓말이다. 그 거짓말은 못내버리고 알 수가 없다. 예수가 그리스어를 안다고 짐작하는 성서학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는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쓰고서 번역하면 그리스도라고 밝혔다. 깊이 헤아려보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호칭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데만 마음을 썼다. 예수는 거듭난 얼나로 하느님의 아들이면 그만이었다. 하느님 아들 이상의 영광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의 생애를 기록하는 복음 기자들은 예수의 생애와 이스라엘의 메시아와 고리를 잇고자 애쓴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예수는 복음 기자에 의해 그리스도에 추대되었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복음 기자들이 무리수를 쓰면서까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들고자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스라엘 민족과 그리스도(메시아)는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다. 복음 기자 자신들도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메시아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었기도 하거니와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인정받는 길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밝히는 데 있다고 믿은 것 같다. 그리하여 복음 기자들은 필요 이상으로 예수를 구약성경과 연계시키고자 하였고 메시아 사상과 밀접한 종말적인 얘기를 많이 썼다. 그리하여 예수의 기본 사상조차 이해하는 데 많은 혼란을 주고 있다.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의 랍비적인 진리의 말씀과 예언자적인 종말의 교리가 모세 앞에 홍해가 갈라지듯이 갈라지는 것을 본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에 어긋나게 되는 성경 구절의 근거가 거의 종말 사상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을 보면 선생님으로서의 그냥 가르침을 주는 랍비적인 요소와 종말관의 메시아적인 요소가 있는데 성경이 잘못된 것은 메시아관 구름 타고 와서 심판을 하게 되고 그때가 되면 지진이 일어나고 그런 종말관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런 것은 전부 거짓으로 보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냥 진리의 말씀을 한 랍비 랍비라는 말은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유대교의 선생님 목사를 랍비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목사님들은 그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 요즘도 종말관 이야기 하고 그따위 소리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메시아 사상이 민족 신앙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선민 사상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만이 여호와(야훼)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민족 우월 의식이 선민 사상의 핵심이다. 사람이 태어나자면 남자의 생식기에서 나온 정액 가운데 있는 5억 마리 가량의 정자가 결사적인 경주를 벌린다. 그리하여 5억마리 정자 가운데 단 1 마리의 정자만이 난자에 골인하여 아기로 자라게 된다.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은 잘났든 못났든 5억 대 1의 경쟁에 이긴 선택된 생명인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만이 특별히 선택받았다는 것은 이기적인 망상이요 편집광적인 착각이다.
"나는 유대 교도가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자기 종족이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라고 믿는 것은 민족주의의 착오다. 그것은 지적인 오류인 동시에 윤리적인 오류이다"(토인비. 회고록) 이러한 오류에서 나온 메시아 사상이므로 많은 잘못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메시아 신앙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생각까지는 잘못이 없다. 오히려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더 나은 생각에 틀림없다. 그 생각이 모든 인류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만을 하느님께서 특별히 더 사랑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할 어린 아이같은 유치한 생각임에 틀림없다. 거기에서 종말관에 기초한 메시아의 천년왕국 사상이 움트게 되었다.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언제나 주변의 이민족들에게 침략의 치욕을 당하니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메시아 사상의 진원이요 선전을 맡은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에게 잘못하여 응징을 받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세계 어느 민족보다 과민한 죄의식이 발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느님 여호와로부터 잘못에 대한 응징만 받아서는 여호와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긍심이 유지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예언자들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 종말관 신앙이다. 이제 인류의 종말이 오는데 그때 다른 민족들은 다 멸망하고 이스라엘 민족만은 하느님 여호와의 친정(親政)아래 영광과 행복을 누리는 천년왕국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 일을 하는 데는 하느님의 아들인 메시아(그리스도)가 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임을 내세우는 데는 멋진 시나리오에 틀림이 없으나 그것이 다만 민족 이기주의에서 지어낸 허황한 망상인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 기자들이 아무리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로 내세웠어도 종말도 오지 않았고 천년왕국도 오지 않았으니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칠 년이란 대 한발에 단비 오기만 기다리는 농민들처럼 갈급한 마음으로 메시아(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민족인지라 조금만 이색적인 인물이 나타나기만하면 혹시나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우르르 모여들었다. 또 아니다 싶으면 우르르 떠나갔다. 예수도 예외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 밀물처럼 몰려왔다가는 설물처럼 빠져나가기를 되풀이하였다.그때의 인구 분포로 3천 명, 5천 명이 모였다면 대단한 군중인 것이다.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는 그의 주석서(성서해석주해서)에서 (보통 일본의 구루사끼의 성서주해가 가장 유명하다) 말하기를 예수 때는 혁명적 분위기라고 말하였다.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있는데 혁명적 분위기이기만 했겠는가. 예수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그래도 자기를 떠나지 않는 몇 사람의 제자들이 고맙고 귀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보더냐 하고 물었다. 제자가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예레미아나 예언자 가운데 한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태오 16:14)라고 하였다. 예수는 제자들의 생각이 궁금 하였다. 그래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었다. 시몬 베드로가 "선생님은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입니다"(마태오 16:16)라고 대답하였다. 예수는 기뻐하며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준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이시니 너는 복이 있다"(마태오 16:17)라고 하였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하느님 자신의 영원한 생명인 성령을 주어 우리가 짐승인 제나(自我)에서 하느님 아들인 얼나(靈我)로 새로 나기를 바란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예수 자신이 얼나로 거듭나지 않았다면 그 이치를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자신이 먼저 제나에서 얼나로 부활하였기에 자신 있게 가르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상의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 이스라엘 민족의 민족적 이기주의에서 나온 종말관적인 천년왕국 사상은 하나의 몽상과 같은 유토피아 사상으로 그 실현성이 전혀 없다. 하느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는데 그런 유토피아가 이스라엘 민족에겐들 무슨 쓸데가 있겠는가.
기름 부은 제나는 믿고 따를 푯대요 傅油小我信順標
얼을 부어주심이 큰 나로 자라날 길 注靈大我成長道
그리스도(메시아)란 말의 뜻은 '기름 붓다' (傅油)라는 뜻이다. 옛날에 임금의 제도가 생기기 전에는 이스라엘에서는 선지자들이 민족을 이끌어 갔다. 그때 선지자들은 늙어지면 후계자를 세우는 의식으로 그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 '기름 붓다'가 그리스도(메시아)의 본 뜻이다. 뒤에 임금제도가 들어서서는 임금이 왕위에 오르는 의식으로 선지자들이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 그 사람들은 얼나로 거듭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제나(小我)라 한 것이다. 그들은 일반 백성들이 믿고 따르라는 표시로 머리 위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사무엘이 사울과 다윗의 머리 위에 기름 부은 일이 이스라엘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류영모의 그리스도관은 한마디로 하느님이 보내주시는 성령으로 깨달은 얼나를 말한다. 그러므로 얼나는 하느님의 생명이므로 하느님과 하나다. 그러나 몸을 쓰고 있는 동안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껍데기 몸은 어머니의 모태(母胎)에서 나왔다. 이 몸은 땅에서 나와 땅으로 돌아간다. 위에서 온 얼은 위로 간다.하느님이 영원하면 우리의 얼도 영원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하느님이 보내시는 성령이 우리의 얼나이다.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예수의 몸을 보고 따르자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내 맘속에 있는 얼나가 참 생명임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므로 먼저 내 맘속에 하느님의 성령을 맞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얼나의 뜻에 따라야 한다. 그 얼나가 참 예수의 생명이고 참나의 생명이다. 몸으로는 예수의 몸도 내 몸과 같이 죽을 껍데기지 별수 없다"(다석어록). 류영모는 하느님 아들의 정체(正體)는 마리아가 낳은 몸이 아니고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전후에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깨달은 얼나임을 밝힌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하였다. 류영모의 생각을 받아들이면 "너희는 아래에서 왔지만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요한 8:23)라는 말을 쉽게 알아들을 수가 있다. 너희란 제나(自我)를 말하는 것이며 나란 얼나(靈我)를 말한 것이다. 예수도 그의 몸으로는 아래서 나온 것이고 얼만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도 얼나로 거듭나기만 하면 얼나로는 위에서 온 것이 된다. 예수가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8:58)고 한 것도 얼나를 두고 한 말이지 몸나를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예수는 그때 50살도 안 된 나이인데 1천7백 년 앞의 사람인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가 이성을 잃지 않았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얼나는 시간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예수의 말은 털끝만큼도 거짓이 없다. 예수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말을 더 잘 알아듣게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에는 너와 나라는 개인이 없기 때문에 이름이 소용없다"(다석어록) "예수나 미륵불을 기다리지 말라. 그것은 헛일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오시는 분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보았다. 보내신 그리스도란 영원한 얼생명이다. 우리 몸에 산소가 공급되듯이 얼이 공급되는 것이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으로 부터 줄곧오는 영원한 생명이다"(다석어록). 그러니 교회에서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이 오는 것이 그리스도이다.
뫼신살이
긴 김 내리받아 말숨살이 참말로 쉬 고맙
머리 웋 임닐 자리로 더위로 맘에 한 웋님
예 예는 우리로서니 도라 가온 계실 꼐
(1972. 2. 11)
시하(侍下)라고 한다. 엄부시하다. 옛날에는 당신 아버지 살아계시느냐를 엄부시하십니까? 요즘은 남편이 아내에게 쩔쩔매면 엄처시하라고 한다. 뫼시고 사는 살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실 존재를 모셔야 하는데 음식점에서 손님을 왕으로 모시겠습니다. 진짜 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데 위에 아무것도 모시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다. 무상(無上)한 놈 위없는 놈 이라고 한다. 자기가 제일 잘났다. 안하무인이라고 한다. 무상한 놈이 되면 유물론이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불교가 무상한 종교가 되었다. 다석선생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사람을 신격화시켜서 사람을 섬기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 사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종교가 아니다. 사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마라. 그러면 부처님도 사람이고 예수님도 사람이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공자님이나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뫼신살이라고 하면 어디까지나 하나님아버지를 모시라는 것이다.회사에서는 사장을 모시고 집에서는 어른들 모시고 절에 가면 부처님 모시고 교회에 가면 예수님 모시고 전부 사람 모시는 것이다. 옛날에는 임금님 가까이 모시는 당상관이 있다. 몸뚱이를 신성시 하는 것이다. 지금도 대순진리회 통일교 전부 사람이다. 강증산이 하나님이고 문선명이 하나님이다. 아예 상제라고 한다. 고등종교라고 하는 기독교 불교가 사람모시는 사람을 섬기는 종교가 되었다. 우리가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를 말고 예수의 신앙을 본받아야 된다. 예수가 누구인가? 예수가 자기자신을 믿은 사람인가?
예수가 하나님을 받든 사람이다. 그러면 우리도 하나님을 받들어야지 왜 예수를 하나님으로 받드는가. 부처님이 언제 자기를 나에게 모두 와서 예배하라 불상한테 절하게 그렇게 만들었는가? 그런 일이 없었다. 부처님은 자기 상을 일체 조각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아쇼카왕의 기둥세우는 데도 부처님상은 없다. 부처님은 절대 그렇게 못하게 했는데 지금 기독교쪽에서는 불교를 우상종교라고 하지만 우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것은 잘 모르고 그렇게 하는 소리다. 그러니 앞으로의 종교도 사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를 말자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야하는가. 전체. 가장자리 없는 허공에 무한한 별들이 있다. 허공에 가장자리가 없다. 허공에 울타리가 있다면 그러면 울타리 너머에는 뭐가 있는가. 이것은 신비다. 우리가 벌집같은 아파트에 30평 50평 70평짜리에 산다고 뽐내고 자랑하고 있지만 이런 무한우주가 있다는 것을 전연 모른다. 가장자리 없는 허공 그안에 무한한 별들이 있다. 그것뿐이 아니고 여기에 생명이 무언가. 얼이다. 허공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얼이 있다. 허공과 얼이 같이 무소부재하게 얼이 있다. 얼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내 마음가운데에서 얼이 터져나온다. 땅속에 불덩어리가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보통 불이라고 하면 흙으로 덮어버리면 꺼진다. 그런데 이 땅속의 불은 두꺼운 멘틀로 덮혀있는데도 꺼지지 않는다. 처음에 태양에서 떨어져나올 때 태양을 돌고있는 12개의 위성이 일정한 거리의 비율로 떨어져 있다. 서로 떨어진 별들의 거리가 일정한 비례가 있다. 달은 지구에서 태평양바다에서 떨어져 나갔다. 가장자리 없는 허공이 전체다. 이것이 하나님이다. 인태신관이 아니다. 여성숙이라는 의사가 있는데 꿈을 꾸었다. 허연 노인이 나타나서 내가 하나님이다. 여러 사람이 있는데 본인 앞에 나타나서 너는 죄를 짓지 말라. 그 의사가 아마도 세례받는 모습이 그렇게 꿈으로 나타난 모양이다. 그러니 꿈이다. 유치한 생각 때 하나님이 사람같이 생겼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도 곰 구렁이 원숭이를 신으로 숭배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못났는지. 그러니 사람을 신으로 섬기는 것은 이상하지도 않다. 지금도 인태신관에 빠져서 그러는데 그것은 다 미신이고 가장자리 없는 허공에 무한한 별들이 네온싸인처럼 빤짝이면서 생멸을 거듭한다. 별들의 수명은 수백억년씩 간다. 가끔 새별이 나타난다. 그것을 초신성이라고 한다. 이것은 새로 생긴 별이 아니고 늙은 별이 죽느라고 흩어질 때 빛이 나는 것이 망원경에 포착이 되는 것이다. 별이 숨지면서 폭발하며 마지막 빛을 발하는 것이다. 우주물질이 불랙홀에 쌓여서 새로운 별이 탄생하기도 한다. 별도 일생이 있어서 푸른 빛이 많이 나는 것은 젊은 별이고 붉은 빛이 많이 나는 것은 늙은 별이다. 하나님측에서 보면 몇백억년 사는 별들도 하루살이처럼 보인다. 딸을 시집보내고 두 노인이 개 3마리를 친자식처럼 키운다. 나중에 가서보니 개가 없어서 물어보니 죽었다고 한다. 개 수명이 15년밖에 안된다. 우리보다 몇백배의 수명을 가진 남산이 우리 인간을 본다고 하면 남산은 이퇴계도 보았을 것이고 세종대왕도 보고 했을 텐데 오늘날 우리를 보고 저것들 많이 달라졌구나 그럴 것이다. 잠깐후에 우리도 송장되어 없어져 버린다. 그것을 알아야한다. 이 전체가 하나님이다. 서양 철학이 희랍철학에서부터 시작해서 몇천년을 하나님을 찾았는데 찾지를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인가 하면 이 전체 가장자리 없는 허공속에 여기 전부다 얼이 있다. 허공 빔 플러스 별 플러스 얼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이다. 업은 아이 3년 찾는다고 전체라는 것은 다 있는데 전체다. 노자는 이것을 樸 박이라한다. 전체가 하나님이다.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전체가 없으면 우리는 전체의 하나의 부속품이다. 하나님 없다고 하는 자는 멍청한데 그런데 짐승이 하나님이다 사람이 하나님이다 문선명 강증산이 어떻게 하나님인가. 어떤 신학생이 저희끼리 이야기를 하는데 예수님이 태어날 때 울었겠는가 안 울었겠는가. 아담의 배에는 배꼽이 있겠느냐 없겠느냐. 아담은 탯집으로 난 것이 아니고 만들었다고 하니 배꼽이 있느냐 없느냐. 신학생들이 그렇게 쓸데없는 소리만 하고 있다. 우리는 전체속의 개체고 전체로 따질 때는 개체는 없어져 버린다. 개체는 전체를 모시고 살아야한다. 우리는 개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다. 개체는 전체를 우리의 님으로 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전체가 없다는 것은 건방진 소리다. 몸뚱이에서 세포가 떨어져 나가면 때밖에 안된다. 개체가 전체를 안에서 같이 놀아야 전체가 우리의 후광이 될 수 있고 우리가 사명을 가질 수 있지 우리가 전체에서 독립해버리면 이것은 때밖에 안된다. 예수님 부처님이 거룩한 것은 전체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도산선생 마음속에는 자기 개인도 가족도 없었다. 안필립이 도산이 가족을 돌보지 않아 결혼 시기를 놓쳐서 결혼을 못했다. 나라 독립운동하는 사람이 처자식 걱정할 여가가 없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부처님에게는 자기 에고도 가족도 없고 오직 하나님 하나만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진짜 뫼신살이다. 하나님만 뫼시고 산 사람이 예수님 부처님이다. 부처님 처자식도 전부 제자 만들어버리고 가족이 없다. 죽기전에 라훌라와 특별 대면 한번 하고 가끔 라훌라가 부처님 발씻겨 드린 그정도다. 죽기전에 다른 제자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이야기 하고 아들에게는 불러서 이제 나는 니르바나에 든다. 내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라. 이제 나도 누구의 아버지가 되지 말고 너도 누구의 아들이 되지 마라. 얼마나 멋진 소리인지 부처님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교회사람들 보면 하늘나라에 가서 아버지만나고 딸 만나고 그 따위 소리하는 것하고 부처님과는 비교가 안된다. 교회 목사들 장례식 가서 얼마 안가서 요단강 건너서 아버지 만나고 부처님은 그런 것이 아니다. 너와 나의 부자지간은 여기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전체로 돌아가는데 하늘나라에 가서 개체가 있다고 하면 죽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데 왜 윤회설이 불교에 윤회설은 불교 것이 아니고 브라만교에서 내려오는 것인데 부처님의 윤회는 우리가 자식 낳고 하는 것이 윤회다. 사람이 짐승이 되고 개가 되고 구렁이가 되고 하는 것은 요즘 유전인자가 발달이 되어있는데도 스님들은 윤회설을 믿는다고 한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사람이 죽어서 어떻게 구렁이가 되고 하는가. 그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오늘날 불교는 미신덩어리다. 기독교가 거짓말 덩어리라면 불교는 미신 덩어리다. 불교도 지금 저렇게 해서는 안된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윤회가 무언가. 윤회라면 우리가 자식 낳는 것이 윤회다. 라훌라 법명은 구도생활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공자 자손은 지금 78대손인가 나오지만 부처님 자손은 없다. 그런데 절에 가서 자식 낳게 해달라고 기도드리는 것은 넌센스중에 넌센스다. 부처님의 이상은 손이 끊어지는 것이다. 기독교도 그런 것이다. 번식하는 것은 짐승들이 하는 것이다. 진리의 사람은 번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이다. 다석선생님이 뫼신살이다 하면 하나님을 뫼시는 것이다. 우리는 개체이기 때문에 전체를 안모실 수가 없다. 전체를 떠나버리면 인간이란 똥무더기 보다도 못하다. 그러나 우리가 전체속에 들어가 있을 때는 전체의 일부니 거기에는 영광이 있을 수 있다. 예수님이 결별의 기도에서 내가 이제까지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였으니 아버지여 나를 영광되게 하옵소서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소리다. 그것은 전체로 받아들여 달라는 것이다. 내 이 개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개체로서 무슨 영광이 있는가. 전체로 돌아갔을 때 전체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당신이 우리의 영광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전체로 돌아갔을 때 우리 개인이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고 우리 개체에게는 하나님 당신이 우리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우리 개인적으로는 대통령이나 장관자리에 있다고 영광될 것이 없다.전체로 돌아갔을 때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무슨 감투를 썼는가. 뫼신살이 인데 전체를 뫼시고 살아야 우리 개체가 보람이 있을 수 있다. 전체가 주는 사명이 무언가. 전체의 생명을 받는 것 전체로 돌아가는 것. 긴 김 내리받아 말숨살이 참말로 쉬 고맙 긴이라는 것은 잘 안쓰는 말이다. 선생님은 고어나 잘쓰지 않는 낱말을 많이 쓰신다. 긴은 끈이라는 뜻의 방언이다. 실을 꼬아 만든 끈이다. 비오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이 생명줄 말씀줄 진리의 김 김이라는 것은 기 气 에너지. 긴김은 성령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불성. 무소부재한 불성. 비가 오듯이 위에서부터 오는 성령의 내림을 받아.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성령이 내 마음가운데로 충만하게 내리는 것. 우리가 정신적으로 번뇌라는 것은 가슴이 답답한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앞이 깜깜해서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출가를 해서 광야를 헤매고 돌산을 해멜 때 그 가슴속이 얼마나 답답하고 깜깜했는가. 그런데 깨달음이란 것이 답답한 속이 확 터지는 것이다. 우리가 숨이 꼭 막혀있다가 확 터지는 것 알 수가 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호흡하는 것을 말숨살이다. 그러면 말씀으로 나타나는 데 그것이 하나님에게 감사하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성령이 내 마음 가운데 와서 말씀의 숨이 터져서 진리의 말씀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참말을 하게 된다.그것이 참 고맙다. 모든 신앙의 시작은 하나님과의 핫라인 성령이 터지는 것 그것이 득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말숨살이다. 성령을 받는 것이다. 보통 그래가 새끼를 낳으면 고래는 포유동물이라서 숨을 쉬어야한다. 새끼를 낳으면 숨을 못쉬면 죽으니 어미고래가 등으로 바다위로 올려 보내 숨을 쉬어서 살게된다. 그러면 선생님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고래새끼처럼 태어났는데 아직 성령의 세계까지 올라오지를 못해서 숨을 못쉬고 있다. 그러면 선생님이 등을 밀어올려 가지고 기통을 시키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선생의 할 노릇이다. 기통시켜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을 숨쉬지 못해서 속이 답답하고 그럴 때 소크라테스가 산파역할 한다고 하듯이 중간에서 도와주는 것이다. 기도라는 것이 하나님의 성령을 숨쉬는 것이다. 보통 고래는 7~8분 물속에 들어가 있다가 나와서 숨을 쉬어야 살수 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우리가 세상 일에 붙잡혀 있다가 깜짝 놀라가지고 또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것이 기도다. 성령을 주고 받는 것 긴 김 내리받아 말숨살이 이것이 기도다. 달라이 라마가 하나님이 없고 불교는 심리학이고 철학이고 그것 철없는 소리다. 그런 사람을 세계적인 불교 무슨 대단한 대접을 받고있는 모양인데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것 전부 엉터리다.
월정사 위에 상원사가 있고 그 위에 적멸보궁이 있다. 적멸이 니르바나다. 니르가 no 바나가 voice다. novoice 아무 소리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 소리 없으면 적멸이다. 하나님은 말씀 안하신다. 떠드는 것은 상대적 존재들이 떠들지 하나님이 허공이 무슨 소리가 있을 까닭이 없다. 니르바나를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음역이다. 음으로는 니르바나가 열반이다. 한문으로 표시하면 열반이다. 니르바나를 모신 보배로운 궁전이다. 이런 뜻을 모르니 거기에는 진신사리가 모셔져 가지고 불상이 없다고 한다. 니르바나를 모셨는데 불상이 있을 까닭이 뭐가 있는가. 진신사리가 있어서 불상이 없다고 해석을 하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다. 스리랑카에 가면 치불사가 있다. 부처님의 이를 모셔놓았다고 치불사라 한다. 그렇게 이름을 붙여야지 왜 적멸보궁이라고 하는가. 이것이 원래 불교의 본모습이다. 이것이 진짜 불교다. 머리 웋 임닐 자리로 더위로 맘에 한 웋님 머리.고기도 한 마리 두 마리 하는데 마리가 머리다. 一頭 二頭 三頭. 頭首두수 머리라는 뜻이다. 宗 마루종. 일본 丸(환)이라고 쓰고 마루로 읽는다. 우리 머리가 둥글다. 우리가 보통 마님 하는데 마루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마루다. 머리 웋. 선생님이 엎어지면 뇌진탕이나 일으켜서 죽는 머리가 무슨 머리이겠느냐. 전체 하나님이 진짜 우리 머리지 이게 무슨 머리냐. 임닐 임을 인다. 더위로 더 위로 정신적인 상승이 필요하다. 업그레이드를 해야한다. 우리가 무엇을 뫼신살이가 있으면 눌러야한다. 위로 모시고 에고의 탐진치를 제나를 눌러야한다. 탐진치가 설쳐가지고는 저 위로 올라갈 수가 없다. 예 예는 우리로서니 도라 가온 계실 꼐 예 이곳은 here. 우리로서니 우리로 서니. 이 세상을 떠나는. 도라 가온 계실 꼐 도라가야 된다. 새시대의 신앙에서 하나님은 있다라고 하니 그러지 말고 계시다로 하라고 하셨다. 계시다라는 동사를 명사화 시켜서 계. 예는 불교식으로 차안 상대세계. 계는 피안 절대세계. 상대세계는 떠나가지고 돌아가는데 어데로 돌아가는가. 계시는 존재하시는 절대세계로. 우리는 있어도 없는 것이고 하나님 절대세계를 꼐로 나타내신다. 그런데 우리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죽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여성숙 의사가 18세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늦깍기인데 서울의대 전신 경성의전을 졸업해서 의사가 되었다. 시집을 가지 않았다. 전라도 광주에서 현재의 기독병원(제중병원) 박시제중에서 8년을 근무했다. 이곳은 미국의 카딩턴 여선교사가 결핵요양원으로 결핵환자들만을 치료하는 병원으로 처음 시작했다. 소록도에서 평생 나환자를 치료할까 결핵 환자를 치료할까 많이 망설이다가 원래는 나환자를 치료하려고 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결핵이 더 나환자보다 나환자는 20살 이상만 되면 전염을 받지 않는다. 어릴 때 전염이 된다. 좋은 약을 먹고 치료를 하면 손가락만 잘려나가지 일하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실질적으로 더 무서운 것은 결핵이다. 노동력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결핵환자 치료를 8년동안 했다. 이사람이 평양에 나이 많은 처녀들을 가르치는 여학교가 있어서 거기에서 공부를 하고 원산에 가서 대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에 가서 공부를 했다. 대만 사람 주재덕이라는 교장이 있었다. 대학교수인데 초빙을 받아서 교장노릇을 했다. 그런데 교장이면서 소사노릇을 했다. 그러다 무슨 심부름을 시킨다. 그런데 허름한 옷을 입고 온갖 잡일을 하니 교장으로서 권위가 없어졌다. 몇년 지나고 나서야 그런 훌륭한 교장선생님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일을 시켜서 하면 다 했어 하면서 그것으로 끝이다. 그래서 선생님 일을 시키셨으면 수고했다고 해주셔야지요. 당신은 나를 위해서 일을 했느냐.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했으니 하나님에게 위로를 받으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처음 나병환자와 살 때는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한다. 나중에 터놓고 이야기 하게 되니 나병환자중 자살하려고 그러지 않은 사람이 없다. 나병이 처음에 드러나면 기가차고 죽고 싶다. 일곱번을 죽으려고 했는데 자살미수가 되어서 살고 있는 나환자가 있다. 나중에는 신앙적으로 의지하니 내가 나병환자가 되있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다고 그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모든 시련을 겪고서야 비로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아마 사회에서 내로라 하며 뻐기고 살았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알지를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내 병환을 주시고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지금 이병에 걸리게 된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은혜가 있을 줄 모르고 그렇게 뒹글고 몸부림처 왔는가.” 이것이 나병환자의 고백이다. 이것에 대한 여성숙 의사의 평가다. “가장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많이 아파야 하고 아깝다고 움켜쥐고 있는 것을 버려야만 참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일어나고 있었다.” 카딩턴 여의사. 선교사이면서 전도사. 이분이 어느 병실에 성경 찬송가책을 들고 들어가 전도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오늘날 교회 사람들이 전도하려고 애쓰는 것이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이 불쌍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교회 신자 많이 만들어서 수입 많이 올리려고. 이 사람은 봉사하려고 그러는데 억지로 예수 신자 만들려고 그럴 까닭이 없다. 전도사지만 찬송가책을 들고 들어가 전도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하였다. 그냥 환자의 손을 잡고는 빙그시 웃고는 시중을 들 것이 없나를 살피고는 말없이 도와줄 뿐이다. 움직이기 어려운 사람은 씻겨주고 닥아주고 옷이 더러우면 빨아다가 가만히 입혀주곤 했다. 돈있고 보호자 있는 방에는 별로 안들어가고 누가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거나 병이 중한 사람에게는 자주 들어갔다. 특히 죽음 직전의 독방에는 하루에도 여러번 들어가 옆에 같이 있어준다. 밥을 못먹는 사람이 있으면 죽이나 반찬을 가져다 먹여준다. 간호사들이 전염병실인데 기숙사의 음식을 나른다고 성가셔하면 자기의 반찬을 몰래 치마에 가지고 가서는 떠먹여준다. 임종하려는 사람앞에서는 손잡고 길을 인도하듯이 해주고 뒤처리도 깨끗이 손수 다해준다. 이분은 무엇을 위해서 한다는 의식이 없이 어머니가 자식에게 아무 의식없이 하듯이 자연스럽게 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런 것이 무위지위(노자)라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그 병원에서 사랑을 받은 사람뿐만 아니라 그 주위에 사람들이 카딩턴 전도사라고 하면 예수 안믿은 사람이 없었다. 전도를 하지 않아도 너무 감격해서 신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현필 선생이 후두결핵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은 들었는데 구체적인 것은 알지를 못했다.그런데 여성숙 이 의사가 치료를 했다. 후두결핵으로 제생병원에 입원했을 때 다석선생님이 면회가고 하는 것이 다석일지에 나온다. 이현필 선생의 제자들이 모시고 제중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 당시에는 호남일대에 꽤 유명한 분이었다. 속립성결핵에 걸렸다. 이것은 피로 결핵균이 옮겨다니기 때문에 곧 즉사하는 병이다. 병원에 왔을 때 목이 부어서 침도 못 삼킬정도이고 말도 못할 정도였다. 이 병은 혈액균이 혈관을 타고 전신에 퍼져 급성결핵이라서 얼마되지 않아 사망하는 병이다. 3개월을 치료하니 겉으로는 정상으로 돌아와서 말도 하게 되었다. 그러자 퇴원을 하려고 하였다. 겉으로는 좋아보였지만 이제 겨우 어려운 고비를 넘겼는데 아직 퇴원은 안된다고 누누이 설명을 했는데도 기어히 퇴원을 하셨다. 걱정이 되어서 간호사를 보냈다. 상황을 보니 약은 다 쌓아놓고 먹지를 않는다. 그래서 여의사가 주사기에 약을 넣고 쫒아가서 사정을 해도 하는 말씀이 한국에 있는 모든 결핵환자들이 그 약을 먹을 수 있는 것 같으면 내가 그 약을 먹겠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약을 먹지 않겠다. 그래서 화가 나서 그러면 선생님 마음대로 하시라고 하고 돌아와버렸다. 광주에서 벽제에 오셔서 3달뒤에 돌아가셨다.벽제에 무덤이 애기죽음 무덤마냥 조그맣게 되어있다. 약을 먹지 않고 치료도 받지않고 돌아가셨다. 그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치료하고 싶어도 못하는 한국의 많은 결핵환자와 함께 고통을 겪으며 죽음까지도 같이 짊어져보고자 하는 그 따뜻한 이웃사랑을 엿볼 수는 있다. 그러나 좀더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내가 완쾌 되어서 이 고통받는 사람들중에서 몇사람이라도 더 치료받도록 주선하는 일을 위해 가는 것이 많은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 되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할 힘을 넉넉히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사람은 전부 자기 판단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기에 내 판단데로 그를 나무랄 수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긴말을 접어두기로 한다. 그렇게 하여 성자가 되었는지 소극적인 사람이 되었는지 평가할 수는 없지만 하여간 그분은 자기 뜻대로 살다간 사람이기에 나의 주관을 겻들인 평가는 삼가야겠다. 이 여의사는 병이 나아서 많은 환자를 도와주면 좋지 왜 그렇게 소극적으로 저렇게 죽었느냐 약간 못마땅한 투로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해서 성자소리 듣는 것 보다는 살아서 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니 그때 굉장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예수 소리 들었다고 한다. 의사로서는 당연히 못마땅한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 아닌가. 의사말은 듣지 않고 약은 똘똘 뭉쳐서 안먹고 치료 받지 않고 그냥 죽어버렸으니. 이현필 선생이 후두결핵으로 죽은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치료를 거부하고 죽은지는 몰랐다. 어떤 사람이 이순신 장군이 죽은 것은 자살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적탄이 오는데 일부러 몸을 던져 죽어버렸다. 그 이유는 한국의 정치현황이 매일 싸우는 것이 보기 싫으니 이제는 일본은 어느정도 물러가게 되었으니 나는 죽어도 괜찮을 듯 싶어서 전사하는 것이 제일 영광된 것이다 싶어 죽었다고 어떤 사람이 추리소설을 쓴 것이지 우리가 이순신 장군의 속마음을 알 수가 있는가. 소크라테스도 얼마든지 도망시킬려고 옥의 간수까지도 다 매수를 해놓았는데 도망만 가면 되는데 도망을 가지 않고 죽는다. 예수님도 얼마든지 전에처럼 피해가면 안죽는데도 그냥 죽는다. 간디도 자기 집에 폭탄이 떨어지고 자기를 죽이려는 것 다 알고도 내루가 보디가드를 파견하려고 하는 것도 반대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 것이다. 그런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정도는 되어야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냥 더 살겠다고 태국의 뱀 한국사람들이 다 가지고 온다. 그렇게 해서 살아서 또 뭐하는가. 몇십년 더 살고 안살고는 오십보 백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래서 성자소리를 듣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다석선생님도 죽을 때쯤 되었으면 죽을 생각을 해야지 그냥 자식들 괴롭히면서 약사오느라 입원시켜라 고래고래 고함지르고 왜 그러느냐. 죽을 때는 죽어야지. 우리가 이렇게 태연자약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는 사람 마음이 늘 부유하고 소유욕을 완전히 버린 사람 그 사람만이 육신을 짐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해 지는가. 몸도 내가 소유하는 재물가운데 하나다. 몸이 내일이 아니라 오늘 죽는다해도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부려야한다. 우리가 만일 그런 자세를 갖추게 된다면 더 이상 몸을 부담스러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간디)
몸을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난 다음에는 할 일 다하고는 마음놓고 죽자. 우리가 일꾼을 부리자면 먹이고 옷입히고 하는 것과 같이 몸을 성하게 하고 건강하게 해서 처자를 부양하든 글을 쓰든 그것은 기본이다. 그렇다고 요즘 사람들 몸에 좋다고 하는 것은 다 잡아먹는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된다. 부려먹듯 해야한다. 요즘 좀 힘드는 일만 하면 돈내놓으라고 한다. 돈 안주면 꼼짝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면 안된다. 결핵에 걸리면 대번 다리에 힘이 없어진다. 송기* 교수가 연세대 4학년 다닐 때 결핵에 걸려서 제중병원에 입원을 해서 여선생의 치료를 받았고 3년을 앓았다. 자기는 걸어다닐 힘이 없는데 사람이 걸어다니는 것이 기적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다시 걸음마를 배워서 걷게 되었다. 이 회고록을 쓴 것이 안병무박사의 권유로 쓰게 되었고 나중에 쓴 후에 안병무박사의 영전에 이책을 바친다. 살아계실 때 이책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아쉽다. 제중병원을 그만두고 목포에 한산촌 결핵요양원을 개원한다. 안병무박사가 양평에 여자수도원 디아코니아를 만들려고 했는데 정부의 방해로 목포 한산촌으로 옮겨왔다. 디아코니아는 예수님이 섬김을 받지말고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라. 수녀들 끼리는 호칭을 언님이라고 한다. 다석선생님이 어질 인을 언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다석선생님의 영향이다. 다석선생님이 함선생님 모임에 찬조로 강연을 하는데 다석선생님이 먼저 하셨다. 안병무박사가 함선생을 따라다니면서 다석선생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다. 독일에 유학을 가기전에도 한두달 다석선생님에게 공부를 하고 갔다. 안병무 박사가 독일에 있을 때 중앙신학의 홍명*이라는 사람이 나도 독일에 유학을 하도록 주선을 해달라고 하니 한국에 진짜 선생이 다 계신데 뭐하러 독일에 유학오려고 하느냐. 그 편지를 보았다. 다석선생님이 편지를 하실 때 호칭을 누구 언께 이렇게 보내신다. 이 여의사는 언이라는 호칭이 다석선생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모른다. 그냥 안병무 박사가 언으로 했기 때문에 우리는 호칭을 그렇게 쓴다. 나중에 송기*교수가 안병무 박사가 해온 한국신학연구소 소장을 했다. 결혼을 하지 않고 결핵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살았다. 대단한 여성인데 하나님의 대한 신앙을 더 언급을 했으면 좋았는데 밑에 깔려는 있는데 신학자가 아니니 그렇지만 그런데에 대한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여성숙 회고록) 희망의 주머니를 별에다 걸었다.제목. 그 사람의 정신적 성숙도를 알려면 보통은 죽음을 무서워하는데 무서움이 없어지고 죽음에 친근감을 느낄수 있고 기쁨을 느낄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하고 죽음이 무섭든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고 오히려 그것이 기쁨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친근감을 느끼며 그렇게 변화되는 그것을 가지고 자기자신의 정신적인 성숙도라든지...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 죽는다고 하면 겁을 절절매고 아이고 나살려 그렇게 된다고 하면 그것은 신앙생활 잘못한 것이다. 죽음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고 우리가 죽은 다음의 일은 잘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선물받을 때 내용을 알고 받는 것보다 내용을 모르고 받는 것이 더 기쁘듯이 죽은 다음의 일은 우리가 잘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더 큰 기쁨을 주시려고 어쨋든 개체에서 개체란 갇혀있는 것인데 전체로 하나님의 본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그거야 말로 진짜 자유가 아닌가. 몸뚱이가 없으면 시간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한 5년 감옥생활을 하면 바깥을 잊어버린다고 한다. 감옥소에서 나가라고 하면 오히려 더 겁이 난다고 한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이세상에 상대세계에 너무 붙잡혀 있으니 하늘나라 가는 것을 겁을 내는것 같다. 그러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