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조선일보 문자보급운동 시작
← 조선일보사가 1929년부터 시작했던 ‘문자보급운동’ 교재. 조선일보가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표어를 내걸고 1929년 7월 14일부터 전국 규모의 '귀향남녀학생 문자보급운동'을 시작했다. 문자보급운동은 일제시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벌인 지속적이고도 조직적인 전국 규모의 문맹퇴치와 민중계몽운동이었다. 조선인구의 90%에 달하는 문맹을 타파하고 한글을 보급해 민족정신을 선양하려는 실천적인 항일운동이었다. 문자보급운동은 학생들이 방학기간중에 하므로 특별한 경비가 소요되지 않고 신문사에서 제공하는 교재를 사용해 자기 집이나 헛간 등 장소에 구애받지 않아 다른 방법에 비해 효율성이 큰 사업이었다. 첫 해에는 귀향 학생 409명이 참가해 2,849명이 한글을 깨칠 수 있었고 두번째 해인 1930년에는 900여명의 학생이 참여해 1만여명이 문자를 해독하는 성과를 거뒀다. 조선일보는 16쪽의 ‘한글원본’을 배포해 문자해독을 도왔다. 1931년과 1934년에는 참여학생수가 각각 1,800여명과 5,078명으로 증가했다. 1935년과 1936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중지령으로 문자보급교재만 각각 10만부, 50만부를 배포해 문자보급운동을 유지시켰다.
[1993년] 가야금병창 인간문화재 박귀희 여사 별세
←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 박귀희 여사. 인간문화재 23호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인 박귀희 여사(72)가 1993년 7월 14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1921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박 여사는 보통학교 시절부터 국악 가락만 나오면 가던 걸음을 멈출 정도로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소녀였다. 결국 박 여사는 보통학교 졸업 후 "국악을 하면 기생이 된다"는 아버지의 만류도 뿌리치고 당시 명창 이화중선이 이끄는 대동가극단에 들어갔다. 16세 때에는 서편제 소리의 박동실 선생, 동편제 소리의 류성준 선생 등 기라성 같은 스승의 문하에서 판소리 다섯마당을 익혔고, 강태홍 오태석 두 선생으로부터 가야금도 배웠다. 남다른 정진으로 그는 19세쯤부터는 국악계의 스타로 발돋움했다. 처음엔 가야금 병창보다는 판소리로 이름을 날렸다. 한양창극단에 들어간 이래 20여년 간 판소리에서 1급의 자리를 지켰고 뒤늦게 그의 숨은 가야금 솜씨도 인정받아 1969년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소리와 가야금에 평생을 바친 국악계의 거목 박귀희 여사는 60여년의 국악인생을 통해 가야금병창의 맥을 이으며 우리소리와 가락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일깨워주었다.
[1924년] 암태도소작쟁의 관련자 석방 1924년 7월 14일 암태도소작쟁의에 대한 전국적인 지원과 지지가 잇따르자, 일제는 쟁의 확산을 막기 위해 관련 구속자 26명을 석방하고 간부 13명도 1주일 내에 석방할 것을 약속해 사실상 소작인측의 승리로 끝났다. 암태도소작쟁의는 1923년 암태도에 약 140정보의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 문재철이 일제의 저미가정책으로 수입이 감소하자 집조제(執租制)에 의해 7~8할의 고율소작료를 징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소작농들은 서태석의 주도로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하고 소작료를 4할로 내릴 것 등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추수를 거부하고 불납동맹을 결성했다. 1924년 들어 쟁의사실과 일제의 탄압이 <동아일보>를 통해 알려지면서 조선노농총동맹이 서울에서 연설회를 개최하는 등 사태가 확산되었다. 이에 일제는 문제를 무마시키기 위해 관련자를 석방하고 8월 30일 소작료 조정 약정서를 교환했다. 암태도소작쟁의는 소작인들의 강한 단결과 전국적인 지원, 항일운동으로의 발전 등 소작쟁의의 모범으로 1920년대 중반 이후 서해안 섬지방의 농민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 함락 1789년 7월 14일 아침 7명의 죄수만이 투옥되어 있던 바스티유 감옥에 파리 군중들이 몰려와 감옥 소장이었던 로네 후작 베르나르 조르당에게 보관되어 있는 무기와 탄약을 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로네가 피신하자 군중들은 분노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했다. 바스티유를 국사범 감옥으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리슐리외 추기경이었다. 루이 14세 치하에서는 사법부의 구금장소가 되어 검찰총장의 권한으로 죄수를 억류할 수 있었다. 이런 역사 때문에 이 사건은 앙시앵 레짐(舊體制)의 종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이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의 시초가 되었다. 혁명정부가 바스티유를 철거한 이후 프랑스 정부는 1880년부터 매년 7월 14일을 국경일인 '바스티유 기념일'로 지정해 "7월 14일이여, 영원히!"와 "바스티유 감옥을 철거하라!" 같은 구호와 함께 행진·연설·불꽃놀이 등의 축하행사를 벌이고 있다.
[1918년] 스웨덴의 시나리오 작가 베리만 (Ernst) Ingmar Bergman 출생 "다른 어떤 예술 형식도 영화만큼 일상의 의식을 넘어서서 우리의 감정에 직접 작용하거나 영혼 내면에 깊이 이르지는 못한다." - 베리만
베리만은 스웨덴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이다. 웁살라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스톡홀름대학교에서 미술·역사·문학을 공부했다. 일찍부터 연극에 관심을 갖고 각본을 쓰고 연기 및 연출 활동을 했다. 1944년 스벤스크필름인두스트리의 사장 칼 안데르스 뒴림의 의뢰로 집필한 각본 <고통 Hets>이 스웨덴의 유명감독 알프 시외베리가 영화화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자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으로서 본격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가벼운 희극에서부터 심오한 형이상학적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화들을 만들었다. 특히 인간과 신의 관계를 다룬 <제7의 봉인 Det sjunde inseglet>(1956), 노년에 대한 명상과 함께 인간 심리를 깊이 천착한 <산딸기 Smultronstalet>(1957) 등으로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3부작 <유리를 통하여 어렴풋이 Sasom i en spegel>(1961)·<겨울빛 Nattsvardsgasterna>(1962)·<침묵 Tystnaden>(1963)은 신의 존재, 신앙 상실, 사랑의 가능성, 대화 단절 등 심오한 주제들을 탐구한 역작들이다. 그는 작가·감독·제작자로서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표현했으며, 총체적 영화제작자 개념을 최초로 정립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1908년] 시인, 교육자 유치환[柳致環] 출생
1908. 7. 14 경남 충무~1967. 2. 13 부산. 시의 기교나 표현에 집착하지 않고 생에 대한 의지를 진지하게 추구했다. 본관은 진주. 호는 청마(靑馬).
생애와 활동 아버지 준수(焌秀)의 8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극작가 치진(致眞)은 그의 형이다. 1922년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 중학[豊山中學]에 입학했다. 이때 형이 펴낸 동인지 〈토성〉에 시를 발표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한의원을 경영하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1926년 귀국,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해 졸업했다. 이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1학년 때 중퇴했으며, 사진관을 경영하는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1937년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된 뒤 교육계에 종사했다. 1937년 문예동인지 〈생리 生理〉를 주재했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펴냈다. 1940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옌서우 현[煙首縣]에 가서 농장관리인으로 일하다가 8·15해방 직전에 귀국하여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 일원으로 참여했다. 해방 직후 생명에의 열애를 노래한 점에서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 불렸다. 1954년 경상남도 안의중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어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을 비롯해 경주고등학교·경주여자중학교·대구여자고등학교·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1967년 교통사고로 죽었으며 묘지는 부산광역시 서구 하단동에 있고, 경주 불국사, 부산 에덴 공원, 통영 남망공원 등에 시비가 세워졌다.
문학세계 1931년 〈문예월간〉 12월호에 〈정적 靜寂〉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이후 35년 동안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펴냈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허무와 애수이며, 이 허무와 애수는 단순히 감상적이지 않고 이념과 의지를 내포한다. 특히 대표시 〈깃발〉(조선문단, 1936. 1)은 연민과 애수를 통해 존재론적 차원의 허무를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깃발'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의 상징이다. 또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되는 〈행복〉에서는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절망의 애수를 보여주었고, 이러한 시세계는 첫 시집 〈청마시초〉(1939)와 제2시집 〈생명의 서〉(1947)에 잘 나타나 있다. 〈청마시초〉에 나타난 허무는 정신편력과 더불어 다양하게 변모하는데 이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출발한다. 여기서의 죽음의 의미는 2가지로 나뉜다. 첫째, 일제 말기의 극한상황과 결부되어 자학적 분노와 생명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이는 결국 종교적 자아로 승화되고, 둘째, 인간의 숙명인 죽음이 역설적으로 인간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수로 나타난다. 이는 제6시집 〈보병과 더불어〉(1951)에 실린 종군시(從軍詩)들에 이어져 전장에서 애수에 젖기도 한다. 한편 제2시집 〈생명의 서〉에 실린 시는 만주에서 쓴 것이 대부분이며, 여기에 실린 〈생명의 서〉와 〈일월〉에서는 허무와 고독을 극복한 강인하고 웅건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후에 대표시 〈바위〉로 이어져 순수한 본질적 자아로 복귀하려는 의지로 나타났다. 그는 후기에 와서 허무에 회의를 느껴 이를 극복한 다른 시세계를 보여주려 했으나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이루지 못했다. 시인 스스로 "윤리를 갖지 않은 글, 윤리의 정신에서 생산되지 않은 문학은 무엇보다 첫째 그것을 읽어 줄 독자가 없을 것"이라 했듯이 현대시사에서 보기 드문 도덕적인 시인으로 평가된다. 시집으로는 〈울릉도〉(1947)·〈예루살렘의 닭〉(1953)·〈청마시집〉(1954)·〈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미류나무와 남풍〉(1964) 등이 있다. 1950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58년 자유문학상, 196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과 부산시 문화상 등을 받았다.
[1958년] 이라크 군사 쿠데타 1958년 7월 14일 아침 이라크에서 청년장교단에 의한 군사쿠데타가 발발했다. 국왕 파이잘 2세와 황태자 부처, 사이드 수상 등이 살해됐고, 카셈 준장을 수상으로 하는 이라크공화국이 수립됐다. 쿠데타는 아랍민족주의에 공조, 요르단과 레바논에 군병력을 지원하는 왕정에 반대한데서 시작됐다. 군부는 요르단과 레바논의 내부반란 진압을 지원했던 파이잘 왕에 반대해 왔었다. 군부는 즉각 이집트 나세르 장군의 반서방, 범아랍 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유럽에 병력 수송기를 파견했고 영국의 맥밀란 수상은 군 일부에 경계령을 내렸다. 레바논 대통령 키밀 샤마운은 즉각 서방 강대국에 자국과 이라크와의 국경폐쇄를 요청했고 요르단의 후세인 왕도 도움을 요청했다. 이라크의 군사 쿠데타는 중동에 새로운 긴장상태를 낳았고, 미국과 소련을 새로운 대결양상으로 몰고 갔다.
[1933년] 독일에서 ‘신(新)정당 수립 금지법’ 성립(나치스가 유일 합법 정당이 됨)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마침내 합법적인 총리로 임명되어 독일 제3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독일의 관료층 ·군부층 ·경영진 ·압력단체 등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나치스의 정권획득은 기정사실이 된 것을 의미하였다. 국내 각 방면 유력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은 히틀러는 보다 강력하게 경제적 ·정치적 시책을 감행하여 나갔다. 1933년 초 600만 명을 넘었던 실업자들을 군수산업과 토목사업에 거의 흡수시켰으며, 농업면에서는 세습농장법을 제정하여 대농과 중농을 보호하였고, 또한 식량의 자급자족화를 도모하였다. 공업면에서는 인조석유 ·인조고무를 비롯하여 대용품 생산에 힘을 기울였으며, 종래의 노동조합을 폐지시키고 노동자를 자본가 ·기술자 등과 함께 새로 조직된 독일노동전선에 가입하게 하였다. 정치면에서는 1당독재를 실시하였으며, 나치스친위대(SS)를 강화하고, 비밀경찰로 하여금 정보를 위한 기관으로서 전국민을 감시하게 하였다. 또한 유대인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를 강제수용소에 수용시켜 혹독한 학대와 살육을 자행하였다. 교회 ·군대 ·학교 등도 나치스식으로 획일화시키고 일반 국민도 나치스 신봉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반(反)나치스 저항운동은 1936년이 되자 거의 그 자취를 감추었다.
[1933년] 독일정부 ‘단종법(斷種法)’ 공포 1929년 이후 대공황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독일정부가 1933년 7월 14일 일명 유태인 말살 정책인 '단종법(斷種法)'을 공포했다. 정식명칭이 '유전질환자 자손 방지를 위한 법률'인 이 단종법은 '신체ㆍ정신상의 악질 유전'이 예상되는 병을 정해, 이 병에 감염된 당사자가 신청하면 우생(優生ㆍ인종개량)재판소가 단종수술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신청을 당사자 이외의 사람 즉, 해당자를 수용하고 있는 병원이나 형무소 감독관 등도 제출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이 단종법은 히틀러가 모든 인류의 악이라고 비난한 유태인에게 제일 먼저 적용됐다. 나치스는 유태인을 '극히 위험스런 외부의 적'으로 조작함으로써 독일인의 통일성을 강화하는 한편, 유태인을 무력ㆍ무능력한 자로 규정해 이들을 추방하거나 공장과 수용소에 보내 강제 노동에 종사케 했다. 이유인 즉 그들의 재산과 직업을 독일인이 차지하게 될 수 있다는 이익 계산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이 단종법 시행 후, 1년간에 걸쳐 독일에 제출된 단종신청은 남녀 약 반반씩 8만4525건이었고 이 가운데 5만6244건이 단종명령을 받았다. 일본에서도 1940년 3월 나치스의 단종법을 모방한 '국민우생법'을 만들지만, 실질적으로 제 기능을 수행하지는 못했다.
[1887년] 자멘호프(Zamenhof, Lazarus Ludwig), 에스페란토 창안
폴란드 비아위스토크 출생. 모스크바대학 의학부에 입학, 후에 바르샤바대학으로 옮겨 1885년 졸업하였다. 비아위스토크는 당시 러시아령의 신흥 방직업 도시로서 폴란드 ·독일 ·유대 ·러시아의 네 민족이 섞여 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들이 서로 반목 속에 살아가는 것을 보고 마음아프게 여겼으며 이민족간의 불화의 주된 원인이 언어의 다양성으로 말미암은 상호 이해의 결핍에서 유래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의 해결책으로서 중립적인 국제어 창조에 뜻을 두어 1878년 고교 재학시절 ‘보편어’를 완성하였다. 그 후 ‘보편어’ 개량을 거듭하여 마침내 1887년 7월 (14일) ‘국제어’라고 이름 지은 에스페란토를 발표하였다. 이 때 그가 사용한 필명 ‘에스페란토(희망자라는 뜻)’가 그 후에 이 언어의 명칭이 되었으며, 그는 평생을 이 언어보급에 헌신하였다. 학습서 ·사전 등의 저작 외에도 《구약성서》, 안데르센의 《동화》 전부와, 실러의 《군도(群盜)》 이외의 많은 작품을 에스페란토로 번역하였다. 또한 국제어 창조의 동기가 된 인류애적 사상을 간추려 ‘호마라니스모(인류인주의의 뜻)’라고 이름 붙여 보급하였다.
[1907년] 이준 열사 憤死
← 이준의 묘 1859.12.18~1907.7.14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가, 일제의 조선 침탈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서울을 출발한 것은 1907년 4월 22일이었다. 이상설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위종이 페테르부르크에서 합류해 6월 25일 목적지에 도착한 세 사람은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며 대회 참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패한 의장국 러시아는 면담조차 꺼렸고, 영·일동맹의 두 당사자인 일본과 영국은 훼방을 놓았다. 사무국이 조선 정부에 신임장을 조회하는 전보를 보냈지만 조선의 통신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 통감부가 이에 응할 리 없었다. 세 특사는 할 수 없이 각국 대표에게 호소문을 보내고 신문을 통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려 했다. 하지만 열강 대표들이 여전히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이준 열사는 통분을 참지 못하고 분사(憤死)한다. 7월 14일이었다. 자결설·병사설·단식순절설 등 사인(死因)을 놓고 여러 설이 난무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헤이그 밀사를 빌미로 5일 뒤에 고종을 강제퇴위시킨 일제는 분이 안 풀렸는지 궐석재판으로 세상을 떠난 이준 열사에게 종신징역을 선고했다. 헤이그에 묻혔던 시신은 1963년에 서울 수유리에 안장됐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며, 위대한 인물은 반드시 조국을 위하여 조국의 생명과 피가 되어야 한다." - 이준 열사 어록
[1817년] 프랑스의 소설가 스탈(Staël, Germaine de, 1766.4.22 ~1817) 사망 별칭은 Madame de Sta l. 파리 출생. 루이 16세 때의 재정가 ·정치가인 J.네케르의 딸로서, 주불 스웨덴 대사인 스탈 남작과 결혼하였다. 소녀 시절에 어머니의 살롱에 모이는 계몽사상가들과의 교유에서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 ·민주주의의 사상을 품고 프랑스 혁명 시대에 입헌 군주주의를 신봉하여, 여러 번 국외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근대 입헌사상의 획기적 저서인 《입헌 정치론》으로 유명한 B.콩스탕과 친하게 지냈고, 자유사상을 탄압한 나폴레옹과의 불화로 1803년 국외로 추방되어, 독일 ·이탈리아를 거쳐, 장기간 스위스의 코메에 체재하면서 그 곳에서 작품을 썼다. 소설은 《델핀 Delphine》(1802) 《코린 Corinne》(1805)이 있고, 논문은 《사회제도와의 관계에서 고찰한 문학론 De la Litt rature consid e dans ses rapports avec les institutions sociales》(1800) 《독일론 De l’Allemagne》(1810)이 있다. 그녀는 예술적 감성보다도 해박한 비판적 지성을 지니고 있어, 그 문학론은 사회환경과 문학의 관계에 착안하여, 19세기의 H.A.텐 등의 실증적 비평의 선구가 되었으며, 《독일론》은 북방문학으로서의 독일문학을 발견하고 초국가적인 유럽 문학을 제창하였는데, 이것은 비평사상 주목할 만한 의의를 가진다. 이 책에서 낭만주의적인 게르만 문화를 소개하여, 프랑스 낭만주의의 성장에 기여하였다.
[1858년] 영국의 여성운동가 팽크허스트(Pankhurst, Emmeline) 출생
1858. 7.14 ~ 1928. 6.14 결혼 전 성은 Goulden. 잉글랜드 맨체스터 출생. 부유한 캘리코 날염업자 집안에 태어나, 파리에서 교육을 받았다. 1879년 에멀린 굴든은 법률가이자 존 스튜어트 밀의 친구이며, 영국 최초의 여성참정권 법안(1860년대말) 및 1870, 1882년 2차례에 걸쳐 기혼여성 재산법안을 기안했던 리처드 마스덴 팽크허스트와 결혼했다. 10년 후 그녀는 여성참정권연맹을 창설하고, 1894년 지방 공직자 선거에서 기혼여성의 참정권을 확보했으며, 1895년부터 맨체스터 시의 공직을 맡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1903년 그녀가 맨체스터에 설립한 여성사회정치연맹(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WSPU)에 점점 더 힘을 기울였다. 이 연맹이 처음으로 세인의 관심을 끈 것은 1905년 10월 13일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와 애니 케니가 여성참정권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 위해 자유당 회합을 무산시켰을 때였다. 당시 그들은 폭력을 휘두르는 경찰에게 체포되어 벌금형을 거부하고 대신 옥살이를 했다. 1906년부터 그녀는 런던에서 WSPU의 활동을 지휘했다. 자유당 정부를 여성참정권 운동의 주요장애물로 간주한 그녀는 선거 때 자유당 후보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으며, 그녀의 동료들은 내각 각료들의 회합을 방해했다. 1908~09년 그녀는 3차례에 걸쳐 투옥되었는데, 그중 1번은 사람들에게 하원 점거를 호소하는 인쇄물 사건과 관련된 것이었다. 1910년에 그녀가 선언한 '휴전'은 정부가 여성참정권 조정안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자 곧 파기되었다. 1912년 7월 WSPU는 극단적인 호전적 노선으로 운동을 전환했는데, 주로 방화(防火)를 저항의 수단으로 삼았다. 이는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검거를 피해서 파리에 가 있던 크리스타벨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으며, 팽크허스트 자신은 투옥된 상태였다. 그녀는 단식투쟁을 하는 죄수들을 일시 석방하여 일정 수준까지 건강을 회복하도록 할 수 있다는 1913년의 죄수법(단식죄수가출옥법)에 따라 석방 및 체포를 1년에 12차례나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녀가 복역한 기간은 총 30여 일 정도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녀와 크리스타벨은 참정권 운동을 중지했고, 정부는 참정권 운동 관련 죄수를 전원 석방했다. 이전에 여성참정권 강의를 위해 3차례 미국을 여행했던 그녀는 전쟁기간중 여성의 전시산업체 동원을 촉진시키기 위해 미국·캐나다·러시아를 방문했으며, 전후에는 몇 년 동안 미국·캐나다·버뮤다 등지에서 살았다. 1926년 영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런던 동부 선거구의 보수당 후보로 공천을 받았으나 건강이 쇠약해져 의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투표권을 인정한 1928년의 인민대표법이 그녀가 죽기 수주일 전에 통과되었다. 이 법은 1928년에 이르러 남자와 동일하게 21세 이상으로 개정되었는데, 웨스트민스터의 영국의회 의사당 옆에는 개정법의 시행을 한 달 앞두고 죽은 그녀의 동상이 건립되었다.1914년에 팽크허스트의 자서전 〈나의 이야기 My Own Story〉가 출간되었으며, 그녀의 둘째 딸인 E. 실비아 팽크허스트가 지은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생애 The Life of Emmeline Pankhurst〉가 1935년에 출판되었다.
그 밖에 2004년 국정원, 국가기관 10곳 해킹피해 발표, ‘국가 안보 위협사건’으로 규정. 2003년 중국, 북한 신의주 특구 초대 행정장관 양빈에 사기 등의 혐의로 징역 18년 선고 2002년 체세포 돼지복제(複製) 국내 첫 성공 2001년 동아일보 김병관 명예회장 부인 안경희씨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 2001년 미국 국가 미사일방어체계(MD) 실험 성공 2000년 수학여행버스 경부고속도로에서 연쇄추돌해 고교생 등 18명 사망 1998년 맥도널드 햄버거의 공동 창업자 딕 맥도널드 사망 1998년 조치훈 본인방 10연패 달성 1997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신유고연방 대통령에 선임 1994년 박보희 세계일보 사장, 김일성 조문위해 평양 도착 1993년 제2차 북한-미국 고위급회담 1990년 민자당, 방송관계법-국군조직법 개정안-광주보상법 등 26개 안건 기습통과 1989년 헌법재판소, 감호조치 위헌 결정 1987년 제4차 남북체육회담 개막(스위스 로잔) 1987년 김정렬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83년 미국 B1기 48대 생산 1981년 한국 여자농구, 최초로 존스컵국제여자농구대회서 우승 1979년 그리스 바티칸 수교 1977년 일본, 최초의 기상위성 히마와리(GMS) 발사 1965년 국회, 한일협정 비준동의안 발의로 여야간에 격돌 난투 1965년 미국 마리너4호 최초로 화성 근접촬영에 성공 1959년 스위스의 광대 그로크 사망 1953년 미국-영국-프랑스 외상회의, 한국휴전후 중국 재침시 공동제재 합의 1950년 유엔사무총장 각국에 한국전 파병을 요청 1949년 볼리비아, 대한민국을 정식 승인 1949년 미국상원, 대한군사원조안 가결 1935년 모스크바에서 사회-공산-급진사회당의 80만 반파쇼 데모 1921년 사코-반제티 억울한 강도살인 범인으로 몰려 유죄판결 1918년 세계최초 실시간 디지털 컴퓨터인 훨랜드 컴퓨터 개발한 포레스터 출생 1910년 만화영화 ‘톰과 제리’ 제작자 윌리엄 해너 출생 1907년 아닐린 염료를 발견한 영국의 화학자 퍼킨 사망 1900년 제2회 파리올림픽 개막 1889년 제2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 창립 1888년 박문국 폐쇄. 한성주보 폐간 1826년 미국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