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예술진흥원 마로니에미술관 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0번지 Tel. 02_760_4605 www.kcaf.or.kr
광복 60주년이 되는 올해는 매우 뜻 깊은 해입니다. 사단법인 민족사진가협회(회장 김영수)와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마로니에미술관에서는 광복 60주년의 의미를 살리고자 ‘시대와 사람들’ 이라는 사진전을 공동으로 개최합니다. ● 어떤 행사를 기념하고 싶을 때, 혹은 어느 중요한 한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을 때 우리는 사진을 찍습니다. 그렇게 시간의 무게에 따라 쌓여진 사진들은 개인이나 가족 더 나아가 민족의 삶의 기록이 되고 역사가 됩니다… ● ‘시대와 사람들’ 전은 지난 60년 간의 민중 모습을 통한 민족의 역사를 사진으로 반추함으로서 영상과 이미지 그리고 외래문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에게 우리나라 근현대의 삶과 문화 및 시대상황과 역사적인 사건을 사진으로 체험하게 하고 그런 과거의 이해를 통해 좀 더 희망적이고 도전적인 미래를 펼치게 하고자 하는 바램과 또 사진에 수록된 동시대를 살아온 분들께는 과거를 추억하게 하면서 그동안 잊고 지내거나 사라진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과 풍속을 후세에게 찾아주는 길잡이 역할을 부탁드려 보고자 기획되었습니다.
미국립문서보존소 사본_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아베 조선총독_1945 ●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미군정 치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진가가 찍은 사진이 없어 미국립문서보존소에 보전되어 있는 사진을 copy하여 사용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문서보존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개방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고 또 그곳에 보존되어 있는 필름과 사진들이 어떤 상태인지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1970년 후반에서 1980년 중반까지의 사진자료는 당시의 시대상황이 국산의 칼라 네가티브 필름을 사용하게 하였다고 하는데, 이 필름은 영구보전성이 약해 더 늦기 전에 시급히 복원해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귀중한 자료가 소실되면 역사적 근거도 사라지게 됩니다. 관심이 필요합니다.
전시되는 사진의 주인공은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 자신입니다. 기억 속에 희미해져 가는 역사적 사건과 사고, 그리고 지난 삶의 일상과 시대상의 변모, 이제는 너무도 달라진 과거의 풍속과 환경 등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와 함께 사진 하나 하나가 훌륭한 예술작품이 되는 미학적인 가치도 알리고자 합니다. 개별 작가들의 주제 선택의 관점과 사진적 역량, 시대별로 차이를 보이는 사회적인 발언들, 근대에서 현대로 이르는 동안 변화되는 사진의 다양한 방식들 등을 접하면서 사진예술을 보다 폭넓게 접하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 한편 광복 60년의 세월은 선후배의 관계로 이어지던 한국사진의 맥을 부자(父子) 혹은 사제(師弟)의 관계로 확대시키면서 금번 전시에 개별 작가로 함께 참여하는 역사도 만들었습니다. 이 모두가 그 자체로 한국 사진의 흐름이고, 역사가 될 것입니다. ● 한편 과거 전쟁을 겪으면서 혹은 필름 보존과 관리에 익숙하지 못해 분실 또는 소실되어 책으로만 간헐적으로 만나던 작품 몇몇은 복원을 통해 또 소재가 파악되어 실제 사진으로 접할 수 있으며, 미발표되었던 과거의 사진도 만날 수 있습니다. ● 이 전시가 우리나라의 과거를 알고 현재를 점검하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한국인이 주인공이 되어 60년 동안 사진으로 쓴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이 거대한 사진첩을 모두와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 한국민족사진가협회
김한용_청계천_1947~48년 무렵 ● 서울 도심을 흐르던 청계천의 일상 모습입니다.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모습 저 멀리, 왼쪽 상단에 보이는 삐죽한 지붕을 한 건물은 시청입니다.
광복 60년 - 일상적 삶에 있어서의 자유와 평등 ● 1945년 우리식 나이로 열 살이었던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는 지금 일흔이다. 광복 60년을 되돌아보는 나이로는 안성맞춤인 셈 인데 나 개인의 사람 됨됨이와는 전혀 무관한 우연의 조건이다. 연령별 인구 통계를 들쳐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남북을 아우른 동갑(丙子, 1936년 生)은 수십만에 이를 터이니 말이다.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제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낀 사람만이 특별한 발언권이라면 발언권을 지니는 경우다. 여기서 ‘피부로 느낀다’는 표현은 추상적인 뜻이 아니라 살갗에 와 닿는 견디기 힘든 아픔이나 살갗을 뚫고 들어와 뼈를 저리게 하는 매서운 추위와 같은 구체적인 감각 경험을 가리킨다.
임범택_상경_1956 ● 서울역 앞입니다. 6. 25 전쟁은 역사에 나오는 전쟁 가운데서 몇 안 되는 참혹한 전쟁입니다. 일제에 의하여 36년간 압제와 수탈에 시달린 2천5백만의 한민족은 이 전쟁으로 인하여 2백만 이상이 목숨을 잃었거나 다쳤고 주거와 생산시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전쟁 중의 굶주림은 차지하고라도 휴전(1953년) 이후에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영양실조에 허덕일 정도로 생활고가 극심했습니다. 살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는 사람도 넘쳐났습니다. 아버지는 밥상까지 등에 메고 또 아이들은 서로를 혹시라도 잃어버릴까봐 손을 꼭 잡고 서울로 상경하는 이 가족의 막내아들은 지금 몇 살일까요?
하지만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자 미군이 서울에 진입하는 모습과 같은 ‘역사적 순간’을 자기의 시야에 담을 수 있었던 사람은 아주 제한된 수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선택된 소수자에 속한다 하더라도 역사적 순간의 현장을 자신의 노력으로 보존하거나 증언하지 않으면 일흔 살 혹은 그보다 더 나이 든 노인이라 하여 특별한 발언권을 행사할 위치에 있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의미 있는 현장을 기록으로 보존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성의를 다하여 증언하는 것은 매우 값진 행동이다. 시대의 생생한 모습을 기록하는 일은 직업적으로는 기자(사진기자를 포함하는 것은 물론이다)의 책무라 하겠으나 평범한 시민의 입장에서도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누구나 그 책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공동체적 윤리의 기본이다. ● 광복 60년을 기념하는 사진 축제에 걸린 「시대와 사람들」의 사진들은 물질적 반대 급부 없이 시민적 책무를 다한 귀중한 기록들이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즉석에서 누구에게나 전송하는 21세기의 오늘과는 달리 오륙십년 전에 사진 찍기는 적지 않은 비용과 전문적 식견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혹은 도락으로 혹은 취미로 손을 댔다하더라도 사진은 작가의 주관적 동기와는 무관하게 생산된 기록으로 남아 객관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특성이다. 사진 작가의 특별한 안목이나 세계관이 사진에 담겼다면 그 사진의 가치는 또 다른 차원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시대와 사람들」 첫머리를 장식하는 다섯 컷의 사진은(현일영, ‘해방의 순간을 기뻐하는 사람들’, 1945) 내가 1945년 8월의 강원도 김화읍(당시는 38선 이북이고 1953년 이후는 읍내 한가운데가 비무장지대, 즉 DMZ)에서 본 장면들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이다. 웅장한 광화문 뒤의 중앙청 건물과 벽돌로 된 단층의 군청 사무소의 크기,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과 기껏 높아야 군수인 피사체 인물들의 비중, 전차 레일이 깔린 대로를 행진하는 취주악대와 집신 신은 강원도 촌사람들의 대조적이 모습이 전시된 사진과 내 머릿속에 각인된 필름의 차이다.
이형록_거리의 구두상_1957 ● 남대문 시장입니다. 헌 구두를 길거리에 나란히 모아놓고 살 사람을 기다리는 중늙은이의 무엇인가를 열심히 푸념하는 입모습, 6.25전쟁의 직접적 결과입니다.
지난 60년간의 역사를 시대구분(時代區分)으로 접근하는 방법, 중요 사건의 인과 관계 해명을 통해 조명하는 방법,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분야별 변화를 서술하는 방법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위의 세 가지 방법, 어느 곳에서도 보통사람의 개별적 삶이 구체적으로 등장하지는 못한다. 이런 점은 왕조사( 王朝史) 혹은 집권층 중심사로부터 사화경제사로 역사 연구자들의 관심이 이동한 20세기 후반에 이르기 까지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개별 인간의 일상적 삶이 역사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역사의 근본 문제에 걸려있기도 하려니와 더 크게는 사회의 구조가 보통사람(하층민, 또는 피지배 계층)은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암묵의 양해위에 성립된 면과 무관치 않을 줄 믿는다. 이런 지배자 중심의 역사서술 관행에 도전자로 나타난 것이 사진이다. 그것은 벽에 걸리는 가족사진으로부터 출발했다. 흔히 ‘빛바랜 가족사진’이란 자조적인 이름으로 불려 때로는 감상에 젖게 하고 또 때로는 잊고 싶은 지난날의 괴로움을 상기시키는 것들이다. ● 「시대와 사람들」에 사진들에는 초기(1945년과 1950년 편)의 것일수록 보편화된 역사기술 방식이 짙게 남아있는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의도적으로 거기에 염증을 느끼는 의도가 역력히 나타남으로써 지난 60년간이 영속과 단절이 숨 가쁘게 다툼을 벌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시대와 사람들」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이른바 지배자의 얼굴로는 이승만과 진주군의 군정장관 하지의 얼굴이 전부라는 사실은 매우 기이하다. 어깨에 총을 메고 서울시가에 입성하는 군인들의 행렬이 있으나 그들은 1960년대 이후 30년간 남한을 지배한 군부 지배자라기보다 지배자가 거의 무상으로 징집한 농민 자식들의 군복차림이라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손규문_채빙_1958 ● 서울 한강의 겨울모습입니다. 냉장고가 없었던 이 시절, 겨울에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하여 서빙고와 동빙고 등에 보관하고 여름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승만과 색안경을 낀 미군 주둔군 사령관(garrison commander)의 얼굴은 해방 공간이라는 특정시기를 추상하는 기록으로 끝나는 것일까. 언뜻 생각하면 보통사람의 일상적 삶과 무연한 한 시대의 중성적 상징물로 완결되는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 때 그저 거기에 있었던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당시와 그 뒤에 이 땅에서 산 이름 없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얼굴이다. 한반도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하고 영속적인 조건은 남북의 분단인데 미국사람은 38선을 그어 놓은 장본인이고, 이승만에게는 38선의 해소보다 단독 정부의 수립을 우선적 과제로 설정하여 실행한 책임이 돌아가는 것이다. 남북 분단이 6.25 전쟁이 일어날 선행 환경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6.25 전쟁은 역사에 나오는 전쟁 가운데서 몇 안 되는 참혹한 전쟁이다. 일제에 의하여 36년간 압제와 수탈에 시달린 2천5백만의 한민족은 이 전쟁으로 인하여 2백만 이상이 목숨을 잃었거나 다쳤고 주거와 생산시설이 상상을 절할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던 것이다. 전쟁 중의 굶주림은 차지하고라도 휴전(1953년)이후에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영양실조에 허덕였다. 정범태의 <우유배급,1955>에 냄비를 들고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7-8세 아이들의 겁먹은 듯한 표정, 헌 구두를 길거리에 나란히 모아놓고 살사람을 기다리는 중늙은이의 무엇인가를 열심히 푸념하는 입모습은(이형록, 「거리의 구두 상」,1957) 6.25전쟁의 직접적 결과들이다.
임응식_4·19혁명_1960 ● 독재와 부패로 얼룩진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기 위하여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궐기에 참여한 학생과 젊은이들이 유혈 진압에 항의하며 경무대로 향하여 질주하는 모습, 그런데 그 자동차 중 하나가 미국제의 고급 승용차 ‘쉬보레’(Chevrolet)라는 사실을 사진을 통해 발견하게 됩니다. 감동과 암시라는 이중의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독재와 부패로 얼룩진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기위하여 궐기한 학생과 젊은이들이 유혈 진압에 항의하여 경무대로 향하여 질주하던 자동차들의 하나가 다름이 아닌 미국제의 고급 승용차 ‘쉬보레’(Chevrolet)라는 사실을 임응식의 사진(「41.9」, 1960)을 통해 발견하고 우리는 감동과 암시라는 이중의 깨달음에 도달한다. 박정희 군사독재 시대의 일상적 삶에서 평균적 소비수준이 이승만시대보다 훨씬 높아진 것을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인간 사회의 공동체적 얼개, 특히 농촌 자연 공동체는 산산 조각나는 시기였고 앞으로 도저히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다. 도시로 내몰린 농촌의 보통사람들이 새로운 생활터전에서 인간다운 삶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는가는 전혀 별개 문제다. 보도사진으로 너무나 유명한 정범태의 서울 역 풀래트홈 압사현장 사진(「시대와 사람들」에는 전민조, 「명절 표 구하기」, 1978 참조)에서 알 수 있듯이 박정희의 산업화는 한국 농업의 붕괴와 농민의 2등 시민 화, 즉 도시 무산자화로 귀결되었다. 도시 무산자들이야 말로 방황하는 영혼의 주인이다. 도시의 일터와 특용작물을 재배에 열을 올리는 고향, 어느 곳이건 간에 돈이 삶의 수단이자 곧 목표가 되어 벼렸다. 단지 일년에 두어 차례 부모가 살고 있는, 예전과 달라진 시골 고향으로 고생고생하며 찾아가는 회귀 본능에서 오로지 자신의 정체성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주명덕_혼혈아-홀트씨고아원_1965 ● 6. 25전쟁으로 미군 기지촌이 생기면서 이 땅에 혼혈아가 생겼습니다. 미군 아버지와 위락인 생활을 하는 어머니 모두에게 버림받은 채 고아원에서 생활하는 혼혈아의 아픔은 다음의 글이 대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배울 글과 말은? 나의 조국은 어디인가?
박정희가 그의 부하의 권총 탄환에 마저 죽는 순간까지 일상적 삶에 허덕이는 도시의 하층민들은 이 사회의 오늘과 내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고민할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시기 사진의 보통 사람얼굴들은 그들의 복장이 달라진 것만큼이나 밝아졌지만 희망에 찬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기관원들은 대학생의 시위를 포함한 정치적인 씬(scene)에서의 얼굴들을 사진작가의 시야에서 가렸던 때문인가 보다. 사진을 포함한 각종 기록 메시지 작성과 전달에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는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음이 입증되는 사례다. 사진작가가 체육관에서 꼭두각시 노름을 하는 통일주체 국민회의의 대통령 선출과정을 찍는 행동은 원천적으로 국금(國禁)의 해당되었던 것이다. 유엔군(미군)의 작전지휘권하에 있는 한국군은 전두환 일당의 계엄 확대 조처에 항의하는 광주시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관 두껑을 닫지 못하게 손으로 받치며 오열하는 여성의 얼굴은 표정을 읽어 글로 옮길 재주는 없다. 가신이가 그의 아들인가 아니면 남편이던가. 이 사진에서만은 축전의 제목의 ‘얼굴’이 현실에 다가서기 힘들다. 민주주의를 소리 높여 웨치며 시가를 누볐다는 것이 기관총 무차별 난사의 이유가 되는 데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는 말 이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다. 표현의 장르로서 영상(회화-조각-사진 등)이 지니는 직접성을 나는 높이 사는 편이지만 이 광주학살의 경우만은 음성 혹은 음악이 다른 장르를 압도한다고 믿는다. 다성 합창으로 울리는 “산자여 따르라”는 가락에 영상은 대적 불능이다. 언어도단이라하여 전달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특정 순간의 감흥과 감동을 뜻한 만큼 옮기지 못한다는 뜻이다.
박옥수_현충일의 국립묘지_1969 ● 1965년에 시작된 월남파병은 이 땅의 아들을 너무도 많이 희생시켰습니다. 죽은 아들의 묘지 앞에서 아들을 대신하는 훈장을 가슴에 달고 비장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어머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민주주의 앞에 수식어를 부치면 의심쩍다는 것이 나의 평소 지론인데 광복60년은 의심쩍은 민주주의가 판을 치는 시기였다. 보통사람은 그날그날의 살림을 꾸려나가기가 바빠 민주주의에 관하여 넉 놓고 말잔치를 벌리지 못한다. 지식인, 예술인, 교육인, 종교인, 정치인들이 그들보다 한 거름 앞서 우리 사회의 기본 가치인 민주주의를 말하며 실천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핵심 내용인 자유와 평등이 어떻게 하여야 온전하게 실현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술이 정치 놀음의 도구가 되어야한다는 좁은 의미의 도구성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보통사람의 삶이 민주주의의 실천 내용과 결과에 따라 얼마나 큰 영향을 받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기능이라면 기능일터이고, 예술은 그 차체로 물질적 소비가 충족시키지 못하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면은 절대로 외면해서 안 된다. 위에서 나는 민주주의의 핵심 내용을 자유와 평등으로 규정하였는데 광복 60을 맞는 지금은 남북을 아우르는 민족 공동체 운명을 우리의 손으로 지켜 나가는 일을 핵심 내용으로 추가해야겠다. 이 일은 냉전적 사고와 푸로파간다에 찌든 우리사회 상층부의 심성과 그들의 현실적 이해타산으로 말미암아 지난 60년간 우리가 당도했던 어떤 난관 못지않게 어려운 것이다. 남북의 보통사람들 모두가 자유와 평등이 충만한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는 시기를 앞당기는 일에 사진작가들이 가일층 분발하기를 바랄 뿐이다. ■ 임재경
첫댓글 우리아버지도 월남에서 싸우다오셨지만 많은 무고한 젊음들이 희생됐던 가슴아픈 전쟁중 하나지. 오로지 국가의 충성심하나로 초개와 같이 산화하신 님들께 머리숙여 감사를 드림니다....
청계천의 저 모습을 찿을려고... 하지만 일부러 만들지 않았던 저 모습을 찰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