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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천보현사 원문보기 글쓴이: 무공
중년의 삶을 어떻게 보내야할 것인가?
법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느 듯 6월 무더운 날씨와 함께 생활하여야할 시간인가 봅니다. 요즈음 수인성 장티푸스가 많이 발생되고 있습니다. 건강에 각별히 주의하시길 당부 드리면서 오늘 지장재일 법문은 중년의 삶을 어떻게 보내야할 것인가? 라는 주제로 시작합니다. 우선 경전에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무명으로 인연하여 행위를 일으키며 나아가서는 큰 괴로움이 따르며,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위가 멸하고 나아가서는 큰 괴로움이 멸한다.” (출전: 잡아함경 권12 310. 가전연경) 우리들은 일상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안녕하십니까? 하는 인사말을 주고받습니다. 항상 편하게 지내고 있냐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면서 평안과 행복은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나의 생활이 행복하십니까? 라고 물으면 우리는 “그저 그렇다”, “마지못해 산다”, “괴로워 죽겠다” 이런 말씀들이 대부분입니다. 현재 살아가는 날들이 즐겁고,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은 매우 드문 것 같습니다. 길거리에서, 차 안에서, 바로 가까운 내 이웃들의 얼굴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찡그린 얼굴, 피곤해 지친 얼굴,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무표정한 얼굴,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표정입니다. 마음의 거울이 얼굴이라고 한다면 열굴 표정으로 보는 우리들의 삶은 그만큼 괴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고통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생로병사의 네 가지를 말씀하셨고, 더 나아가 미운 사람과 만나는 고통,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구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는 고통, 인간의 내재적 욕망이 주는 감관의 고통 등 4고(四苦)와 8고(八苦)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생에 있어 총체적인 고통의 실상일 뿐이고, 더 많은 고통들을 우리는 겪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고통, 이웃과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온갖 고통, 사회와 국가적으로 겪게 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 많습니다. 또한 나 자신이 분명하게 잘못을 지어 받게 되는 고통도 있지만, 나의 직접적인 행위와 관계없이 환경, 질병, 전쟁 등 외부적인 원인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받는 고통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시대적인 고통을 겁탁(劫濁)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정신질환, 이혼, 살인, 자살, 전쟁 등은 모든 것이 원인이 바로 고통에 있습니다. 고통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압박을 받아서 정신질환이 생기는 것이며, 부부사이의 고통으로 인하여 이혼과 별거가 생기는 것이며, 고통으로 인하여 소중한 자신의 일생을 자살이라는 비참한 방법으로 마감하는 것입니다. 종합병원에 가면 수많은 환자들이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교도소에 가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범죄로 인하여 신체적인 자유를 속박당하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가정법원에 방문해보면 “옷깃 한번만 스쳐도 삼천생의 인연이다”라는 비유가 무색할 정도로 금생에 맺은 부부의 인연들을 끝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겉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 가정인 듯 하지만 실제로는 심한 불화를 겪는 가정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이렇듯 세상이 온갖 고통과 불행으로 얼룩져 있는 것을 보면 “ 인생은 고해다”, “인생은 피곤한 나그네다”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고통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한다는 것일까요? “인생은 고통이 아니다. 괜히 비관적으로 살지 말고 즐겁게 살자. 인생을 낙천적으로 살자.” 이렇게 살아가는 태도가 옳을까요? 인생을 진지한 성찰 없이 맹목적으로 낙천적으로나 혹은 비관적으로 살아가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맹목적인 삶의 태도, 극단적인 삶의 태도를 멀리하라고 하셨습니다. 겸허하고 진지하게 인생과 세계에 대하여 관찰하고, 그 실상을 정확히 깨달아서 바르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많은 고통이 있다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맹목적으로 즐겁게 살려는 태도는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이는 자칫하면 향락적이고 소비적으로 사는 삶의 방식을 가져오게 됩니다. 불교는 가장 정직하고 근원적인 사색과 성찰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에 대해서 그 원인과 해결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모든 중생에게는 갖가지 은애와 애정과 탐심과 음욕이 있어 생사에 윤회한다. 음욕이 애정을 일으켜 생사가 되풀이 된다. 음은 사랑에서 오고 생명은 음욕으로 생긴다. 음욕 때문에 마음에 막거나 거스름이 생기고, 그 대상이 사랑하는 마음을 거스르면 미움과 질투를 일으켜 온갖 악업을 짓는다. 그러므로 중생이 생사의 괴로운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탐욕과 애정의 갈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출전: 원각경)
먼저 고통의 원인은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온갖 쓸데없는 탐욕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소유 수행자를 존경하게 되는 것이며, 욕망을 극복하고 초월하려는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욕망! 과연 그것의 정체는 무엇이기에 인간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일까요? 또 인간은 과연 욕망 없이는 살 수 없을까요? 욕망의 위험을 설한 부처님에 말씀입니다. “욕망은 불이나 탈이나 독이므로 쾌락을 구해서는 안 된다. 온갖 욕망은 마치 불이 맹렬히 타는 것과 같다.”(출전: 정법염처경) “인간의 욕망은 모두가 덧없는 것, 마치 물거품, 허깨비, 야생마, 물 속에 비친달, 꿈 그리고 구름과 같다.”(출전: 화엄경)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모든 사물은 여러 가지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이고, 모든 성자들이 싫어하는 것이다.”(출전: 화엄경) 우리는 흔히 욕망하면 다섯가지 욕망, 즉 오욕락(五慾樂)을 떠올리게 됩니다. 많이 갖고 싶은 재물욕, 이성에 대한 갈증과 소유욕에서 나오는 색욕, 음식에 대한 탐착심에서 오는 식욕, 남보다 더 잘나 보이려는 명예욕, 과도한 수면욕, 이 오욕락이 바로 우리들의 삶의 모든 모습일 수 있습니다. 이 욕망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다면 이 욕망과 요구들을 완전히 포기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인간이 살아가려면 재물도 있어야 하고, 사랑도 해야 하고 먹어야 하고, 잠도 자야하는데. 이것들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죽으라는 말인가? 하는 강한 항변이 나올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갈등 앞에서 대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리지 말고, 적당히 욕망을 충족시킵시다. 적당한 욕망은 인생을 발전시키는 삶의 활력소가 됩니다. 이러한 결론은 일면 옳은 면이 있습니다. 욕망의 절제라는 측면에서는 수긍이 가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옳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욕망의 뿌리를 뽑아 버리고, 순수한 마음과 행위로 살아가는 “원력”은 욕망과 구별되어야합니다. 적당한 탐욕, 적당한 거짓, 이러한 욕망에 대한 태도는 자기변명이고 자기 합리화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고통 받는 일차적인 원인은 욕망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욕망을 극복하고 초월하여 자유와 행복을 얻는 길은 “욕망” 그것에 대하여 철저히 부정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욕망이 부질없고, 끝내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고통이라는 철저한 깨달음이 있어야만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 세상의 모습과 이치에 대하여 깊이 사색하지 않고 깨닫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무지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무지를 타파하려는 사람은 사심을 버리고, 자신의 교만을 버리고, 텅 빈 마음으로 모든 것을 진실하게 대하고 관찰해야 합니다. 자! 우리 자신을 한번 살펴봅시다. 부질없는 탐욕, 성냄, 어리석은 소견, 질투, 교만, 의심이 얼마나 자신 속에 자리 잡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이 평소 행위로 발현되어 부질없는 욕망을 일으키고, 그로 인하여 얼마나 내 이웃과 갈등을 일으키고 그 갈등이 나와 이웃을 고통스럽게 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냄과 분노 그 자체가 참으로 부질없고 부끄럽다는 철저한 인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폭력과 살인으로 교도소에서 고통 받지 않을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정당하지 못한 욕망이 부질없고 부끄럽다는 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도둑질을 하거나 큰 경제범죄를 일으키지 않은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지나친 간섭과 과보호가 자식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하여 깊은 성찰과 인식이 있었다면 결코 자식에게 쓸데없는 간섭이나 과욕을 부리지 않고 바로 키울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무엇을 얻기 이전에 모든 것에 대한 철저한 사색과 인식이 필요함을 가르칩니다. 이제 욕망 그 자체 때문에 괴로워할 일이 아닙니다. 욕망에 대한 바른 관찰로, 욕망과 모순을 바로 깨달아 무지에서 해방되고 욕망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어두운 밤길을 조심스레 걷기보다는 등불을 들고 당당하게 걷는 지혜로운 길을 터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지혜를 닦아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질없는 불장난, 그 자체가 허망하다고 깨닫는다면 불장난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을 괜스레 미워하는 그 자체가 허망하다고 깨닫는다면 남을 결코 미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욕망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지입니다. 고통은 욕망에서 오고 욕망은 무지에서 나옵니다. 미혹으로 인하여 행위를 일으키고 그로 인하여 고통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 무지에서 해방되어 욕망에서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불자가 됩시다. “지혜는 뛰어난 광명이요, 어리석음은 지극한 어두움이니 만일 잘 분별하면 이를 슬기로운 사람이라 하리.”(출전: 제법 집요경)
오늘 법회 참석하신 법우님들 모두 행복하시길 축원 올립니다.
불기 2551년 (음) 사월 지장재일
보현공동체 무공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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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스님, 귀한 법문 고맙습니다._()_
스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스님! 법비 내려 주셔 감사합니다 _()()()_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스님께배 올립니다
스님 좋은 감로법문 가슴에 새겨 갑니다..늘 법체 강령하시옵소서...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