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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 날 아침, 일주문에서 법회보를 나누어 드리고 법회로 안내하며 법우 형제를 반갑게 맞이하시는 봉사팀.
사무국 내에도 봉사하시는 분들이 각기 자리하시고 회장단에서는 아침 회의를 하시니 분주한 아침은 휘리릭 지나갑니다.
송파 22구, 송파 23구, 송파 24구, 송파 25구에서는 떡과 생수를 보시하시고 법우 형제들에게 각각 나눔을 하시고 엘리베이터, 법당 안내, 새 법우 안내 팀 봉사자분들이 각지 자리하여 법회가 곧 시작된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보광당 입구 풍경입니다.
법회 시작 전에 천수경을 독경하시는 자광거사님께서 타종까지 하시니 추담거사님의 사회로 법회가 시작됩니다.
부처님 전에 헌향과 헌다를 올립니다.
일요 법회 때마다 떼어 낸 게시물을 다시 부착해야 하는 수고로운 작업에 몰두하고 계신 거사님들.
한파가 찾아와 꽤나 추운 날씨에도 보광당엔 빈자리 없이 불광 바라밀 형제들이 가득 모여 법문을 듣습니다.
금주의 법문 : 허우성교수님
금주의 법어 : 달라이 라마 : 자비와 관용으로 인류 평화를 심다.
달라이 라마의 정치철학: 자유와 자비(슬픈 티베트 이야기)
티베트와 중국 이야기이기도 함. 암도, 캄, 우창(라싸시), 티벳 3대 지역
(티베트)민족의 자유, 자비의 인식과 발현 방식은 지정학적 위치(역사와 지리)와 깊이 관련됨.
중국 전토 면적의 4/1, 포기 못하는 이유 중 하나
티베트 북부, 동부 지역은 대개 중국 3개의 성에 편입되었다.
티베트인을 위한 달라이 라마의 발언; 편입지역, 칭하이, 시창, 윈남 성에 사는 티베트인을 모두를 위해.
위구르 족, 카자흐스탄인은 대개 이슬람교도, 국제앰네스티 반인륜범죄 자행된다고 비판함. 자치구: 자치 없는 자치구
오늘 불광법회가 열리는 이 거룩한 자리에 서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저를 이 자리에 불러 주신 박홍우 법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제가 발표할 주제는 달라이라마의 정치 철학, 자유와 자비: 슬픈 티베트 이야기입니다. 이 주제는 티베트와 중국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특히, 티베트 동부지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티베트민족도 민족의 자유 자비의 인식과 발현 방식은 지정학적 위치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림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티베트는 중국 전토 면적의 4분의 1에 해당됩니다. 이것이 중국이 티베트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겠습니다.
티베트 북부와 동부지역은 현재 중국의 세 개 성에 편입되어 있습니다. 달라이라마가 티베트인에 대하여 말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중국에 편입된 지역, 티베트의 라사 지역을 포함하여 거기에 사는 티베트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의 탄압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림에서 붉은 색으로 표시된 신장지역, 흔히 위구르 지역이라고 하지요. 이곳은 주로 이슬람교도가 사는 곳인데, 국제엠네스티 등에 의해서 반인륜범죄가 자행되고 있다고 비판받고 있습니다. 자치구라고 하지만 자치가 없는 자치구라고 달라이라마는 부지런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주제의 토대는 바로 이 책입니다. 달라이라마의 정치철학이라는 책인데, 원래는 티베트어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티베트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영역이 된 것을 제가 한글로 번역한 책입니다. 제가 이 책을 작년 딱 오늘, 제가 아는 금강스님을 통하여 달라이라마 스님께 전달해 드렸습니다. 이 사진은 달라이라마 1살 때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4살, 4년 7개월 정도 되었을 때의 사진인데, 달라이라마로 옹립된 직후에 찍은 사진입니다. 달라이라마는 19살 때 중국에 가서 모택동을 만납니다. 이 사진에서 중간에 앉아 있는 분이 모택동이고, 오른 쪽에 앉아 있는 분이 달라이라마, 왼쪽에 있는 분이 주은래입니다.
1950년에 인민해방군 8만 정도가 티베트 동부로 들어와서 침략을 당하게 됩니다. 9년 동안 견디다가 59년에 인도로 망명합니다.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설치하고 아직까지 여전히 그곳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티베트에 대한 달라이라마의 꿈은 중립적인 비무장의 성역이 되는 것이고, 불교의 원칙에 따라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것이며, 군대 없이 나라를 지키는 것인데, 지난 300년 동안 사실상 군대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중국 인민 해방군의 철군, 자치, 비무장지대, 티베트 고원의 벌채 금지, 환경보호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는 군대없이 과연 꿈의 실현이 가능할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달라이라마는 지속적으로 종교적 은둔자가 될 수 없었다고 말씀으로도 행동으로도 표출하고 있습니다. 달라이라마는 종교적, 현세적 지도자로서 티베트의 정치적 운명, 그리고 세계사를 이해하면서 그는 결코 종교적 은둔자가 될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불성을 얘기하고 있는데, 달라이라마는 불성을 인간 본성론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진실과 정의, 자유, 민주주의, 평등(인권들)에 대한 사랑이 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이것이 이루어지면 인간은 행복해지고, 거부당하면 불행해 진다. 20세기 동유럽의 혁명은 인간 본성의 실현 과정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진실,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본성/불성이 있다는데 왜, 북한, 중국, 러시아의 정치체제는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1989년 소련의 해체는 세계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1989년은 폴란드와 헝가리를 시작으로 11월 베를린 장벽의 붕괴,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 12월 루마니아의 공산 독재 타도 등 동구권의 공산주의를 종식시킨 ‘1989년 혁명’으로 정치사의 전환점이 되었고, 1991년 12월 소련의 해체로 냉전은 종결되었습니다. 이 20세기 세계사의 흐름이 달라이라마는 본성론을 따랐다고 봅니다. 달라이라마는 동유럽의 평화적 민주주의 운동에 깊이 감동하고 있습니다. 동유럽 사람들은 마음으로부터 자유, 진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인간 본성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 주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과거에 억압받는 사람들은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을 하면서 항상 폭력에 의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1989혁명은 간디와 마틴 루터 킹의 뒤를 이은 평화적 혁명이었다고 달라이라마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본권인 자유와 진실, 민주주의에 대한 인류의 기본적인 욕망은 폭력으로 결코 억누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고,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나 시스템을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활동들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라고 달라이라마는 말하고 있습니다. 자유, 독립, 평화에 대한 기본적인 욕망은 인간의 본성이고, 불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공산주의가 이타주의를 비롯한 여러 고귀한 이상을 신봉했지만, 자신들의 견해를 명령하고 강제하려는 지도층 엘리트들의 시도는 그 결과가 처참한 것으로 이미 드러났다고 달라이라마는 말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그들의 신념을 증진시키기 위해 무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결국, 인간의 본성은 공산주의가 낳은 고통을 계속해서 감내할 수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달라이라마는 평화적 비폭력적 변화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동유럽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은 평화와 자유에 대한 열망이 인간 본성의 가장 기저에 있다는 것과 폭력은 그것과 완전히 대립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고 달라이라마는 말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체제가 가정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단지 의식주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속 깊숙한 곳에 있는 본성을 지탱할 소중한 자유의 공기가 부족하면, 우리는 그저 반쪽자리 인간일 뿐입니다. 단지 신체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만 만족하는 동물과 같게 됩니다. 의식주 못지않게 자유의 공기가 중요한 것입니다.
달라이라마는 구소련과 동유럽의 평화혁명이 우리에게 위대한 교훈을 많이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로 진실(truth, 如是)의 소중함을 깨닫게 했다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진실을 고마워하고 진실을 존경하는 마음이 우리의 핏속에 정말로 흐르고 있습니다. 진실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최고의 보증인이자 진정한 토대입니다. 달라이라마는 진실과 자유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DNA이며, 이것이 역사 발전의 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세계인권선언은 1948년 12월 10일에 유엔총회에서 채택되었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주축 국들이 저지른 만행이 세상에 알려지자, 이와 같은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수많은 소중한 생명들이 참혹하게 죽은 끔찍한 전쟁을 치른 후, 국적을 불문하고 모두가 함께 지켜야 할 하나의 윤리 기준을 세우기 위한 선언이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의 주요 내용을 보면, 제1조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 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해야 한다. 제2조는 모든 사람은 선언에 규정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있다. 제3조는 모든 사람은 생명과 신체의 자유와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제4조 어느 누구도 노예상태 또는 예속상태에 놓여 지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제5조는 고문 금지입니다. 사실은 이런 등등의 선언 내용은 각국의 법률에도 충분히 반영되었다고 달라이라마는 보고 있습니다. 1998년 세계인권선언 50주년 기념일에 달라이라마는 기념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 메시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자유, 평등, 존엄성을 갈망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고 고통을 원하지 않습니다. 세계인권선언에 명시된 원칙이 모든 국민과 정부가 따라야 할 자연법이며, 서구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티베트와 같은 제3세계 국가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자유, 평등, 인권 보장 등 인간의 본성, 즉 불성이 보다 더 잘 구현되고 있다. 이러한 이상은 사방승가(四方僧伽)에서 가장 잘 구현되고, 그 다음이 세속적 민주 사회이며, 가장 안되는 곳이 공산사회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인도 망명 이후, 달라이라마는 1961년 26살 때, 네루 수상을 만나 망명 티베트인에 대한 환대에 감사하고 깊은 존경을 표하고, 1966년에는 인디라 간디 수상을 만납니다. 1961년에는 유명한 철학자인 라다크리슈난 부통령도 만납니다. 1973년 38세 때 런던 아더램지에서 캔터베리 주교를 만났고, 1988년 53세 때는 바티칸시티에서 요한 바울2세 교황을 만납니다. 1989년 54세, 노벨평화상을 받은 해에는 노르웨이 수상 얀 쉬세를 만났으며, 1989년 폴란드의 자유화 물결을 타고, 자유노조를 설립한 레흐 바웬사를 만났고, 1991년 소련의 해체, 동구라파의 민주 , 자유화 1993년 유럽연합의 창설을 인류의 진보로 간주하고 열렬히 환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진은 1993년 53세 때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을 만난 사진이고, 이 사진은 1996년 61세 때 남아공 대통령 넬슨 만델라를 만난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2015년 다람살라 이동촌락학교에서 인종분리정책에 반대하고 1984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데스몬드 투투 주교를 만나는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1993년에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부통령 엘고어를 만나는 장면이고, 2001년에 조지 부시 대통령과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 사진은 1997년 타이완 대통령 리덩휘를 만나는 장면이고, 이 사진은 2002년 바클라프 하벨 체코 공화국 대통령을 만나는 장면이고, 이 사진은 2003년 고르바초프를 로마에서 만나는 사진입니다. 고르바초프는 1988년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패기를 선언합니다, 그 내용은 동구권이 공산주의를 벗어나도 강제로 간섭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르바초프는 2022년 8월 30일에 사망하였으나 현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소련을 망하게 했다는 이유로 장례식에 불참하였습니다. 이 사진은 2008년 영국왕 찰스3세가 황태자인 시절 만난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2009년 달라이라마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사진입니다. 달라이라마는 1967년부터 2018년까지 총 여섯 번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미국 정치인 가운데 시진핑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사람이 팰로시 하원의장입니다. 이 사진은 2022년 8월 3일, 낸시 팰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타이완에 도착한 직후, 중국이 타이완의 민주주의와 경제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인권과 법치를 무시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리는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2022년 7월에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를 만나는 사진입니다. 리처드 기어는 열렬한 달라이라마 팬입니다. 1970년대부터 인도와 네팔에서 티베트 불교에 접하고 있다고 합니다.
달라이라마는 세계 각국을 방문하고 있는 사진을 보여드리는 이유는 달라이라마의 방한이 무산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고 달라이라마의 방한을 추진하여 2000. 11.16일부터 22일까지 일정도 정했지만 중국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2014년에도 달라이라마방한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활동백서에 의하면 정상적인 국가 중 달라이라마가 갈 수 없는 나라는 중국과 한국, 두 나라 뿐이라고 합니다.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중국의 영향 때문인지, 자주성이 부족한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사진은 재작년에 인도북부 라다크 지역에서 열린 달라이라마 법회 사진입니다. 달라이라마의 관심사 중의 하나는 불교 명상과 자연과학의 관계에 관한 연구였습니다. 심리학자, 명상가들이 명상을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를 과학적으로, 뇌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책은 한글로 많이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표정의 심리학’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여기에 나오는 폴 에크만(Paul Ekman)이라는 사람은 표정의 심리학 저술 마지막 단계에, 다람살라에 가서 달라이 라마를 만나게 됩니다. 이 책 1부에 보면 이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명상 요가 수행은 분노, 공포 등을 일으키는 자동적 평가(automatic appraising)를 반성적 평가(reflective appraising)로 바꾼다.” 그것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들 어떤 사태를 보게 되면 금방 화를 내잖아요. 자동적 평가예요. 굉장히 빠른 시간 내에 화를 내게 되는데, 명상을 하게 되면 반성적 평가를 하게 되어서 화내는 것을 자제하게 되는 것을 배우게 된다는 겁니다. 폴 에크만이 하는 이야기는 달라이라마의 명상 수행이 주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보통 명상을 하게 되면 자신에게 이익을 준다고 그랬는데, 달라이라마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달라이라마의 경험으로는 명상이 주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것 같더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까 잠시 얘기를 한 것입니다만, 태생적으로 티베트인이고 또 정치인이기 때문에 달라이라마는 영적, 현세적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탐진치는 우리 인간에게는 늘 존재하고 있고, 달라이라마에 따르면, 현대는 더 효과적으로 시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 심리학에 따르면 탐진치는 개인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지만 현대는 세계사 속에서 작동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법회할 때 보면, 기본적으로 우리 한국 불교도 우리 불광사의 불교도 대승불교입니다. 달라이라마도 마찬가지로 대승불교 전통 속에서 성장해서 사랑과 자비가 세계평화의 도덕적 뼈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족 또는 가까운 친구에 대한 사랑은 보통 애착을 바탕으로 합니다. 애착은 변하면 친절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애착심이 아닌 무한한 이타심으로 기반해야 한다는 겁니다. 애착심을 이타심으로 발전시켜야 우리의 적을 향해서도 가질 수 있는 폭넓은 사랑이 된다고 합니다. 아까 우리가 부른 노래 속에서도 이런 구절이 보였습니다. 이 그림은 여러분 잘 아시는 오온(五蘊),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입니다. 우리가 탄생해서 성장을 하게 되면 색수상행식이 증가하게 되고, 불법(佛法)을 제대로 배우게 되면, 색수상행식의 최소치에 이르게 되고, 그러면 아라한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달라이라마는 오온 감소법을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는가 하면, ‘나’ ‘나의’ ‘나는’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지 말라고 그래요. 왜냐하면 이런 말 뒤에는 늘 이기적인 생각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달라이라마에 따르면 오온 감소는 해탈이 아니라 자비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달라이라마는 해탈보다는 자비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초기 인도불교나 석가모니 불교에도 사무량심이나, 자비희사 등 자비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성철스님 같은 분이 깨달음의 경지를 두고 돈오돈수, 돈오점수 하는 논쟁에 대해서는 달라이라마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달라이라마에게 자비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상처 입은 사람에게 어떤 기분인지 묻지 않으며 나 스스로 상처 입은 사람이 된다.” 이런 식입니다. 즉, 고통 속에 있는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 타자성이라는 장벽을 깨고 그 고통과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달라이라마의 정치철학의 기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개인의 삶 속에서 내면의 평화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평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개인의 평화가 21세기 한국의 진영 간의 평화로 이르게 할 수 있을 까는 잘 모르겠습니다. 종교인은 은둔자가 아닙니다. 달라이라마는 종교와 윤리가 정치에서 설 자리가 없고, 종교인은 은둔자로서 스스로를 고립시켜야 한다는 일반적인 가정에는 늘 반대하고 있습니다. 달라이라마의 정치 철학은 그 폭이 아주 넓습니다. 달라이라마의 정치철학은 모든 생명과 환경을 위한 것입니다. 그는 승려로서 자신의 관심사는 인간 가족의 구성원 전부, 그리고 실로 모든 생명에게까지 확장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달라이라마의 불교 이해와 실천은 1950년 중국 공산당의 침공 이후, 티베트가 세계사에 끌려 들어간 일과 깊이 관련이 있습니다. 1950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침공한 이후에 총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1백만 명 이상이 대학살을 당하고, 최소한 그만큼의 티베트인이 종교적 신념과 자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수용소에 투옥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제발 중국군이 티베트에서 물러나라, 철군만이 화해 과정의 출발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974년 이후에는 접근법이 달라졌습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중도론(Middle way approach)을 펴고 있습니다. 티베트가 1950년 침공 이전에는 독립국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너무 힘이 세고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일 것 같아서 독립을 포기하겠다. 그래서 독립을 포기하는 대신에, 명실상부한 자치를 인정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중국 법률에도 있는 것이 자치입니다. 그 내용은 티베트 문화의 보존, 우리의 언어를 드높일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완전한 환경보호를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티베트 자유를 지키는 것은 자비심에 바탕을 둔 불교문화를 지키는 것이고, 불교문화를 지키는 것은 인류에게도 무신론자에게도 모두 유익하고, 인간만이 득을 보는 것이 아닌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도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티베트는 본토에서 일종의 문화적인 집단 학살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달라이라마는 마오쩌뚱을 여러 번 만났습니다. 마오는 아버지이고, 자신은 아들과 같다고 하면서, 마오는 인민을 위한 혁명정신은 있었지만, 불교는 모른다고 비판하고, 불교를 모른다는 비판은 마오 이후의 모든 중국공산당 지도부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달라이라마는 자서전 말미에 이런 얘기를 하고 있어요. “마오 주석은 정치적인 힘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총구에서 나온 권력은 일시적일 뿐이다. 결국에는 진리와 정의, 자유와 민주를 향한 사람들의 열망이 승리한다...나는 기도했다. 자비와 깨달음의 빛이 전세계를 비추고, 공포와 억압의 어둠을 쫓아내기를!” 이런 기도의 응답이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음에는 가장 슬픈 이야기인데요. 1970년대까지 네팔 북부에 티베트 게릴라가 있었습니다. 중국 정부가 네팔 정부를 압력을 하고, 달라이라마에게 압력을 가해서 티베트 게릴라를 없애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달라이라마가 녹음을 보내요. 그 녹음을 받은 장군은 자살해 죽고, 나머지 많은 게릴라 대원들도 사살을 당합니다. 이것은 2년 전 사진인데요. 티베트 젊은이인데, 티베트 독립을 호소하면서 분신자살해서 죽은 젊은이입니다. 이 사진은 인도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 독립 열사 기념비입니다. 아마 티베트 독립을 위하여 자살하여 죽은 사람들이 백 수십 명이 넘을 겁니다.
다음은 자서전 이야기인데요. 자서전에도 그렇고, 노벨평화상 수락연설에서도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절대 상대방을, 원수를 비난하지 않아요. “나는 억압자(여기서는 중국을 말하는 겁니다)와 친구를 포함한 우리 모두를 위해, 인간적인 이해와 사랑을 통해 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는데 우리 함께 성공할 수 있도록 기도 합니다” 우리 함께 라는 말 속에는 중국 공산당 지도자도 포함됩니다. 2008년에 수천 명의 티베트인들이 실제로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달라이라마는 티베트인들에게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달라이라마의 글에는 분노가 없어요. 슬픔은 많은데. 예수의 산상수훈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와 적은 다르지 않다, 상호의존성을 얘기합니다. 상호의존성, 말은 쉬운데, 이해하고 공감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한 가족이라면 부부간이나, 부모 자식 간에 서로 다투고 싸우더라도 서로 갈라설 수 없으니까 서로 의존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쉬워요.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는, 이해관계가 아주 다른, 정치 집단의 경우에 상호의존은 말하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하여간 달라이라마는 전염병이 퍼질 때 우리가 그랬듯이 우리 함께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달라이라마는 중국 정부를 자주 비판합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도 지도부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13억 국민에 속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도덕적, 영적 분야는 완전히 텅 비어 있고, 그들은 돈과 힘만을 생각합니다. 그 결과, 모든 수준에서 엄청난 부정부패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유로운 정보와 투명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라고 이런 얘기를 하니까 중국 인민은 스스로 현 지도부에 대하여 만족도가 매우 높다고 얘기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 사진은 코로나에 대한 중국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반대를 폈던 중국 청년들의 모습입니다. 이 청년들은 백지 시위를 하고 난 다음에 안면인식기술로 시위자를 체포했다는 뉴스입니다.
달라이라마가 흔히 하는 명상이 똥렌 명상, 주고받기 명상입니다. ‘적’의 의심이나 분노는 받아들이고, 대신 나의 신뢰와 자비를 준다는 명상입니다. 정말 고상한 명상으로 보여요. 상대가 가지고 있는 증오심이나 분노는 내가 받아들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신뢰와 자비심은 준다는 그런 명상인데, 나중에 달라이라마가 고백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이런 명상이 내 마음은 편해 지더라도 상대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더라는 그런 얘기입니다. 차라리 논리적인 말이 더 중요 하더라 그런 얘기를 합니다. 물론, 자신이 편해지면 상대에게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대화나 타협의 가능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좋든 싫든, 우리는 이 땅에서 인류라는 하나의 위대한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고 고통은 원치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 모두는 이러한 목표를 추구할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달라이라마가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 “모든 인간은 행복을 원하고, 고통은 싫어한다.”는 이 말 이예요.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전체 인류를 위한 보편적인 책임이 있는데, 보편적인 책임의 출발은 개인의 각성이라는 거예요. 인류의 커다란 운동은 개인의 주도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마르틴 루터, 킹, 간디 같은 사람과 같이 개인의 각성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불광법회도 잘되기 위해서는 한분의 리더십이 먼저 나서야 될 거에요. 개인의 각성, 자신감이 있어야 되는데, 자신감은 차분한 마음, 열린 마음을 준다는 거예요. 자신감은 두려움과 불안을 줄여 줍니다. 자신감을 통해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또 성실하게 행동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고 하니, 우리 속에 있는 불성(佛性)같은 씨앗에서 자신감이 나오고, 그런 자신감이 높아지면 두려움이 없어지고, 상대에 대한 친밀한 감정을 발생시키고,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많으면 두려움이 오고, 불신이 생겨나서 결국은 마음의 문을 닫게 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사실, 우리 정치판은 공포로 잔뜩 찌든 사람들이 모여서 정치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자비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낮은 차원레벨의 자비심은 생물학적 요소를 가진 애착이 섞인 낮은 레벨의 자비입니다. 그 제한된 자비는 하나의 씨앗으로서, 사고를 통해 높은 레벨의 무한하고, 편견 없는 자비로 더 강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의 목적은 아름다운 교회나 절을 짓는 것이 아니라, 관용, 관대함, 사랑 같은 인간의 긍정적인 자질을 함양하는 것입니다.
달라이라마가 주장하는 경제시스템은 혼합경제입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경제의 강점을 모두 합한 혼합경제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유 경제체제와 제대로 된 정부의 온정적 간섭을 모두 수용하는 듯합니다. 반 시장적 통제 경제에서는 개인적 동기를 무시해요. 더 무서운 것은 기본적 인권적 박탈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시장통제는 정치 검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중국 사회를 보고 느낀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달라이라마는 슬픈 티베트에서 태어난 것을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하나는 전생에서 나쁜 업을 쌓은 탓이다. 또 하나는 우리의 잠재력을 개발하고, 사용할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달라이라마는 최소 4가지 책무를 희망을 갖고서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자비심, 용서, 관용, 자기훈련과 같은 인간적 가치를 증진시키는 것입니다. 세속주의(secularism)는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는다는 뜻이 아니라, 종교를 존중하되 비신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종교화합 이예요. 세계의 주요 종교적 전통들 간의 종교적 화합과 이해를 증진하는 것입니다. 종교 간의 철학적 차이는 관계가 없다는 것 이예요. 기독교가 하나님의 창조설을 얘기하든 불교가 인과설을 주장하든 그것은 관계가 없다는 거예요. 모든 종교가 자비심, 관용, 용서를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 책무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티베트인의 자유로운 대변인 역할을 할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중국과의 관계가 호혜적으로 변하면 이 책무는 없어진다고도 말합니다. 불교명상과 과학의 공동연구가 네 번째 책무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과학의 연구적인 전통과 불교 수행 간에 존재하는 연관성에 집중해 왔습니다. 1989년 노벨평화상을 받고 난 다음에는 상금의 상당 액수를 Mind & Life라는 단체에 기부합니다. 달라이라마가 제기하는 질문중의 하나는 자비심, 긍정적인 감정을 훈련하거나 가르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입니다.
달라이라마는 인간의 선함은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가장 크게 꽃 핀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이 품성이 더 친절함이 더 높을 수 있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어떤 연구에 의하면 북한 일반 주민들이 하는 언사가 매우 거칠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만약 그렇다면 사회 시스템하고 개인의 덕성하고 깊은 관련이 있다는 관찰이 옳은 것 같습니다. 2004년에 한 말인데요, 달라이라마는 지난 100년간의 경험의 결과로서 우리는 인간에게 매우 본질적인 자유의 중요성에 대해, 그리고 개인 기업 및 기업의 사적 소유가 경제를 크게 개선하는데 기여한다는 것을 훨씬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와 민주주의의 공통점이 무엇 인고 하니,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거 에요. 불교는 초기 불교, 한국 불교, 중국 불교, 일본 불교, 티베트 불교, 대승불교 등 하나의 불교가 아니라, 서로 다르듯이 Budisms(복수)으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개인이 책임을 지기는 하지만,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민주주의는 공통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의 관점에서 또 하나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달라이라마는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이지만, 정당한 전쟁이론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 사례는 2차 대전에서 히틀러의 인류 문명을 파괴하는 부당한 공격에 대항하기 위한 처칠의 용감한 대응은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고, 6.25 남침에 맞서서 남한이 한국을 지키고, 그 이후에 자유민주주의를 뿌리내려서 민주주의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킬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한국 전쟁이 정당한 전쟁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미 2000년에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 당시 한국 방한 계획을 앞두고 한국 역사를 조금 배운 것 같습니다.
다음 내용은 사실 아름답고, 시적인데요. 우리 모두는 사실은 평온함을 좋아한다는 거예요. 심지어 폭력적인 버릇이 있는 사람들도 평온함을 좋아하는 요소가 있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예를 들어 봄이 오면 해가 길어지고, 햇빛이 많아져서, 풀과 나무가 살아나고 모든 것이 매우 생생합니다. 사람들은 행복해 합니다. 가을에는 잎이 하나 둘씩 떨어지고, 아름다운 꽃들이 모두 죽어서 우리는 헐벗은 식물에 둘러싸이게 됩니다. 별로 즐겁지 않지요. 왜 그럴까요?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성장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무너지거나 죽거나 파괴되는 것은 싫어하고요. 모든 파괴적인 행동은 우리의 본성에 반하며, 건설적인 것이 인간의 방식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자비는 엄마 사랑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엄마의 아이를 사랑하는 그런 사랑의 씨앗이 아이의 피 속에 있어서 생물학적으로 우리는 타인의 안녕에 대한 배려를 갖게 된다는 겁니다. 사랑으로 키운 아이가 자신감을 갖게 된다는 그런 얘기도 합니다. 오래 사시려면 분노, 증오, 공포, 이런 것들을 가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분노, 증오, 공포가 우리의 면역체계를 갉아 먹고, 자비는 우리의 면역체계를 강화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종교적 믿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 과학적으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라이라마는 세속 윤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달라이라마가 불교를 독실하게 믿고 있지만, 그는 가끔 세속주의자라고 얘기를 해요. 다른 모든 종교, 사랑과 관용을 가르치는 다른 종교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분노와 동요는 질병에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자비가 표출되는 것이 비폭력이예요. 비폭력은 자비의 행위입니다. 중국인들은 일반적으로 교양 있고, 근면하며, 그들의 문화에는 항상 연장자와 부모를 존경합니다. 하지만 그 문화유산은 파괴되었습니다. 이제 새롭게 형성된 문화유산은 무력 사용을 믿습니다. 마오주석이 말했습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그들은 정말로 총의 숭배자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에 대해서 달라이라마는 슬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적은 소중한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적들만이 우리가 관용과 인내와 자비를 키우는데 필요한 도전을 해옵니다. 기독교에는 한 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 뺨도 돌려준다는 감동적인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 같은 이상이 불교철학의 근저에도 있다는 것이에요. 남이 우리의 진정한 적은 내 속의 분노와 증오입니다.
다음 내용은 시진핑이 가장 싫어 할 내용입니다. 구 소련과 마찬가지로 중국은 다민족 국가이며, 팽창주의적 이념으로 자극받아 인위적으로 건설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식민지 방식의 무력으로 통치되고 있습니다. 중국의 평화롭고 번영하며,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안정된 미래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체제를 원하는 중국인의 바람뿐 만아니라,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8천만명의 소위 소수민족의 바람 역시 성공적으로 충족시키는데 있습니다. 인류의 5분의 1이 사는 아시아의 중심부에 진정한 행복이 돌아오기 위해서는 현재의 중국을 해체하고, 다원적이고, 민주적이며, 상호협력적인 국가들의 공동체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진핑이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말씀입니다. 2022년 10월 16일 중국공산당 20차 당 대회 개막연설에서 시진핑은 삼권분립, 다당제, 시장 보다 마르크스를 강조하면서 달라이라마의 기대와는 반대로 가고 있고, 공산당 독재와 공산당도 상당히 시진핑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달라이라마는 세계 평화를 위한 단계적 무장해제론도 제시합니다. 먼저 핵무기를 제거하고, 그 다음에는 생화학 무기를, 그 다음에는 공격무기를, 마지막으로는 방어무기를 제거해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 이상의 세계 지역에서 각 국가로부터 동등한 수의 인원을 모아 집단의 지휘를 받는 국제경찰을 창설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승자가 없으니까 핵전쟁을 하지 말자 그런 제안도 하고 있습니다.
달라이라마는 환생이 일어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합니다. 환생을 믿지 않으면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하나는 까르마와 파괴적인 감정의 지배아래서 재생된다는 것입니다. 탐욕과 집착이 남긴 까르마가 재활성화 되어서 우리가 내생에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의 길이기도 한데, 긍정적인 소망을 갖고 부지런히 유덕한 행위를 하면 그 덕으로 더 높은 곳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비와 기도의 힘에 의한 재생입니다. 이것은 보살의 길입니다. 깨달음의 길을 얻은 우월한 보살들은 중생에 대한 자비심 덕분에 그리고 타인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기도에 근거해서 재생합니다. 그들은 미래의 부모들뿐만 아니라 재생의 장소와 시간까지도 선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인류가 최악의 생명체예요. 인류가 지구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유일한 종족은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새들도 곤충도, 그리고 그 어떤 포유류도 그런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구를 파괴할 능력이 있다면 그 반대로 지구를 보호할 능력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달라이라마의 기도문입니다. 달라이라마는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을 그렇게 좋아해요. “허공계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중생계가 존재하는 한, 나 역시 그곳에 머물 겁니다. 세계의 고통을 물리칠 때까지”
오늘 법문을 요약합니다. 달라이라마가 인류의 스승인 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입니다. 개인 차원에서는 자신의 탐진치를 잘 다스려 자비심을 기르는 것이고, 세계적 차원에서는 그 자비심을 확장해서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이루려는 것입니다. 그에게 자비심과 자유, 그리고 평화는 모두 하나입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녹취 청명 거사님)
♬ 찬탄곡 : 대각산사 바라보며(김효경 작사, 정부기 작곡, 김회경 지휘) 마하보디 합창단 ♬
고적이 숙명인 양 그물 걸려 앓던 삶이 전 전생 사바 그곳 잊지 못할 한인 것을
이제는 옛이야기로 허리 펴고 하늘 본다 부처님은 거기 서서 미소하며 보자 하고
보살님은 나를 반겨 길을 같이 가자 하네 오늘의 장미 꽃다발 한 아름 안겨울고
마음은 연꽃잎 이슬로 맺혔다가 때로는 호수처럼 청산 더불어 머물고
내 품안 조국의 산사 구름으로 머물다가 한뜸한뜸 기운 누덕 피눈물 괸 대각 도량
사무쳐 그리운 정 당신 불러 목이 메고 아무도 모르는 이 밤 귀뚜리만 웁니다.
B---- B--- B--- B---
대각산 오르는 길 춘하추동 이십여 성상 천둥번개 백설 분분 숨죽이며 달래며
묵빈을 양식 삼아서 지금에 이르렀느니 아수라게 구비 돌아갈 길 바쁜 지금이다
정토 향한 해오름에 해탈 수 담아 싣고 한 눈을 팔 여가 없으니 오직 내길 가자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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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원문 낭독 : 송파 12구 명등 대연화 보살님 (불광법회.불광사 정상화 기도 발원)
현안 보고 : 현진 법회장님
법회 후에 법등 모임하는 구가 법당 구석구석 가득하고, 법회를 마치고 나서는 형제들에게 다정히 배웅을 하시는 법당 안내팀.
사 측에서 위험하다는 취사는 하지 않습니다. 단지 공양 장소로 사용하겠다는데, 그것도 안된다며 공양실 문을 변함없이 굳게 닫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불광 법회의 사용을 방해하는 행위로 밖에는 이해할 수 없으므로 사 측 부당함에 시위하시며 송파 9구, 송파 28구, 강동 6구에서는 공양간 앞에서 불편함을 감수하며 공양을 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일요법회가 끝나고 많은 분들이 동참한 대웅전에서는 염송팀의 집전으로 금강경 독송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12/19일 금강경 독송시 대웅전에서 동지 기도 입재 하여 , 12/21일 동지기도 회향을 여법하게 하였습니다.
지난주, 조계사, 화광사, 봉은사, 동명사에서 불광 바라밀 형제들은 추위도 마다하지 않고 1인 시위 정진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일요법회를 위해서 바닥을 닦고, 의자를 배치하고 추운 보광당인 것을 감안하여 의자와 바닥에도 방석과 발 매트까지 빈틈없이 준비해 주시는 청정팀 봉사자분들의 노고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갑자기 찾아온 한파에도 토요 집회에 모여 불광 정상화를 외치는 불광 바라밀 형제들의 이 간절함을 왜곡시키고, 불광 법회를 거부하고자, 듣도 보도 못한 토요법회를 만드신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뜻을 새기며 출가하신 스님들은 편안히 따뜻한 법당에서 어떠한 법문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때마침 동짓날이었다, 집회가 끝나고 보문부에서 준비한 팥죽을 들고 공양실로 향했으나, 외부인들에게도 팥죽을 쑤어 배달하는데 팥죽 먹을 장소만 사용하고자 하는데 공양실 출입을 금한다. 종무원은 토요일이라 사용 못한다 하니 그렇다면 일요법회 시에는 왜 문을 걸어 잠그느냐는 보살님들과 다툼이 일 수밖에, 종무원은 이 말, 저 말, 두서가 없다.
결국 공양실에서 시위팀, 금강경 독송팀이 보문부에서 준비한 팥죽과 물김치를 받아 얼마 만인지 기억할 수도 없는 공양실 내에서의 공양을 했습니다.
저기 서 계신 종무원께서는 '얼음 땡' 놀이를 하시는지, 팥죽 드시는 보살님들을 감시하시는 것인지 미동 없이 서 계심의 뜻은?.
토요 법회를 끝내고 나가시던 전 법회장 현선거사님께서 법회측에서 붙여놓은 게시물을 읽어 보고 계신다.
읽으신 후, 무슨 생각에,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요?
광덕스님의 가르침을 함께 배우신 전 법회장님이시니 불광법회를 없애자는 현 스님들의 상황이 잘못된 판단임을 말씀드려야 하는 분이신데요.
그러나 사 측에서는 우리가 설치해 놓은 현수막을 당일 또, 철거하고 말았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
첫댓글 법회 일지 작성하신 마음님, 법회 사진 찍으신 원각화보살님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_()()()_
토요일에도 항상 사진 찍어주시는 지일심보살님 수고에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