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과 <종묘> 그리고 <종로성당>
[옥졸 두목은 우리(리텔 주교와 신자)와 친구처럼 지내고 있어서 문을
잠그기 전에 종종 우리 있는 곳에 와서 저녁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내면에는 좋은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하루는 그에게 예전에도 신자들을 본 적이 있는지 물었더니,
그는 "수백명을 봤소! 사람들이 아주 조용하고 착합디다. 그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평화롭고 온순하며 소란을 피우지 않고 항상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처럼 보입디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곳에서 신자들을 많이 죽였습니까?"하고 묻자 "그 당시엔 감옥이 신자들로 가득차
있어서 빈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매일 우리가 상당수를 교살했어요.
기껏해야 2-3일 정도 밖에 가두지 못하였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조선 제6대 교구장이었던 <리델/Ridel>주교(한국명 이복명)의 <나의 서울 감옥 생활>
의 일부를 소개한 글이다.
<나의 서울 감옥 생활>은 아주 담담하고 솔직하게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종로성당>의 미사 드리는 방은 지하 1층에 아주 작게 되어 있고 포도청(옥터) 순교자
헌양관 등으로 많은 할애되었다. 많은 천주교 순교자들이 나온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종로 일대에는 을묘박해를 시작으로 병인 박해에 걸쳐 대원군 실각 때까지 주로 천주교도들을
가두고 심문하기위한 포도청과 전옥소가 있었다.
<종로성당>을 나오면 바로 옆 <종묘>의 외대문 앞에는 숲으로 잘 가꾸어진 공원이 있다.
그 공원 한켠에는 바둑과 장기판을 놓고 많은 노인네들이 이곳 저곳에 모여 있다.
<종묘>는 역대 국왕들과 왕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곳이다.
<종묘>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원인 모르게 자꾸 죽어 나갔다.
영혼들의 원혼으로 불안에 떨던 왜군은 그곳에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철수하면서 불을 질러 소실된 것을 17세기초에 다시 중건한 것이 오늘의 <종묘> 모습이다.
화려한 단청을 하지 않고 최소한의 색만 사용하고, 장식과 기교를 최대한 절제하였다.
부끄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서울에 살던 나는 <종묘>를 처음 찾았다.
잚은 시절 나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었고 그냥 지나치며 살아왔다.
내친김에 <종묘>의 속살을 깊이 살펴 보았다. 그날은 <종묘>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고,
무더운 날씨는 우리를 지치게 했고 집으로 향하게 하였다.
일주일후에 <종로성당>을 다시 찾았고, 우리는 그곳에서부터 종각을 향하여 걷기로 하였다.
종로3가에서 종각을 향해 걷다보면 <단성사>터가 나온다.
조선인 극장 <단성사>는 경성 실업가들과 모금을 통하여 만든 공연장이다.
<단성사>에서는 조선인 흥행사 박승필에 의해 최초의 권투시합(1912)이 소개 되었다.
최초의 우리영화 <장화홍련전> 그리고 민족 영화 <아리랑>이 개봉된 장소이기도 하다.
가수<이 에리수>가 이곳에서 <황성옛터>를 처음 불렀을 때, 관객들이 울음을 터트리자
'일본 순사'들이 공연을 중단 시키기도 하였다.
<단성사>는 공연 수익금으로 활발한 복지 사업을 펼치기도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단성사>는 이렇듯 공연장이기 이전에 우리 역사에 한점을 찍은 곳이다.
<단성사터>는 <좌포도청>이 있던 곳으로, 동학과 천주교의 순교의 터이기도 하다.
<동학> 제1세 교조 <최재우>가 참수된이후 <동학> 제2교조 <최시형>이 순교한 터이자,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탑공공원>은 영어 표현을 따서 <파고다공원>으로 불렸다.
Pagoda는 '동양의 불탑'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었다.
원래는 사찰이 있었다. 폭군이었던 연산군에 의해 "원각사"는 없어졌고,"십층석탑"만
그 흔적을 안고 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으로 역사에 남아 있는 곳이다.
해방을 한해 앞두고 세상을 뜬 <한용운>은 시인이자 승려, 그리고 독립운동가로 어느 한부분
소홀함이 없었다.-----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일제가 "도장만 가져와 찍으면 성북동의 땅
20만평을 그냥 주겠다" 고 했던적이 있다.
그의 답변은 어떤 침묵보다도 아름다운 말이었다. "도장이 없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님의 침묵>과 <알 수 없어요>는 아직도 한국인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주는 한용운의 詩이다.
낙원상가를 마주보며 2층 높이의 <파고다 아케이트>가 공원의 담을 따라 있었다.
소공동 <반도 조선 아케이트>와 공평동 <신신백화점(현SC제일은행 본점)>와 더불어 서울의 3대
쇼핑아케이트로 인기가 있었다. 추억 속으로 사라진 곳들이다.
길 하나 건너면 인사동 길이다. 지금의 낙원상가 근처는 오래된 노포들의 집합소이다.
노인층이 많다보니 홍대거리를 표방한 노인들의 '락희거리'를 조성해 놓은 것이다.
1960년-70년대 당시 모습으로 컨셉한 것이 특징이다. <송해의길>도 조성해 놓았다.
<송해>가 자주 드나들었던 곳으로 수표로에서 낙원동 방향의 도로 200여 미터를 <송해의 길>로
이름짓고 여행자들의 관심을 끌게하고 있다.
낙원동에서 종로2-3가에는 식당과 이발소(이발소들이 유난히 많다)의 가격표들이 상당이 저렴하게
붙어 있다.
어떤 곳은 5000원의 5라는 숫자에 작대기 하나 더 그어서 6으로 고쳐쓰기도 했다.
옛 흔적을 말끔히 지워내지 못한 가격표는 기나긴 옛날을, 추억을, 가슴에 안고 사는 노인들처럼
노쇄하다.
<탑골공원>에 홀로 앉아 시름을 달래고 있는 노인----노인을 상징하는 마중물이 된 곳.
깨끗이 입어도 냄새가 날것 같은 노인들이지만, 한때는 술도 마시고, 시국 토론에 열을 올리고,
만담을 펼치던 활기 넘치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열기에 대한 단속과 규제로 노인들은 표정을 잃어 갔다. 그리고 그러한 열기와 결기는 과거의
추억속으로 잠겨 버렸다.
지금 탑골공원은 오로지 독도사랑과 독고노인 돕기 모금운동을 하는 노인들의 색소폰과 전자 오르간
소리만 구성지게 울릴 뿐이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윤여정이 노인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매춘부 할머니 연기를 했다.
'나랑 연애할래요? 잘해줄께. 안 비싸'
모신문사 최모기자의 잠입 리포트는 아주 리얼하다. 5-60십대의 여성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인터뷰 상대자는 식당일이 고되기 때문에 발을 들여 놓았다고 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한달에 400만원정도 수입이 있었는데 지금은(코로나 당시) 200만원으로 줄었다고 했다.
코로나보다도 돈이 더 무서운 여인들의 실상이다. Peak Time은 2-4시 사이라고 한다.
조선족 여성들이 뒤늦게 뛰어들어서 밥그릇을 위협하고있는데 3명중 1명꼴로 조선족 여인들이라고 한다.
요즘은 2-30대 젊은이들의 발걸음도 심심치 않다고 한다. 왜? "싸니까"
만해 <한용운>은 '도장이 없다'고 20만평 땅을 외면했고, 한쪽에선 '싸니까!' 박카스를 마신다.
또다른 한쪽에선 죽창가를 부르며 국민을 위한다고 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낙원동의 지명은 시내 중앙에 낙원이라 할 만한 공원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어느 곳에도 없고 어느 곳에나 있는 샹그릴라/지상낙원---- 대한민국의 낙원동은 오늘도 분주하기만 하다..
의금부터-전옥소터(녹두장군 동상이 있다)를 거쳐 나무로 만든 수표교위에서 오늘의 걸음은 마무리 되었다.
누구도 죽을 만큼 나이가 많지 않고 하늘의 구름은 늘 아름다우며 우리들의 삶은 항상 사랑스럽다.,
그러나 때론 슬프기도 하다.
<고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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