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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동초등학교총동창회 원문보기 글쓴이: 유랑아제
물안개에 취한 아침
국학문화회관 509호실은 우리 5명의 숙소로 배정을 받은 방이었다. 엊저녁에 새벽까지 술 한 잔씩 나누면서 친목을 다졌고, 모두들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지만 난 아침 기상 시간이 되자 얼른 일어나서 간단히 준비를 하고 밖에 나섰다. 아침 6시 25분쯤이었으니 아직 완전히 밝지 않은 상태이었다. 아침 운동을 좀 할까 하고 밖엘 나갔더니 꽤 쌀쌀한 날씨이었다. 낯설은 고장에서 너무 이른 시간이어어서 밖에 나가서 운동을 하기엔 조금 무리인 듯하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카메라와 연결 포트를 들고 로비로 내려가서 인터넷을 통해서 나의 사진들을 모두 이메일로 보내버리고 메모리를 비워두기로 하였다. 일단 메모리를 연결하고서 이메일을 통해서 발송을 하는데 너무 사진들이 160여장이나 되어서 용량이 많다고 저장이 안 되는 것이었다. 파일박스에 저장할까하고 연결을 하였지만 잘 안되었다. 평소 파일박스를 잘 안 썼더니 그 동안 정비가 안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이메일로 발송을 하면서 2번에 나누어서 발송을 하였는데, 이젠 무사히 전달이 되었다. 그런데 이게 문제였다. 집에 와서 확인을 하는 과정에서 잘 보냈다고 생각하였건만, 하회마을에서 탈 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20여장이 누락되고 말았으니 이 자료를 어디서 받는단 말인가?
아마도 박스를 지정하면서 누락 시킨 모양인데 이상하리만치 꼭 박물관 사진만 단 한 장도 남지 않고 모두 누락이 되고 말았다. 이 사진을 찍으려고 남보다 먼저 서둘러서 박물관에 들어가서 열심히 찍었는데 참 아깝고 내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걸 확인하지 않고 메모리를 씩 비워버렸을까? 생각하니 답답하다. 4G나 되는 메모리를 비우지 않아도 별 이상이 없을 걸 하는 후회만 든다.
일단은 정리가 끝나고 밖을 보니 안동호의 물안개가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는 서울에서는 보기 어려운 광경이어서 사진으로 남기기로 하고 옥상으로 올라가 보았다. 다행히 닫혀 있지는 않았다. 옥상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고 내려 왔다가 다시 올라 찍기를 몇 번 되풀이해서 간신히 몇 장의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깊은 산골의 그림 같은 산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흐르는 물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한 폭의 동양화를 연충ㄹ하고 있었다. 그냥 그대로 동양화를 보는 셈이다. 물안개가 가려서 산의 봉우리 부분만이 살그머니 머리를 내미는 모습들은 언제보아도 포근한 어머니 품 같은 광경이 아니던가?
시골에서 살아서인지 골안개가 퍼지면서 마을의 모습이 아랫부분은 가려지고 위 부분만 남아 보이거나 산봉우리만 보이는 안개가 낀 모습은 왜 그리 포근하고 정다운지 모른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향수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은 되지만 이 나이에 아직도 그런 모습에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이 이상할 때도 있다. 그러나 천생 시골 촌놈이라서 어린 시절의 그런 풍경에 익숙하여져서 그런 것을 어떡하나? 아직 그런 정서가 남아 있는 것만도 아직은 젊은 감성이 남아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자고 생각해본다.
유교문화 박물관
유교문화박물관은 우리나라 유교 문화를 정리하고 알리기 위한 공간이이다. 유교는 세계4대 성인 중의 한 분이신 공자의 가르침을 대집성한 주자에 의해 정리되고 이론적으로 완성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동양의 정신문화이다. 사실상 유교는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라기보다는 실천철학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일종의 정치철학이자 인간윤리이고 인간관계를 바르게 가지도록 가르치는 도덕률과 같은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판단을 한다. 왜냐하면 종교라면 반드시 내세와 같은 귀결점이 있어야 하는데 유교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현세의 올바른 생활, 윤리, 도덕 등을 가르치는 학문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유교는 다른 종교와 극명한 다툼이나 배척을 별로 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종교에서 부모봉양을 사후까지로 보는 유교의 제사에 관해서 부정하는 것이 마찰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내세론이 있어서 대립한 것이 아니라, 조상숭배나 경모를 두고 다툼이 있었을 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박물관에서는 주로
여기서 우리가 적어도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을 가지고 차분하게 하나하나를 익혀가야 하는데 불과 30여분을 보고 말았다는 것은 우리가 제대로 연수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공부하는 틈틈이 건강을 위해서 요즘 유행하는 단전호흡과 같은 [활인 심방]을 하여 마음과 몸<몸과 마음이 아님>을 같이 단련하기도 하였다.
유교의 발상을 알리는 공자님의 탄생부터 생활모습 제자들을 가르치는 과정 등을 파노라마로 알려주는 이런 시설을 좀 더 차분하게 보고 배웠으면 좋았을 것 같았다.
어제 일정에 쫓겨 이곳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고, 대부분이 알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자세한 설명도 들을 수가 없었기에 좀 섭섭한 편이었다. 해설을 해주는 분도 우리가 해설사라는 점을 알고 정확하게 자기들의 프로그램에 의해서 해설을 하기 보다는 안내 정도로 그치고 말았기에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이 든다.
관장님께서 나오셔서 간단한 안내만 해주셨고 직접 안내를 좀 해주실 줄 알았는데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영상과 패널로 전시된 박물관은 일일이 좀 더 공부를 하고 싶은데 나머지 일정과, 장판각에서의 관람이 있어서 서둘러야 하는 형편이었다.
영상으로 본 유교의 발달과정, 그리고 유교문화와 선비정신, 다음으로 서원에서의 유교 공부, 나머지 유교 전적이며 목판 등이 전시 되어 있었다. 서원의 풍경과 서당에서 글을 읽어 바치는 모양, 그리고 선비들의 생활모습을 느낄 수 있는 공부방의 모습 문방사우와 옛책들, 이런 것들은 요즘 젊은 청소년들에게는 참으로 낯설고 이상한 모습이며 물건들일 것이다.
특히 선비들이 공부하여 장원 급제하여서 받은 교지들이며, 벼슬에 오른 임명장에 해당하는 교지들, 그리고 장원급제에게 주어지는 어사화까지 전시가 되어 있으니, 유교를 공부한 젊은이들의 꿈이 모두 모인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선 사회에서 입신양명의 가장 확실한 길이란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고, 그 중에서도 장원급제라면 적어도 3품 정도 높은 자리로부터 출발을 하는데 요즘 말하자면 고등고시에 합격하면 3급 공무원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인 셈이다. 장원의 경우 약 4년 정도 빠른 품계에서부터 출발을 하게 되니까 그만큼 빠른 것이다.
많은 돈을 들이고 정성을 들여서 만든 박물관의 모습은 모든 건물 내부의 장식들마저 옛날 건축물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를 썼고, 전시품들도 유교적인 공부와 관련된 책들, 또는 문구들, 그리고 유교 사상을 잘 정리한 패널로 된 여러 전시품들이 비교적 우리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전시장의 마지막 출구 앞에서 패널 하나에 정신이 팔려 우리들은 한 참 동안이나 발걸음을 멈추고 설명을 듣고 사진을 찍고 들여다보게 되었다. 옛 선현들의 서명<싸인> 때문이었다. 임금님부터 여러 신하들, 학자들, 화가들의 서명을 어떻게 하였는가를 알려주는 그런 패널이었다.
요즘 우리 젊은이들의 사인과 별로 다르지 않는 사인이 있는가 하면 아주 정숙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사인도, 또한 익살스런 사인도 있어서 더욱 흥미로웠다. 요즘은 사인-->서명이지만 옛날에는 수결<手決>이라하여서 사용이 되었던 것이다.
유교문화 장판각
유교문화박물관의 바로 뒤편에 위치한 장판각은 우리나라의 각 문중 또는 향교 등에 보관중인 유교 관련 문서들의 목판들을 한 곳에 모아 보관을 하는 곳이었다. 여기 보관이 되어 있는 목판들은 우리나라 전통이 있는 종갓집이나 문중에서 보관중인 목판과 향교 등의 보관 목판을 모아놓은 이유가 우리나라 문화재는 방송에 소개만 되면 어느 샌가 도난당하고 유출이 되어서 국외로 반출이 되는 등 보관에 문제가 많아서 나라에서 모두 한 곳에 모아서 잘 관리하고 과학적인 보존이 될 수 있도록 화기 위한 것이란다. 마치 팔만대장경의 목판이 보관이 되듯이 잘 관리되고 상온상습의 환경에서 무엇보다 파손이마 마모가 되는 일이 없도록 잘 관리를 해주고ㅛ 있으며, 절대적으로 문중이나 개인의; 목판을 소유권까지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잘 보존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란다. 이렇게 모두 한 곳에 모아 놓고 보니 무려 64,000여장이나 되어서 이정도면 유네스코의 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을 추진하여도 될 만하다는 판단이 서서 준비를 하고 있단다. 여기 보관이 되어 있는 목판은 720여개 문중의 서책과 400여 문중의 목판이 보존이 되어 있으며, 1570~80년대의 목판 중에서는 국보급으로 인정을 받은 것들도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 보존이 되어 있는 목판은 연대별로 구분하여 보면 19세기 후반>20세기>18세기의 순으로 19세기 후반의 목판이 가장 많은 것으로 되어 있다. 거의 대부분이 개인의 문집으로 약 80%나 차지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문중의 보판(족보) 등으로 되어 있으며, 귀한 자료로는 1630~40년대의 퇴계선생의 서책 목판과, 학봉선생의 목판이 귀한 자료로 인정 받고 있단다. 우리 의성김씨의 학봉 선생의 문집 등의 자료는 [운장각]이라는 개인 유물전시관에 보존이 되어 있는데, 목판은 여기에 보존하기로 하였는가 보다. 운장각의 개관식 날에 종친회 임원의 자격으로 참석을 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여기 보관이 되어있는 목판을 현재 작업을 하여보니 한 장을 새겨 여기 보관을 하게 만드는데 3,000,000원이나 들더라고 한다. 그렇게 많은 돈이 드는 작업이기 때문에 많은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학파의 수장이나 명문거족의 집안이 아니면 그 많은 돈을 부담할 수가 없어서 목판을 남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목판은 글자를 새긴 목판과 손잡이 겸 보관을 잘 하기 위해 목판을 끼워 넣는 마구리로 이루어지는데, 목판은 한 면에 200자<20자씩 20줄(10 x 20)으로 요즘 200자 원고지와 같은 규격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기만 하다. 동양 3국의 목판을 비교하면 중국은 상업적으로 출판을 하는 업자가 새긴 것이어서 마구리가 없이 목판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본은 한국처럼 마구리가 있기는 하지만 글씨 보다는 도판<그림>이 많은 것이 특징이란다. 마구리의 용도는 목판이 다른 판과 맞닿아서 글자가 마모되는 것을 막고, 또한 보관을 할 때에 세워서 보관하기 쉽게 하며, 나중에 관리가 편하게 무슨 책 몇 권의 몇 쪽의 목판인지를 먹으로 적어 놓게 된단다. 또한 누가 새겼는지도 적어 놓기도 한단다. 이런 목판을 새기려면 아무 나무나 다 새길 수가 있는 게 아니고, 나무의 결이 곱고 균일하여야하며 너무 단단하거나 너무 무르지도 않는 나무라야 한단다. 그래서 가장 많이 쓰이는 나무가 산벚나무, 고로쇠나무, 감나무 등이 가장 많이 쓰이고 있으며, 자작나무, 단풍나무, 돌배나무도 쓰이고 있단다. 이런 목재를 구하더라도 그냥 바로 새기는 게 아니라 뻘밭에 3년 정도 묻어서 나무의 진을 모두 빼고, 소금기가 베어서 썩지 않게 그리고 벌레들이 먹지도 않게 만든 다음에 말려서 사용한다고 하니 목판 한 장 한 장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귀중한 우리의 문화재를 이렇게 한데 모아서 보관하여 주고 관리하여 준다는 것은 참으로 잘 하는 정책이라고 칭찬하고 감사해야 할 일인 것 같다. 앞으로 이렇게 우리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관리하는 정책이 더 나와서 우리의 찬란한 문호와 문화재를 모두 이렇게 잘 보존하여 가도록하였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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