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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인 듯해요.
책 추천 글 남기는 거요.
그러니까, 어디 보자. 지난번 마술사 관련 서평을 남긴 게 5월이었으니, 대충 두 달 만이네요.
이제 계절은 완전히 여름입니다. 여름에는 특정 장르가 끌리지 않으시나요?
그래서 책 추천도 그쪽 계열로 준비했습니다.
도서명: 요괴 호러 픽션 쇼
저자: 윤동희, 김채현, 김명, 장혜영, 성기연, 김경은
* 이 책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재활통신망 넓은마을 도서관에 데이지도서로 제작되어 있습니다.
* 소개글 서평
여름 하면 자고로 괴담, 공포, 미스터리, 추리, 서스펜스 장르가 유행하는 계절이다. 꼭 여름에만 그 장르들을 읽으라는 법은 물론 없지만, 날이 덥다 보니 에어컨이 있다 해도 뭔가 좀 심리적으로 오싹한 게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절로 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 《요괴 호러 픽션 쇼》를 들게 됐다. 내가 아무리 공포나 호러 쪽에 좀 약한 면모를 보인다지만 무덤을 헤집고 나오는 망자라든가, 머리 풀어헤친 처녀귀신이라든가, 무당 몸을 입고 몰약을 일삼는 뱀귀신이라든가, 유혈이 낭자한 살인귀의 이야기가 아닌, ‘요괴’를 소재로 한다는 대목에서 용기를 얻었다.
《요괴 호러 픽션 쇼] - 사춘기 청소년 CROSS 작정하고 그들 곁을 맴도는 요괴들
이 작품은 단편집이다. 설명에 의하면 윤동희, 김채현, 김명, 장혜영, 성기연, 김경은 작가가 ‘요괴들이 고등학교에 나타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착상으로 시도한 집필이라고 한다. 때문에 6편의 서로 다른 이야기에, 6개의 각기 다른 주제로, 6가지의 개성 있는 요괴들을 만나볼 수 있다. 역사에서 등장하는 요괴, 우리 주변에, 혹은 마음에 있을 법한 요괴들을.
사료에서 현대로 튀어나온 요괴들은 십대에게로! - [요괴 호러 픽션 쇼》
“무고경주를 이길 수 있는 건 사람뿐이야. 사람이 사람을 믿는 마음.”
첫 번째 이야기는 윤동희 작가의 ‘그날의 분위기’이다. 수학여행을 온 여고생들이 밤에 선생님 눈을 피해 마실을 나온다. 그래봤자, 여행지가 유적지라서 사찰 정도가 한계였다. 한 무리의 여고생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데, 그 와중 무리의 리더인 예니의 눈치를 살핀다. 그녀는 엔터 연습생으로, 최근 학폭 가해자로서 학생들의 입방아에 오른 전적이 있었다.
별은 없지만 달이 환한 밤, 오래된 사찰에서 모종의 일을 겪은 예니.
그녀는 그때부터 거침없이 같은 반 다현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학교는 점점 기묘한 공황에 빠져가는데......
한편 다현의 단짝 친구 묘아는 예니에게서 귀신, 아니 요괴의 낌새를 느끼고, 수학여행지의 사찰에 얽힌 전설을 떠올린다.
백제가 망할 무렵 출몰해 나라를 혼란스럽게 했다는 요괴, 무고경주가 그 사찰에 봉인되었다는 이야기. 그 요괴는 실체도 없는 것이 수십만의 인파를 공황으로 몰아가 서로 도망치게 해 밟혀 죽는 참상을 일으켰다고 했던가.
소설을 읽다가 잠시 ‘어라?’ 하고 고개를 갸웃했던 대목이었다. 나는 그때 나타난 요괴를 ‘공포’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포스럽다, 공포 등의 어원이 요괴 공포에서 왔다고 말이다. 단순한 소설적 변형인지, 아니면 무고경주란 요괴가 따로 있는지는 몰라도, 명칭이 꽤나 기막히긴 했다. 이 요괴는 따지자면 말, 헛소문, 허언, 말 그대로 무고함의 요괴였기 때문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고, 이목을 끌고,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얼마 없다.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성격의 사람이라도,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을 바랄 때가 있다. 때로는 그러고자 다소 과장된 허풍을 치거나, 과한 동작을 해서 이목을 끌기도 한다. 무리의 중심, 마치 세상이 나를 위주로 돌아가는 듯한 감각을 한 번 맛보면 그것에서 초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운동을 잘하려 노력하고, 성적을 높이거나 유지하려 애를 쓰고, 자신의 외모를 관리하는 것. 이런 스펙을 갈고닦는 이유가 자기 향상심 때문도 아니요, 우수한 특기로 인해 손에 들어오는 메달, 상장, 표창도 아니요, 다른 아이들 앞에서 모두의 주목을 받는 순간이 좋기에 더욱 노력했던 경험이, 그런 한때는 누구나 있지 않을까.
물론 나도 그런 마음이 없었다고 적지는 않겠다.
하지만 모두의 중심이 되고 리더가 되는 게 아무리 좋다 한들, 누군가를 무고하면서까지 관심을 받고자 하는 심리는 참 이해하기 난해한 영역이다. 질풍노도의 시기인 십대라고 해도 말이다. 막말로 나도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 인정을 받는 거 좋다 이거다. 어떤 승부나 대회나 경기에서 이기는 것도 좋다 이 말이다. 뭔가 내가 우월한 기분, 내 가치를 증명한 기분이 참 형용할 수 없이 좋다. 그런데 그 기분을 멀쩡한 사람 무고하는 헛소문을 내면서까지 누려야 하나 싶다. 그건 너무 구저분하잖아. 그야말로 이것이 진정한 ‘찐따’ 인증 아닌가.
때문에 소설 속의 예니가 참 답답했고, 한심했고, 어딘가 한구석이 심하게 결여되어 보였다.
예니라는 인물이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어중간한 단계의 청소년의 불안함이나 결여된 면을 표현하고자 의도적으로 구축된 캐릭터였다면 좋은 설정이다.
한편 마지막 장면이 매우 찜찜하게 끝나서 6편의 이야기 중 결말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하다. 그렇지만 헛소문, 뜬소문, 가담항설, 무고한 이야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한 사람을, 단체를, 나아가 이 사회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것 같아 냉한 기운이 들었다. 하기사, 백제도 헛소문에 망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다현이와 묘아의 관계가 끝까지 베프로 남았으면 좋겠다. 피해자와 가해자 구도가 아니라.
“그래요, 팔찌는 지귀를 쫓아내 줘요. 다만 팔찌는 지귀에게 먼저 가지 않고 지귀가 마음에 품은 사람에게 간대요. 그 사람이 지귀를 알아보고 직접 물리치라는 의미로요.”
다음 에피소드는 김채현 작가의 ‘버닝 러브’인데, 다 읽고 나면 제목이 예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사랑, 아니 집착을 사랑이라 우기는 사람이 불타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제법 장문의 메일 형식을 빌린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때 아이돌 ‘스타 더스트’의 멤버였던 리나. 그녀는 같이 활동했던 멤버 언니에게 그 시절 있었던 어떤 기이한 일화에 대해 말한다. 언니가 끼고 있는 팔찌, 한때는 자신의 것이었던 팔찌에 대해서.
리나는 아이돌 그룹 시절, 소속사 대표의 아들 수혁과 교제했다. 연인이었다. 둘 다 아직 미성년자였지만, 서로에 대한 어떤 확신으로 리나와 수혁은 여행을 갔던 별장에서 밤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수혁은 상냥한 연인이 아닌 짙은 집착으로 똘똘 뭉친 화신처럼 변하기 시작하는데......
리나는 어릴 적 경험과 할머니가 남겨준 팔찌를 통해 수혁의 정체를 깨닫는다. 그는 어느새 사랑이 집착으로 변질되어 불이 된 요괴, 지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지귀’는 우리 역사 문헌에도 기록이 있다. 신라시대 ‘지귀’라는 남자가 있었다. 하루는 서라벌에 나왔다가 지나가는 선덕 여왕을 보고 단번에 여왕을 사모하게 되었다. 그 사모의 마음이 너무나 열열해서 온몸이 불타오르는 귀신이 되었다. 이것이 사랑이 집착이 되고, 그것이 제 몸까지 태우게 된 불귀신, 지귀 혹은 지귀심화로도 불리는 요괴의 전설이다. 온몸이 불타는 이 귀신은 말 그대로 화재요, 재앙이라 백성들이 두려워했다고 한다. 결국 선덕 여왕이 지귀를 쫓는 주문을 지어 내놓았고, 백성들이 주문을 쓴 종이를 집집마다 붙여 지귀를 막았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 등장한 팔찌에는 주문이 적혀 있다고 한다. 직접적으로 내용이 언급된 바 없지만, 그 주문이 이 주문 아닐까?
“지귀는 마음에 불이 일어 /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사료에도 제법 신화적인 요소나 괴기 요소가 풍부하다. 이렇듯 역사 속의 요괴나 귀신을 현대로 끌고 와서 재해석한 부분이 꽤나 흥미로웠다.
나한테 왜 왔니? 네가 불렀잖아! - 《요괴 호러 픽션 쇼》
“요 녀석이 너희 집에 숨어든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니? 아니지. 이 요물들은 우리 같은 인간들을 귀신같이 찾아낸다니까.”
세 번째 이야기는 김명 작가의 ‘더비더비’이다. 이야기의 시점은 작년인 것 같다. 코로나가 한창 극성스러운 시기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 덕구가 집에 틀어박혀서 학교를 안 간다.
대신 다른 것에 몰두하고 있었다. 학원도 빠지면서 그가 몰입하는 것은 불법 촬영물, 아마도 야동인 것으로 추정되는 영상물이었다. 처음에는 덕구가 스마트폰 중독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런 종류의 불법 영상물이었다. 으웩, 사춘기 남자애들이 그렇고 그런 면이 있다지만, XX 염색체를 가진 태생상 좀 거북하기도 했다. 예전에 엄마가 동생 방에서 빨간 딱지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충격을 먹었다고 나한테 살짝 알려줬는데, 그 일이 갑자기 생각나네.
심지어 학원에서 만난 친구 역시 그렇고 그런 동영상에 아주 빠삭해 보인다. 허, 유유상종이라더니!
그나마 덕구에게 건전한 취미가 있다면 도마뱀 사육이었다. 그런 어느 날, 덕구는 집에서 난생 처음 보는 도마뱀을 발견한다. 그가 따로 주문한 건 아니고, 애완용 도마뱀을 위한 택배 주문품에 묻어온 거였다. 마침 도마뱀 관련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는 주인이 ‘수일이점대’라는 희귀종을 분실했다며 뭔가 기묘한 경고 메시지와 함께 찾는 문자를 본 덕구. 하지만 그는 새로운 도마뱀에 호기심을 느꼈는지 어쨌는지 바로 주인에게 연락하지 않고 그 희귀 도마뱀에게 ‘더비더비’라는 이름까지 지어주며 관찰한다. 그런데 더비더비를 곁에 둔 후부터 덕구에게는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문득 화장실 거울을 통해 본 그의 모습이 도마뱀처럼 변해 있었던 것.
덕구는 변화에 혼란스럽지만, 첫사랑이자 짝사랑 백지윤과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위해 학원에 가기로 한다. 물론 그 혼자 소중하게 여기는 추억인 것 같다. 그리고 학원에서 화장실 몰카 사건을 접하게 되고, 그 범인 중 하나가 그의 친구 세준이라는 것도 알게 되는데......
나중에 도마뱀 관련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는 주인에게서 자신의 변화에 대한 것도 듣게 된다. 이유는 더비더비에게, 아니 요괴 수일이점대에게 기를 빨린 결과라고. 그러면서 슬쩍 들어난 주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그는 말했다. 덕구 스스로가 요물을 불러들인 거라고. 과연 덕구는 수일이점대가 자신을 떠나가게 할 수 있을까?
“서묘: 아주 특별한 쥐. 보통 쥐보다 쥐를 잡는 솜씨가 뛰어나며 고양이보다 쥐를 잘 잡는다. 이 쥐를 잡거나 가까이하면 똑......”
넷째로는 장혜영 작가의 ‘꼴찌를 탈출하라’였다. 제목만 보면 아기자기한 내용일 것 같았는데 읽어보면 영 그렇지만도 않다.
이야기는 병수가 꼴찌를 하게 되면서 시작한다.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답안을 밀려쓰는 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광의 9등급을 받았다. 꼴찌는 ‘찐빵’으로 통하는 같은 반 친구의 자리였는데, 병수 자신이 그 위치에 놓이니 그렇게 쪽팔릴 수가 없다. 그것도 무려 한자릿수 8점으로!
병수는 애석함과 답답함을 곱십으며 하교하는 길에 우연히 1등 미오의 이어폰을 주어주게 되고, 그 계기로 그녀에게 들으면 집중이 잘 된다는 음원 파일을 받게 된다. 찌지지직 찌지지지직 하는 잡음처럼 들리는 소리. 그 음원을 듣는 순간 분노, 꼴찌 신세가 부각되고 친구에게 무시당했던 기억이 상기되며 마음속에 분노가 솟아났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꼴찌를 탈출하겠다는 독한 결심을 품는다. 꼴찌 신세를 면한 찐빵에게서 우연히 혹은 억지로 쪽지 하나를 입수한 병수는 학교의 전설 내지 괴담 ‘서묘’에 관해서 알게 되는데......
학교마다 이런 전설이나 괴담 한둘쯤은 있기 마련이다. 무슨 교내 7대 미스터리 같은 거창한 게 아니더라도 말이다.
미아8동 H 초등학교 때는 교내 운동장 미끄럼틀이랑 그네가 사실 용이었는데, 놀이기구로 변한 거라는 둥, 밤이 되면 이순신 장군 동상이 칼을 뽑고 돌아다닌다는 둥, 별의별 전설이 아이들 사이를 떠돌았다.
수유리 H 맹학교 중등부 때는 밤에 몇 층 여자 화장실 몇 번째 칸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얘기가 있었다. 어느 학생이 그 칸에서 몰래 아이를 낳다가 아기와 함께 운명을 달리했다고. 재수가 없으면 그 귀신과 마주칠 수 있다고.
그랬다. 맹학교에도 그런 괴담은 있다.
고등학생 때는 학교 본관 2층인가 3층인가에서 원학생 식당으로 통하고, 그 경사로를 쭉 내려가면 운동장까지 갈 수 있는 길에 설치된 난간에 대한 전설이 떠돌았다. 난간 중 움푹 파인 지점이 하나 있었는데, 학교 선배가 투신을 해 떨어지면서 머리가 난간에 부딪혀 생긴 것이라는. 그 선배는 수능 점수에 비관해 자살한 거라는.
참고로 현재 H 맹학교에는 그 난간 없다. 리모델링 및 보수 공사하며 낡은 설비를 교체했으니까.
곱십어보니 초반에는 아기자기했던 교내 전설이 점점 학년이 올라가고 교육 기관이 상위가 되면서 차츰 세태나 관심사를 반영하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그 교내 괴담 및 전설은 죄다 카더라 통신이다.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라는 거다. 하지만 가끔 불현듯 그 이야기가 떠올라 괜히 화장실 가기 무서웠던 때가 있었고, 고3 때는 수능 성적에 비관해 하늘로 갔다는 그 시각장애 선배의 이야기가 자주 생각났더랬다.
아마 병수도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찐빵은 정말 그 서묘의 기운을 받아 꼴찌를 면하게 된 걸까?
서묘를 잡으려 학교 창고 주변을 서성이고, 친구와의 사이도 멀어지며, 심지어 반장의 노트까지 슬쩍하게 되는 병수.
그 와중 미오는 그를 은근히 응원한다. 그녀는 요점 정리 노트를 책상에 두고 사라지는 등 병수를 돕는다. 아니, 진실로 돕는 것일까?
이야기의 말미에서 교내 괴담에 등장하는 서묘의 정체가 드러난다. 서묘는 쥐를 잡는 쥐, 고양이보다 쥐를 더 잘 잡는다. 그런데 그 방법이 참...... 무슨, 고독 제조 비법도 아닌 것이, 쥐들끼리 서로 싸우게 하고 경쟁을 시켜서 잡아먹는다니.
누구나 한번은 시험 점수나 등급의 압박에 시달린다. 1등을 맛보기 위해 노력하고, 1등은 그 자리를 사수하려 애를 쓴다. 나와 성적이 엇비슷한 애를 어떻게든 이겨보려 하고, 더 떨어지지 않기 위해 현상 유지를 하려 발버둥을 친다. 나도 그랬던 적 있다.
점수를 유지하려 친구들과 침목을 다지는 모임을 피한 적 있고, 친하게 어울리던 또래 모임에서 어디 놀러 가자든가 모임 활동을 하자는 등의 제안이 올 때, 약속이 있다는 둥, 컨디션이 별로라는 둥, 핑계를 대며 빠졌었다. 그리고 곧장 집에 와서 공부했다. 걔들이 노는 동안 나는 공부하면, 내가 몇 발짝이라도 더 앞설 수 있을 테니까. 경쟁에서 약간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을 테니까.
웃긴 건 그런 일들이 양심에 찔렸는지 나중에 친구들에게 내가 손수 정리한 요약 노트라든가, 스스로 공부하며 뽑고 내고 했던 예상 문제와 답을 공유했다는 거다. 솔직히 이거 보여줬다가 정작 내가 그 문제 답을 못 맞춘다든가, 친구들 점수만 높여준다든가 하는 상황을 보는 건 아닌가, 잠시 그런 얍삽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근데, 그런 거 보여줘도 공부는 할 녀석은 하고 안 할 녀석은 안 하더라.
좌우간 병수처럼 눈이 뒤집혀서 타인의 물건에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에 제법 공감이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 스토리의 결말이 제일 마음에 들었고, 인상에도 깊게 남았다. 얘도 나랑 비슷한 행동을 하더라고.
“너도 이젠 감서의 꼴을 제법 갖춰 가네. 감서! 들어는 봤냐? 몰래 상대방의 몸을 갉아먹는다더라. 조금씩 갉아먹히는 동물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하고. 갉아먹는 정도가 심해지면 상대가 죽게 될 때도 있다는데, 그때까지도 상대방은 자기가 갉아먹히는지도 모른다더라.”
다섯째 에피소드는 성기연 작가의 ‘날아라, 스피닝’이다. 주인공 민상은 평범하다. 아니, 집이 꽤나 잘사는 평범한 청소년이다. 게임에 취미를 붙인 것 같지만, 그 정도야 요즘 청소년에게는 평균 아닌가.
그러나 이런 민상에게 어떤 위화감을 느끼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상하게 같은 반 친구 진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가벼운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심한 짓도 한다. 진수의 자전거를 망가뜨리는 행동이 바로 그것.
사실 원래 민상과 진수는 제법 친한 친구 사이였다. 민상은 진수와 베프가 되고 싶어 했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고, 아마도 동경도 좀 했던 것 같다. 진수는 뭐든 잘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민상이 진수보다 나은 건 집의 부유함 정도일까.
드럼도 잘해, 기타도 잘 쳐, 사교성도 좋아, 그런데 그 친구가 나만의 베프가 아니고, 나와의 관계를 별로 중요하게, 그러니까 내 마음처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서운할 만하고, 화가 좀 날 만하고, 심술 부리고 싶을 만하다. 질투가 나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민상의 행동은 좀 도가 지나쳤다. 그의 마음 저변에 깔린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한편 민상은 성질 포악해 보이는 동급생 태규의 수작으로 진수를 다치게 하기도 했다. 태규는 일명 ‘감서’로 통하는 불량 학생인데, 나중에 크게 될 싹수가 보였다. 뉴스에 십대 청소년 범죄 사건 관련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민상은 태규와의 갈등과 진수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깨닫는다. 스스로를 갉아먹던 마음의 실체, 제 손톱을 깨물던 무의식의 실체, 그것은 열등감이었다.
민상은 태규를 반면 교사 삼아 자신은 그처럼, 그와 같은 감서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데......
요괴도 내 안에, 요괴를 쫓을 수 있는 열쇠도 내 안에...... - 《요괴 호러 픽션 쇼》
“네가 너를 구하게 될 거야.”
마지막 이야기는 김경은 작가의 ‘요괴 사냥꾼 신돈복’이다. 제목을 보고 현대판 요괴 사냥꾼 학생 이야기를 상상했더랬다. 낮에는 평범한 고등학생, 밤이 되면 요괴 잡는다고 동네를 누비는 스토리. 혹은 여느 고등학생이지만 집안 가업 탓에 교내에서 일어나는 요괴 관련 사건에 뛰어들게 되는 스토리. 이름이 신돈복이라고 하고, 좀 촌스럽게 작명이 된 인상이 드니, 어쩌면 대대로 요괴 잡는 걸 업으로 삼은 가문의 후손이 아닐까?
내용을 보니, 내 상상력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반절은 맞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조선 제일의 요괴 사냥꾼 신돈복이다. 정확히 말하면 신씨 집안의 돈복이었던, 현생에서는 신지언으로 불리는 여고생이 된 인물이다. 무려 13번째 생의 이름이다. 요컨대, 그는 13번이나 환생을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13번의 생해 모두 요괴랑 드잡이를 하며 보냈다.
실제 조선시대 신돈복 씨로 말할 것 같으면, <학산한언>이란 책까지 남겼을 정도로 능력 있는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픽션 아니고 문언과 인물 모두 존재한다는 거. 인터넷 검색하니 신돈복과 그가 편저한 책이 나오더라.
그런데 이번 생에서 신지언이 된 신돈복은 결심한다. 13번째인 이번 인생에서는 요괴 퇴치고 뭐고, 반드시 소설만 쓰겠노라고!
물론 그의 계획은 신지언으로서 전학을 오게 된 학교에서 만난 김유나로 인해 초장부터 흔들리게 된다. 뭐, 사실 신돈복이 등교 준비할 때 까마귀가 까악까아악 울 때부터 알아봤다.
하필 김유나에게 슬픔을 양분 삼는 요괴 ‘복중능언’이 마수가 뻗쳐 있었기 때문이다. 복중능언의 목적은 하나, 김유나가 슬픔에 잠식되는 것이다. 최근 이슈가 된 가스라이팅이다. 복중능언이 하는 짓은 말이다. 김유나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만들고, 요괴인 자신의 말을 듣게 하고, 그렇게 김유나가 좌절할 수밖에 없는, 슬퍼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간다.
신지언, 아니 신돈복은 결국 김유나를 돕기로 하고, 김유나는 끝에 가서 자신 스스로 복중능언과 대면한다.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갖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데도 용기는 필요하다. 그 사실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과연 조선 최고의 요괴 사냥꾼이었다는 신돈복의 요괴 퇴치 비방은 무엇일까?
‘요괴 사냥꾼 신돈복’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복중능언 퇴치 방법에 대해 뭔가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지 않았다는 부분이다. 대충 준비물이 녹즙, 잘 깎은 연필, 자신에 대한 긍정이 필요한 것 같은데, <학산한언>이랑 잘 엮어서 독자에게 사전 지식을 주고 시작하거나 나중에라도 책 내용을 일부 발췌하는 식으로 설명을 해줬으면 이야기가 더 풍성해지고 몰입도도 더 커지지 않았을까?
《요괴 호러 픽션 쇼》 - 요괴란 무엇이고, 어디에서 오는가?
<조선왕조실록>에는 ‘인요물괴’라는 말이 종종 등장한단다. 사람 중에 요사한 인물이 나타나고, 물건 가운데 괴이한 것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당연히 나쁜 징조로 보았고, 특히 나라에 이변이 생길 징조로 여겨졌다. 이 ‘인요물괴’를 줄여서 ‘요괴’라 불렀다. 이런 어원이 조선시대 때 존재한 거 보면, 그보다 앞전 시기인 삼국시대에도 ‘요괴’라는 건 통용되었던 것 같다. 하기사, 사료를 보면 백제 멸망이라든가, 신라 부흥이라든가, 그런 길흉을 예고하는 데 요괴가 등장하곤 했었다.
그렇다면 ‘요괴’란 무엇인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풍문에 의하면, 올바르게 변하지 않고 변해서는 안 될 것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서양의 늑대인간 전설에 보면, 늑대에게 물린 사람이 늑대로 변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본래 사람은 늑대로 변할 리가 없는데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늑대에게 물려 보름달만 뜨면 늑대로 변신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늑대인간도 요괴에 범주에 속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사용한 물건이 변해서 이루워진 것, 가령 도깨비나 학교에 괴담으로 떠도는 밤만 되면 걸어다니는 이순신 장군상 등도 요괴 취급이다. 물론 우리에게 친숙한 구미호 역시 요괴라고 한다. 심지어 물귀신까지.
이 정도쯤 되면 ‘요괴’라는 것의 정의가 애매해진다. 아니 무슨, 귀신도 요괴 취급이란 말인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도 있다. 요괴는 기본적으로 바르지 않다는 인식이다.
그렇다면 이 ‘요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대체로 이야기 속에서는 저절로 생긴다고 한다. 우연이나 어떤 신비하고 기이한 섭리, 혹은 선업과 악업 등 인과율에 따라서 말이다. 가령, 벼락을 맞은 나무에 신령이 깃든다거나 피가 묻은 바늘이 도깨비가 된다거나 하는 식이다.
《요괴 호러 픽션 쇼》에서는 요괴의 탄생은 몰라도, 그 요괴를 끌어들이는 이유는 대상자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예니의 뒤틀린 마음이 무고경주를, 수혁은 연인에 대한 집착으로 지귀를, 덕구는 불법적인 야한 영상에 중독으로 수일이점대를 불러들였다. 병수는 경쟁심으로 서묘의 타겟이 되었고, 민상은 열등감으로 인해 감서가 될 뻔했다. 그리고 유나는 자신의 슬픔에 메몰되어 복중능언과 엮이게 됐다.
주인공들이 했던 일은 분명 잘못이다. 요괴에 홀려서 저지른 실수라기보다 그들의 그릇된, 어긋난, 부족한, 결핍이 요괴를 불러들였고, 그들의 행동력을 키웠다고 봐야 한다.
십대란 불안정한 시기이다.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어중간한 시기라서 질풍노도라고 하지 않던가. 어딘가 빈틈이 있기에 요괴들의 먹잇감이 되기 쉽고 요괴가 꼬여들기 수월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십대만 요괴의 타겟이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어른이 됐다고 열등감 없는 거 아니고, 성인이라고 경쟁심이나 질투, 집착이 없는 거 아니니까. 특히 요즘 같은 SNS 시대에는 다른 요괴는 몰라도 무고경주는 아주 활개를 치지 않을까 싶네.
다행하게도 이야기 속의 아이들은 요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요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듣는다. 그렇다. 주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그뿐이다. 방법을 알려주는 일. 요괴와 싸우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요괴와의 싸움에서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지탱해야 하는 것도 ‘나’의 몫이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고, 내가 이 세상에서 바꿀 수 있는 것도 오직 ‘나’뿐이기에.
생각해 보면 나도 어느 시기에서는 《요괴 호러 픽션 쇼》에 나온 요괴들 중 몇몇은 마주했던 것 같기도 하다. 흔히 심마니 어쩌니, 의심마귀니 어쩌니 하는 것들이 불쑥 찾아오는 경우. 멘탈 붕괴되는 일들과 마주했을 때.
사람이 있는 한 요괴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요괴를 내쫓는 방법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