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80~90세 되어서 수행을 하다 죽을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재가자로서는 참 막막합니다.
요양원이나 병원 말고,
집이나 수행처(절)에서 수행하다 죽을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죽을 때 수행의 환경'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 스님 의견이 필요합니다.
다음에 이 주제로 법문 좀 해주십시오, 스님.
[법 문]
저 숲속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 한번 알아차리는데 있어서도 앞생각 뒷생각이 오락가락 야단법석 떠들어 댑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이러한 아사띠(Asati)의 영역에서도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마음은 제 할 일을 제 스스로 합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삶의 회전무대의 업 조건을 알면 알아차림밖에 없으며, 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근래에 들어 Well_Being과 Well_Dying이란 말을 참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Well_Dying에 대해 더욱 관심을 많이 두고 있는 듯싶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뭐 『잘 살고, 잘 죽자』라는 말인 것 같은데 Daum 인터넷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나와 있더군요.
⚫웰빙[well_being]: 몸과 마음의 편안함과 행복을 추구하는 태도나 행동.
⚫웰다잉[well_dying]: 품위 있고 존엄하게 생을 마감하는 일.
그럼 Well_Being과 Well_Dying의 관계에서,
Well_Being의 “어떻게”는 ‘바르게_잘’로서, 몸과 마음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결과가 Well_Dying이요, 즉 모든 번뇌의 苦/集/滅/道가 아닐까 싶습니다. 붓다께서는 둑카(苦)를 보는 자 둑카(苦)의 끝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삶과 죽음, 生과 死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빤냐띠, 관념으로서 生과 死인데 이것은 보통 중생들이 알고 있는 고제의 生과 死입니다. 즉 태어나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빠라맛타로서의 生과 死입니다. 지금 생겨나고 지금 사라지는 것, 모든 현상들의 生滅/生滅의 과정을 말할 수 있습니다.
실은, 살고 죽는 것은 모두다 ‘業’일 뿐이며, 그 무엇(者)도 아닙니다. 내가 살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목갈라나 존자의 업보도 죽인 자는 없고 업에 의한 과보로서 죽은 것일 뿐입니다. 「因/果」만이 있으며 업의 과정일 따름입니다. 사실 ‘인간’ 그 자체가 업일 뿐입니다.
生과 死(滅)는 처음과 끝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처음도 끝도, 시작도 종지부도 없다는 것이 윤회의 굴레, 삶의 회전무대(無限遡及行)라고 일컫겠지만, 알아차림, 대상으로 아는 수행으로 인하여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쉐우민 큰 사야도께서는 ‘알아차림 하나만 끈질기게 사용하면 마지막엔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그 끝에 이를 것이라는 확신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끝, 종지부, Ending이야말로 곧 Well_Being의, ‘바르게_잘’의, Well_Dying의 결과, 복지의 결실, 성과가 아닐까요?
아주 지극한 자연스러운 원인/결과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있음으로 인하여 경험되는 모든 대상으로부터 배우고 이해해야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까닭입니다. Well_Being과 Well_Dying의 관계도 다름 아닌 그 원인/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부딪힘(경험)이 없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경험되면 대부분이 마음 안에 저장됩니다. 특히 안 좋은 일들은 더욱더 나중에 아무 때, 장소와 상관없이 불쑥불쑥 떠오르는 것이 마음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된 마음의 성질, 성품으로부터 배우고 이해해서 능숙하게 볼 줄 알도록 익혀야만이 제대로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이른 봄에 파종한 곡식을 가을에 수확하는 가을걷이 추수(Golden harvest)처럼 말입니다. ‘어떤 인생을 살아가느냐?’는 ‘어떻게 삶을 살아갈 것인가?’ Golden harvest는 곧 Well_Dying을 맞이할 것입니다.
『죽을 때 맞이하는 수행의 환경』이란 satizone(사띠네 집)이나 中道에 머물면서 사띠와 지혜가 법으로서 제 할 일을 제가 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고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야도께서는 이런 사띠와 지혜의 성품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일을 같이한 일꾼(사띠)과 주인(지혜)과의 관계처럼 상호간 손발이 척척 맞게 알아서 일을 다 한다. 국수를 먹는데 젓가락 2개와도 같다.
지혜는 오래 수행을 하여 능숙한가, 능숙하지 못한가와, 수행을 이해했는가, 못했는가 그것에 대해 말을 해준다. 이것을 마음의 힘, 사띠의 힘, 지혜의 힘이라 한다.
지혜로서 일을 다 한다. 지혜가 이것저것 다 알아서 한다.
한번 생각을 했다하면 그 다음에는 저절로 다 알아서 일을 하게 된다. 한번 지시하면 척척 알아서 다 하는 것처럼 한집에 사는 주인과 일꾼의 관계와도 같다.
아는 것에다가는 아무것도 이렇게 저렇게 할 필요는 없다. 사띠의 힘보다는 지혜의 힘, 그것만이 한다.
아울러 中道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가야할 길, 내가 있어야 할 곳, 내가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인가?
“내가 가야할 길을 가고,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하라”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자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라고 하는 것은 中道를 가라고 하는 것이다. 좋아함도 없고, 싫어함도 없는 중도의 길을 가라고 하는 것이다.
사띠와 지혜가 있을 것 같으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 없이 항상 그렇게 생활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자기가 가야 할 길이다.
자기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으라는 것은 어디에 있으라는 것인가? 그곳에 있으라고 하는 것은 사띠를 두는 것을 다시 알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 알고 있는 것이 곧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다.
자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이 체험(경험)하는 것에 대해서 바른 견해로 보는 것, 그것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사띠가 계속 이어지는 것에서 마음가짐이 바르게 되는 것, 그것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모두 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고, 내가 가야 할 길을 가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하라.
이와 같은 가르침을 자신의 인생, 삶의 지표를 삼아서 깨어있는 사띠와 흔들림 없는 앎의 지혜를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으로 사료 됩니다. 죽을 때 맞이하는 수행의 환경, 조건으로는 이것이면 충분하리라 여겨집니다.
근래에는 장례문화도 많이 바뀜으로서 거의 요양원이나 호스피스 병동이 피할 수 없는 곳(장소)이 되어버렸습니다. 마지막 숨을 어디에서 거두느냐는 것보다는 마음의 힘이 어떤가, 어떤 진리(담마)를 터득하였는지를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되지 않을까요?
Golden harvest is Well_Dying이기에 그 원인/결과가 따로 없을 것입니다.
쉐우민 큰 사야도께서 하신 수행의 주된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 수행은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
▸부단없이 꾸준히 위빠사나 법을 바르게 알고 나면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안 하고는 베길 수가 없다.
▸사리풋타, 아라한이 될 때까지도 하는 것이다.
아울러 떼자니아 사야도께서는 수행자가 항상 잊지 않고 고찰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①죽음; 생멸이 항상하지 않다고 아는 사람은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 라고 안다.
②안 좋다는 것; 아뚜바, 좋다고 여기지 않는 것, 不淨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③멧타; 도다가 없는 순간은 멧타가 저절로 일어난다.
④부처님의 공덕; 지혜가 생겨서 지혜를 다시 알 때에 부처님을 생각하게 된다.
수행을 꾸준히 오래도록 하게 되면 항상 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집착하지 않습니다.
<Nibbana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원하면 안 된다. 원인이 갖춰져야 한다. nibbana는 원인을 알면 된다. 할 줄 아는 것도 다 지혜이다. 할 줄 안다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얻으려 하지 말고 할 줄 알도록 하라. 할 줄 알면 nibbana를 안다. 원인/결과를 알면 nibbana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nibbana의 대상은 지혜가 대상이다.
보통의 대상으로는 nibbana가 안 된다. 「대상과 아는 마음」의 관계는 지혜에 따라서 nibbana를 말할 수 있다.
dukkha를 알면 그 반대되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지혜는 양쪽 다 알 수 있다. dukkha를 알 수 있으면 nibbana를 알 수 있다.
사두사두사두~
_(20230610 멀리 타국에서 체류 중인 한 수행자의 청법에 의해 법을 설하다/경주 마하보디 선원에서 사사나 스님)_
첫댓글 사두 사두 사두.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