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se levantó un maestro de la Ley, y para poner a prueba a Jesús, le preguntó: «Maestro, ¿que he de hacer para tener en herencia la vida eterna?». Él le dijo: «¿Qué está escrito en la Ley? ¿Cómo lees?». Respondió: «Amarás al Señor tu Dios con todo tu corazón, con toda tu alma, con todas tus fuerzas y con toda tu mente; y a tu prójimo como a ti mismo». Díjole entonces: «Bien has respondido. Haz eso y vivirás».
Pero él, queriendo justificarse, dijo a Jesús: «Y ¿quién es mi prójimo?». Jesús respondió: «Bajaba un hombre de Jerusalén a Jericó, y cayó en manos de salteadores, que, después de despojarle y golpearle, se fueron dejándole medio muerto. Casualmente, bajaba por aquel camino un sacerdote y, al verle, dio un rodeo. De igual modo, un levita que pasaba por aquel sitio le vio y dio un rodeo. Pero un samaritano que iba de camino llegó junto a él, y al verle tuvo compasión; y, acercándose, vendó sus heridas, echando en ellas aceite y vino; y montándole sobre su propia cabalgadura, le llevó a una posada y cuidó de él. Al día siguiente, sacando dos denarios, se los dio al posadero y dijo: ‘Cuida de él y, si gastas algo más, te lo pagaré cuando vuelva’.
»¿Quién de estos tres te parece que fue prójimo del que cayó en manos de los salteadores?». Él dijo: «El que practicó la misericordia con él». Díjole Jesús: «Vete y haz tú lo mismo».
«Un samaritano (...) tuvo compasión; y, acercándose, vendó sus heridas (...) y, montándole sobre su propia cabalgadura...»
Rev. D. Llucià POU i Sabater
(Granada, España)
Hoy, nos preguntamos: «Y, ¿quién es mi prójimo?» (Lc 10,29). Cuentan de unos judíos que sentían curiosidad al ver desaparecer su rabino en la vigilia del sábado. Sospecharon que tenía un secreto, quizá con Dios, y confiaron a uno el encargo de seguirlo... Y así lo hizo, lleno de emoción, hasta una barriada miserable, donde vio al rabino cuidando y barriendo la casa de una mujer: era paralítica, y la servía y le preparaba una comida especial para la fiesta. Cuando volvió, le preguntaron al espía: «¿Dónde ha ido?; ¿al cielo, entre las nubes y las estrellas?». Y éste contestó: «¡No!, ha subido mucho más arriba».
Amar a los otros con obras es lo más alto; es donde se manifiesta el amor. ¡No pasar de largo!: «Es el propio Cristo quien alza su voz en los pobres para despertar la caridad de sus discípulos», afirma el Concilio Vaticano II en un documento.
Hacer de buen samaritano significa cambiar los planes («llegó junto a él»), dedicar tiempo («cuidó de él»)... Esto nos lleva a contemplar también la figura del posadero, como dijo Juan Pablo II: «¡Qué habría podido hacer sin él? De hecho, el posadero, permaneciendo en el anonimato, realizó la mayor parte de la tarea. Todos podemos actuar como él cumpliendo las propias tareas con espíritu de servicio. Toda ocupación ofrece la oportunidad, más o menos directa, de ayudar a quien lo necesita (...). El cumplimiento fiel de los propios deberes profesionales ya es practicar el amor por las personas y la sociedad».
Dejarlo todo para acoger a quien lo necesita (el buen samaritano) y hacer bien el trabajo por amor (el posadero), son las dos formas de amar que nos corresponden: «‘¿Quién (...) te parece que fue prójimo?’. ‘El que practicó la misericordia con él’. Díjole Jesús: ‘Vete y haz tú lo mismo’» (Lc 10,36-37).
Acudamos a la Virgen María y Ella —que es modelo— nos ayude a descubrir las necesidades de los otros, materiales y espirituales.
♣ 울타리를 허물고 다가가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 ♣
오늘 복음에서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10,29). 그러자 그분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이웃이 누구이며 사랑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다양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옷 벗김과 폭행을 당하여 초주검이 됩니다(10,30). 폭력적인 이웃을 만난 것입니다. 이 만남에서는 그 어떤 생명의 숨결도 창조의 손길도 찾아볼 수 없었고 단절과 파괴로 치달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제와 레위인이 이렇게 초주검이 된 상태로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버립니다(10,31-32). 괜히 도와줬다가 변을 당하거나 죽은 사람일 경우 율법에 따라 정결예식 등을 해주어야 하니 부정을 타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보기는 하였으나 멀찍이 피해 지나쳐버립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에 충실할 생각뿐이었고, 고통받는 사람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외면해버렸습니다. 여기에는 하느님을 발생시키는 진정한 만남, 성사적 만남이 없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행동만이 있습니다. 이런 스침의 관계는 깊은 인격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 없고 진정한 사랑과도 무관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마리아인이 길가에 쓰러져 있는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줍니다(10,33-34). 그뿐 아니라 여관 주인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잘 돌봐줄 것을 부탁하고 떠납니다(10,35).
강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폭행을 당한 그 사람에게 다가간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통 신앙에서 벗어난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하고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을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10,33) 다가가 진정한 이웃이 되어 아낌없는 사랑과 봉사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귀한 동료 인간들의 고통과 아픔, 부당한 현실과 비인간적 상황 앞에서는 오직 사랑해야 할 의무만이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종교나 이념, 종족과 신분, 개인적인 차이 등 그 어떤 조건도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에는 조건도 한계도 없고, 그 어떤 울타리도 머뭇거려야 할 중립지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만남을 갖습니까?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을 만날 때, 누군가가 폭행을 당하거나 소매치기를 당할 때, 교통사고로 위급한 상황을 당할 때 외면하거나 비겁한 침묵을 하고, 못 본 척 하며 지나쳐버리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하느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함을 적극적으로 다가가 지켜나가며 억울한 이들의 인권을 되찾아주며, 고통 받는 이들을 연민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고통 중에 있는 원수에게 오직 연민의 마음으로 다가가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며 아낌없이 사랑을 나누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도록 마음을 가다듬었으면 합니다. 이제는 나 자신의 안위와 행복에만 몰입하는 이기주의에서 탈피하고, 동료 인간들의 아픔과 비인간적 상황에 적극적이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대하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이웃이 누구이냐를 생각하기보다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주기로 힘쓰면서...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네가 이웃이 되어 주어라, 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제가 초등학교 2-3 학년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께서 갈 곳이 없는 집 없는 아이를 집 주위에서 발견하셨습니다.
옷도 더럽고 얼굴도 더러운 말 그대로 거지였고 나이는 제 또래 쯤 되어보였습니다.
길에서 서성이는 그 아이를 보고 어머니는 그 아이를 들어오라고 해서 밥을 배불리 먹였습니다.
그리고 불쌍했는지 목욕도 시켜주시고 입던 옷은 버리고 대신 우리 옷도 꺼내 입히셨습니다.
아이가 집을 나와 갈 곳이 없다고 하자 어머니는 갈 곳이 생길 때까지
우리 집에서 지내라고 배려까지 해 주셨습니다.
우리 남자 넷, 즉 아버지, 형 둘과 나는 어머니의 이런 배려에 반대를 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그저 갈 곳도 없고 불쌍하니 도와주자고 하였습니다.
저희는 마지못해 그 아이를 맞아들였고 그렇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학교 갔다가 집에 왔는데 어머니께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저희를 맞아주셨습니다.
아이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삼형제가 열심히 모으던 돼지 저금통도 같이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집 뒤란에 돼지저금통들이 배가 갈라져서 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는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어보는 율법 교사에게
‘네가 이웃이 되어 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즉 같은 동족 중 가장 사랑을 많이 실천해야 하는 사제나 레위인까지 지나쳐 버린
강도를 만난 사람을 그 사람들로부터 벌레취급을 당하던 사마리아 사람이 도와줍니다.
이 비유는 그 도움을 받은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어떻게 보답을 했는지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고만 하십니다.
그러다가 피해만 당하면 그 도와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란 영화를 볼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습니다.
미국과 영국군은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시행합니다.
작전은 성공했지만 많은 군인이 죽었습니다.
이 때 군입대한 라이언 4형제 중 3형제가 전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결국 오늘이면 아들 셋의 전사 통보를 받을 어머니를 위해
막내아들 라이언을 귀환시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전투 베테랑인 밀러대위는 상부로부터 얼굴도 모르는 라이언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경험 많은 동료들과 라이언이란 군인을 찾아 나서고,
그 찾기까지도 계속 매복해 있는 독일군들에게 형제와 같은 동료를 잃어갑니다.
그 중 독일군 포로 한 명을 사로잡는데 밀러 대위는 그를 죽이지 않고
포로의 눈을 가린 채 계속 가다가 미군을 만나면 그 곳에서 항복하라고 보냅니다.
업햄이란 병사는 이렇게 불평을 합니다.
“아주 잘하셨습니다. 저러다가 독일군을 만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포로를 놓아주다니.”
천신만고 끝에 라이언을 만납니다.
밀러대위는 라이언에게 형제의 전사소식을 알려주고 귀대하라는 명령도 내립니다.
“전 갈수 없어요.”
자기가 가면 이 곳은 무너지고 동료도 다 죽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그의 완강한 거부로 밀러대위는 다음 선택을 합니다.
“여기에 남자!”
미군은 전투준비를 합니다.
곧 적이 오고 적이 사정거리에 오자 공격을 개시합니다.
그리고 독일군의 엄청난 공격으로 미군은 밀리기 시작합니다.
업햄은 너무 무서워서 숨어 있다가 낯익은 얼굴을 봅니다.
밀러대위가 보내준 그 독일군 포로, 그가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밀러대위와 함께 왔던 모든 사람이 죽고
결국 밀러대위도 다리를 폭파하려다 총탄을 맞고 죽어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 때문에 함께 왔다가 죽어간 전우들의 처참한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라이언에게 이 한 마디를 합니다.
“라이언 잘 살아야 돼!”
밀러대위는 다가오는 탱크를 막기 위해 권총을 꺼내 힘없이 쏩니다.
예닐곱 발 째 쏘는데 탱크가 터집니다.
아군비행기의 P-51의 폭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아군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군의 지원 병력이 온 것입니다.
독일군은 후퇴하고, 라이언은 살게 됩니다.
수십 년 후 백발노인이 된 라이언
그는 가족들과 함께 국립묘지에 왔습니다.
그는 밀러대위의 묘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묻습니다.
“여보 나 잘살고 있지?”
“그럼요.”
라이언 한 명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습니다.
라이언은 그 희생을 잘 알기에 함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받아야만 그만큼 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이 되어주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위해 죽어버린 수많은 이들은 무엇입니까?
또 살려주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데 그 사람을 살려줄 필요가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도대체 손해 보는 이런 일을 왜 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폼페이는 2000년 전 가장 부유했고 가장 타락했던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화산으로 한 순간에 모든 도시 사람이 몰살 된 이 유적지에 가 보면
지금도 그들이 얼마나 향락에 취해 있었는지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성적인 타락은 말할 것도 없고, 먹는 것도 즐기는 그들이었습니다.
귀족들이 파티 하던 방들의 바닥은 약간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들이 먹고 토해 낸 것을 하인들이 쓸어내리기 쉽게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들이 건강하게 오래 살았을까요?
당시 평균 수명이 40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향락으로 스스로를 망치고 있었습니다.
현대에도 가만히 보면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우울증이나 불평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마더 데레사 효과’
(마더 데레사가 봉사하는 장면만 보아도 몸의 면역력과 행복이 증가한다는 이론)에서도 보듯이
오히려 이웃을 위해 살 때 나도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부활이 없다면 그 죽음은 어리석음으로 남아있을 수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을 도와 준 사마리아 인은 반드시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그
게 정의입니다.
다시 말해 이웃이 되어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부활의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만 된다는 뜻이기도 한 것입니다.
어느 사람에게 하느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매일 저 바위를 굴려라.”
어느 날이었습니다.
깊은 마음속에서 심상찮은 불평이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넌 왜 쓸데없는 일을 하니?
네가 그렇게 힘쓰고 애써도 결과가 무엇이니? 괜한 노력 낭비하는 것 아니니?
이 일을 계속한다는 건 의미가 없어.”
그래서 하느님 앞에 찾아갔습니다.
“하느님, 이제 이 일을 포기하겠습니다. 이 일은 도저히 안 되는 일이네요.”
“안 되지? 그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단다.
그러나 네 모습을 보아라. 너는 병약했지만 지금은 매우 건강하게 되었고,
내 뜻에 순종했으니 나의 사랑받는 아들이 되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도와주어서 그 사람으로부터 고마움을 받아야
보상을 받는 줄 알지만, 이미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 하나에게 해 주는 것들은
하느님이 직접 갚아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전신마비 아들 싣고 철인3종 6차례 철인 3종 경기
(3.9km 수영, 180.2km 사이클, 42.195km 마라톤)를 완주했고,
206차례 단축 3종 경기(1.5km 수영, 40km 사이클, 10km 마라톤)를,
64차례 42.195km 마라톤을 완주한 아버지.
마라톤 땐 휠체어, 수영 땐 고무보트, 사이클링 땐 보조의자에 아들 싣고 경기를 합니다.
은퇴한 지 오래인 아버지 딕과, 아버지가 미는 휠체어에 앉은 전신장애 아들 릭.
그러나 그들은 모두 철인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없이는 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없었다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이 없었다면 아버지도 철인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없었다면 그리스도도 구세주가 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없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정의롭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잘 했으면 상을 받고 못 했으면 벌을 받습니다.
세상이 해결해주지 않는 정의는 각자의 마음 안에 있는 양심이 해결해 줍니다.
따라서 누군가 세상을 만들었다면 정의로운 분이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상 받아야 할 행위를 하고 보상 받지 못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손해 보는 것 같은 행위,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이고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고,
또 속아주고 죽어주고 손해 보는 것, 이것이 이웃을 살리지만,
더 먼저 살리는 것은 바로 자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 죽으셨다가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그분 사랑을 본받아 모든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며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도록 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오늘 복음을 속담으로 대신한다면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이 더 낫다"는 표현이
그중 어울릴 것 같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은 그 첫 대목만 듣고서도
끝까지 환히 내용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리코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재산은 모두 빼앗기고 초주검이 돼 버려졌습니다.
이때 마침 사제와 레위인이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더구나 성전에서 봉사까지 하는 그들이었지만
그 상황을 피해 지나가 버리지요.
뒤를 이어 지나던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난 자와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불쌍한 마음이 들었는지 그를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자,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돼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물론 사마리아인이지요. 당연한 대답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사제나 레위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느님께 선택받은 자들이라고 여기며
자신들을 특별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민족들과 혼인해 아브라함의 순수 혈통을 오염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일신 야훼 신앙을 훼손하고 이방인들의 풍습을 따르는 사마리아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자들로 단정 지으며 멸시하고 살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은 뽑혔다고 자부했던 사제나 레위인들이 아니라
부정하다고 손가락질 받던 사마리아인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제나 레위인도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지 죽어 가는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친 그들의 행위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마리아인처럼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을 칭찬하고 사제와 레위인들의 이기심을 비난하지만
정작 실생활은 사제나 레위인에 더 가까운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처럼 이웃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많은 분들이 소년소녀 가장을 돕고 싶어 하고, 홀몸노인을 돕는다든지,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활이 빠듯하고 바쁜 일상 때문에 마음은 있어도
실행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지요.
제가 아주 간단한 방법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바로 빈첸시오 회원이나 사회복지회 회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돕기 단체들은 매달 회원들이 내는 수 천원, 수 만원을 모아서
어려운 이들을 직접 찾아가서 도와주고 있습니다.
내가 직접 찾아가서 할 수 없으면 이런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웃 사랑은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신앙은 배움이나 지식이 아니라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은 '언어'에 있습니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말은 우리 생활에서 참으로 중요한 수단입니다.
두 사람이 싸움을 하게 됐습니다.
얼마나 크게 싸웠던지 둘 다 전치 5주의 상처를 입고 자리에 눕게 됐습니다.
깨지고 터졌는가 하면 심한 피멍이 들어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됐지요.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흉했던 상처는 원상 복구가 돼 아물고
흔적 없이 사라지게 됐습니다.
그런데 싸우면서 주고받았던 거친 말들은 하나도 잊혀 지지 않고 그대로 다 기억됐습니다.
잊혀지기는커녕 독기어린 말들은 안에서 응어리가 돼
시간이 지날수록 복수심으로 자라나게 됐지요.
그렇습니다. 터지고 부러진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그때 주고받은 말을 통한 상처는 복수심으로 자라 평생을 가기도 합니다.
치고받고 싸우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비난의 말입니다.
말은 절망에 빠진 사람을 한 순간에 일으켜 세우기도 하지만
한 순간에 쓰러뜨려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이웃 사랑 실천에 있어서 핵심 중 하나가 언어 사용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람들에게 밤길에 무엇이 제일 무서우냐고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사람이라고 답합니다.
또 같은 사람들에게 밤길에 무엇이 제일 반갑냐고 물으면 똑같이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오늘 강도를 맞은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것도 사람이요
제일 고마운 것도 사람이었습니다.
사람과의 따뜻한 관계는 예수님 가르침대로 서로를 도우며 살 때 가능해집니다.
격려하는 말, 칭찬하는 말, 또 희망을 주는 말들이 이웃 사랑의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가슴에 담고 실천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복음선포의 첫걸음 : 진정한 이웃사랑
지난 연중 제14주일의 ‘일흔 두 제자의 파견’(루가 10,1-12.17-20)에 관한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각자가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도로서 선교의 결과보다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자체를 기쁨으로 여길 수 있음을 묵상하였다.
아울러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우선 파견되어 간 곳에 ‘하느님의 평화’를 기원하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 병자를 치유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며
하느님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였음을 전하는 일임을 알았다.
병자치유와 구마를 통하여 세상에 평화를 심는 일이 바로
도래한 하느님나라의 직접적인 표징인 셈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갈수록 병자의 치유와 구마의 기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좀처럼 우리들 안에 없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물러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복음선포는 모든 신자들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이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에게 병자치유도 구마의 능력도 없는 것일까?
필자는 있다고 대답하고 싶다.
오늘날 고도로 발달된 과학문명의 시대에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적이나 이변을 기적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일의 결과만 보려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원인과 과정 없이 결과만 있을 수는 없다.
따라서 기적적인 결과는 통상 그 원인이 아주 평범한 원칙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즉, 병자를 치유하고 세상에서 악의 세력을 몰아내어 하느님나라를 세우고
그분의 평화를 심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에서 시작된다는 말이다.
병자의 치유는 병자를 돌보는 데서, 악의 세력을 몰아내는 일은
내가 악을 근절하는 데서 시작하기 않겠는가.
그러므로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일 중요한 가르침을 손꼽으라면
‘많은 일 중에 가장 요긴한 하느님 말씀의 경청’(10,38-42),
‘주님의 기도와 옳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11,1-13)과 함께
단연 오늘 복음이 보도하는 ‘참된 이웃사랑에 관한 가르침’이다.
예수님의 참된 사랑에 관한 가르침은 공관복음 전체에 나타나는 가장 핵심적인 말씀이다.
그런데 원전(原典)이 되는 마르코복음(12,28-34)이나
이를 참고한 마태오복음(22,34-40)에서는 첫째가는 계명으로 ‘하느님사랑’(신명 6,4-5)을,
둘째가는 계명으로 ‘이웃사랑’(레위 19,18)을 제시하면서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며, 가장 큰 계명이라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루카복음에서는 ‘계명’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루카가 원전을 각색하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곁들여
고유자료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나라의 모든 시작을 볼 수 있다.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의 같은 대목을 살펴보면,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와서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직접 사랑의 이중계명을 설파하신다.
그런데 루카복음에는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와서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25절) 하고 묻는다.
그 질문에 예수께서는 직접 대답을 주시지 않고, 그 교사로 하여금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하신다.
율법교사는 자신이 모세의 율법서에서 읽은 대로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답으로 제시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사의 대답을 옳은 답으로 인정하시고
”그대로 실천하라. 그러면 살 수 있다“(28절) 하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루카가 계획하는 편집의도가 들어 있다.
루카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사랑의 실천, 즉 행동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고맙게도 루카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 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추가하여
참된 사랑의 실천방법을 가르쳐준다.
이번에는 예수께서 직접 수고를 하신다.
예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누가 나의 이웃인지?’, 그리고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를 한꺼번에 가르쳐 주신다.
‘이웃’이란 말 그대로 자신을 기준으로나, 타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 즉 나의 도움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인 것이다.
물리적으로나 장소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이웃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이웃사랑이 실천되지는 않는다.
물론 함께 있어주는 것도 사랑실천이 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오늘 비유에서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실제로 사랑을 베푸는 것을 예수께서는 ‘이웃사랑’이라고 하신다.
비유에 등장하는 첫째 인물인 사제는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얻어맞기까지 하여 반쯤 죽어 있는 사람의
제일 가까운 이웃이 되었으나,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
사제의 머릿속에는 위급에 처한 사람보다는
‘시체에 몸이 닿은 사람은 칠 일간 부정하다’(민수 19,11)는 규정이 먼저 떠올랐을 것이다.
둘째 인물인 레위 사람은 성전제사의식에서 제사장을 돕거나
종교적 업무에 종사하는 부류로서 육체적이 노동을 하지 않고도 십일조를 받아
걱정 없이 살 수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괜한 일에 관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다.
강도를 만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던 길이었으니,
그 사람은 유다인임이 틀림없다.
유다교의 정통성을 상실한 이유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유다의 진정한 이웃이 되는 순간이었다.
비유에서 보듯이 사마리아 사람은 심하게 다친 유대인에게 기대이상의 사랑을 베풀어준다.
강도를 만나서 반쯤 죽게 된 사람에게 이웃이 된 자는 사제, 레위, 사마리아 사람 셋이었다.
사제와 레위는 그 사람을 보고 동정심을 가지긴 했겠지만,
피해서 지나가 버림으로써, 즉 가까운데서 먼 곳으로 가버림으로써 이웃이 되기를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이웃사랑의 실천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유다인과 원수지간이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 되었고,
실제로 이웃사랑을 실천하였다.
사랑은 바로 이렇게 행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멀리 가지 않고 가장 가까이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그것이
바로 기적의 시작이요, 하느님나라와 그분의 평화를 이 땅에 심는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첫댓글 '어떤 일'이 있어도 -_- 그리스도 가르침을 실천하는 이가 그리스도인임을 묵상합니다. 가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성령을 청합니다. 아멘.
실천하는 사람... 그게 참 어려운 일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