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만 친구 / 최백호
바닷가에서 오두막 집을 짓고 사는 어릴적 내 친구
푸른 파도 마시며 넓은 바다의 아침을 맞는다
누가 뭐래도 나의 친구는 바다가 고향 이란다
갈매기 나래위에 시를 적어 띄우는
젊은날 뛰는 가슴 안고 수평선 까지 달려 나가는
돛을 높이 올리자 거친 바다를 달려라
영일만 친구야
[최백호]
출생:1950년 4월 23일, 부산 기장군 장안읍
데뷔:1977년 앨범 '내마음 갈 곳을 잃어'
학력:가야고등학교 졸업
데뷔와 동시에 전성기를 누비던 최백호는
1980년 당시 국민배우 김자옥과 결혼하였고《영일만 친구》라는 곡으로
TBC 방송가요대상 남자가수상을 수상하였다.
1983년에는《고독》이라는 곡으로 MBC 10대 가수상,
KBS 가요대상 남자가수상을 수상하여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김자옥과 이혼한 후 큰 시련을 겪었다.
1984년 재혼한 후 다시 안정을 찾아 복귀하였다.
1987년에는 삼각산 경국사에 들어가 가수로서의 마지막 승부를 걸고
작곡에 전념하였지만 1년후《시인과 촌장》을 끝으로
1989년 1월 미국으로 이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잠시 한인방송
라디오코리아 DJ로 활동하며 지냈다.
그 후 1990년 2월에 다시 귀국하였고 공연 관련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1991년 3월 지방 선거에서 무소속 서울특별시 의회 의원 후보 출마하였지만
낙선하였고 이후 1995년 삶의 허무와 지나간 시간에 대한 미련을 담은
《낭만에 대하여》라는 곡이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영일만 친구 노래비]
1995년 영일만 등대박물관 앞에 세워진 영일만 친구 노래비
최백호의 영일만친구에 관한 이야기
최백호의 대표곡 영일만 친구에 관한 이야기다.
최백호의 고향은 경북 포항 영일 일대가 아니고 부산 기장이다.
그러면 영일만에 친구를 뒀다는 것일까? 대체로 맞는 이야기이다.
1970년대 후반.
영일만에서 음악 카페를 하는 친구를 찾아간 것이 계기가 됐다.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소주잔을 기울이다
문득 영일만에 관한 노래하나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그 시절 젊은이라면 누구나 가졌을 억눌린 세상에 대한 답답함,
갑갑함, 그것을 풀어낼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1970년대 후반, 무엇이 최백호 씨를 암울하고 답답하게 했을까.
이 노래는 유신정권 말기인 1978년 최백호 씨가 곡과 노랫말을 쓰고
직접 통기타를 치며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불렀다.
최씨는 “영일만 친구는 혹독한 유신정권 하에서 패배주의와 무력감,
비애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한 메시지였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영일만 친구는 대놓고 분노할 수는 없어 우회적으로 울분을 표시하는 통로였다.
그 노래가 나오고는 당시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부터 대학가에서 불리기 시작하며
뒤늦게 뜨기 시작해 지금껏 애창되고 있다.
이 노래는 암울하고 살벌했던 유신독재가 붕괴된 뒤
민주화를 갈망하는 피 끓는 젊은이들 사이에 자유의 외침’쯤으로 여겨졌으니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밖에...
최백호 씨의 그 영일만 친구가 과연 누구일까?
최백호 씨의 절친했던 친구로 울산문화방송 라디오 프로듀서를 지낸
고 홍수진 씨가 바로 그다.
홍수진 씨는<영일만 친구>가 만들어질 당시 영일만의 오두막집에서 살면서
음악다방 DJ로 이름을 날렸다.
하루는 이들이 영일만의 술집에서 만나 유신독재의 시대상에 울분을 토해내다
누군가 청년들을 암울한 시대로부터 탈출시킬 수 있는 노래를 만들자고 해
즉석에서 만든 게 <영일만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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