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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곡(李穀)의 자는 중보(中父)이며 초명(初名)은 이운백(李芸白)으로, 한산군(韓山郡)의 향리인 이자성(李自成)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행동거지가 다른 사람과 달랐는데 조금 성장해서 글을 읽을 줄 알게 되자,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겼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서리[椽吏]가 되었다가, 충숙왕(忠肅王) 4년(1317)에 거자과(擧子科)에 급제하여 경사(經史)를 깊이 연구하였는데, 당시에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 많았다. 〈충숙왕〉 7년(1320)에 과거에 급제해서 복주(福州)의 사록참군(司錄叅軍)에 임명되었다. 충혜왕(忠惠王) 원년(1331)에 예문검열(藝文檢閱)로 옮겼다. 충숙왕 후원년(1332)에 정동성(征東省) 향시(鄕試)에 1등으로 급제하였고 드디어 〈원(元)의〉 제과(制科)에 뽑혔다. 이보다 전에 고려인은 비록 제과에 급제해도 대개 석차가 낮았는데, 이곡의 대책(對策)이 독권관(讀卷官)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아 제 2갑에 선발되었다. 재상(宰相)이 〈황제에게〉 아뢰어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으로 임명하였다. 이곡은 중국 조정의 문사(文士)들과 교유하면서 강론․연마하여 학문의 조예가 더욱 깊어졌다. 문장을 지을 때는 붓을 들면 바로 이루어졌는데, 말은 엄격하고 뜻은 오묘하였으며, 〈문장이〉 전아(典雅)하고 고고(高古)한 것이 감히 외국인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 뒤〉 흥학(興學) 조서를 받들고 환국하였다가 얼마 뒤에 다시 원으로 돌아갔는데 본국에서는 전의부령(典儀副令)을 제수하였다. 원에서는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를 제수하였다가 정동성행중서성(征東省行中書省)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으로 옮겼다.
원(元)이 고려에 동녀(童女)를 여러 번 요구하였으므로 이곡(李穀)이 어사대(御史臺)에 그 일을 말하여 〈어사대가〉 중지해줄 것을 청하였는데, 〈이곡이〉 대신지은 상소문에서 말하기를, “옛날의 성왕(聖王)께서 천하를 다스릴 때는 〈모든 백성을〉 똑같이 대하고 다스림도 같게 하였습니다[一視同仁]. 비록 사람의 힘이 닿는 한 제도[文軌]를 반드시 같게 하였으나, 그 풍토에 적합한 것과 인정상 숭상하는 것은 구태여 반드시 고칠 필요는 없습니다. 생각건대 사방의 먼 나라[荒徼]들은 풍속이 각각 다른데, 굳이 중국(中國)과 같게 만들려고 하면 인정이 따르지 않을 것이며 형세상 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형세상 행해지지 않고 인정이 따르지 않는데도 잘 다스리려고 한다면 비록 요(堯)․순(舜)이라도 능히 잘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 우리 세조(世祖) 황제께서는 천하를 다스리실 때에 인심을 얻으려 힘쓰셨습니다. 특히 먼 나라의 특별한 풍속은 그들의 습속(習俗)에 따라 순하게 다스리셨기 때문에 온 천하의 모든 사람들[普天率土]이 기뻐하고 춤을 추었으며, 두 번 세 번 통역을 하여 와서 군왕으로 받들었으며 오히려 혹시라도 늦게 올까 걱정하였습니다. 요 임금과 순 임금의 다스림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었습니다. 고려는 본래 바다 밖에 있으면서 따로 하나의 나라를 만들어서 진실로 중국에 성인(聖人)이 없으면 멀리하면서 서로 통교하지 않았습니다. 당(唐) 태종(太宗)의 위엄과 덕망으로도 두 번이나 정벌하였지만 공(功)이 없이 돌아갔습니다. 상국(上國)이 처음 건국하자 가장 먼저 신복(臣服)하여 왕실에 현저한 공훈을 세웠으므로 세조 황제께서 공주(公主)를 내려 보내시고 이어서 조서(詔書)를 하사하시어 권장하고 깨우치시며 말씀하시기를, ‘의관(衣冠) 제도와 의례는 조풍(祖風)을 잃어버리지 말라.’라고 하셨으므로 그 풍속이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습니다.
지금 천하에 군왕과 신하가 있고 민과 사직이 있는 것은 오직 고려[三韓] 뿐입니다. 고려를 위한 계책으로는 마땅히 황제 폐하의 밝은 조칙을 공경히 받들어서 조상들을 따라 그대로 행하고 정치와 교화를 닦고 밝히며, 때에 맞추어 조빙(朝聘)함으로써 상국(上國)과 함께 태평을 누리는 것이 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환관[婦寺]의 무리로 하여금 중국(中國)에 근거하여 그 도당들을 번성하게 하니 이들은 황제의 은총(恩寵)을 믿고 도리어 본국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심지어 외람되게도 천자의 명을 어기고 다투어 사람을 보내어, 해마다 동녀들을 취하여 잇달아 수레에 싣고 오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무릇 남의 딸을 데려다가 윗사람에게 잘 보임으로써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니, 이것은 비록 고려가 스스로가 초래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천자(天子)의 분부를 사칭하고 있으니 어찌 상국에 허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옛날 제왕(帝王)들은 한번 호령을 선포하시거나 한번 명령을 시행하시면 천하가 공경하며 그 덕택(德澤)을 바랐기 때문에 조지(詔旨)를 일컬어 덕음(德音)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주 특별 명령을 내리셔서 남의 집 딸을 빼앗는 것은 심히 옳지 못합니다. 무릇 사람이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뒷날 자식들의 봉양을 기대하는 것이며, 〈이는〉 존비(尊卑)의 차별이나 화이(華夷)의 구분이 없는 것이니 그 천성이 같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려의 풍속은 차라리 아들로 하여금 따로 살게 할지언정 딸은 내보내지 않으니 이는 진(秦)의 데릴사위[贅婿]와 비슷합니다. 무릇 부모에게 봉양을 바치는 것은 딸이 맡아서 하는 것이므로 딸을 낳으면 은혜와 부지런함으로 키워서 밤낮으로 자라서 능히 봉양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인데, 하루아침에 품 안에서 빼앗아 4천 리 밖으로 보내버리기 때문에, 발걸음이 한 번 문을 나서면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니,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고려의 부녀 중에서는 〈상국의〉 후비(后妃)의 반열에 올라 있는 자도 있고 왕이나 제후와 같은 귀인(貴人)의 배필이 된 자도 있어서 공경(公卿)과 대신(大臣)들 중에는 고려의 외손(外孫)이 많습니다. 이는 본국의 왕족 및 문벌과 부호들의 집안에서 특별히 황제의 조서를 받았거나 혹은 자원해서 스스로 왔거나, 또는 중매로 혼인한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일들은〉 진실로 항상 있는 일이 아닌데도 이익을 노리는 자들이 끌어다가 상례인 양 꾸미고 있습니다. 요즘 고려에 사신으로 가는 자들은 모두 아내와 첩을 구하려고 하는데 비단 동녀만 데려가는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무릇 천하 사방으로 사신 가는 일은 황제의 은덕을 널리 선포하고 민의 고통[民隱]을 살피려고 하는 것이니 『시경(詩經)』에서 ‘두루 살피고 두루 상의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외국으로 사신가는 자들은 재물과 여색(女色)으로 직책을 더럽히고 있으니 금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풍문으로 들으니,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바로 숨기고 오직 드러날까 걱정하며, 비록 이웃이라도 볼 수 없게 한다고 합니다. 매번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문득 실색하여 서로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무얼 하러 왔을까? 동녀를 데려가는 것이 아닌가? 처첩을 데려가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합니다. 이윽고 군리(軍吏)들이 사방으로 나가 집집마다 수색하는데, 만약 혹시라도 〈딸을〉 숨기기라도 하면 그 이웃을 잡아 가두고 그 친족을 구속해서는 채찍으로 때리고 괴롭혀서 〈딸들이〉 나타난 뒤에야 그만둡니다. 사신이 한번 오게 되면 나라가 온통 소란스러워져서 비록 개나 닭이라도 편안하지 못합니다. 동녀들을 모아놓고 그 중에서 〈데려갈 사람을〉 뽑을 때가 되면, 얼굴이 예쁘기도 하고 못 생기기도 하여 같지 않은데,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서 그 욕심을 채워주면 비록 예쁘더라도 놓아줍니다. 놓아주고는 다른 데서 〈동녀를〉 찾게 되므로, 1명의 동녀를 취하는 데에도 수백 집을 뒤집니다. 오로지 사신의 말만 들을 뿐 누구도 감히 어기지 못하는데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사신들이〉 황제의 성지(聖旨)가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기를 1년에 두 번, 혹은 한 번이거나 한 해씩 거르기도 하는데, 그 수가 많으면 40~50명에 이릅니다.
〈그러다가〉 일단 그 선발에 들어가면 부모와 친척들이 서로 모여서 우는데 밤낮으로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도성(都城)의 문에서 보낼 때에는 옷자락을 붙잡고 넘어지기도 하고 길을 막고 울부짖으며 슬프고 원통해서 괴로워합니다. 그 중에는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는 자도 있으며,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다가 눈이 멀어버리는 자도 있는데, 이러한 예들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사신들이〉 동녀를 취하여 처첩으로 삼는 경우는 비록 이와 같지는 않지만 인정을 거스르고 원망을 사는 것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서경(書經)』에서 말하기를, ‘필부필부(匹夫匹婦)라도 스스로 그 뜻을 얻지 못하면 민의 임금이 된 자[民主]는 백성과 함께 공적을 이룰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상국 조정의 덕화(德化)가 미치는 곳은 만물이 모두 뜻을 이루는데 고려 사람은 홀로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고통을 받습니까? 옛날 동쪽 바다에 한을 품은 아낙네가 있었는데 3년 동안 큰 가뭄이 들었으니, 지금 고려에는 한을 품은 아낙네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몇 년 사이 고려에는 홍수와 가뭄이 계속 이어져서 민 가운데 굶어 죽은 자가 매우 많으니, 이야말로 그 원망과 탄식이 조화로운 기운을 상하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당당한 천자의 조정으로서 어찌하여 후비나 궁녀[後庭]가 부족하여 반드시 외국에서 취하려고 하십니까? 비록 아침저녁으로 사랑을 받아도 오히려 부모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 사람의 지극한 정인데, 지금 궁궐에 두고 시기를 넘겨서 헛되이 늙게 하거나 때로는 혹시 내보내어 환관에게 시집을 보내지만, 끝내 후사가 없는 자가 열 중 대여섯이나 되니, 그 원망하는 기운이 조화를 상하게 하는 것이 또 어떻겠습니까? 일에는 작은 폐단이 있어도 나라에는 이익이 되는 일이 어쩌다 있기는 하지만 폐단이 없는 것보다는 못합니다. 하물며 나라에 이익이 없는데도, 먼 곳의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받아 그 폐단이 적지 않은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의 덕음(德音)을 내리시어, 감히 폐하의 뜻을 어기고 위로는 성덕(聖德)을 모독하고 아래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동녀를 데려가는 자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처첩을 취한 자는 금지 조목을 명시하셔서 차후로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황제의 조정이 만민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교화[同仁之化]를 드러내고 외국에서 옳은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위로하심으로써 원망을 없애고 조화로운 기운을 불러와서 만물이 길러진다면 더 이상 다행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황제가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본국에서는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임명하였다.
〈이곡은〉 충혜왕(忠惠王) 후2년(1341)에 표문(表文)을 받들고 원(元)에 가서 잇달아 6년 동안 머물렀는데, 원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로 임명하였다. 그때 본국에서는 관작이 남발하여 〈심지어〉 노예도 고관대작[軒冕]을 얻었다. 전중(殿中) 최강(崔江)이 정윤(正尹)이 되기를 원하였는데, 이곡이 이 말을 듣고는 시를 붙여서 보내기를, “생전에 정윤이 되는 것도 괜찮은 일이니, 죽은 뒤에 중서로 올려 주는 것보다 나으리.”라고 하였는데, 안취(安就)와 조명(趙溟)이 죽은 뒤에 중서(中書)로 임명되었기 때문이었다. 충목왕(忠穆王)이 왕위를 이어받아서 환국하자 이곡이 재상(宰相)에게 글을 부쳤는데, “오직 우리 삼한(三韓)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풍속이 무너지고 형벌이 문란하여 민이 편안히 살지 못하는 것이 도탄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 지금 국왕께서 명을 받아 환국하게 되니 민이 기대하는 것은 큰 가뭄에 단비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국왕께서는 춘추(春秋)가 넉넉하시며 겸손하고 온화하며 과묵하시니, 나라의 정사(政事)를 여러 공들에게 물으신다면, 사직의 안위(安危)와 백성들의 이해(利害), 사군자(士君子)의 진퇴(進退)가 모두 여러 공들에게서 나올 것입니다. 대저 군자를 나아가게 하면 사직이 편안할 것이고, 군자를 물러나게 하면 백성들이 해를 입게 되니,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불변의 이치이므로,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정치의 근본입니다. 무릇 사람을 쓰기는 쉽지만 사람을 알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사람이 간사한지 바른지, 인격이 높은지 낮은지를 따지지 않고 오직 재물만 바라보고 권세에만 의지하여 나에게 달라붙는 자는 비록 간사한 아첨꾼이라도 나아가게하고, 나를 다르게 보는 자는 비록 청렴하고 근면해도 물러나게 한다면 인재를 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을 쉽게 쓰기 때문에 정사는 나날이 어지러워지고, 정사가 어지럽기 때문에 나라도 따라서 위기에 빠져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멀리 고사(古事)에서 찾을 필요도 없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는 명백한 귀감(龜鑑)입니다.
옛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한번 사람을 진퇴(進退)시킬 때도 반드시 그 행하는 바와 과거에 행한 바를 살펴서 오직 재물에 더러워지고 권세에 흔들릴까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른 자와 악한 자가 서로 〈본성을〉 빼앗고[朱紫相奪] 옥석이 서로 섞이니 사람을 알아내기는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바로 지금 본국의 풍속은 재물 가진 자를 능력이 있다고 하고 세력이 있는 자를 지혜가 있다고 하며, 조신(朝臣)과 유자(儒者)의 말을 광대와 잡극의 유희로 여기고, 곧은 말과 옳은 논의를 길거리에 나도는 망령된 이야깃거리로 여기니, 나라가 나라답지 않게 된 것이 마땅합니다. 저는[穀] 친척들과 이별하고 고국을 떠나 오랫동안 황제 아래에서 객(客)으로 있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요사이 듣건대 여러 공들께서 정치를 보좌하고 교화를 새롭게 한다는 것은 예전과 비교해서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말로는 비록 원로들을 숭상한다고 하지만 젊은이들이 실제로 정권을 잡고 있으며, 말로는 청렴을 숭상한다고 하지만 탐욕스러운 자가 실제로 권세를 잡고 있습니다. 악소(惡小)들은 이미 척결하였지만 큰 악당들은 그 악함을 고치지 않았고, 이미 옛 신하를 바꾸었으나 새로 벼슬에 오른 자들은 도리어 옛 신하에게 아부하고 있습니다. 사람 알기를 어렵게 여기지 않고 사람 쓰기를 너무나 쉽게 여기니, 국왕께서 〈공들에게〉 정사를 맡긴 뜻이 아닌 듯합니다. 〈원(元)〉 조정에서 〈이런 사정을〉 듣는다면 불가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본국의〉 여러 공들에게 굳이 글을 보낼 필요가 없소. 부질없이 분노만 살 뿐이요 소득이 없을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응답하기를, ‘사직이 진실로 편안해지고 백성이 참으로 이로워진다면 장차 본말을 갖추어 〈원〉 조정에 말하여 황제께 주달(奏達)할 것인데, 어찌 〈본국의〉 여러 공들이 화를 낼 것이라고 해서 그냥 입을 다물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뜻으로 감히 망녕된 말을 드리는 것이니 공들께서는 살펴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원〉 순제(順帝)가 상도(上都)로 행차하니, 이곡이 호종하였는데, 본국에서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하고 거듭 승진시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삼았다가,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올리고 한산군(韓山君)으로 봉하였다. 책력(冊曆)을 반포하는 일로 환국하여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增修)하고, 또 충렬왕(忠烈王)·충선왕(忠宣王)·충숙왕(忠肅王)의 3왕의 실록(實錄)을 편수하였다. 〈그리고〉 양천군(陽川君) 허백(許伯)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김인관(金仁琯) 등을 뽑았는데, 이곡과 허백이 사정(私情)에 따라서 권세가의 학문이 변변치 않은 자제들을 많이 뽑았기 때문에 헌사(憲司)가 이를 탄핵하여 새로운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하였다. 공문에 의거하여 다시 원으로 돌아가자 중서성(中書省)에서 감창(監倉)을 맡겼고 본국에서는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로 임명하였으며, 얼마 뒤에 환국하였다.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자 이곡은 이전에 공민왕(恭愍王)을 〈국왕으로〉 세우고자 청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불안하여 관동(關東)으로 유랑하였다. 이듬해 원에서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奉議大夫 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으로 임명하였다. 그 다음 해에 죽으니, 나이는 54살이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이곡은〉 성품이 단정하고 엄격하며 강직해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공경하였다. 그가 저술한 『가정집(稼亭集)』20권이 세상에 전한다.
아들은 이색(李穡)이며 따로 전기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