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 스님의 금강경 강설
15. 정신희유분(正信稀有分 - 바른 믿음은 희유함)
미세한 분별심도 없어야 인과 생기지 않아 괴로움 과보 안 받는다
법상이든 비법상이든 어떤 법이라도 취하면 진제법 아닌 법집
부처님은 이를 강조하기 위해 얻을 것도 설할 것도 없다 가르쳐깨달음이나 진제에 말이 붙게 되면 진정한 깨우침에서 멀어져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즉시, 깨닫지 못한 마음의 과보가 생기는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샴보리’라고 하는 순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멀어진다. 사진은 스리랑카의 불교유적지 폴론나루와에 자리한 갈비하라의 석불입상.
시고 불응취법 불응취비법(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이시의고 여래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이러한 고로 마땅히 법도 지니지 말고, 마땅히 법 아닌 것도 지니지 말지니라. 이러한 까닭으로 여래께서 항상 말씀하시되 “너희들 비구가 내가 설한 법이 뗏목과 같은 줄을 알라고 하였나니, 법도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은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러한 연고로 부처님께서 다시 진제(眞諦)를 바르게 하기 위해 말씀하신다. 진제에는 법상(法相) 비법상(非法相)을 취하고 버리는 취사의 양면까지 여읜 법, 이러한 양면을 버린 법까지도 취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이중 삼중으로 취하고 버리는 생각까지도 떠나라고 하심이다.
법상(法相)이든 비법상(非法相)이든 어떤 법이라도 취하게 되면 이는 진제법(眞諦法)이 아니라 법집(法執)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상(四相-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떠나는 것이 곧 법이다’라고 하는 법상(法相)까지도 버려야 함이요, 법상(法相)을 떠나야 한다는 비법상(非法相)도 결국 버려야 함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취한다, 버린다 하는 양면까지도 떠나는 것이 진제(眞諦)이다.
이러한 고로, 여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법을 비유하여 뗏목과 같이 저 언덕에 도달하게 하는 법(법상, 비법상을 여읜 법)도 결국에는 버리고야 말 것이거늘, 하물며 저 언덕에 도달하는 법도 못되는 비법(非法-법상, 비법상 등의 법)이겠느냐? 하신다. 어떤 사람이 뗏목을 타고 저 언덕에 도달하면 이 뗏목이 저 언덕에 도달하게 해준 진제(眞諦) 법이건만 저 언덕에 도달한 후에는 오히려 뗏목을 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뗏목을 버리지 않고서는 저 언덕에 오를 수 없는 탓이다. 이 같은 진제법(眞諦法)인 뗏목도 이러하건만 저 언덕에 도달하지도 못하는 비법(非法)이야 말로 말할 것도 없다 하신다. 옛 성인도 ‘부처님께서 일체법(一切法)을 설하신 것은 일체의 마음을 비우기 위함이시니, 내가 일체 마음이 없는데 일체법은 무엇에 쓰리오?’ 라고 말씀 하신다.
과연 자기의 일체 번뇌망상을 없애기 위하여 법을 쓰는 것인데, 번뇌망상이 없는 바에야 어떠한 법인들 소용이 있겠는가 말이다. 이때 법은 병 없는 사람에게는 약도 도리어 병이 되는 것과 같이, 일체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법도 도리어 망상이 되는 것이다. 병을 놓아버린 건강한 사람, 즉 저 언덕에는 병을 낳게 하는 참 약, 곧 진실법도 소용이 없는 것인데, 병에 해당치 않는 약, 곧 비법(非法)이야 말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말씀이다. 이러한 자리라야 진실로 머무름이 없고 앉을 자리가 없는 곳이라 할 것이니, 머무름과 앉음이 없으면서 머무름과 앉음 없이 머무름과 앉음이 없는 까닭이다.
에고~ 힘이 들어 죽겠네~ 사는 게 따분하다. 그래도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났다는 옛말이 생각난다. 언제 어떻게 제대로 기분 좋게 살아갈 운이 다가올까? 요즘 부쩍 많은 이의 생각들을 들어본다.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때가 언제였을까? 누구나 즐겁고 기쁠 때가 한두 번 이상은 있었을 것이다. 만약 즐겁고 행복한 때가 한 번도 없었다면, 이는 역설적으로 괴롭고 슬픈 때가 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때가 있었을지라도, 그것도 잠시,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원하는 마음이 이어서 생기기 때문에 희락(喜樂)의 행복은 지속될 수 없다. 즐겁고 기쁜 마음도 생로병사하기 때문이다.
최고의 즐거움과 최상의 기쁨, 더없이 행복함의 그것은 바로 진제(眞諦)라 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이다. 더 이상의 최고 최상은 없다. 하지만 즐거움은 괴로움의 과보(果報)가 생기고, 기쁨은 슬픔이라는 과보(果報)가 생기며, 행복은 불행이라는 과보(果報)가 생긴다. 인과법(因果法)이다. 그러므로 최고 최상의 자리인 진제(眞諦) 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었다 할지라도 곧바로 생로병사하여 사라지게 될 것이니, 마음을 깨달았다고 하는 즉시, 깨닫지 못한 마음의 과보가 생기기 때문에, 진제(眞諦) 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고 하는 순간, 이는 진정한 진제(眞諦)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깨달음이라 하고, 진제(眞諦)라고 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 것인가? 즐겁고 기쁘고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하다면, 그 즉시 괴로움과 슬픔과 불편과 불행의 과보(果報)가 생기듯이, 깨달음도 이와 같은 고로, 즐거움과 괴로움, 기쁨과 슬픔, 편안과 불편, 행복과 불행이라는 두 가지 양변을 떠나야 한다. 이렇듯, 진제(眞諦)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 마저 완전히 떠나야, 진정한 진제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을 보거나, 듣거나, 부딪치거나, 생각을 하더라도,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두 가지의 생각과 감정을 분별하지 않아야 하느니, 일상의 생활에서도 그 어떤 인연과 환경에 만나 처할지라도, 가타부타의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훈련과 연습, 마음 수행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이라 하시고, 얻을 것도 설할 것도 없음이라 하셨다.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 얻을 것도 설할 것도 없음)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 여래 유소설법야(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得阿縟多羅三貘三菩提耶 如來 有所說法耶)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보느냐? 여래가 법을 설했다고 보느냐?”
세존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대중이 바로 알아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시었다. 무엇을 못 알아들을까 염려하셨을까? 구경의 땅인 진제, 곧 여래의 땅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는 그 무엇도 두지 않거늘 진제법이 아닌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닌 법이야 말할 것도 없다 하심이다. 그렇다면 진제법과 아뇩다라샴막삼보리를 얻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지금 여래가 말씀하시는 법은 곧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보리를 불러 물어 보시기를 나 여래가 진실로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일깨우셨으니 이 말씀 속에는 너희들이 나더러 얻었다고 하는 소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면서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어서,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되는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자체가 이러한 것이니, 나도 이것을 얻을 때, 얻으면서 얻음이 없이 얻은 것이므로, 묘하게 합하게 되는 것이니, 얻음 이것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곧 얻음이 되어 어떠한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며 어떠한 것이 얻음인지 모르겠노라 하심이다.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본래 없는 것이요, 얻음도 본래 없는 것이니, 만약 얻음이 있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닌 것이 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를 얻었다고 하면 진정 얻음이 아닌 것이 된다. 자고 일어나면 사람을 대한다. 가족은 물론 친구, 이웃사람, 그리고 수많은 모르는 사람들, 삶에 있어서 사람을 대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음을 제대로 먹고 묵언(默言-말하지 않음)하면서 아무도 보지 않고 무문관(無門關)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70억이 넘는 지구촌 사람들, 그리고 셀 수 없는 수많은 생명들, 이 모든 중생은 각자 자신의 업(業)에 의해 살아간다.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중생도 비슷한 업을 가질 수는 있겠으나, 똑 같은 업을 가진 이는 없다.
업은 살아가는 모습, 형태, 모양, 습관, 과보 등 그 사람의 전체 모습을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업은 누구나 똑 같다고 했다. 사는 모습, 사는 형태를 불문하고, 어떻게 살아가든, 결국은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마음감정으로 귀결되어 인과업(因果業)에 의해 고락(苦樂)이 반복 윤회(輪廻)하게 된다. 그리고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고 좋은 감정을 느끼고 경험한 만큼, 똑 같은 질량의 괴롭고 슬프고 불행한 나쁜 감정을 받는 것이 업의 본 모습이라고 했다. 또 이를 분별심(分別心)이라고 했다. 좋은 것을 분별(分別)하니 나쁜 과보(果報)가 생긴다. 조금 분별(分別)하면 조금의 인과(因果)가 생기고, 많이 분별(分別)하면 많은 인과(因果)가 생기는 것이 인과의 법칙이다.
그래서 시시비비(是是非非) 즉, 이러쿵저러쿵, 옳네 그르네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국 내 마음에 들기 위해 따지게 되는 것이고, 마음에 든다는 것은 즐겁고 좋은 마음을 갖기 위한 욕심이니, 그렇게 되면 인과(因果)가 생겨서 즐거움을 얻은 만큼의 괴로운 과보(果報)를 받게 됨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아주 미세한 분별심(分別心)도 없어야 인과가 생기지 않게 되어 괴로움의 과보를 받지 않게 되는 것이므로, 이런 측면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마지막 깨달음조차도 깨달음이라는 분별심(分別心)을 내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인과(因果)에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정한 깨달음, 진정한 진제(眞諦), 진정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는 것은 분별을 하면 안 되기 때문에, 깨달음이라든지 진제라든지 하는 생각과 말이 붙게 되면 이미 진정한 깨침이 아니 된다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강조하심이다.
[1644호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