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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독재자 올리버 크롬웰
1644년 7월 22일에 잉글랜드 북부 마스턴 무어 평원에서 왕당파 군대와 의회군과의 대전투가 벌어졌다. 대포 소리가 요란한 뿌연 포연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기병대가 왕당파 군대의 허를 찌르며 공격해들어 왔다. 기병대는 단 하룻밤 사이에 왕당파 병사 4,000여 명을 몰살 시켰다. 두툼한 갑옷과 날카로운 검으로 무장한 철기대를 지휘한 사람은 훗날 호국경으로 추대된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시기 : 1599년-1658년
인물: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신모범군
1642년에 찰스 1세가 이끄는 왕당파 군대와 의회군과의 내전이 발발할 당시 쌍방의 병력 상태는 어땠을까? 찰스 1세의 지지자들은 주로 잉글랜드 서북부 지역의 귀족들과 대지주였다. 이 지역은 전통적인 농업 지역으로 상대적으로 상공업이 낙후되어 세금을 거두어 군자금으로 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반면에 의회파는 경제가 발달한 잉글랜드 동남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공장과 상점이 부지기수인 데다 인력이 집중되어 있어서 군자금을 거두는 데 매우 유리한 곳이었다. 다시 말해, 왕당파와 의회파는 첫 시작부터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처음 전투가 시작됐을 때 의회군은 연거푸 패전을 거듭하며 왕당파 군대에 몰살당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왕당파 군대는 대부분 정식 군인인 반면에 의회군은 시멘트공이나 양모 상인 등으로 급작스레 꾸려진 임시 군대였기 때문이다. 유창한 말솜씨로 손님을 상대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지만 총칼을 들고 전쟁터에서 싸우기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국왕이라는 존재는 수백 년 동안 내려온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러한 국왕에 맞서 싸워야 하는 의회군은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의회군을 이끌던 맨체스터 백작은 종종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국왕을 99번 이겨도 그는 여전히 국왕이다. 하지만 우리는 국왕에서 단 한 번만 져도 모두 단두대에서 목이 잘릴 것이다."
지휘관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을 정도였으니 의회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의회파는 강력한 군대를 새로 조직하기로 했다. 이러한 배경 아래 역사 무대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올리버 크롬웰은 1599년 4월 25일에 잉글랜드 동부 케임브리지셔(Cambridgeshire)의 헌팅턴(Huntingdon)에서 신흥 중산층인 젠트리(Gentry) 계층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크롬웰은 헌팅던에서 문법 학교에 다니다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와 법률을 공부했다. 이 시기에 그는 청교도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아 독실한 청교도가 되었다. 1628년에 크롬웰은 헌팅던에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찰스 1세가 의회를 해산하고 11년 동안 소집하지 않아 의정활동을 할 수 없었다. 1640년에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다시 의회를 소집하자 크롬웰은 단기 의회와 장기 의회에서 케임브리지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급진적인 사상과 뛰어난 말솜씨로 의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1642년에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자 크롬웰은 고향 헌팅던으로 내려갔다. 그는 농민과 수공업자 출신의 청년들을 뽑아 기병대를 조직했다. 그의 기병대는 규율이 엄격하고 용맹스러웠으며 갑옷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신모범군' 혹은 '철기대'라고 불렀다.
내전 종결
올리버 크롬웰의 지휘 아래 전열을 가다듬고 크게 사기가 진작된 의회군이 연달아 전승을 거두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1645년 6월 14일에 왕당파 군대와 의회군은 잉글랜드 중부의 네이즈비(Naseby) 평원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렀다. 찰스 1세는 왕당파 기병대에게 의회군의 측면 공격을 지시했다. 그러나 왕당파군이 측면 공격을 가하기도 전에 이미 크롬웰의 철기군이 오른쪽 측면에서 기습 공격을 가했다. 크롬웰의 기습 공격으로 찰스 1세가 주둔하고 있던 본부 진영까지 무너졌다. 찰스 1세는 근위대의 엄호 아래 시종으로 변장하고 겨우 스코틀랜드로 도망갈 수 있었다. 네이즈비 전투에서 크게 패한 왕당파는 병사 5,000여 명이 포로로 사로잡히고 대부분 군수품을 빼앗겼다. 1647년 2월 의회파는 스코틀랜드에 몸값 40만 파운드를 준 뒤 찰스 1세를 넘겨받았다. 이로써 5년 동안 이어진 내전은 잠시 일단락 지어졌다.
국왕의 죽음
왕당파를 무찌르고 국정을 장악하고 나자 이번에는 의회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의회는 장로파와 독립파로 나뉘어 있었다. 자본계급과 상류층의 신귀족으로 이루어진 장로파는 정치적으로도 보수적 성향이 강해서 국왕과의 타협을 원했다. 반면에 중소 귀족의 이익을 대표하는 독립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건설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의회파의 파벌 싸움이 격화되는 틈을 타 찰스 1세가 감옥에서 탈주하면서 제2차 내전이 일어났다. 1648년에 찰스 1세는 잉글랜드 서남부 지역에서 왕당파를 끌어모아 군대를 일으켰다. 그러나 크롬웰이 이끄는 원정군에 진압되어 다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장로파는 찰스 1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그가 복위하기를 원했다. 그러자 올리버 크롬웰을 주축으로 하는 군대가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전쟁터를 누비며 수많은 병사가 피를 흘린 대가로 간신히 국왕을 잡았는데 의회에서 다시 국왕을 복위시킬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의회에서 군인들에게 밀린 원급도 주지 않은 채 군대를 해산하려고 하자 그동안 참고 있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1648년 12월 6일에 신모덥군의 토머스 프라이드(T. Pride) 대령이 군대를 이끌고 의회를 습격하여 장로파 의원 140여 명을 추방했다. 바로 영국 역사상 유명한 '프리이들의 숙청'이 일어난 것이다. 의회 습격으로 장로파 의원들이 대거 축출되고 의회에는 60여 명의 독립파 의원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이 시기의 의회를 '찌꺼기 (rump)'라는 경멸의 뜻을 보태 '잔부 의회(Rump Parliament)'로 부르게 되었다.
잔부 의회는 맨 맨 먼저 찰스 1세를 재판할 최고재판소를 조직했다. 1649년 1월 27일에 최고재판소는 찰스 1세에게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국가의 적으로서 폭정, 반역, 살인, 사회에 해악을 끼친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1월 30일 초췌한 몰골의 찰스 1세가 단두대 앞으로 끌려 나왔다. 그는 단두대 주위의 사람들을 절망스런 눈길로 살펴보고는 주교 앞에서 최후의 기도를 올렸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순교자임을 주장하며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마침내 그의 목에 도끼가 휘둘러지고 집행관이 찰스 1세의 목을 집어 올려 군중에게 보였다. 이는 재판을 통해 국민이 군주를 처형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한편, 찰스 1세의 죽음은 유럽 절대 군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모아 국왕을 참수한 올리버 크롬웰을 저주했다. 그해 5월 19일에 전 유럽의 질책 속에서 잔부 의회는 영국 공화국의 탄생을 선포했다. 이로써 영국은 절대 왕정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민 국가 시대로 들어섰다.
호국경
공화국이 설립된 후 올리버 크롬웰은 잉글랜드의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자시느이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공격했다.
아일랜드는 브리튼 섬 서쪽에 있는 작은 섬으로, 일찍이 12세기 플랜태저넷 왕가의 헨리 2세가 군사를 일으켜 잉글랜드 땅으로 복속시켰다. 그러나 잉글랜드 땅으로 복속시켰다. 그러나 잉글랜드 국왕의 폭정에 시달리던 아일랜드 인은 점차 불만이 고조되었다. 1649년에 영국 내전이 발발하자 이 기회를 틈타 아일랜드 인이 봉기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제1차 내전이 끝났을 당시 아일랜드로 도망쳤던 많은 왕당파는 아일랜드 인과 손을 잡고 왕정복고를 계획했다. 아일랜드로 집결한 왕당파는 꾸준히 세력을 확장하여 1648년에 이르러서는 무려 1만 2,000명에 달했다. 왕당파 세력이 커지는 것을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던 올리버 크롬웰은 1649년에 댁규모 함대를 이끌고 아일랜드 인을 발견하면 무조건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서인도 제도에 노예로 팔아넘겼다. 이러한 무자비한 진압 끝에 올리버 크롬웰은 1652년에 마침내 아일랜드를 복속시켰다. 3년여에 걸친 전쟁으로 아일랜드 주민 3분의 1이 목수을 잃었고, 1만 헥타르의 땅이 황무지로 변했다. 올리버 크롬웰은 황폐하게 변한 아일랜드를 바라보고 의기양양해하며 "이는 하늘이 야만인에게 던진 경고이다"라고 코웃음을 쳤다. 아일랜드 원정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군대는 정치적 세력을 키우고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다. 이는 올리버 크롬웰이 독재 정치를 펼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1650년에 원정을 끝내고 런던으로 돌아온 올리버 크롬웰은 곧장 스코틀랜드로 진격했다. 당시 스코틀랜드에서는 찰스 2세가 새로운 왕으로 인정된 상태였다. 1652년 9월 3일에 잉글랜드군은 우스터(Worcester)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했다. 찰스 2세는 변장을 하고 농가에서 40여 일을 숨어 지내다 가까스로 배를 타고 프랑스로 도망쳤다. 이로써 10년 동안 계속된 내전은 끝을 맺고 스코틀랜드는 크롬웰에게 완전히 정복되었다. 크롬웰은 몽크(General Monck) 장군이 이끄는 부대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주둔시키고 자신은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1654년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통합하고 브리튼 섬의 통일을 선포했다.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돌아온 크롬웰은 정치적 안정과 사회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잔부 의회와 군대의 갈등은 점차 커져만 갔다. 군대 내에는 의원들이 부패했기 때문에 새로 의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크롬웰은 양측을 중재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의회를 해산시키기로 했다. 1653년 4월 19일에 크롬웰은 런던에서 군사 회의를 열어 의회의 자체 해산을 요구했다. 그러자 다음날 의회는 크롬웰에 맞서기 위해 새로운 선거법을 의결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크롬웰은 휘하의 총기병을 소집해 곧장 의회로 쳐들어갔다.
"의원 여러분! 그동안 여러분이 저지른 죄악이 너무도 많습니다. 영국 시민은 좀 더 나은 지도자를 선출하여 정권을 맡기고자 합니다!"
그 말에 의원들은 분노를 터뜨리며 올리버 크롬웰을 질책했다.
"감히 군인 나부랭이가 성스러운 의회를 모독하다니!"
크롬웰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시오. 나는 당신들의 의회를 인정하지 않소. 나는 당신들의 죄상을 널리 알리고 의원 자격을 박탈할 것이오!"
크롬웰은 이어서 의원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은 내노라하는 술주정뱅이고, 당신은 뇌물수수죄! 그리고 당신, 그 옆의 당신 모두 여기서 나가시오!"
크롬웰이 손짓하자 수많은 병사가 의사당 안으로 밀치고 들어와 의원들을 모조리 쫓아냈다. 크롬웰은 의장의 자리에 앉아 의사봉을 들어 올리며 웃을 터뜨렸다.
"이까짓 의사봉이 뭐라고!"
국가권력의 상징인 의사봉이 올리버 크롬웰에게는 단순한 장난감에 불과했던 것이다.
1653년 12월 16일 올리버 크롬웰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세ㅣ 나라를 통치하는 호국경(Protectorate)에 정식으로 취임했다. 성대한 취임식장에 올리버 크롬웰은 군복과 군화를 벗어 던지고 검은색 가운을 두른 채 나타났다. 이제 더는 군인의 신분이 아니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권력의 상징인 옥새와 보검이 올리버 크롬웰의 손에 쥐어지면서 마침내 군사독재 정권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올리버 크롬웰은 영국의 내정과 외교, 군사, 입법을 장악한 최고 통치자가 된 것이다.
호국경의 죽음
호국경이 된 올리버 크롬웰은 금욕적인 독재 정치를 펼쳤다. 그는 전국을 11개 군사 구역으로 나누고 군정장관을 배치하여 관할하도록 했다. 군정장관은 크롬웰이 직접 관리했기 때문에 크롬웰의 말 한마디가 곧 법이었다. 크롬웰은 또한 엄격한 청교도식 법령을 만들어 온 국민이 청교도 계율을 지키도록 했다. 가령 술이나 도박을 금지하고, 안식일에는 영업 활동은 물론이거니와 외출까지 금지했으며 이를 어기면 혹독한 형벌을 가했다.
강압적인 통치방식은 내정뿐만 아니라 외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651년에 크롬웰은 항해 조례를 재정하여 외국 상인이 영국 식민지와 무역을 하지 못하게 금했다. 또 상품을 싣고 영국으로 드나드는 선박은 영국 선박과 원산지 선뱍에만 국한시켜 이를 어기면 상품을 모조리 몰수했다. 항해 조례는 영국 상인들의 호주머니를 두둑이 해 주는 대신 해상 중계 무역을 중점적으로 하던 네덜란드에 크나큰 타격을 입혔다. 항해 조례로 말미암아 갈등이 폭발한 영국과 네덜란드는 한 차례 대규모 해전을 벌였다. 그러나 약소 국가였던 네덜란드는 해전에서 패해 영국의 항해 조례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영국은 신식 대포를 갖춘 군함을 앞세워 돈벌이를 찾아 나섰다. 우선 통상 무역을 강화하기 위해 스페인령 서인도 제도에 원정대를 파견했다. 1655년 5월에는 카리브 해의 노예무역 중심지였던 자메이카를 정복했다. 다음에는 프랑스와 합세해 스페인령 플랑드르에도 원정대를 파견하여 유럽의 중요 무역항이었던 됭케르크(Dunkerque)를 손에 넣었다. 덕분에 영국의 통상 무역이 크게 발전하면서 신대륙과 유럽, 아시아의 금은 보화가 영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말년의 크롬웰에게서는 과거의 위풍당당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극심한 신경쇠약증으로 항상 자신이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1658년 말라리아에 걸려 병이 위중했던 크롬웰은 병석에 드러누운 와중에도 전전긍긍하며 불안에 떨었다. 영국의 최고 통치자 자리까지 올라서는 과정에서 그의 총칼에 쓰러졌던 수많은 주거이 눈앞에 어른거렸던 것이다. 죄책김에 시달리던 크롬웰은 죽어서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에게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의 죄를 사하고 용서해주십니다."라고 속삭였다. 그제야 올리버 크롬웰은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드디어 구원받았다!"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9월 3일 올리버 크롬웰은 아들 리처드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11월 10일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비밀리에 안장되었으며 장례식은 13일 국장으로 치러졌다.
올리버 크롬웰을 공정하게 평가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영국 역사가들은 올리버 크롬웰이 비록 독재자였지만 내란 후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통일하여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고 입헌주의 정부 체제를 발전시켰으며, 영국의 해외 확장에 큰 공헌을 한 애국적 지도자로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