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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secularization) 과정은 신앙과 교회를 개인적이며 인간적인 영역으로 축소시키려 합니다. 더 나아가, 초월적인 것을 철저하게 거부함으로써 윤리의 타락을 가져오고, 개인과 집단의 죄의식을 약화시키며, 상대주의를 자라게 합니다. 이런 것들은 전체적으로 방향감각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복음의 기쁨, 제64항)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 유다가 돈 때문에 예수를 배신한 사실을 우리 모두는 기억하고 있다. 신앙인이 돈으로 예수를 배신하는 모습은 우리 시대에도 드물지 않다. 돈과 가장 거리가 멀 것 같은 고위성직자들이 막대한 재정을 투자하여 진행하는 여러 가지 사업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대기업의 총수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최근 들어 교회가 영리사업과 상조회사를 운영하며 막대한 자금을 형성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장례식장 운영, 대학 확장, 의료기구 수출입 판매 등의 대형사업에서, 영세 성물업자들의 이익에까지 많은 부분에서 교회가 영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교회 유지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의 속성, 운동 방향과 상당부분 일치한다는 점에서 상식을 가진 많은 이들이 우려를 하고 있다.
배신자는 외부에 있지 않고 언제나 내부에 있다. 그것도 유다처럼 예수 곁에 가까이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 중에 배신자가 더 많다.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언론에 화려하게 나타나는 사람 중에 악한 배신자가 더 많다.
20세기 말 지구촌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세계적 변동은 거주인구 1,000만 명 이상의 ‘메가시티(megacity)’가 빠르게 증가한 점이다. 1975년만 해도 뉴욕과 도쿄, 멕시코시티 등 3-4개 정도뿐이었지만, 40여년 만인 2015년에는 대한민국 서울을 포함해 25곳으로 증가했다. ‘메가시티’는 글로벌 세계의 정치 중심이자 새로운 시장 지향적 글로벌 경제의 거점, 점차 심화되는 도시 간 글로벌 경쟁의 핵심 주체로 그 역할이 확대되고 있다.
메가시티들은 새로운 글로벌 정보, 지식경제의 모든 과정들을 주어진 특정 지역 속에 집중시켜, 최고의 것(강력한 힘과 사람들)과 최악의 것(구조적으로 부적합한 사람들)을 집중시킨다. 이러한 문제에도 메가시티들은 경제·기술·사회적 역동성의 중심이고 각 나라의 실제적 발전 엔진이며, 새로운 경제 속에서 모든 사람이 의존하는 글로벌 네트워크와 연결해 주는 접점 등의 이유로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된다.
우리는 도시에서 인신매매, 마약거래,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착취, 노인과 영아의 유기, 다양한 형태의 부패와 범죄가 벌어지고 있음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교류와 연대의 공간이 될 수 있는 곳이 빈번하게 소외와 상호불신의 공간이 됩니다. 주택과 단지는 서로를 결합하고 통합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격리되어 보호하기 위해 건설됩니다. 복음 선포는 이 같은 환경에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기반이 될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 제75항)
1970년대 초부터 근 40여 년간 진행된 한국가톨릭 교회의 고속 성장과 확장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대사회적인 건강함을 유지했던 정의구현사제단이나 정의평화위원회 활동 등)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종교사회학의 ‘합리적 선택 이론’에서 말하는 ‘종교시장(religious market)’에서의 ‘신자유주의’와 ‘소비자(고객) 중심주의(consumerism)’가 표출된 것으로 바라보는 학자들도 있다. ‘합리적 선택 이론’은 근대화가 진행될수록 인간 사회에서 종교가 탄생·성장·발전·쇠퇴하는 일련의 변화 과정을 인간 사고의 경제적 합리성에 근거해 설명하려는 새로운 시도이다.
에밀 뒤르켐과 막스 베버 이후의 기존 종교사회학이 소홀히 취급해왔던 종교 현상의 공급 측 요소들이 1990년대 이후 최근 종교경제모델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그 중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종교 사회를 공급자와 수요자로 구성된 하나의 시장으로 가정하는 이 모델은 미시적 관점에서 종교 시장에 참여하는 모든 행위자들이 경제적 합리성에 기초하여 종교적 믿음과 행위를 선택하고 결정하기 때문에, 거시적 관점에서 종교 시장에 대한 법적 규제가 시장 참여자들의 종교적 참여도를 떨어뜨린다고 한다.
종교 집단의 성장이나 감소가 종교적 수요의 양적 변화에 기인하기보다는 종교 공급자들간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종교시장에서 가장 효율적인 종교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급자들이 성장하고, 비효율적 공급자들은 쇠퇴한다는 이론이 지금 한국개신교와 가톨릭 교회에 반영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의미를 해석하고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지 않는 이러한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문화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대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문화에서 새로운 언어, 상징, 메시지 그리고 패러다임을 차용하며, 이것들은 삶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 대체로 예수님의 복음과 반대되는 접근법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여 도시 안에서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시노드에서는, 오늘날 이 거대한 공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와 그 변화가 만들어내는 문화는 새로운 복음화에게 있어 유리한 거점이라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도시민들에게 더 매력적이고 의미 있는 기도와 교감을 위한 혁신적인 공간과 가능성을 구상해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 제73항)
‘종교경제(religious economy)’는 종교를 하나의 상품(commodity)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 ‘사업가형 사목자 (pastopreneurs)’이다. 이는 교회와 공동체가 선교를 확장시키려 할 때 필요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 비즈니스의 위험과 비슷한 위험을 불사하려는 교회의 지도자를 말하며, 이들은 일반의 평범한 지도자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다양한 현실적 기법을 사용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사업가형 사목자’들은 더 큰 성당을 짓고, 더 많은 시설을 만들어 내며 심지어 ‘주교와 함께 하는 성지순례’라고 선전하는 해외 여행투어 프로그램 등 온갖 위험한 일들을 불사하면서까지, 신자들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종교와 비즈니스 관행을 결합하기 시작했다.
돈에 대한 교회의 변화된 관점도 중요하다. 기존 자유시장 경제체제 내에서 물질적인 풍요를 가지게 된 한국 천주교회 주류 집단인 중산층 신자들은 자신들의 상승적 사회이동, 즉 사회경제적 지위 성취가 신(神)의 뜻이라는 일종의 ‘자기 정당화’를 일삼고, 막연하게 모든 것이 다 잘되고 성취될 것이라는 기복적 ‘무지개’로 대변되는 ‘긍정 신학(?)’에 도취된다.
미국 개신교 메가처치 설교자로 긍정적 사고를 설파한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 한국어로 번역된 2005년 이후 오랫동안 인기 도서가 된 점만 봐도, ‘번영의 복음’ 한국판이 담은 성공의 교리와 자본주의 양자 간에는 상호연관성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무지개 원리가 번영의 복음 가톨릭판이 되어 한 때를 보냈으나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다.
이와 함께 한국형 개신교의 메가처치 형태들과 가톨릭교회의 교구별 대규모 성령기도회, 체육관 전례, 각종 성모신심관련 행사들은 복음에 대한 열정 보다는 성령세미나 전속 사제들이나 유명한 성직자 혹은 고위성직자를 등장시켜 ‘어떤 신부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막연한 믿음으로 개인숭배적인 요소를 강하게 표출한다. 과정 안에서 무속적인 요소가 상당히 많이 보인다.
또한 성공지향적인 중산층이 모여서 부르주아적 종교 조직이라는 동질성을 띠며 복음의 고난과 희생보다는 축복과 번영을 강조하지만, 실질적인 삶의 위기와 고통의 한복판에서는 잃어버린 십자가를 찾을 수가 없어 어려워하는 신자들을 보게 된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 천주교 주교들과의 첫 번째 만남의 자리에서 한 연설의 핵심은 ‘번영의 유혹에 대한 경계’였다. 그러나 주교회의는 교황의 발언에서 불편한 부분들을 누락시켜 발표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아래는 관련된 부분의 교황발언 전문이다.
저는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핵심에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그 자리에 있습니다. 나자렛의 회당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직무를 처음 시작하는 자리에서 이 점을 명확히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이 장차 올 하늘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심판을 받을지 드러내 밝히실 때, 여기에서도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봅니다. 번영의 시대에 떠오르는 한 가지 위험,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저 또 다른 “사회의 일부”가 되는 위험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신비적 차원을 잃고, 성체성사를 기념하는 능력을 잃으며, 그 대신에 하나의 영적 단체가 되는 위험입니다. 이 단체는 그리스도교 단체이며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을 가진 단체이지만 예언의 누룩이 빠진 단체입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가난한 이들은 더 이상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적절한 역할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이 유혹에 특정 교회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과거 오랜 세월 동안 크게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어떤 사례들에서 이런 교회와 공동체들은 그 자체가 중산층이 되어서 그런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가난한 이들이 심지어 수치감을 느낄 정도가 됩니다. 이것은 영적 “번영”, 사목적 번영의 유혹입니다. 그런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부유한 이들을 위한 교회, 또는 돈 많고 잘나가는 이들을 위한 중산층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는 낯선 일도 아닙니다. 이 유혹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코린토 신자들을 질책해야만 했습니다. (1코린 11,17) 그리고 야고보 사도는 이 문제를 더욱 강하고 명확하게 제기했습니다. (야고 2,1-7) 그는 이들 부요한 공동체들, 부요한 사람들을 위한 부요한 교회들을 질책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배제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들이 누리는 생활양식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그들 공동체에 들어가기를 꺼리게끔 하였고 가난한 이들은 그런 공동체에서 편안하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번영의 유혹입니다. 저는 여러분 주교들께서 좋은 일들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는 지금 여러분을 훈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 자신의 형제를 확인해야 할 의무를 지닌 한 형제로서,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의 교회는 번영하는 교회이고 매우 선교적인 교회이며 위대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교회의 예언자적 구조 자체로부터 가난한 이들을 제거하려는 이런 유혹의 씨앗들을 뿌리도록 허용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악마로 하여금 여러분이 부요한 이들을 위한 부요한 교회, 잘 나가는 이들의 교회가 되게 만들도록 허용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그렇게 된다면) 그 교회는 아마도 “번영의 신학”을 펼치는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제대로 되지 못하는) 그저 그런 별 쓸모없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번영의 신학은 세상에서 어떠한 '성취'를 이루는데 집중한다. 경제적 성공, 경쟁에서 이기는 것, 남보다 앞서는 것, 사회적 명망을 얻는 것 등 세속이 말하는 성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경쟁을 극대화시키면서 이윤을 극대화하자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에 가깝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번영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상실할 위험을 지닌다. 예수의 성취를 바라본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갔다. 십자가는 죽음이다. 죽어야 산다는 것이 십자가의 논리이다. 그런데 비교와 경쟁을 통해 살아남겠다는 것은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죽일 수 있다!’는 논리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이다.
‘희생으로 죽는 것(순교)’이 고결한 가치인 그리스도교의 신앙 안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비교와 경쟁으로 ‘남을 이겨야(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논리를 최고점으로 끌어올려 ‘죽을 때까지 싸워라! 죽을 때까지 경쟁하라!’ 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반영성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체제인 것이다. 인간이 바라보아야 할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고 또 온전한 채움이 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신앙을 어떻게 상품화 시키는가? 개신교는 이제 종교상품 시장이 다변화 되고 상품도 다양해져 다양한 종교물품과 서적, 음반, 성물, 강의 등이 다양한 소비자들의 욕구에 맞게 조직되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종교상품 시장의 후발업체 격으로 개신교에서 이미 상품화시켜 재미를 톡톡히 보았던 다양한 방식들을 여과 없이 반영하여 사업에 적용한다. 대규모 체육관 성령세미나, 안수치유기도 피정, 음반, 성물, 도서 등 소비의 측면에서 사용자들의 요구가 아닌 생산자의 기획에 따른 불필요한 상품들의 생산과 판매들이 줄을 잇는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 안에 ‘힐링’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뜻하는 것이 이루어 질 것이다.” 라며 한국인들의 기복신앙과 현세주의에 부합하여 금세 베스트 셀러가 되는 책들이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책들과 대중강의가 지금 우리들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인가?
1997년, 국제통화기금 체제로 들어서며 한국사회의 경제주체들이 경제위기에 처하고, 실업과 실직, 부채와 파산으로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내 몰리면서 이 사회에는 커다란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로 인해 상처받고 거리로 내몰린 자들에게 종교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따뜻한 밥 한끼의 식사대접이 아니라 ‘마음을 치유(힐링)한다’는 것이었다.
2009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최고조에 달하고 다시 한 번 한국사회에 쓰나미로 다가올 때 많은 이들은 불안과 충격을 받았고, 생활에 큰 어려움을 맞이하게 된다. 그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는 주문에 걸려 ‘힐링’이라는 처방전을 받고 TV, 신문, 수 많은 인문학 강의들에 ‘힐링’자만 나오면 달려가는 묘한 ‘힐링 중독자’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어느새 중독에서 깨어난 이들은 그 힐링 치료사들에게 온갖 비난을 퍼붓고 ‘속았다’고 말한다. 그래도 ‘희망’이 있지 않겠나 했지만 역시나 삶에서 다가오는 어려움들 속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삶의 문제와 고난을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기 보다는 그들을 ‘중독’상태로 내 몰아 막연한 기대와 희망만을 품게 했던 것이다.
교회의 세속화 문제를 시대의 대세라고 말하는 것은 복음적이지 않은 생각이다. 교회의 세속화에 제동을 걸어야 하고, 이제 사회악과 마찬가지로 싸워야 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하나의 기법으로 생각하며 인간의 재주로 생각한다면 이미 그것은 방향이 잘못 설정된 것이다.
복음은 인간의 말재주로 전하는 것이 아니다. ‘사목자가 자랑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 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는 복음은 헛된 것이며 복음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식별해야 한다.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세속주의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많은 나라에서, 가톨릭교회를 신뢰할 수 있는 기관 가운데 하나로 생각한다. 가톨릭교회는 가장 가난한 자들에 대한 연대와 관심으로 특별히 약자들에게 신뢰받고 있다. 이제 교회는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병원이나 대학이 아니다. 멋지고 웅장한 성당건물이나 화려한 쇼케이스가 있는 상가건물이 아니다. 현대식 교구청 건물도 주교좌 성당도 아니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쇄신되고, 들어야 할 것을 올바로 듣고, 보아야 할 것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안목과 능력을 가져나가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예수는 이런 우리들에게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빌려 말씀하신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마음이 무디고,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마태 13,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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