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진리 찾는 고행, 권력의 탄압
리영희 평전/[1장] 진리를 추구한 이성의 파수꾼 2010/04/22 08:00 김삼웅진리란 한 마디로 ‘자유의 사상’이며, 자유의 사상을 추구하는 지식인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처럼 아무리 포악한 도그머의 권력에 대해서도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해도 지구의 운동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이다.
그와 같은 신념과 사상과 삶은 이른바 ‘기성의 권위’에 맞서는 것이다. 오로지 이성에 대한 충성심으로 사는 정신이다. 충성과 복종을 강요하는 각종 권위와 권력에 대해서 그 허위의 껍질을 벗기려는 정신이다. 그 정신은 필연적으로 약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 (주석 10)
리영희는 자신이 군사독재의 포악한 시대에 지적 활동을 지탱해 준 두 권의 책에서 진리란 어떤 것인가를 깨닫고, 진리에 몸바쳐야 하는 지식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도 배웠다고 말했다. J. B. 베리의 <사상의 자유의 역사>와 A. D. 화이트의 <기독교국가에서의 과학과 신학의 투쟁의 역사>이다.
리영희는 1968년 5월 큰 영향을 받은 <사상의 자유의 역사>를 읽고 다음과 같은 독후감을 적었다.
초자연적 신학이론과 교회의 권위에 대항해서 인간과 인간 이성을 해방하기 위한 싸움이 보여주는 이 처절한 투쟁사는 바로 오늘날 남한 사회의 정치 이데올로기의 권위 앞에서 우리가 싸워야 할 자유사상의 투쟁의 현실과 미래를 말해주는 것 같다. 한 때의 기독교가 차지했던 사상 탄압과 반진보적 역할을 지금 이 나라의 착도된 정치 이데올로기가 대행하고 있다. 이 정치 이데올로기가 그 권위를 지키고 국민에게 강요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단과 수법의 포악성도 중세의 기독교 권력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러면서도 인류의 사상사와 문명사는 반이성적 억압세력의 패배의 역사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 인식 없이는 자유사상을 위한 투사는 희망을 잃은 지 오래일 것이다. (주석 11)
리영희가 거대한 우상집단과 ‘진리를 위한’ 싸움에 동원한 무기는 ‘논증(論證)’이었다.
약자의 유일한 무기는 논증이다. 자유의 사상을 대표하는 소크라테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조르다노 브루노, 스피노자, 로저 베이컨‥‥에서부터 근대의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이성의 신봉자들이 종교적 권위나 세속적 권력의 본질인 무지, 편견, 폭력, 아집, 교만, 교활, 포악, 위선, 궤변, 협박, 허위, 광신, 잔인‥‥과 싸워온 기록은 눈물겨울 만큼 감동적이었다. ‘위대한 인간’이란 어떤 인간을 말하며 ‘자유로운 사상’이란 어떤 사상인가를 이 두 권의 책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나의 글을 논증으로 무장하는 동기가 되었다. (주석 12)
‘논증’의 철학적 풀이는 “주어진 판단에 참이라고 하는 것의 이유를 밝히는 논리적 절차, 논증되어야 할 판단을 논제(論題) 또는 주장이라 하고, 그 이유 내지 근거로 선택되는 것을 논거(論據)라 한다.” (주석 13)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사유는 ‘논증적’이지 ‘직관적’이지는 않다고 했다.
리영희가 수많은 지식인, 언론인이 명멸하는 한국사회에서 우뚝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치열한 ‘논증의 글쓰기’에서 비롯한다. 책상머리 글쟁이, 대충대충 추상명사를 남발하는 허위의 글쓰기가 아니었기에 그는 한국 지성의 성좌가 될 수 있었다. 그 ‘논증’때문에 ‘의식화의 원흉’으로도 몰리고 탄압받았다. 리영희는 논증을 통해 금단의 영역을 조명하고 우상들을 박멸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1960년대부터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이른바 ‘의식화’의 ‘원흉’으로 몰아치는 권력에 의해서 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걸쳐 각각 한 차례씩, 그에 대한 정권의 보복으로 세 차례의 반공법에 의한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대학생과 젊은 지식인 세계의 ‘의식화’의 물결에 나의 저서들이 몇 개의 물방울을 보탰는지 정확히 가늠할 길이 없다. 보탰다손치더라도 극히 미미한 것이라는 주관적 평가로 살아왔다. (주석 14)
이성적이지 못한 인물이나 집단이 권력이라는 칼자루를 쥐면 그 주변에 온갖 망나니가 몰려든다.
망나니들은 주군에게 자신들의 존재가치와 이유를 확인하려고 부단히 희생자를 만들어 낸다. 반이성의 권력집단과 망나니들의 잔치에는 희생양이 필요했고, 희생양은 그 시대의 대표급 양심적인 인물 중에서 골라낸다.
고대 부족사회에서 하늘이나 부족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가장 살찐 소나 양을 잡아서 제물로 삼았듯이, 독재권력 집단도 그러하다. 거기에는 이성의 목소리를 제거하려는 일차적 목적과 함께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공포감을 주려는 배제의 효과도 배려된다. 리영희는 반이성의 시대에 우상들의 제물(祭物)이 되었다.
1966년(27일), 1977년(2년), 1980년(60일), 1983년(35일), 1989년 (5개월 10일)의 구속을 비롯하여 9차례의 연행, 5차례의 구치소 생활, 3차례의 재판, 2차례의 해직교수, 2차례의 언론사 강제퇴직 등 30여 년의 험난한 ‘역정’을 헤쳐왔다. 한 인간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고 시련이었다.
사회 첫 출발 때 리영희는 평범한 언론인이었다. 비상식과 광기의 시대가 그를 비판하는 투사 지식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세상이 대변혁을 이루고 있기 전부터도 제도나 체제보다는 인간적 가치를 존중히 여겨왔습니다. 해방 이후 이 사회를 지배해 온 가치관은 자유와 평화를 배제한 것이었습니다. 개인의 창의를 억제하고 평화를 파괴하는 제도나 이데올로기에 맞서 분노를 가지고 싸워왔어요. 군사적 방식 및 철학에 대한 거부, 총체적 평화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온 것이지요. 앞으로는 이런 가치들에 대한 추구가 더욱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주석 15)
주석
10) 리영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362쪽, 두레, 1994.
11) 이영희, <대화>, 386쪽, 재인용.
12) 앞의 책, 363쪽.
13)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철학대사전>, 236쪽, 동녘, 1989.
14) <역정(歷程)>, '책을 내는 변명의 말', 3쪽, 창작과 비평사, 1988.
15) 김영모, 리영희 인터뷰, <옵서버>, 1990년 1월호.
그와 같은 신념과 사상과 삶은 이른바 ‘기성의 권위’에 맞서는 것이다. 오로지 이성에 대한 충성심으로 사는 정신이다. 충성과 복종을 강요하는 각종 권위와 권력에 대해서 그 허위의 껍질을 벗기려는 정신이다. 그 정신은 필연적으로 약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 (주석 10)
리영희는 자신이 군사독재의 포악한 시대에 지적 활동을 지탱해 준 두 권의 책에서 진리란 어떤 것인가를 깨닫고, 진리에 몸바쳐야 하는 지식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도 배웠다고 말했다. J. B. 베리의 <사상의 자유의 역사>와 A. D. 화이트의 <기독교국가에서의 과학과 신학의 투쟁의 역사>이다.
리영희는 1968년 5월 큰 영향을 받은 <사상의 자유의 역사>를 읽고 다음과 같은 독후감을 적었다.
초자연적 신학이론과 교회의 권위에 대항해서 인간과 인간 이성을 해방하기 위한 싸움이 보여주는 이 처절한 투쟁사는 바로 오늘날 남한 사회의 정치 이데올로기의 권위 앞에서 우리가 싸워야 할 자유사상의 투쟁의 현실과 미래를 말해주는 것 같다. 한 때의 기독교가 차지했던 사상 탄압과 반진보적 역할을 지금 이 나라의 착도된 정치 이데올로기가 대행하고 있다. 이 정치 이데올로기가 그 권위를 지키고 국민에게 강요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단과 수법의 포악성도 중세의 기독교 권력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러면서도 인류의 사상사와 문명사는 반이성적 억압세력의 패배의 역사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 인식 없이는 자유사상을 위한 투사는 희망을 잃은 지 오래일 것이다. (주석 11)
리영희가 거대한 우상집단과 ‘진리를 위한’ 싸움에 동원한 무기는 ‘논증(論證)’이었다.
약자의 유일한 무기는 논증이다. 자유의 사상을 대표하는 소크라테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조르다노 브루노, 스피노자, 로저 베이컨‥‥에서부터 근대의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이성의 신봉자들이 종교적 권위나 세속적 권력의 본질인 무지, 편견, 폭력, 아집, 교만, 교활, 포악, 위선, 궤변, 협박, 허위, 광신, 잔인‥‥과 싸워온 기록은 눈물겨울 만큼 감동적이었다. ‘위대한 인간’이란 어떤 인간을 말하며 ‘자유로운 사상’이란 어떤 사상인가를 이 두 권의 책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나의 글을 논증으로 무장하는 동기가 되었다. (주석 12)
‘논증’의 철학적 풀이는 “주어진 판단에 참이라고 하는 것의 이유를 밝히는 논리적 절차, 논증되어야 할 판단을 논제(論題) 또는 주장이라 하고, 그 이유 내지 근거로 선택되는 것을 논거(論據)라 한다.” (주석 13)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사유는 ‘논증적’이지 ‘직관적’이지는 않다고 했다.
리영희가 수많은 지식인, 언론인이 명멸하는 한국사회에서 우뚝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치열한 ‘논증의 글쓰기’에서 비롯한다. 책상머리 글쟁이, 대충대충 추상명사를 남발하는 허위의 글쓰기가 아니었기에 그는 한국 지성의 성좌가 될 수 있었다. 그 ‘논증’때문에 ‘의식화의 원흉’으로도 몰리고 탄압받았다. 리영희는 논증을 통해 금단의 영역을 조명하고 우상들을 박멸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1960년대부터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이른바 ‘의식화’의 ‘원흉’으로 몰아치는 권력에 의해서 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걸쳐 각각 한 차례씩, 그에 대한 정권의 보복으로 세 차례의 반공법에 의한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대학생과 젊은 지식인 세계의 ‘의식화’의 물결에 나의 저서들이 몇 개의 물방울을 보탰는지 정확히 가늠할 길이 없다. 보탰다손치더라도 극히 미미한 것이라는 주관적 평가로 살아왔다. (주석 14)
이성적이지 못한 인물이나 집단이 권력이라는 칼자루를 쥐면 그 주변에 온갖 망나니가 몰려든다.
망나니들은 주군에게 자신들의 존재가치와 이유를 확인하려고 부단히 희생자를 만들어 낸다. 반이성의 권력집단과 망나니들의 잔치에는 희생양이 필요했고, 희생양은 그 시대의 대표급 양심적인 인물 중에서 골라낸다.
고대 부족사회에서 하늘이나 부족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가장 살찐 소나 양을 잡아서 제물로 삼았듯이, 독재권력 집단도 그러하다. 거기에는 이성의 목소리를 제거하려는 일차적 목적과 함께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공포감을 주려는 배제의 효과도 배려된다. 리영희는 반이성의 시대에 우상들의 제물(祭物)이 되었다.
1966년(27일), 1977년(2년), 1980년(60일), 1983년(35일), 1989년 (5개월 10일)의 구속을 비롯하여 9차례의 연행, 5차례의 구치소 생활, 3차례의 재판, 2차례의 해직교수, 2차례의 언론사 강제퇴직 등 30여 년의 험난한 ‘역정’을 헤쳐왔다. 한 인간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고 시련이었다.
사회 첫 출발 때 리영희는 평범한 언론인이었다. 비상식과 광기의 시대가 그를 비판하는 투사 지식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세상이 대변혁을 이루고 있기 전부터도 제도나 체제보다는 인간적 가치를 존중히 여겨왔습니다. 해방 이후 이 사회를 지배해 온 가치관은 자유와 평화를 배제한 것이었습니다. 개인의 창의를 억제하고 평화를 파괴하는 제도나 이데올로기에 맞서 분노를 가지고 싸워왔어요. 군사적 방식 및 철학에 대한 거부, 총체적 평화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온 것이지요. 앞으로는 이런 가치들에 대한 추구가 더욱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주석 15)
주석
10) 리영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362쪽, 두레, 1994.
11) 이영희, <대화>, 386쪽, 재인용.
12) 앞의 책, 363쪽.
13)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철학대사전>, 236쪽, 동녘, 1989.
14) <역정(歷程)>, '책을 내는 변명의 말', 3쪽, 창작과 비평사, 1988.
15) 김영모, 리영희 인터뷰, <옵서버>, 1990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