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행 50- 인천 송월동 동화마을
2020년1월19일 인천 송월동 동화마을로 갔습니다. 오늘은 동화속의 주인공이 되려고 합니다.
송월동은 소나무가 많아 "솔골", "송산"으로 불리다가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달이 운치가
있어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된 후 독일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거주하던 부촌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 젊은 사람들은 떠나고 연로하신
분들만 거주하면서 건축물은 점점 노후되고 빈 집들이 늘어나 활기를 잃어버린 곳이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원도심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2013년 4월부터 꽃길을 만들고 낡은
담과 옹벽에 세계명작동화를 테마로 동심이 담겨져 있는 그림과 조형물을 설치하면서
지금의 동화마을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동화마을 이름에 걸맞는 메르헨한 이름의 메뉴들 짜장빙수와 돌고래피자등 굉장히 아기
자기한 음식들의 인기가 독보적으로 높습니다. 물론 맛도 좋습니다. 짜장빙수라고 정말
춘장이 들어간 짜장이 아닌 비쥬얼적으로 짜장이란 뜻입니다. 근처의 해물찜집도 상당히
맛있습니다. 그 외에도 길거리 음식인 음료류와 아이스크림류도 매우 다양합니다.
새우만두와 월병과 같은 중식 매장도 몇개 있습니다
이집은 Black Rabbit 커피집입니다. 동화속에나오는 검은 토끼를 상호로 만든 커피집입니다.
인천시가 송월동 달동네를 관광명소로 재탄생하기 위한 일원으로 주거환경을 대폭 개선하여
아이들에게 친숙한 동화풍의 거리를 만들게 되었고 주택가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과
배경으로 꾸며진 동화마을로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대만에 갔을때 고양이 마을을 찾아간적있습니다. 그곳은 온통 고양이 벽화와 고양이가
거리를 거닐고 있던 생각이 납니다.
주택가 골목마다 동화 속에 나오는 배경과 주인공들이 그려져있으며 한국 전래동화를
비롯하여 세계명작동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그려진 벽화와 조형물을 만날 수 있으며
아이들에게는 동화를 통한 동심을 심어주고 어른들에게는 어린시절 동화를 보았던 추억을
만끽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니 청춘남녀들이 많이 와서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을 보니 옛날
70년초에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키타를 메고 경춘선타고 남이선에 가고 춘천 소양강을
가기도 했는데..
누구나 어린시절 동화를 읽고 가보지 못한 세상에 대한 환상을 품게 하였습니다.
디즈니 애니매션의 여인들입니다. 한결같이 얼굴은 개름하고 눈이 반짝 빛나고 피부가
하얗습니다.ㅎㅎ
화가 모자를 써 봤습니다.ㅎㅎ
내 취향은 아니지만 사진찍을때는 친한척 합니다.ㅎㅎㅎ
사랑의 카드의 손을 만져보니 겨울이라 차겁습니다. 동상걸릴까봐 손을 따듯하게
녹혀주었습니다.(에라이 동화소설을 써라...!)ㅎㅎ
동화속에 나쁜 역활하는 여자나 남자나 눈꼬리가 올라가고 웃는것도 쓴웃음을 짓는것을
봅니다. 그래서 나이 먹으면 웃는것도 해맑게 웃는 습관을 기르는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입이 얼마나 큰가를 알기 위해 주먹을 넣어 봤습니다.
중학교때 디즈니 애니매션 영화 "밤비, 피노키오""백설공주"를 보고 한때는 애니매션
만화가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월트 디즈니는 우연하게 생쥐를 보고 그린것이 미키 마우스를 그렸다고 합니다.
월트" 디즈니(Walter Elias "Walt" Disney 1901년12월5일-1966년12월15일)은 미국
일리노이즈 시카고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부터 상업 미술에 뜻을 두고 광고 만화 등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미키마우스'를 창조하여 한층 인기가 높아져 "미키마우스""도널드"등
많은 만화 영화를 제작하였습니다.
1937년 세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를 제작하여 개봉하였는데 당대에 엄청난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애니메이션은 장편 영화 상영 도중 잠시 틀어주는
소품같은 개념이어서 월트 디즈니의 도전은 무모하다고 여겨졌지만 개봉 직후 모든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며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알라딘의 지니" 입니다. 중학교때 알리바바와 도둑 40인을 보고 그리 동화속에 빠져들었는지
마치도 알리바바와 같이 양탄자를 날고 세계를 다니고 싶어했었습니다. 지금은 비행기타고
세계여행을 하지만...ㅎㅎ
덴마크의 "호두까기 인형"입니다. 호두까기 인형은 북유럽의 자주 등장하는 캐럭터입니다.
동화마을을 걷다보니 어느덧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나이를 착각하게 됩니다.
월트 디즈니는 4살때,월트의 부모는 시카고의 번잡한 도시생활이 아이들의 교육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월트는 형들과 달리 그림에 무척
관심이 많은 듯 하여 한 번은 집의 벽에 붓으로 돼지그림을 그리다가 콜타르를 뒤집어 쓴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즈음 월트는 아는 의사선생의 말을 어른 못지않게 잘 그리는 등
그림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미술학교에 다니고 싶어했지만 당시 그의 집은
가난하여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고,아버지 역시 반대하였습니다.
월트가 7살이 되었지만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버지 함께 신문팔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문팔이를 하다가 신문에 나온 만화를 많이 볼 기회가 생기고, 그는 결국 아버지에게 그림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월트의 노력을 보아 허락해 주었고, 근처의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자, 예전에 시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유럽에는 세계1차대전이 한창
이었습니다. 월트는 군대에 간 형들을 생각하며 해군에 지원을 했지만, 당시 열 여섯살이던
월트는 입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친구로부터 적십자사 에 구급 부대가 새로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1900년생까지만 받아준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월트는 원서의 생년월일을 1901년에서 1900년으로 고쳐 지원하여 그곳에 들어
갔습니다. 훈련소에 들어가 부상병을 치료하고 간호하는 법을 배우고 적십자 부대에 끼어
프랑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월트가 속한 부대는 파리에 본부를 두고
계속 활동을 하였습니다. 월트는 부대의 상점에서 일하게 되었고, 틈틈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면서 월트의 그림 솜씨는 온 부대에 알려지게 되었고 군인들은 월트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후 크래커라는 동료의 권유로, 패전한 독일군들의 철모에 그림을
그리고 미국에 와서 기념품으로써 그것들을 팔았습니다. 적십자사에서 일해 번 돈의 대부분은
어머니에게 부쳤다고 합니다
1919년 월트는 본격적인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캔자스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만화가나
혹은 그에 관련된 직업을 구하려고 했으나 쉽게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광고용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 인형을 움직이면서 촬영하는 1분짜리 애니메이션 광고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월트는 일생을 통틀어 어릴 때 살던 마을 마셀린을 잊지 못했습니다. 디즈니 영화가 늘
동물과 숲, 농경과 같은 끊임없는 목가적 꿈을 펼쳐오는 것도 마셀린이 월트에게 남긴
기억들이 새롭게 조직되는 과정에서 출현했다고 훗날의 분석가들은 말합니다. 월트는
여기서 기차에 대한 동경과 작은 동물들과 함께 놀던 추억을 가지게 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공동체 삶의 긍정적 희망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월트는 집의 차고를 스튜디오로 개조해 거기서 다니던 회사의 카메라를 빌려다 영화적인
기교를 익혔습니다. 물론 그런 기교는 촬영방식을 확인하는 식의 거의 원초적인 작업이었고
무언가를 알아볼만한 애니메이션 교습서도 드물었습니다. 당시 애니메이션에 관심 있던
사람들의 필독서였던 E.G 러츠의 애니메이션 교습서만이 월트의 유일한 교과서였고 그것을
읽으며 월트는 셀 애니메이션의 기본기를 익혔습니다.
회사에서의 낮일이 끝나고 나면 월트는 어브 아이웍스 등의 동료들과 함께 캔자스 시티 미술
학원에 다니며 드로잉 수업을 들었다. 기본기가 닦이기 시작하면서 그는 이제 영화광고업자로
전환한 회사의 사장 코거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요청해볼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매체에 관심이 많았던 코거조차도 셀 애니메이션의 제작에 필름을 쓰는 일에는 반대했고
월트는 결국 자력으로 첫걸음을 내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래프 오 그램 (Laugh-O-
Gram)'이라고 이름지은 1분짜리 애니메이션 필름 릴을 회사 동료였던 하먼 형제와 만들어서
뉴먼 극장의 주인 프랭크 뉴먼을 찾아갔습니다. '래프 오 그램'은 그시절의 소단위 규모의
사회문제들을 풍자한 짧은 만화로 신문에 연재되는 풍자만화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이었습니다. 월트가 찾아간 뉴먼은 예전에 월트가 일했던 미술가게의 페스먼이 소개해
준 자였는데 1분의 짧은 시사를 마친 뒤 지체 없이 그 필름을 사고는 월트와 시리즈 계약도
맺었습니다.
훗날 월트는 자신의 작품명을 따 래프 오 그램 필름사를 설립하고 미성년자 신분으로 그 회사
사장이 됩니다. 재정적인 문제로 래프 오 그램의 운영이 쉽지 않았던 월트는 새로운 시작점을
헐리우드로 결정지었지만 당대 애니메이션의 중심지는 당연 뉴욕 이었습니다. 월트가 처음
헐리우드에 도착해서 찾아다닌 일도 애니메이션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실사영화의 감독직
이었습니다. 이전에 형과 함께 고생을 하며 만든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필름을 가지고
계약을 해볼 심산으로 여러 스튜디오 문을 두드렸지만 길은 열리지 않았고 결국 실사영화의
감독이 되는 것도, 앨리스 코미디를 파는 것도 몇 개월만에 모두 포기했습니다.
위기 속에서도 기회는 찾아왔는데 헐리우드 역사상 최초의 여성 배급자인 마거릿 윈클러가
월트 디즈니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워너 브라더스의 비서인 동시에
자신만의 캐리어 확장을 꿈꾸던 그녀는 애니메이션 배급에서 이미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월트의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를 보자마자 시리즈의 성공
가능성을 점치고는 시리즈 배급계약을 제의했습니다. 일이 워너브라더스에 있던 윈클러의
상사에게도 알려지면서 그렇게 월트 디즈니의 워너브러더스 에서의 첫 번째 경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계약을 끝난 뒤에도 월트를 괴롭혀왔던 돈은 여전히 커다란 벽이었습니다. 그런
월트를 도와준 사람은 로이 디즈니입니다. 로이는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제작에 뜻이 있지는
않았지만 월트의 열정에 감복하고 그를 동경의 눈길로 보면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하루의 반을 병으로 인한 피곤함으로 누워보내면서도 사무실을 구하고 새로운 아파트를
임대하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초창기의 일이지만 월트와 영화를 같이 제작하기 시작
했습니다. 셀에 구멍을 뚫고 카메라를 다루는 일도 맡으면서 스튜디오의 재정까지 책임졌고
그런 역할은 수십년이 지나서도 계속되었습니다. 형제는 마침내 1923년 10월에 디즈니
브라더스(Disney Brothers) 스튜디오의 첫 간판을 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