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

[거북모음]

* 나의 고향(故鄕)

북으로 작성산, 북서로 흑성산, 동으로 서림산, 남으로 남산, 서쪽으로 은방산, 백문산으로 크게 둘러싸인 그 안에 현무로 만종산(萬宗山), 좌청룡으로 매봉산(류관순 열사가 봉화를 올리던 산), 우백호로 남산(南山), 주작으로 약사산(藥師山)이 아주 부드럽게 자리 잡고 있다.

그 가운데 약간 높이 자리 잡고 있는 곳, 그 동네 이름은 만마루(만화촌 ․ 晩華村)이다. 만마루와 용두벌 사이에 만화천(晩華川)이 길게 뻗어 금강 상류를 이루는 곳, 그야말로 산과 물이 잘 어우러져 보기에도 아름다운 10여 호밖에 안 되는 아주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서 나는 첫울음을 터뜨리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마을 앞길이라고는 병천(並川. 아우내)과 청주로 통하는 우마차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옛날에는 과거보러 가는 사람들이 많이 다녔다고 한다)이 꼬불꼬불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통하는 지 잘 알 수 없는 처음과 끝이 보이지 않는 원시적인 길이다. 3km 정도 걸어가야 아우내(병천)에 천안과 진천으로 통하는 버스가 겨우 길을 비켜가면서 다닐 수 있는 신작로(新作路)가 있었다.

버스 운행은 아침 일찍 천안과 진천에서 상대방을 향하여 출발하는 것과 저녁에 서로 상대방을 향해서 오가는 것 두 대만이 다닐 정도였다. 급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 사오십리 길을 걸어 다녀야 했다.

산세(山勢)는 이렇게 부드럽지만, 정기(精氣)로 가득 차 있어서 훌륭한 인물이 제법 많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용두리(龍頭里)의 한 자그마한 마을인 지령리에서 항일 투사인 류관순(柳寬順) 열사가 태어났고, 개울 건너 용두(龍頭)에는 독립투사였으며 내무장관을 역임했던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 박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좀 떨어져 이 십리 안팎밖에 이법석(李範錫) 장군, 이동령(李東寧) 장군 박문수(朴文守) 어사 등의 유명한 인사가 태어났거나 살던 곳이기도 하다. 이 고장은 예부터 우리나라 팔대 승지(八大勝地 :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고장))의 하나라고 일컬어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산천과 유명인사가 태어난 곳이 바로 내가 태어난 고장이어서 여태까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 왔다.

내가 태어난 만화촌은 사백여 년 전에 어우야담(於于野譚)을 지은 어우(於于) 류몽인(柳夢寅)<1559~1623>이 인조반정 때 노상부시(老孀婦詩)로 인해 시해 당하자 그 일족들이 연좌제로 인해 화를 모면할 길이 없게 되자, 그 조카의 한 사람인, 나의 12대 조상 태우(泰宇) 류활(柳活)이 근처에서 살게 되었다. 그 후 나의 7대 조상이며, 최고(最古)의 춘향전인 ‘만화본 춘향가’(晩華本春香歌) 200절구(絶句)를 지은 만화(晩華) 류진한(柳振漢)이 이곳에 자리를 정하고 문인들과 교류하고 제자를 양성하면서 동네의 이름을 만화라고 붙이게 됐다.

나는 이런 훌륭하고 아름다운 고장에서 태어나, 자연을 만끽하면서 천진난만하게 자랐다. 팽이치고 썰매타고, 구슬치기하고, 반딧불이 잡아 놀고, 도깨비불 장난하고, 개울에서 씨름하고, 참외서리, 수박서리하고, 밤에는 어머니 무릎 베고 한없이 많은 별을 바라보고, 어느것이 내 별인가 찾아보고 별똥별이 심심치 않게 떨어지는 운치를 맛보고 개울에 나가 미역 감고 물싸움하면서 자랐다. 때로는 부모님으로부터 이 고장의 지리에 대해, 훌륭한 조상과 이 고장의 유명한 인사들에 관한 말을 심심치 않게 들어가면서 자랐다.

내가 만마루(晩華村)를 떠난 시기는 우리나라가 광복을 되찾고, 독립을 이룩한 1948년 무렵이니까, 아무 물정 모르고 삶을 누릴 수 있는 어린 시절, 약 14년을 이 마을에서 천진난만하게 뛰놀면서 지낸 셈이 된다.

서울서 바지, 저고리 입고 학교를 다닐 때에는 친구들이 촌놈이라 놀려서 시골에서 태어난 것이 부끄럽고 창피하기도 했지만, 학교를 다니면서 방학 때면 찾아갈 고향이 있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서울역에서 칙칙폭폭하면서 연기를 내고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타고 때로는 푸른 들을, 때로는 눈 덮인 들과 산을 가로 질러 고향을 향하는 그 마음은 어느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흐뭇하고 자랑스럽고 신나기만 했다.

6 ․ 25 사변 때 인민군들이 사흘 만에 서울을 함락시키자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부산으로 피란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우리는 어디로 피란 갈까 생각도 안 하고 무작정 떠나 도착한 곳이 고향이다.

나의 청소년기에 피란생활하면서 집 짓고 나무하고 농사짓고, 꽁보리밥도 없어 한 철은 고구마, 또 한 철은 감자를 주식으로 연명하면서, 그리고 농작물을 아우내장에 지고 가 팔아 돈을 벌기도 했고, 동네 근처에는 땔 나무가 없어 30리 밖에 있는 작성산 꼭대기에 가서 나무해서 하루는 집에서 때고, 하루는 시장에서 팔아 돈을 벌어 연명을 하며 고생고생하고 지냈던 고향이지만 내가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겪을 적마다 약이 되고 힘이 되어 어려운 세상을 힘들지 않게 살아갈 수 있도록 영양소를 공급한 것도 고향생활에서 비롯됐다.

최전방 남방한계선에서 군대생활하면서 밤에 보초를 설 때, 구름 한 점 없고 온 천지가 달빛으로 밝게 비출 때면, 무서워 오싹 소름이 끼치곤 했다. 이럴 때도 달밤에 친구들과 뛰어놀면서 놀던 그 고향이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치면서 외롭고 스산한 밤을 달래주기도 했던 곳이 고향이기도 하다. 이렇게 고향은 외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나의 마음을 달래 주면서 힘을 불어넣기도 했다.

그렇던 고향이지만 우리나라가 개발되면서 우마차 길은 2차선 아스팔트길로 바뀌고, 하루에 두 번밖에 다니지 않던 병천(아우내)과 천안 간 길은 십 분이 멀다고 버스가 내달리고 있고, 승용차와 트럭들이 숨 돌릴 틈 없이 질주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가 밀릴 때면 우회해서 달리는 차들이 마을 앞을 질주하여 사람들이 길을 건너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교통사고로 동네 사람들이 세 명이나 생명을 잃기도 했다. 그 결과 무인 카메라가 등장하여 난폭운전을 감시하고 있지만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산업이 발달하면서 고향의 젊은이들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도시로 떠나 노인들만이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는 실정이다. 열 한 채였던 마을은 여섯 채로 줄었고, 비어 있는 집도 두 채나 된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네 채인데, 짝 잃은 노인들이 한 사람씩 살고 있는 집이 셋이고, 한 집만이 부부가 살고 있는 상황이다. 노인들이 세상을 뜨면 이곳을 찾아와 살 만한 사람들은 전무한 실정이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어우 류몽인(柳夢寅)을 비롯해 세 분을 모신 청절사(淸節祠)라는 사당이 있고, 마을 앞 길 옆에는 고전문학을 전공한 교수들이 모금해서 건립한 류몽인 시비와 류씨 집성촌인 용두리에 살면서 삼강(三綱)을 실천한 훌륭한 분들을 기리는 삼강여비(三綱勵碑)와 나의 할아버지의 행적비가 세워져 비석거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비석거리는 4차선 도로로 확장 공사를 하고 있는데, 길로 편입되어 어디론가 곧 옮겨야 할 운명에 놓였다.

그렇게 아담하고 아름답고 소탈하고 꾸밈이 없던 마을, 내 인생의 꿈이었고 원동력이었던 고향마을, 그 고향마을이 5년 뒤에 어떻게 될지, 10년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수명이 다해가는 마을이 되어 가고 있다.

앞으로 고향은 연명하기조차 어려운 실정이 되고 말았다. 이 마을이 생겨 난지 이백 팔십여 년이 지난 지금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꿈과 희망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만 같아 서글프고 허전함을 달랠 길이 없다.



참고: 류몽인의 노상부시

老孀婦詞(孀婦詞, 孀婦歎, 老婦詞, 老寡婦詞)

七十老寡婦 칠십 먹은 늙은 과부가
單居守空壼 홀로 빈방을 지키며 살아 왔다.
慣誦女史詩 여사의 시를 늘 자주 외어
頗知姙姒訓 태임 태사의 교훈을 잘 알고 있는데
傍人勸之嫁 옆 사람이 다시 혼인하라 권하며
善男顔如槿 잘 생긴 남자가 있다고 하지만
白首作春容 흰 머리에 젊은 모습으로 꾸민다면
寧不愧脂粉 어찌 화장품이 부끄럽지 않으리오

(인조반정 때 인조대왕의 조정에 나와 참여해달라는 권유를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는 뜻으로 이 시를 지어 거절한 것임)


* 다음 사진은 280여 년 된 마을 앞 정자나무(느티나무), 마을 전경, 노상부시를 새긴 어우 류몽인시비, 일가들이 삼강(三綱)을 실천한 분들을 기리고 교훈으로 삼기 위한 삼강려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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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ys]

지천 얼굴 잊겠소이다. 지천이 주신 글 공감하면서 잘 일고 있소이다. 지천도 이제 중년이 넘어가는구려. 연륜 속의 문향이 짙은 포도주 맛 그윽하외다. 고향이라 - - - - - . 지천, 우리 언제 만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