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Karl Heinrich Marx ]
출생 - 사망 | 1818년 ~ 1883년 |
---|---|
대표분야 | 사회철학 |
대표이론 | 마르크스주의 |
대표저서 | 자본론 |
관련철학자 |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
1) 성장배경
칼 하인리히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는 1818년 5월 5일에 독일 라인주(州) 트리어(Trier) 시에서 유대인 기독교 가정의 7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트리어는 당시 독일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가장 발전한 곳이었으며, 한때 프랑스 혁명군이 점령하여 진보적인 이념을 널리 퍼뜨려 놓은 곳이었다. 변호사인 아버지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칸트 철학의 신봉자로서 가족들에게 휴머니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사상을 면밀히 교육하였다. 어머니 헨리에테는 자녀들에게 지적으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대식구의 생활을 잘 꾸려나가는 주부였다.
유태인에 대한 불이익을 피하고자 마르크스가 태어나기 직전에 개신교로 개종한 집안에서 마르크스는 6살이 되던 1824년에 개신교 세례를 받았다. 12 살이 되던 1830년에 마르크스는 트리어에 있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김나지움에 들어갔다. 마르크스는 이곳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역사, 철학 등을 배우며 말 그대로 교양 있는 젊은이로서 이후의 삶을 준비할 수 있었다.
1835년 8월 김나지움을 졸업하면서 열일곱 살의 마르크스는 「직업 선택을 앞둔 한 젊은이의 고찰("Betrachtung eines Jünglings bei der Wahl eines Berufes")」(MEW, Ergänzungsband 1, S.591-4에 실려 있음)이라는 졸업에세이(Abiturienarbeit) 중의 하나에서 “우리는 우리가 소명을 받았다고 믿는 자리를 반드시 얻지는 못한다. 사회에서 우리의 관계들은 우리가 그 관계들을 규정할 위치에 이르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처음으로 마르크스의 전기를 쓴 프란츠 메링(F.Mehring)은 이 문장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맹아를 발견했다고 말하는데, 과장일지는 몰라도 일리는 있는 말이다.
마르크스는 이후 줄곧 인간들은 사회적, 경제적 환경으로부터 고립되거나 추상될 수 없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같은 글에서 자신의 일생이 인류의 행복과 해방을 향한 것이 될 것임을 약속하며 그 마지막에 “온 힘을 다해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택한다면 … 우리는 초라하고 제한된 이기적인 기쁨을 향유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수백만 명의 행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우리는 장차 인간 마르크스의 실천적 삶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을지를 단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2) 청년헤겔학파와 마르크스
1835년에 마르크스는 본 대학에 입학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미술사 등 인문계 수업을 받았다. 본 대학에서 1년 공부한 후 마르크스는 곧바로 베를린 대학 법학부로 전학하여 법학, 역사학, 철학을 공부하였다. 특히 마르크스는 당시 독일의 철학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헤겔의 철학에 관심을 쏟았다.
여기서 그는 청년헤겔학파로 알려진 브루노 바우어, 칼 프리드리히 쾨펜, 아돌프 루텐베르크 등이 운영하고 있던 ‘박사 클럽’이라는 모임에 참여하였으며 얼마 안 있어 이 모임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1841년에 마르크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 철학의 차이」라는 논문을 예나대학에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본으로 갔으나, 바우어가 대학에서 해직되는 것을 보고 대학 교수의 꿈을 포기하였다.
이제 청년헤겔학파의 지도적 인물인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정부의 방해로 대학에 취직할 길이 막혀 버렸다. 당시의 반동적 프로이센 체제에서 청년헤겔학파에게는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은 물론 글을 발표할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기독교 예술에 관한 저서를 집필하기 위한 연구도 중단한 채, 마르크스는 1842년 초에 「최근 프로이센의 검열 제도에 대한 견해」라는 글로 정부를 비난하였다.
그러던 중 마르크스는 1842년에 『라인 신문』(Rheinische Zeitung)의 편집진에 들어갔다. 장차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폐간과 복간을 거듭하게 될 그 신문과의 질긴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이 무렵은 마르크스가 혁명적 민주주의자의 입장에서 공산주의자와 철학적 유물론의 입장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던 때이고, 따라서 청년헤겔학파와 결별하던 때이기도 했다.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기사들을 쓰면서 마르크스는 점차 정치와 사상의 문제에서 경제 문제로 관심을 이동하기도 하였다. 훗날의 마르크스 자신의 표현대로 하자면 ‘상부구조’의 문제에서 ‘토대’의 문제로 관심이 이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반정부적인 내용이 가득한 글로 인해 1843년 3월 18일 마르크스는 편집장직에서 쫓겨나야 했으며, 그 신문도 곧 이어 폐간되고 말았다.
3) 파리 시대
1843년 6월 어린 시절의 벗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한 후 아내와 함께 그해 10월 파리로 이주했다. 이렇게 하여 1845년 2월까지 계속될 15 개월가량의 파리 시대가 펼쳐지게 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시인 하이네와 알게 되었고, 1789년의 프랑스혁명 연구에 몰두했으며, 영국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자들의 저술도 읽을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 시기의 연구 결과물들을 완성시키지 못한 채 세 개의 단편적인 초고로 남겨 놓았는데, 이 초고들은 1932년에 처음으로 소개된 이래 오늘날 『1844 년의 경제학-철학 수고』(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로 전해져 오고 있다. 일명 ‘파리 수고(초고)’ 또는 우리말로는 간략히 ‘경철 수고(초고)’로 더 잘 알려지고 있는 『1844년의 경제학-철학 수고』는 작성 후 100년 동안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마르크스주의 역사 ․ 경제 이론의 바탕을 이루는 휴머니즘이 설명되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 문헌에서 더욱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시기의 마르크스에게서 주목할 것은 특히 두 가지이다. 첫째는 『독불 연보』(獨佛年報 ; Deutsche-Französische Jahrbücher)라는 잡지를 발간한 것과 노동자들을 조직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1844년 2월 아놀드 루게 (A.Ruge)와 『독불 연보』를 발간하고, 여기에 두 편의 글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Zur Judenfrage")와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philosophie. Einleitung")을 기고하였다. 이 글들은 마르크스의 사상이 혁명적 민주주의에서 과학적 공산주의로 궁극적으로 이행하였음을 보여주는 글로 평가된다.
한편,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프랑스인 노동자 조직 및 독일 망명자 노동자 조직과 직접 접촉하였다. 그리하여 그 조직의 지도자들과 알게 되었고, 노동자 모임에도 참석하였다. 이곳에서 마르크스는 당시 노동자계급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던 프루동, 불랑, 카베 등의 사상가들과 친분을 쌓았다.
이 파리 시기에서 주목할 또 하나의 ‘사건’은 프리드리히 엥겔스(F. Engels)와의 운명적 교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1842년 말 영국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서로 냉담했다고 하는데, 1844년 8월, 엥겔스가 파리에 방문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두 창시자의 역사적 만남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엥겔스도 『독불 연보』를 통해 자신의 글을 발표했는데, 이 잡지를 통해 둘은 자신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마르크스 보다 두 살 아래인 엥겔스는 1820년에 독일의 바르멘에서 방직공장 사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였던 엥겔스의 아버지는 엄격한 부르주아적 행동규범과 정통적 신앙에 입각하여 자녀들을 키우려고 하였으나, 청년 엥겔스는 복종하지 않았다. 김나지움도 그만두고 회계사무실에서 일해야 했던 엥겔스는 여가를 이용하여 역사, 철학, 문학 등의 교양을 쌓았다. 청년헤겔학파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엥겔스도 마르크스와 마찬가지였다. 22살 되던 1842년에 아버지의 회사를 경영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간 엥겔스는 영국의 공상적 사회주의,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인 노동 운동인 차티스트 운동을 접하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의 공통된 견해를 확인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4년 11월에 두 사람의 지적 자원을 결합시켜 신학자 브루노 바우어의 헤겔주의적 관념론에 대한 장문의 비평 『신성가족(神聖家族) 또는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 - 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에 대하여』(Die heilige Familie oder Kritik der kritischen Kritik. Gegen Bruno Bauer und Konsorten)라는 책을 펴냈다. 『신성가족』은 마르크스가 박사학위 논문 이후 처음으로 출간한 책이었다. 이 책은 제목과 같이 청년헤겔학파인 바우어 및 그 무리의 견해와 대결한 것이다. 두 사람은 이 책에서 지금까지보다 훨씬 강하게 청년헤겔학파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마르크스는 17세기와 18세기의 영국 및 프랑스의 유물론자들을 자세히 연구할 수 있었다.
4) 브뤼셀 시대
마르크스의 파리 시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프로이센 정부는 프랑스에 압력을 넣어 마르크스를 파리에서 추방하게 했고, 1845년 2월에 마르크스는 벨기에 브뤼셀로 근거지를 옮겨야 했다. 그러나 프로이센 정부는 이번에도 마르크스를 가만두려 하지 않았다. 또 그곳에서 추방하려 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당국이 자신을 고소하지 못하도록 1845년 12월에 프로이센 국적을 공식적으로 포기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마르크스는 죽을 때가지 무국적자로 살았다. 어쨌든 마르크스는 1848년 초까지 약 3년을 브뤼셀에서 보낼 수 있었다.
1845년 4월, 마르크스는 스스로 청년헤겔학파 중 가장 훌륭하게 평가했던 포이에르바하를 비판하며「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Thesen über Feuerbach)을 썼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사후에야 엥겔스의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Ludwig Feuerbach und der Ausgang der klassischen deutschen Philosophie, 1888)에 실려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강령적 성격을 지닌「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는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 세계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1845년에서 1846년에 걸쳐서 엥겔스와 공동으로 저술한 『독일 이데올로기 - 포이에르바하, 바우어, 슈티르너를 대표자로 하는 독일 철학에 대한 비판과 여러 예언자들의 독일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Die deutsche Ideologie. Kritik der neuesten seutschen Philosophie in ihren Repräsentanten Feuerbach, B. Bauer und Stirner, und des deutschen Sozialismus in seinen verschiedenen Propheten)에서 유물론적 역사관의 기초를 완성함으로써 이와 같은 요구를 실현했다. 청년헤겔학파에 대한 공격을 사실상 완결 지었다고 할 수 있는 『독일 이데올로기』는 오랫동안 원고 상태로만 보관되어 오다가 1932년에야 소련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1845년 여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영국으로 연구를 위한 여행을 떠났고, 당시 프로이센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노동 운동의 지도자 바이틀링(Weitling)을 만났다. 당시 바이틀링은 프루동(Proudhon)과 함께 독일 이주 수공업자들이 조직한 ‘의인동맹’(義人同盟 ; Bund der Gerechten)이라는 노동자 조직의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동맹은 프랑스, 독일, 스위스, 영국 등에 지부를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이 ‘의인동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공산주의자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재조직되었다. 이와 함께 “모든 인간은 형제다!”이던 ‘의인동맹’의 구호 대신에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공산주의자 동맹’의 구호가 등장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미 ‘의인동맹’에 가입할 것을 권유받아 왔으나 동맹의 비과학적인 이론 때문에 거부해 온 터였다. 1847년에 마르크스는 ‘의인동맹’의 지도자들에 맞서 『철학의 빈곤 -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에 대한 답변』(Das Elend der Philosophie. Antwort auf Proudhon’s ‘Philosophie des Elends’)이라는 논박서를 쓰기도 하였다.
1848년 초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 동맹’의 위임을 받아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를 완성하였다. 『공산당 선언』은 마르크스주의의 강령적 문건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동 집필로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직전에 발표되었다. 『선언』은 전부 4개의 장으로, 즉 제 1장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제 2장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제 3장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문헌, 제 4장 반정부적 당(黨)들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언』은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명제를 통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정립된 유물사관을 요약하고 계급사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에 따라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선언』은 공산주의 운동의 국제적 성격을 표현하는 저 ‘공산주의자 동맹’의 구호로 끝맺고 있다.
5) 쾰른을 거쳐 런던에 정착
1848년 3월 1일, 벨기에의 브뤼셀에 있던 마르크스는 프랑스의 혁명 임시 정부로부터 다시 파리로 돌아와도 좋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이틀 뒤에는 벨기에 정부로부터 24시간 안에 떠나라는 추방 조치를 받았다. 마르크스는 떠나기 전에 자기 집 거실에서 공산주의자 동맹 중앙위원회를 소집하였다. 이 중앙위원회에서는, 동맹의 근거지를 파리로 옮기며 그곳에서 새로운 중앙위원회를 구성하는 문제를 전적으로 마르크스에게 위임한다고 결정하였다. 회의를 막 마치고 사람들이 다 흩어진 후 경찰이 들이닥쳤고, 마르크스는 24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야 했다.
결국 마르크스는 이번에도 짐 하나 변변히 챙기지 못한 채 브뤼셀을 떠나야 했다. 그는 파리에 잠시 체류하다 곧 혁명이 발발하고 있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마르크스는 이미 1845년에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였기에, 이제는 쾰른 시의 참사회에 거주권을 신청해야만 했다. 독일에 도착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대중조직을 형성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혁명의 성공을 위해 쁘띠 부르주아들과 함께 협력하는 형태의 하나의 기관지를 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848년 6월 1일에서 1849년 5월 19일까지 쾰른에서는 마르크스가 편집한 『신(新)라인신문』이 혁명적 민주주의의 기관지로서 간행되었다. 이 『라인신문』에 이어 마르크스가 편집을 책임지게 된 『신(新)라인 신문』의 부제는 ‘민주주의의 기관지’였다. 『신(新)라인 신문』을 통해 마르크스는 혁명의 경험을 직접 철학적으로 평가하여 대중에게 전달하려 하였다.
프로이센 정부는 비열한 방책을 써서 마르크스가 외국인 법(앞에서 말한 바 있듯이 마르크스는 1845년 파리에서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였다)을 위반했으니, 24시간 이내에 프로이센을 떠나라는 최후통첩을 내렸다. 『신(新)라인 신문』의 폐간과 함께 마르크스는 다시 프랑스로 갔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도 6월 혁명은 패배하였고 승기를 잡은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마르크스를 추방하기로 결정하였다.
1848년 독일과 프랑스에서 혁명이 모두 좌절된 후 그는 1849년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가서, 몇 차례의 짧은 외유가 있기는 했지만, 거기서 죽을 때가지 살았다. 런던으로 이주하자마자 마르크스가 제일 먼저 전력한 것은 새로운 기관지의 발행이었다. 그는 1848년의 유럽 혁명을 과학적으로 결산하고 혁명 이론을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잡지의 형태로라도 기관지를 발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잡지의 이름은 『신(新)라인 신문-정치경제 평론』(Neue Rheinische Zeitung. Politischökonomische Revue)으로 결정하였다. 1849년 가을과 겨울, 마르크스는 잡지 발간을 준비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자금을 조달하고, 발행인을 찾아야 했으며, 협력자를 선정하고, 주식을 발행해야 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마르크스는 많은 동료와 아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 새로운 『신(新)라인 신문』의 창간호는 1850년 3월 6일 함부르크에서 나왔고, 1850년 11월말의 5-6호 합본호가 마지막이었다.
1848년 혁명은 패배한 혁명이었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은 1848년의 혁명에서 최초로 다른 계급과는 독자적으로 혁명적 요구를 들고 나왔다. 노동자 계급은 자신들이 민주주의 투쟁에서 가장 단호하고 가장 일관된 사회 세력임을 보여 주었다. 마르크스는 이미 『신(新)라인 신문-민주주의의 기관지』에서 자신의 철학으로 정치적 사건 및 투쟁을 이론적으로 해석한 것처럼 이러한 작업은 『신(新)라인 신문 - 정치경제 평론』에서도 자신의 철학을 역사적 변혁 및 계급투쟁과 직접 결합시켜 그 올바름을 입증했다. 역사적 경험과 혁명적 계급투쟁을 창조적으로 일반화하는 가운데 유물론적 역사관 특히 마르크스주의적 국가론과 혁명론,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이론이 더욱 확대되고 심화되었다.
이는 영국 이주 후에 『신라인 신문』에 기고한 글들과 이를 토대로 저술한 『1848년에서 1850년 사이의 프랑스 계급투쟁』, 그리고 뛰어난 시대사 연구서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등의 저작에 잘 나타난 있다.
6) 정치경제학 연구와 제1인터내셔널
1850년대는 지독한 반동의 시대였다. 프로이센에서도 물론 절대주의가 강화되었다. 민주주의적 언론과 노동자 언론은 탄압받았으며 노동자들의 단체들은 깨져 나갔다. 마르크스도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혁명적 신문이나 출판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예전처럼 새로운 잡지를 만들 돈은커녕 생계마저 막막했다. 마르크스는 1851년 여름에야 미국 신문인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고정 기고자로 지낼 수 있었지만 형편이 나아진 것은 없었다. 당시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투고한 글들은, 새로운 사상을 확립한 것들이기보다는 반동의 시기에 벌어지는 상황들을 『독일 이데올로기』와 『공산당 선언』에서 확립한 사상으로 해석하고 선전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1862년 3월 마르크스는 10여년 넘게 맺어온 『뉴욕 데일리 트리뷴』과의 관계를 청산한다. 1861년에 벌어진 아메리카의 남북 전쟁에 대해 마르크스는 노예제 폐지가 인류의 진보를 가져다 줄 것이라 했으나, 편집진은 노예제를 옹호하는 남군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반동의 시대였던 1850년대와 60년대에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연구에 몰두했다. 1867년 『자본론』(das Kapital) 제1권이 출판되고, 사후에 출판 될 『자본론』 2권과 3권을 준비하기까지 수십 년 동안 정치경제학은 마르크스의 주요한 연구 분야가 된다. 『자본론』의 예비 작업 및 예비 연구 격으로 1857년과 58년 사이에 『정치경제학 비판 강요』(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 Ökonomie)를 썼다. 『강요』는 1939∼41년 사이에 모스크바에서 처음 출판되고 이어서 1953년 동독에서 다시 출판됨으로써 비로소 서구학자들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인쇄된 지면으로 1,0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이 저서는 비록 『자본론』을 쓰기 위한 초안이요 초고이긴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자본론』보다 오히려 더 풍부하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세련되고 체계적인 논의의 면에서는 『자본론』에 뒤지겠지만 출판을 목적으로 씌어진 글이라기보다는 자기 스스로의 연구를 해나가면서 자신의 생각을 다듬어 가는 과정이 전부 기록된 수고라는 점에서 마르크스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헌이 되고 있다.
1859년에는 『정치경제학 비판』(Zur Kritik der politische Ökonomie)이라는 저술을 출간했다. 이 책의 내용은 『강요』의 제1부와 일치한다. 여기에 부친 유명한 ‘머리말’(Vorwort)에서 마르크스는 유물론적 역사관의 개요를 펼쳐 보이고 있다. “물질적인 생산양식은 삶의 사회적 ․ 정치적 ․ 정신적 차원들을 결정한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생활이 의식을 좌우한다.” 이러한 역사관은 1844년 이래 그의 연구의 길잡이 노릇을 해왔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1856년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867년에 『자본론』 제1권을 출판한다. 『자본론』은 상품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하여 자본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경제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밝히면서 나아가 자본주의가 내적 모순에 의해서 붕괴될 수밖에 없음을 규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노동 가치설, 잉여 가치와 착취, 생산 부문간의 불균형적 생산,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실업자의 증가, 공황의 발생 등 자본주의 경제의 운동 원리와 그 문제점을 분석한 풍부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자본론』 1권은 생전(1867년)에, 그리고 2권(1885)과 3권(1994)은 사후에 엥겔스에 의해 출판되었다.
마르크스는 1850년대 이후 계속된 정치경제학 연구와 더불어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이론적, 실천적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유럽 노동조합조직인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협회의 창립선언과 규약을 작성하는데, 이것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전략과 전술을 설정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1864년 제1인터내셔널의 창설과 더불어 마르크스의 정치적 고립도 끝났다.
그는 제1인터내셔널의 창설자도 회장도 아니었지만 곧 그것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그의 제1인터내셔널 창립대회는 1864년 9월 28일 런던에서 영국 노동조합의 지도자들과 프랑스 노동자 대표들에 의해 소집되었으며 마르크스는 독일 대표 자격으로 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제1인터내셔널에 대한 마르크스의 영향력은 187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제1인터내셔널이 해체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871년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이 봉기하여 이른바 파리 꼼뮌을 선포하자, 마르크스는 이 혁명을 지지하기 위해 『프랑스 내란』(Der Bürgerkrieg in Frankreich)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자본론』 1권을 출판(1876년)한 이후에 2, 3권을 계속해서 집필해 나갔으나 그 작업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그는 흥기하는 독일 노동운동을 멀리서 지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고타강령 비판』(Kritik des Gothaer Programms, 1875)이라는 중요한 저작을 남겼다.
이 저서에서 마르크스는 파리꼼뮌이라고 하는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에서 얻은 경험과 경제학 연구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낮은 단계로서의 사회주의 사회와 높은 단계로서의 공산주의 사회에 대해 말하고 있다. 레닌(Lenin)이 이 저작과 관련하여 말하듯이 마르크스는 이 저서에서 “공산주의의 경제적 성숙단계를 분석해 내고 있다”는 것이다.
7) 무국적 상태에서의 죽음
말년의 마르크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휴양지에서 보내면서 알제리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1881년 여름, 마르크스는 간암 진단을 받은 아내 예니를 데리고 맏딸 예니 부부가 있는 프랑스로 떠났다. 그곳에서 마르크스는 딸 엘레노어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딸의 건강이 호전되어 아내에게 달려 온 마르크스도 이제 앓아눕는 신세가 되었다. 부부가 모두 침대에서 앓다가 마르크스가 이제 기력을 되찾아 아내를 돌볼 수 있게 된 1881년 12월 2일,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아내의 장례를 마치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온 마르크스는 『자본론』 2권과 3권의 완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83년 1월 큰 딸 예니 마저 병으로 죽고 말았다. 마르크스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기관지염은 더욱 악화되어 급기야 후두염으로까지 발전하였고, 2월에는 폐렴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1883년 3월 14일 마르크스는 유언도 없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는 국적이 없는 상태로 죽었다. 65년의 인생 가운데 반 이상을 살았던 나라에서 그의 죽음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서 있었던 그의 장례식에는 겨우 11명의 조객이 참석했다. 조사는 그의 평생의 동지 엥겔스가 낭독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칼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