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7일(주일) 낮 설교 - 성령강림 후 제19주[세계성찬주일] -
주 앞에 온전히 설 수 있을까?
{ 욥기 2 : 1~10 }
Ⅰ. Story. 「 누가 종인가? 」
어두운 곳을 무척 무서워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사실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어두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어느 날 밤 엄마가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얘야, 뒷마당에 있는 빗자루를 좀 가져오너라.” 아이는 질색을 하면서 “엄마, 바깥은 지금 캄캄해서 너무 무서워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아이를 달래는 요령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예수님이 항상 우리 곁에 계신데 뭐가 무섭니? 지금 밖에도 예수님이 계시니까 너를 지켜 주실 거야.” 그러자 아이의 얼굴이 환해지며 “진짜 밖에 예수님이 계실까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어디든지 계신단다. 네가 두려울 때 언제나 네 곁에서 너와 함께 하신단다.” 아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더니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님, 거기 계시지요? 계시면 빗자루 좀 갖다 주세요?” 아이는 여전히 어두움이 무서웠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예수님을 말로는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심부름센터 소장이나 택배회사 사장님쯤으로 여기고 행동하지 않습니까? 부르기는 “주님”이라고 하면서 “이것도 갖다 주시고, 저것도 갖다 주세요.”하며 주님을 심부름꾼으로 여기고 있는 건 아닌 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유명한 대형교회 목사가 미국 뉴욕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면서 이런 어이없는 설교를 해서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포클레인과 같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고 조종하는 대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맘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교만해도 이렇게 교만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종처럼 부려먹겠다는 것입니다. 이 양반은 한국사회에 참 많은 문제를 양산해냈습니다. 누가 종입니까? 우리입니까, 주님입니까?
성경에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면서 “구하면 주실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하면 주십니다. 그러나 자기 욕심을 위해 구하는 것은 응답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못 박고 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2-3)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다고 다 주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맘대로 조종할 수 있는 포클레인과 같은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욥처럼 충성스런 종들을 통하여 일하기를 원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바로 종입니다.
Ⅱ.
욥기는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복 주심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가, 아니면 환란과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여전히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가?”하는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욥에 대하여 소개한 것을 보면, 욥은 ‘우스’라는 땅에서 살았는데, 매우 다복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7남3녀의 자녀를 두고 있었고, 수많은 가축과 종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에 대한 평가입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욥 1:1)라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온전했다는 것입니다. 단지 많은 재산을 가지고 풍요롭게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평가를 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의 믿음이 얼마나 경건했으면 사탄이 시기할 정도였을까요?
욥에게 시비를 걸어온 것은 바로 사탄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가서 욥을 고소합니다. 모두가 욥의 믿음을 칭찬하지만, 하나님이 만약에 욥에게 물질의 풍요로움을 주지 않으셨다면, 욥이 하나님을 그렇게 경건하게 섬기면서 살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물질을 모두 빼앗아버려도 욥이 계속 하나님을 섬기겠느냐는 것입니다. 사탄은 시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욥 사이를 시기했고, 욥이 철저한 신앙으로 사는 것이 너무 미웠습니다. 그래서 욥을 시험할 것을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보통사람들은 믿음생활을 하다가 고난을 당하면, 그가 반드시 뭔가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이야기를 보면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Α. 욥은 불 같은 시험 속에서 믿음을 지켰습니다(1:21).
욥에게 닥친 시험은 한 마디로 “불 같은” 시험입니다. 졸지에 그가 가졌던 모든 것들을 다 잃게 됩니다. 그가 가졌던 모든 재산을 물론이거니와 그의 자녀 10명을 모두 한자리에서 잃게 됩니다. 이런 것을 날벼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있는데, 욥은 그 많던 재산이 하루아침에 모두 없어졌습니다. 망해도 이렇게 철저하게 망할 수는 없습니다.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정신을 잃고 쓰러지던지, 아니면 땅바닥을 치면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런 신앙고백을 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왠만한 믿음이라면 이런 고백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왔기에(훈련되었기에)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당한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Β. 욥은 시험 속에서도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1:22).
민수기에 보면, 광야의 이스라엘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원망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12 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백성들이 얼마나 심하게 하나님을 원망했는지,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민 14:27)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려고 예비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욥이 당한 시험만 놓고 본다면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1:22). 원망은 원망을 낳고, 감사는 감사를 낳습니다. 원망하기 시작하면 원망할 일이 계속 생각나게 되고, 그러면 원망이 봇물 터지듯 솟구치게 됩니다.
Γ. 욥은 시험 속에서도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2:10).
하루아침에 쫄딱 망한 것으로 부족해서 욥의 온몸은 심각한 종기로 가득했습니다. 사탄은 욥의 뼈와 살을 쳤고,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났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질그릇조각으로 온몸을 득득 긁었을까요. 욥에게 생긴 병은 나병의 일종이라고 해석합니다. 참 기막힌 현실입니다. 오죽했으면 욥의 아내가 이런 말을 했을까요.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9) 웬만하면 잘 치료받고 살라고 했을 것입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입니다. 욥의 아내는 눈뜨고 차마 볼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남편에게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와중에도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이것이 바로 욥의 온전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한번 뱉어내면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주 앞에 온전함이란 입술(말)을 지키는 것입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민 14:28)
Ⅲ.
어느 교회 앞에 거지 두 명이 나란히 앉아 동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 손에는 성경이 들려있었고, 다른 한 사람 손에는 목탁이 들려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교인들은 하나 같이 성경을 들고 있는 거지에게 돈을 주고, 목탁을 들고 있는 거지에게는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교인이 다 빠져 나갈 즈음, 성경책을 들고 있던 거지의 깡통에는 돈이 가득 찼지만 목탁을 들고 있던 거지의 깡통은 땡전 한 푼 없었습니다. 잠시 후 목사가 나오면서 두 거지를 보더니 손에 목탁을 들고 있는 거지에게 충고했습니다. “여보시오. 여기는 교회 앞이라고요. 당신이 목탁을 들고 있는 한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땡전 한 푼 못 얻을 거예요.” 그러자 목탁을 들고 있던 거지가 옆에 있는 거지에게 말했습니다. “이봐, 다 나왔나 봐. 이제 자리를 옮겨서 저쪽 ‘절’ 앞으로 가자고.” 성경책을 들었다고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