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에 관련된 중국의 고사성어에 '와신상담'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춘추시대 각국의 치열한 생존경쟁의 단면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야말로 와신상담하지 않고서는 도시국가간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가 바로 이 시기였다. 춘추 초기에 100--180개 정도였던 도시국가가 말기에는 10여 개의 국가로 정리되었다. 기록에 남겨진 전쟁의 횟수만도 1,200회가 넘는다.
이때 각국은 그때 그때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게 되었는데, 그 회맹의 대표자를 패자라고 불렀다. 춘추시대에는 다섯 사람의 유명한 패자가 있어 이를 춘추 5패라고 부른다. 춘추 5패는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최초의 패자가 된 사람이 제나라의 환공이다. 이때는 초나라가 남방에서 흥기, 강성해져서 중원을 위협하고 있었다. 중원 제국은 동방의 제나라에게 구원을 요청, 각국의 동맹이 이루어졌다. 그는 관중을 재상으로 등용, 혁신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부국강병에 성공함으로써 최초의 패자가 될 수 있었다.
제 환공은 이 연맹에서 (주나라 왕실을 높이고, 이민족을 물리친다.) 즉, 존왕양이의 구호를 내걸었다.
춘추시대에 이미 주왕실은 하나의 소국에 다름아니었으나, 주왕실을 존중한다는 명분이 제후들에게 호소력을 지닐 만큼 아직 주왕실의 권위는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봉건제도의 잔재는 전국시기에 이르면 깨끗이 사라지고, 양육강식, 오로지 실력만이 인정받는 시대가 도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각국은 춘추시대에도 독자적인 주권 영토국가로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춘추좌전)에 의하면, 소국 송의 재상 화원은 통행증 없이 송나라의 영토를 통과했던 대국 초의 사신을 사형에 처했다. (사기)에 의하면, 오나라와 초나라는 국경에 서 있는 뽕나무의 소유에 관한 양국 주민의 시비가 원인이 되어 대병력전을 치르기도 했다.
춘추시대를 통틀어 가장 강대한 나라 둘을 든다면 그것은 역시 중원을 대표하는 진나라와 양자강 유역에서 새로이 성장한 초나라를 들 수 있다. 실로, 진나라가 한, 위, 조 3국으로 분열했던 기원전 453년, 혹은 주왕실이 이를 공인한 403년을 기점으로 춘추와 전국시기를 가르는 것이다. 춘추 5패로 진의 문공과 초의 장왕이 있다. 초는 더 남족의 신흥국 오와 월의 약진으로 잠시 위기를 맞았는데, 오의 합려와 그의 아들 부차, 월왕 구천 등이 역시 춘추 5패로 거론된다.
오와 월은 보병 중심의 새로운 전법을 터득하고 일찍이 철기의 기술을 습득하여 강성해졌다. 오와 월이 소유했다는 명검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근래에 발굴된 무덤에서 유명한 월왕 구천의 검이 실제로 발견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2천 4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칼날은 지극히 날카롭기 이를 데 없고 날 밑의 양면에는 남색 유리와 터키석이 상감되어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칼의 몸통은 다이아몬드 무늬의 선으로 장식되어 있다. 현대의 공예가도 어떻게 칼날 부분에 이러한 무늬를 넣을 수 있었는지 감탄할 뿐이다.
오왕 합려는 즉위 후 9년간 국력을 키워 초를 공격했는데, 다섯 번 싸워 다섯 번 이김으로써 초를 위기에 빠뜨리는 등 강성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월왕 구천과의 싸움에서 손가락을 부상당한 후 이것이 원인이 되어 죽음에 이르렀다. 그가 강소성의 해용산에 묻힐 때 10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으며, 묘안에는 3천 자루의 명검이 함께 묻혔다고 한다.
합려의 아들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와신', 즉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자면서 고통을 상기하고 국력을 키워, 회계산의 전투에서 월왕 구천 의 굴복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구천은 부차에게 뇌물과 미녀를 보내어 마음을 안심시키고, '상담', 즉 쓸개의 쓴맛을 매일 보면서 스스로에게 회계산의 굴욕을 상기시켜 결국은 부차를 물리쳤다.
각국이 패자로 등장하는 과정을 보면, 각 패자의 뒤에는 훌륭한 재상들이 있다. 제나라 환공에게는 '관포지교'의 아름다운 우정을 남긴 관중과 포숙이 있었고, 오나라 합려와 부차에게는 오자서가 있었으며, 월왕 구천에게는 범리가 있었다. 부차는 구천에게 패하고 자결할 때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는데, 그 이유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패하여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환공은 포숙으로부터 관중의 인물됨을 듣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과거지사까지 과감하게 묻어버리고, 그를 재상으로 등용하는 용단을 내렸다.
각국의 군주들은 기존의 명문귀족들의 세력을 억압하고 세력기반이 없는 평민출신의 인재들을 과감히 등용하여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화를 꾀했으며, 저마다 부국강병에 힘써 항쟁의 대열에 나섰다. 빈번한 전쟁 속에서도 과학기술은 더욱 발전하고, 통일 국가의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훌륭한 사상가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철기의 보급과 함께 전국시대에 더욱 확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