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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5일(주일) 주일설교 전도서 9:11~18 “무기보다 나은 지혜로 살라 ” 새찬송가 35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새찬송가 425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오늘은 전도서 9:11~18 말씀을 중심으로 “무기보다 나은 지혜로 살라” 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전도자는 아무리 뛰어난 능력과 재물과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도 홀연히 임한 재앙에 걸리듯이, 시기와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임함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지혜는 큰 전쟁에서 성읍을 건지고, 우매한 자의 힘과 호령과 무기보다 나음을 말하면서 지혜로 살라고 말씀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말씀 제목 처럼 ‘무기보다 나은 지혜’로 사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즘 세대는 지혜보다 지식을 강조하는 세대입니다. 그래서 그 지식을 쌓고자 요즘 학생들은 다 피곤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생들은 ‘기초학력평가’라 하여 읽기, 쓰기, 기초 수학에 대한 테스트를 받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은 ‘국가 수준 학업 성취도 평가’를 받습니다. 이 평가의 목적은 교육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취지입니다. 학생들이나 교사들은 이 평가 앞에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니까요. 그러나 우려되는 바가 많습니다. 교육은 이제 다양한 생각이나 관점을 갖도록 학생들을 돕기 보다는 정답을 찾아내는 지식 위주의 방법에 치우칠 것이고, 그 결과 학생들의 인성과 공동체성은 파괴되기 쉽고, 성적이 좋지 못한 학생들은 스스로 무능력자로 인식하게 되고, 이런 일을 막아줄 묘책으로 사람들은 사교육 시장에 더욱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교육체계에서 12년간 교육을 받고 나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를 생각하면 무기보다 나은 지혜로 사는 사람이 될까에 대한 질문에 의구심을 갖게 되고 암담해집니다. 우리는 지식있는 자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혜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지식과 지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지식(Knowledge)은 정보나 사실들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식은 학습, 경험, 교육 등을 통해 습득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주어진 주제나 분야에서 사실과 데이터를 이해하고 기억하며, 이를 구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반면, 지혜(Wisdom)는 사실과 데이터를 이해하고, 분석하여, 판단하고, 실천하는 것을 포함하는 인간의 더 깊은 지적 능력을 말합니다. 지혜는 지식과는 다릅니다. 지식은 정보나 사실에 대한 이해와 기억에 초점을 두지만, 지혜는 이러한 지식을 기반으로 한 깊이 있은 이해와 판단력, 그리고 행동과 삶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말합니다. 즉, 지식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지혜는 그 정보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사용하여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지식은 단지 정보의 모음일 뿐이며, 지혜는 지식을 적절하게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 삶 속에 이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적용의 능력을 가지신 지혜로 삶을 살아가시는 수정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부터 오후 예배가 시작됩니다. 점심식사와 설거지 후에 시작될 텐데요. 매주 필수암송성경60구절을 매주 큰 소리로 낭독할 것인데요. 이렇게 함으로 자연스럽게 여러분의 머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잡기를 원하고 그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 자연적으로 적용되어 참으로 지혜로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뉴턴 디즈라엘리는 "지식은 힘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적용하는 지혜가 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라기는 성경지식이 여러분 안에 체화되어 그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지혜로 연결되기를 바랍니다. 이 땅을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말씀에 기초하여 현명하게 생각하고 지혜롭게 행동하며 말씀에 기초하여 삶의 방향을 정하고 자신의 행위를 조정할 수 있는 지혜를 적용하는 능력이 점차 성장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시기와 기회를 알지 못하는 인생 (11~12절)
오늘 본문 11,12절은 시기와 기회를 알지 못하는 인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과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오늘 성경 11절, 12절에서 전도자는 능력과 지식과 명철이 탁월한 사람이라도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재능이 많은 사람도 자신의 인생을 자기 뜻대로, 자신의 계획대로는 살 수는 없음을 말해 줍니다. 즉 사람이 가진 능력이나 배경이 어떤 일의 성취를 보장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물고기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이 던진 그물에 걸리듯이, 사람도 홀연히 임한 재앙에 걸리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 재앙에는 죽음도 포함되는 데 사람에게는 죽음을 포함해서 자신에게 찾아오는 사건도 피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전도자의 고백처럼 우리는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어찌할 수 없는 여러 요소일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 9:27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홀연히 모든 인생에게 임하는 죽음과 죽음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재물과 실력과 권세와 학벌을 믿고 교만해서는 안됨을 솔로몬은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실상은 어떠한가요? 사람들은 저마다 남보다 앞서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늘 바쁩니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까지 일합니다. 물론 가끔씩 일의 보람이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보람을 느끼면서 살아가야죠. 그런데 그들이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외로움’입니다. 너무 바빠서 친구나 동료들과 어울려 느긋하게 지내는 법을 잊은 사람이 되고, 해야 할 일에 온통 마음이 가 있는 사람이 되어 도무지 다른 이들의 말과 아픔에 귀를 기울일 수도 없게 됩니다. 또한 그들의 깊은 내면의 요구에 응답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런 관심이 없어 타인의 요구에 응답할 줄 모른다는 것이 바로 ‘타락의 징조’입니다. 그렇게 바쁘게 살며 사람들이 그렇게도 손에 넣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것들이 우리 삶에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많다고, 좋은 학교를 다녔다고, 높은 지위에 있다고 다 행복한 것 같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것을 다 손에 넣고도 얼굴에 독살이 박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11,12절 말씀을 다른 번역본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되는 것도 아니더라.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사람은, 그런 때가 언제 자기에게 닥칠지 알지 못한다. 물고기가 잔인한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는 것처럼, 사람들도 갑자기 덮치는 악한 때를 피하지 못한다.”(11-12)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성공하거나 행복을 느끼는 것은 단지 빠르게 진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목표에 대한 진전과 일치할 때 더욱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적용)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이 때까지 꼭 이루어져야 한다’며 조급해하며, 남보다 더 가질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무엇이며,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많은 재물과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교만하며 남을 무시하지는 않습니까?
2. 성읍을 건졌지만, 멸시 받는 지혜(13~15절)
오늘 본문 13절에서 15절은 위기에 처한 성읍은 지혜로운 자를 통해 건졌지만, 멸시받는 지혜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전도자는 많은 병사와 전투력을 갖춘 왕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작고 보잘 것 없는 한 성읍의 가난한 지혜자로 말미암아 물거품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혜가 단순한 물리적인 힘 뿐 아니라 인간이 가진 모든 종류의 권세와 능력보다 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지혜자를 세상 사람들이 가난하다고 하는 이유로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음으로 지혜가 외적인 조건에 따라서 멸시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뛰어난 지혜자조차 그가 가진 소유와 겉모습으로 판단하여 무시하고 망각한다는 현실을 전도자는 말해줍니다. 지혜는 소중하고 중요하지만, 그의 외모나 소유로 인해 무시당하는 세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위급한 순간이 아니면 가난한 사람의 지혜는 무시당하기 일쑤입니다. 가난한 자 뿐 아니라 학벌이 좋지 않은 사람의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현실을 알기에 사람들은 기를 쓰고 부자가 되려 하고, 기를 쓰고 명문 대학교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김중백 경희대 사회학 교수의 ‘의대라는 유령’이라는 칼럼 내용 중 일부을 발췌했습니다. “이제는 SKY(스카이)로 상징되는 학벌 체계를 대신해 세상을 의대 진학자와 의대 비진학자로 나누는 새로운 세계관이 확산되고 있다. 그 결과 ‘서울대 의대-명문대 의대-수도권 의대-지방거점국립대 의대-지방사립대 의대-SKY 이공계’라는 신(新)카스트 제도가 등장했다. 왜 우리는 의대에 집착하는가? 실리콘밸리에 진출할 수 있는 첨단 이공계열 학과를 마다하고 의대에 진학하려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현재 정부에서 보호하는 의대 체계에서 졸업하면 의사면허증이 나오고, 일정 수준 이상의 생활이 보장될 가능성이 다른 어떤 직업보다 높기 때문이다. 왜 이러한 사회적 안정성에 사람들은 열광하는가? IMF 경제위기 이후 평생 고용이 무너지고, 계속된 세계화 흐름에서 삶의 유동성은 점차 커졌다. 의사가 아니어도 성공할 수는 있지만 사회적 대전환기마다 위기에 노출되는 삶의 불안정성을 피부로 경험한 부모 세대가 자녀에게 안정성이 높은 의대 진학을 권유하며 지금의 의대 열풍은 시작되었다. 때론 부모나 선생이 권한다고 모든 학생이 의대를 진학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 의사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껴야 진학의 욕구가 생긴다. 왜 청년은 기존의 학벌 체제를 넘어 의대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가? 의대 졸업 후 삶을 살펴보자. 의사면허를 취득하면 병원에서 근무할 수도 있고, 개업할 수도 있다. 중간에 쉬더라도 다시 일할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업무 환경과 보상 수준에 따라 일할 곳을 찾을 수 있다. 서울은 물론 좋은 직장이 적은 지방에서도 일할 수 있다. 가부장적 조직문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를 누리며 일과 삶의 공존을 갈망하는 청년 세대에게 의사는 최고의 직업이 아닐 수 없다. 어찌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있는가.” 직장내에서의 직위가 지혜를 결정하고, 그 직위로 지시 명령할 수 있는 그런 사회로 바뀌어져 가고, 이러한 지시하고 명령할 수 있는 직위에 올라가기 위해 안간함을 쓰는 세대가 오늘날의 세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믿음의 식구들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지혜의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을 살아가되 겉으로 보이는 외모와 직장이나 소유나 권세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더 귀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적용)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면의 능력을 쌓고자 힘쓰고 애씁니까? 아니면 속사람의 능력을 쌓고자 지혜의 말씀을 묵상하고자 애쓰십니까? 그동안 나에게 홀연히 임한 재앙이 내가 그동안 예배와 말씀묵상을 등한시 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듣지 않았기 때문은 아닙니까?
3. 호령과 무기보다 나은 지혜(17~18절)
오늘 본문 17절과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7절에서는 지혜자의 조용히 들리는 말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고 말하고 있고, 18절에는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 큰 소리로 호령해도 그 말에 지혜가 없으면 맡은 일을 완수할 수도, 맡은 사람을 살릴 수도 없습니다. 반면 지혜자는 겸손한 태도로 조용히 말하지만, 그 지혜로 맡은 일도 완수하며 맡긴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스리는 자의 호령’은 자기에게 주어진 힘과 권력으로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종종 그 다스림과 지시와 지적이 부당하거나 그 모든 것이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18절 “지혜가 무기보다 나느니라” 여기서 "지혜가 무기보다 낫다"는 말은, 무력보다 지혜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전쟁이나 갈등 상황에서 소유하고 있는 무기력보다 지혜를 가진 사람이 더 큰 영향력을 미치고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말은 결국 무기의 힘으로는 어떤 꼬여진 삶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고, 상황에 맞는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과 지혜로 문제를 해결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적용) 나는 힘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듣기를 좋아하고 그 말에 영향을 받습니까? 믿음의 공동체에서 함께 말씀으로 겸손히 삶을 나누는 지체들의 말을 듣고 따르기를 좋아합니까?
‘나라는 성읍에’라는 박루디아님의 큐티인 간증입니다.
결론
오늘 ‘무기보다 나은 지혜로 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는데, 진정한 지혜는 생명을 살리고자 십자가를 지는 삶과 겸손한 말입니다. 이 세상을 이기는 지혜는 큰 왕의 권세도 아니고 큰 목소리로 호령하는 것이나 칼과 활 같은 무기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 권세와 무기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이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는”(사 42:2~3)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삶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세상은 장차 심판 받아 무너질 나라입니다. 뛰어난 능력과 권세와 지식이 있든 없든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공의로 심판하실 마지막 날은 누구에게나 홀연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메멘토모리로 나의 죽음을 기억하며, 그 후의 심판을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저주와 심판을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하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이땅을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위하여 헌신할 뿐 아니라 마태복음 25장의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말씀과 회개와 순종의 기름을 늘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지혜의 말씀을 곁에 가까이 두고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인간 상식을 뒤집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5:14)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든, 정말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고전3: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1:18)
문제는 지혜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적고, 십자가의 어리석음에 운명을 거는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높아지기 위한 공부에는 아낌없이 투자하지만, 하나님의 구원과 말씀을 통해 구원을 이루는 데는 시간도 물질도 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게 우리의 척박한 삶의 내력입니다. 유명한 유대인 학자이자 사상가의 한 사람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누가 사람인가]라는 책에서 “희랍인들은 이해하기 위하여 배웠다. 히브리인들은 공경하기 위하여 배웠다. 현대인들은 사용하기 위하여 배운다”(201쪽)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써먹기 위한 배움에 집중할 때 얻는 것은 무엇이고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헤셀은 이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직장도 있고 성공할 기회도 있고 위안도 있고 안정도 있다. 그러나 고양(高揚)이 없고 자기 몸을 희생시킬 만한 가치에 대한 감각이 없고 끊임없는 통찰이 없고 동경(憧憬)의 경험이 없고 가장 귀중한 것과의 만남이 없다.”(같은 책, 203쪽)라고 합니다. 그래도 그게 현실 아니냐며 체념하며 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아깝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가 큰 왕의 권세를 가진 지체도, 가난한 지혜자 같은 지체도 각자에게 주신 역할로 구원을 이루며 거룩히 쓰임받는 공동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는 지혜는 물질과 권세가 아닌 십자가를 지는 삶인 것을 깨닫고, 이를 선포하고 나누는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