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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정신
회화에 있어서 정신의 문제
서화일치: 승리한 정신
그날은 유달리 추웠나보다. 환갑을 앞둔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지에서 음력설을 전후하여 가장 추운 절기인 세한(歲寒)을 보내고 있었다. 그해는 서력으로 1844년이었다. 맞배지붕의 간소한 초옥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소나무와 전나무가 각각 두 그루씩 서있는 풍경을 갈필로 그린 이 문인산수화는 김정희가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에게 그려준 것이었다.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난 후 그를 찾던 사람들로부터는 연락이 끊기고 아내 예안 이씨마저 세상을 떠나 쓸쓸하기가 말로 다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런데 역관이었던 이상적이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수행해 북경으로 갔을 때 두 차례에 걸쳐 귀한 책을 구해 보내줬기 때문에 김정희는 이상적의 지조를 높이 평가하며 그 답례로 이 산수화를 그려 이상적에게 보냈다. 김정희는 화면의 오른편 위쪽에 ‘세한도’란 화제를 적고 “우선은 감상하시게(藕船是賞) 완당(阮堂)”이란 관지(款識)를 적어놓았다. 그 아래에 “서로 잊지는 말게나(長毋相忘)”라고 새긴 주인(朱印)을 찍은 것과 함께 그림 옆에 해서체로 쓴 발문에서 이상적의 한결같은 처신을 칭찬하며 『논어』의 「자한(子罕)」 편에서 공자가 말한 “한겨울의 추운 날씨가 된 뒤에야 소나무와 전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는 문장을 인용했다.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은 감격에 겨워 스승에게 답신을 보내면서 북경으로 갈 때 이 그림을 들고 가서 시문을 청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과연 이듬해 중국으로 간 이상적은 16명의 문인들에게 이 그림을 보인 후 그들로부터 찬문과 찬시를 받아 10미터에 달하는 두루마리로 표구하여 다시 김정희에게 보내었다.
<세한도>는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문인산수화로서 손색이 없는 걸작임에 분명하다. 이 작품에서 한때는 중국의 문인학자로부터 ‘해동통유(海東通儒)’란 격찬을 받았지만 권세를 잃고 절해고도에 위리안치된 채 고독하게 겨울을 나야했던 노경의 김정희가 느낀 고독과 황량한 마음이 잘 드러나고 있다. 지조를 잃지 않고 자신에게 최선을 다한 제자로 향한 마음을 삭막한 겨울을 버티고 있는 소나무와 전나무에 비유한 점도 읽을 수 있다. 이 나무들은 어쩌면 김정희 자신을 상징한 것인지도 모른다. 스승으로 향한 이상적의 존경과 흠모가 애틋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정희는 이 그림을 보내주면 그가 필경 중국으로 가져가서 자신이 그리워하는 중국의 학자들에게 보여줄 것임도 간파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어쨌든 이 작품을 보면 고고한 인품과 지조를 상징하는 나무를 통해 봄이 멀지 않았다는 희망도 읽을 수 있다.
그림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림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형식이지만 그 너머의 많은 것을 함의하고 있는 것 또한 그림이다. 만약 <세한도>를 형식으로만 해석하려 한다면 고졸담박한 필치, 대상의 적절한 포치(布置), 갈필의 운용 외에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양식론만으로는 이 작품을 해석하는 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김정희 자신이 썼던 발문은 작품의 내용과 의미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이다. 아울러 이 작품은 쓸쓸한 겨울풍경을 그렸으되 대상의 외양을 재현(形似)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뜻을 표현(寫意)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랜 학습과정을 거쳐야 체득할 수 있는 인문지식과 정신기질을 표출하는 ‘사의’는 고개지(顧愷之)의 ‘전신(傳神)’으로부터 사혁(謝赫)이 『고화품록(古畫品錄)』에서 제시한 육법(六法)에 이르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만 하더라도 주로 인물화에 적용된 이론이었다. 그러나 육법중 제일 우선시되는 기운생동은 고개지의 전신론으로부터 발전한 것으로 사혁 자신도 이를 ‘신운(神韻)’이라 표현했다. 이런 점에 주목하여 중국 미학자 갈로(葛路)는 사혁이 활동하던 시대는 초상화나 고사인물도가 회화의 중심을 이루었으므로 기운의 본의는 인물의 정신적인 기질을 가리키지만 그 후 산수나 화조 등에도 확대되었다고 했다.
당대에 이르러 장언원(張彦遠)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畫記)』에서 회화와 서예의 뿌리는 같다(書畫同原論)고 주장함으로써 그때까지 회화를 기예로 파악했던 관점을 불식시켰다. 송대에는 구양수(歐陽修),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등에 의해 문인사대부의 심미관을 우위에 두는 미학과 화론이 중심을 이루면서 미불(米芾)에서 볼 수 있듯 <기산행려도>와 같은 웅장한 풍경을 그린 범관(范寬)보다 동원(董源)을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명대 초기만 하더라도 남송원체화풍을 계승한 절파(浙派)가 제대로 평가를 받았으나 중기에 이르러 시·서·화를 중시한 문인들이 일으킨 오파(吳派)의 심미관이 원체화풍을 압도했다. 특히 동기창(董其昌)의 남북종론은 남종문인화를 숭상하고 화원화가들의 그림을 북종이라 멸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중국의 화론에서 시와 그림의 결합을 최고의 경지로 정식화한 이론가는 소식이었다. 그는 왕유의 <남전연우도(藍田煙雨圖)>에 대해 “마힐(摩詰)의 시를 맛보면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보면 그림 가운데 시가 있다”고 했다. 이 산수화가 왕유의 작품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소식의 시정화의론(詩情畫意論)은 훗날 중국에서 회화비평의 중요한 원칙으로 작용했다. 화가의 재능 못지않게 수양을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화가들에게 문학적인 조예와 전통에 대한 연구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했다. “만 리의 길을 걷지 않고 만 권의 책을 읽지 않으면 화조(畵組)가 되고자 하더라도 그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는 동기창의 주장은 황정견의 의견을 따른 것이지만 이것을 통해 천하를 주유(周遊)하고 엄청난 독서를 해야만 비로소 화가로 입신할 수 있다는 문인사대부의 회화관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생전에 동기창은 “내가 임모하지 않은 글이 하나도 없다”고 스스로 밝힌 것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대단한 노력과 연구를 통해 많은 저술과 작품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사후에는 문민(文敏)이란 시호를 받았고 ‘예림백세의 대종사’로 추앙되었다. 그러나 생전에 그는 가렴주구를 일삼는 탐관오리로 몰려 민란을 야기했다. 대표적인 문인 우월주의자였던 동기창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더욱 가혹하다. 예컨대 그의 독서는 잡식성에 불과하여 깊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독(誤讀), 오식(誤識)은 물론 공공연하게 사실을 왜곡하거나 선가적(禪家的) 횡설수설로 일관하였으면서도 철저하게 종파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명·청대의 문인화가들이 추구한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는 문인화가들의 태도는 물론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이었다. ‘가슴 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의 향기와 서권의 기미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김정희의 주장도 바로 이런 전통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희가 <세한도> 발문에서 인용한 논어의 한 구절은 ‘그림은 바탕이 있은 후에 할 일이다(繪事後素)’, ‘맑은 거울은 모습을 살피게 해준다(明鏡察形)’는 구절과 마찬가지로 예술이 예(禮)의 교화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공자의 예술의 공리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희는 중인출신으로 뛰어난 예술가이자 이론가였던 조희룡을 폄훼하는 글에서 “근래 사람들은 붓에 먹을 적게 찍어 가지고 원대 화가들이 즐겨 사용했던 황한간솔(荒寒簡率)한 맛을 내려고 하는데 이는 모두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짓이다. 왕유, 이사훈·이소도 부자, 조영양, 조맹부는 모두 청록색을 사용한 것이 더 우수하였다. 품격이 높다는 것은 형태가 아니고 정신이다. 이 정신을 체득한 사람이면 청록색을 사용한 것이 더 우수하였다. 서법도 마찬가지다.”고 썼다. 이것은 김정희가 예술의 사회적, 교육적 역할보다 심미적 가치에 더 주목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고매한 인품과 고전의 섭렵, 학문적 도야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작품을 거의 무시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김정희가 <세한도>를 그릴 때 갈필의 운용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정신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학예일치만이 정신의 승리를 보장하는가?
그렇다면 서구에서는 회화와 문학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고대 로마의 호라티우스가 했던 ‘그림은 시처럼(Ut pictura pöesis)’이란 말은 오늘날까지 왜곡된 채 거듭 인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문구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에서 ‘포이에시스(ποίησις)’는 원래 제작 일반을 의미했다. 사실 예술의 어원은 기예나 기술을 의미하는 ‘테크네(τέχνη)’로부터 비롯하고 있다. 로마인들은 이것을 ‘아르스(ars)’로 번역했다. 플라톤은 건축처럼 사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생산적 예술로 규정하고, 회화처럼 사물을 모방하는 것을 모방적 예술이라고 분류했다. 기원후 1세기경 로마의 수사가인 퀸틸리아누스는 이를 세 개로 분류했는데 오직 연구에 속하는 예술(이론적 예술: 천문학), 산물을 만들어내지 않고 행위로만 이루어진 예술(실천적 예술: 무용), 예술가의 행위가 끝난 후에도 존재하는 사물들을 만들어내는 예술(제작적 예술: 회화)이 그것이다. 이때 제작적이란 뜻을 지닌 것이 ‘포이에틱’이므로 원래의 의미대로 한다면 ‘그림은 시처럼’이 아니라 그림은 그림처럼 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르네상스에 이르러 중세만 하더라도 칠학예(七學藝)에 들어가지 못했던 회화가 인문주의의 학문에 버금가는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순수예술(Beaux-arts)이란 개념은 나타나지 않았고 회화·조각·판화·건축 등 이른바 조형예술의 바탕이 도안 또는 설계란 의미의 ‘디세뇨(disegno)’라고 인식했다. 르네상스인들은 이 디세뇨를 기초로 만들어진 것을 ‘지성적인 예술(arte intellettuale)’로, 공예처럼 디세뇨의 과정 없이 기능적인 재주만으로 이루어진 것을 ‘기능적인 예술(arte meccanico)’로 분류했던 것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분위기 속에서 풍미한 신플라톤주의는 많은 르네상스 화가들을 단지 장인이 아닌 지성적인 전문가로 그 사회적 지위를 격상시키는데 공헌했다. 보티첼리의 작품은 메디치 가문의 후원과 피치노(Marsilio Ficino)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의 고전연구 성과에 힘입어 탄생할 수 있었다. 마침내 레오나르도는 “과학은 사물의 양을 생각하는 반면 회화는 사물의 질을 생각한다”면서 예술을 과학보다 우위에 두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회화는 최선의 과학이 아니라 화가의 혼을 신의 혼과 유사한 어떤 것으로 변형시키기 때문에 하나의 기술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성이기도 하다”고도 했다. 이로서 회화는 기술과 학문을 추월할 수 있었으나 그것이 자연이든 고전(거장의 양식)이든 모방을 모범으로 삼았다. 바사리가 동시대의 예술가들을 평가할 때 동원했던 ‘위대한 양식(gran maniera)’이란 개념은 곧 미켈란젤로와 같은 거장이 이룩한 양식을 일컫는 것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신화나 경전은 물론 고전과 같은 전거를 바탕으로 그린 회화를 그리거나 이해하기 위해 문헌에 대한 연구와 고증, 주석의 중요성이 더욱 증대했다. 이러한 회화에 두드러진 상징과 알레고리를 더욱 풍부하게 해석하고자 하는 학문적 열정으로 인문학으로서의 미술사인 도상해석학은 20세기에야 나타났다. 그러나 예술의 종교적, 도덕적, 교육적, 이념적 가치를 중시할수록 주제는 선명하게 부각될지언정 심미적 가치는 후퇴할 수 있다. 도상해석학이 귀중한 학문임에는 분명하지만 예술의 형식적 특징에 대해서는 규명하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 도상해석학을 정초한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는 베네치아 색채파 화가 티치아노의 작품에 깃든 의미와 주제는 훌륭하게 해석하였지만 그의 색채가 훗날 미술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별반 주목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모방은 미학은 물론 회화에서도 중요한 원칙이었다. 전설적인 화가 제욱시스(Zeuxis)가 그린 <포도바구니를 든 소년>이나 솔거(率居)의 <노송도>는 현존하지 않지만 기록으로만 보건대 묘사하고자 한 대상에 얼마나 필적하는가가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경우에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적 탁월성, 즉 대상을 실감나게 재현하는 재능이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유사성에 바탕을 둔 가치의 판단은 적어도 낭만주의 이후 그 절대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그것을 대신하여 독창성, 상상력, 개성이 중요해진 것이다.
중국회화사에서 대상의 외양을 잘 묘사한 것에 대해 짐짓 낮게 평가하려는 태도는 “형사로 그림을 논하는 것은 견해가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는 소식의 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고 동북아시아의 회화사가 문인의 기품을 타고나고 인문지식을 함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서·화에 능한 학자가 기운생동과 문자향서권기를 잘 구현한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중국 특유의 투시법인 삼원법을 정립한 곽희(郭熙)의 <조춘도>는 화북지방의 웅혼한 산수, 그것도 겨울의 추운 기후까지 느낄 수 있도록 그린 것인데 자연에 대한 정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제작했다는 데 특징이 있다. 곽희의 작품이 여러 시점으로 파악한 거대한 자연을 바위산은 물론 메마른 나무, 얼어붙은 강, 조금씩 흘러내리는 폭포, 무지개다리 뒤의 건물, 강가와 계곡 사이에 언뜻언뜻 보이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김정희는 화면을 차지하는 네 그루의 나무와 집 한 채만 덩그러니 그려 넣어 자신의 심경을 그 풍경에 투사시켰다. 다 같이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 형식에서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세한도>에서 느낄 수 있는 문기와 <조춘도>의 시정(詩情)을 단지 형사나 사의라는 기준에만 의존하여 그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두 작품에서 우리는 각 작가가 살았던 시대와 사회의 조건, 그들의 처지와 마음의 상태, 개성적인 특징까지 본다.
타고난 신분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려불화를 대표하는 작품 중의 하나인 <수월관음도>를 보면 화기(畵記)에 ‘고려 승려 혜허가 그렸다(海東癡衲慧虛筆)’고 기록돼 있어서 혜허가 스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위대한 불화는 승려인 혜허가 지극한 불심으로 그렸을 것이지만 종교화이므로 논외로 치자. 양해(梁楷)나 센가이 기본(仙厓義梵)은 문인이 아니라 승려였지만 문인화의 전통을 따르고 있어서 신분으로 문인화가와 직업화가로 나눌 수는 있을지언정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거나 정신의 승리를 결정짓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학습능력이 부진했던 고흐는 신학교를 중퇴하고 전도사로 활동하다 화가가 된 후에도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불우한 삶을 살았다. 그가 화가로 활동한 기간은 불과 십여 년 정도였고 정신질환으로 자신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겨 생을 마감했지만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무엇이 고흐를 위대하게 만들었는가. 그는 인상주의란 흐름 속에 있었으나 자신만의 비전을 표현했다. 잦은 간질로 여러 차례 발작을 일으켰고, 심한 우울증을 앓았던 고흐의 작품에서 정신적인 것을 찾는다면 다른 작가들과 공유할 수 없는 고양된 열정이지 않을까. <별이 빛나는 밤에>와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회오리치는 하늘에 빛나는 별은 정신착란을 일으킨 환자가 환상에 사로잡혀 그린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의 치밀한 관찰의 결과였다는 과학자의 연구를 보면 그의 창작의 원천이 광기로부터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생전에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800여 통의 편지를 보냈다는 점에 착안하여 어떤 학자들은 그가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증상인 ‘하이퍼그라피아(hypergraphia)’의 대표적인 질환이 측두엽 뇌전증을 앓았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내면으로 침잠하던 고독을 작업에 집중시킨 에너지가 물감 속에 함유된 납성분에 의한 중독 때문이든, 당시 예술가들이 즐겨 마셨던 압생트의 과도한 음주에 의한 것이든, 경계성 인격장애에 의한 것이든 고흐는 자신의 격렬한 성격을 창조적 열정으로 표출한 작가임에는 분명하다.
재현으로부터 자유로운 추상회화에 이르면 정신의 문제는 더욱 추상적인 차원으로 넘어간다. 보링거는 『추상과 감정이입』에서 인간의 근원적 심리욕구인 ‘예술의욕(Kunstwollen)’이 ‘감정이입 충동’과 ‘추상충동’으로 나뉜다고 했다. 보링거는 감정이입 충동은 인간과 세계가 조화적 관계를 유지할 때 미적 체험의 과정에서 유기적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발생한다며 그 예로서 고대 그리스와 르네상스 미술을 들고 있다. 반면에 인간이 외부세계와의 부조화에서 야기되는 불안으로 추상충동이 발생하는데 동방, 이집트, 비잔틴미술에 나타난 기하학적, 추상적 예술을 예로 들고 있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예술을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나눠 고찰한 것에 착안한 보링거는 아폴론적인 것을 감정이입에,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추상충동과 연관시켰지만 니체가 아폴론에서 디오니소스를 본 것처럼 보링거 또한 추상충동 역시 감정이입에 들어있다고 파악했다. 1910년 보링거는 『추상과 감정이입』을 재출간하며 ‘초월성과 내재성에 관하여’란 부록을 추가했다. 산업혁명에 따른 급격한 사회의 변화와 근대도시의 출현, 기독교적 세계관의 붕괴와 세기말적 우울, 제국주의의 팽창에 따른 긴장국면에서 세계와의 부조화에 따른 불안이 고조되는 가운데 초월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종교적 신비주의와의 만남을 의미했으며, 보링거가 신지학의 비물질주의와 신비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20세기 초에 추상회화를 개척한 칸딘스키는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내적 필연성’을 강조한 바 있으므로 추상회화가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더욱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고자 한 결과임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칸딘스키는 색의 순수 물리작용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예술작품은 내적 요소(예술가의 영혼 속에 있는 감정)와 외적 요소(회화를 물리적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것)에 의해 성립한다고 파악했으나 ‘영혼의 상태’를 더 중요시했다. 특히 기술의 발달로 확산되던 물질주의와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 맞서 인간의 내면을 성찰하고자 했던 칸딘스키는 ‘온 세상의 삶을 불행과 무의미한 유희로 이끄는 물질주의의 악몽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이제 막 깨어나고 있는 영혼은 아직도 이러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칸딘스키 못지않게 몬드리안도 추상회화로 발전하기 전까지 신지학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들은 추상회화를 시각적 만족을 고양시키는 형식이 아니라 그것에 정신을 담고자 했다.
형식에 대한 정신의 우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추상회화에서도 발견된다. 예컨대 바넷 뉴만은 거대한 색면추상에서 숭고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린버그의 형식주의 비평과 상관없이 그는 「숭고는 지금부터」란 논문에서 ‘낭만적이면서 흥분되고 동시에 일종의 ‘계시’라고 할 만한 새로운 예술’에 대해 언급했다. 마크 로스코 또한 추상화가로 분류되기를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독과 명상, 비극과 같은 감정을 색면회화 속에 담고자 했다. 마크 로스코는 휴스턴에 모든 기성종교를 뛰어 넘어 그것을 융합하는 ‘명상의 공간’인 로스코사원을 건축하던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서정적이고 명상적인 특징은 종교적 초월과도 연결된다. 로스코사원은 예술이 마침내 종교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만든다는 점에서 헤겔을 떠올리게 만든다.
회화의 죽음과 연명
플라톤은 이데아의 모방인 현상을 모방하는 화가를 철학자들이 통치하는 국가로부터 추방했다. 물론 목수와 화가의 비유는 플라톤 식의 논리에 충실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가 보기에 화가란 모방의 모방만 일삼는 기술자이거나 장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예술의 종말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헤겔로부터 비롯하고 있다. 예술을 정신의 감각적 구현이라고 정의한 헤겔은 예술의 역사가 물질성으로부터 정신성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임을 자신의 변증법을 동원해 주장했다. 즉 그는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건축은 물질이 정신을 압도한 것으로서 이를 ‘상징적 예술’이라고 불렀다. 이 단계를 지양하여 정신과 물질이 조화를 이룬 단계를 ‘고전적 예술’로 분류하며 그 예로 고대 그리스 조각을 들고 있다. 르네상스의 회화, 17세기의 음악, 그리고 시에 이르러 마침내 정신이 물질을 극복할 때 ‘낭만적 예술’이 도래한다. 개념이 물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면 예술이 물질적 매체를 통해 존재하는 시대는 끝나므로 예술은 종말을 맞이한다.
예술을 감각적 직관의 형식으로 파악한 헤겔에게 예술은 종교, 철학과 함께 정신의 최고단계인 절대정신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술로 파악된 진리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고 스스로를 지양하여 직관형식보다 더 보편적인 형식인 내면으로 표상되어야만 한다. 즉 직관에 의한 예술은 표상의 형식인 종교에 의해 지양됨으로써 진리의 인식매개체로서 역할을 다한다는 것이다. 종교 또한 개념의 형식으로 진리를 인식하는 철학에 의해 지양되므로 절대정신의 최고단계는 철학일 수밖에 없다.
20세기에 들어 단토 역시 예술의 종말에 대해 말했다. 1964년 스테이블갤러리에서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본 후 충격에 빠졌던 그는 1997년에 출간한『예술의 종말 이후』에서 예술계 내의 배타적인 담론(narrative)인 바사리(Giorgio Vasari) 에피소드와 그린버그 에피소드가 끝났음을 선언했다. <브릴로 상자>에 의해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의 구별이 더 이상 무의미해졌으므로 예술과 작품의 본질과 조건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시작되어야 하며, 예술의 철학적 의미를 묻는 예술철학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단토의 예술종말론은 예술이 파탄이 아니라 특정 시기의 예술을 규정했던 내러티브의 종말이므로 바야흐로 모든 예술이 가능할 수 있다는 예술부활론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미술계 내에서도 그동안 얼마나 많은 회화의 죽음이 선고되었는가?
사진이 등장하자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인 역사화가이자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이기도 했던 들라로슈는 “이제 회화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한탄했다. 게오르게 그로츠와 같은 베를린다다이스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바이마르공화국의 여러 도시를 순회하던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기념비> 모형의 꼭대기에 꽂혀있던 깃발을 내려 손에 들고 거리를 뛰어다니며 “예술은 끝났다. 사회주의 예술 만세”를 외쳤다. 1960년대 프랑스의 새로운 미술운동을 주도했던 다니엘 뷔랑 역시 모든 도시를 미술관으로 만들겠다는 포부 아래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줄무늬가 그려진 작품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오며 ‘회화의 죽음’을 선언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톰 울프는 『색칠된 그림』이란 책에서 아주 냉소적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미술관에서 그린버그나 로젠버그의 비평문이 실제 작품을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그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면 ‘저자의 죽음’ 혹은 ‘책(말씀)의 종언’이 바이러스처럼 번져나갔다. 그것은 곧 기의(signifier)의 죽음이자 로고스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어! 언제는 묘사나 재현을 폄하하며 정신의 승리를 주장했던 예술론이 이제는 그것조차 폐기한단 말인가. 이제는 아방가르드조차 제도화했기 때문에 그것에서 특징적이었던 반항, 부정, 파괴의 정신도 제도의 규칙 속에서 동어반복되고 있다. 그래, 역시 예술은 죽었어.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배우기를 강요당했고, 진리로 신봉되었던 고상한 이론들도 이제는 해묵은 과거지사가 되어버린 거야.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또한 모든 것이 이미 소진된 시대를 살고 있단 말이야.
그렇다고 아직도 회화의 정신을 믿고 있는 작가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미래에 대한 불안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미술대학은 많지만 작가로 활동하기 어려운 현실이나 길을 묻는 작가들에게 아무 말도 못하는 엉터리 비평가의 증발, 침체란 말이 만성화된 시장의 위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2016년 3월, 구글의 딥마인드에서 개발한 검퓨터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다. 바둑에서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인간에게 승리하였다고 침울해할 필요는 없지만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다. 정보통신기술시대를 대표하던 제3차 산업혁명에 이어 정보통신기술과 제조업, 바이오산업을 연결하고 융합하는 제4차 산업혁명의 도래가 훨씬 가까워졌다는 사실은 인간의 삶이 급격하게 바뀔 수 있음을 예고한다.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을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사물인터넷이 실용화단계에 이르렀고, 많은 데이터를 분석하여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는 기술까지 나타나고 있다. 미래학자들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의해 많은 직업이 사라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고소득과 사회적 지위와 명망을 보장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망하는 변호사, 의사, 회계사 등의 일을 로봇이 대신할 것이라고 한다. 드론의 상용화는 각종 배달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며, 무인자동차는 택시나 버스기사들을 집으로 보낼 것이다. 인공지능 로봇은 제조업에 종사하는 많은 노동자들을 실업자로 만들 수도 있다. 디자이너라고 예외는 아니다. 창의성이 아니라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순응하는 디자이너의 역할도 기계가 빼앗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술가는? 3D 프린터의 출현으로 조각가가 일부 타격을 입을 수도 있겠지만 사진이 등장했을 때 회화가 그랬던 것처럼 조각가는 오히려 3D 프린터를 활용하여 조각의 영역을 더 확장시킬 수도 있다. 화가는 당연히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존경을 받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모든 예측가능성을 동원하여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감성과 소통의 역할까지 할 수 있을지 솔직히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예술가들에게 희망어린 복음을 전파하고 싶지도 않다. 회화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찬란하지는 않을 것이다. 회화는 제도, 우리가 멀리하고 싶기도 하고 가까이 하고 싶기도 한, 그러나 결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그 제도의 보호 아래 연명할 것이다. 즉 화가를 양성하고, 등단시키고, 경쟁하게 만들고, 평가하고, 수입을 제공하고, 월계관을 씌워주는 그 제도 말이다.
회화정신은 회화와 시대정신을 조합한 조어이지만 회화 자체에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회화에서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태도를 반영한 것으로 보고 싶다. 회화정신이란 이 조어는 작가들이 형식의 참신성 못지않게 회화를 통해 우리 시대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믿는다. 중요한 것은 마음 못지않게 우리의 몸이다.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도 이 몸이며 물리적으로 회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눈이나 손과 같은 신체기관도 몸과 연결돼 있다. 내 몸은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 위치하고 있다. 나와 타자와의 관계, 나와 사회와의 관계, 나와 세계와의 관계는 나를 존재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 관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예술의 지리멸렬한 연명이 아니라 예술의 건강한 생존을 위한 조건이지 않을까. 예술에 있어서 정신은 내 몸 속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그 성찰의 지속에 의해 빛나는 것은 아닐까.
최태만/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