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표소방소 맞으편에서 버스에 탑승 서울 양양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춘천JC에서 중앙고속도로
변경 춘천까지가서 일반국도로 양구를거쳐 고방산에 위치한 두타연 갤러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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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군개요
개관
동쪽은 인제군, 서쪽은 화천군, 남쪽은 춘천시, 북쪽으로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창도군·금강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경 128° 10'∼127° 51', 북위 37° 59'∼38° 19'에 위치한다. 면적은 701.53㎢이고, 인구는 2만 4089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4개 면, 83개 행정리(60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하리에 있다.
자연환경
태백산맥의 여러 연봉들이 남북으로 종관한다. 양구군은 화천댐과 소양강댐 건설로 많은 평야지역이 물에 잠겨 전체면적의 85%가 임야와 호수로 되어 있다. 금강산의 뿌리가 서남쪽으로 뻗으면서 지맥이 양구와 회양을 경계로 하는 마비령으로 내려가 광록산(800m)을 이루어 산세가 험준하다.
군의 동단부는 가칠봉(加七峰, 1,242m)·대우산(大愚山, 1,179m)·도솔산(兜率山, 1,148m)·대암산(大巖山, 1,304m)을 연결하는 높고 험준한 대암산맥이 남하해 소양호에 접한다.
중앙부에는 지혜산(智惠山, 1,024m)·봉화산(烽火山, 875m)을 연결하는 비봉산맥(飛鳳山脈)이 있다. 서단부에는 어은산(魚隱山, 1,277m)·백석산(白石山, 1,142m)·사명산(四明山, 1,198m)을 연결하는 어은산맥이 있다. 이렇게 군 전체가 험준한 내륙산간지역을 이룬다.
이들 연봉 사이를 북한강(北漢江)의 지류인 수입천(水入川)과 서천(西川)이 남류하다가 남서부의 파로호(破虜湖)로 흘러든다. 서부에는 금강산에서 발원한 금강천이 북한강으로 흘러들며, 남단부를 소양강(昭陽江)이 서류한다.
북동부의 해안분지는 소양강 유역권에 속하는 전형적인 침식분지이고, 양구읍에는 대규모의 산록완사면이 발달하였다. 지질은 대부분 시·원생대의 변성퇴적암 내지 화강편화암이나, 해안분지는 중생대에 관입된 화강암지역이다. 토양은 대부분 잔적토이고 비옥한 충적토는 하천 주변에 좁게 분포할 뿐이다.
이 군은 태백산맥의 분수령 일부를 차지해 한반도의 서부와 동부 식생계의 경계가 되므로 희귀한 동식물이 많다. 냉수성 어류인 열목어·잉어름치·황쏘가리, 딱새과에 속하는 쇠올딱새 등이 있다. 그리고 콩과인 개느삼과 다년초인 금강초롱 및 비로용담·칼잎용담·끈끈이주걱·큰비다분취·북통발·장백제비꽃·물이끼 등 식물종들이 자생한다.
호수로는 인공호인 파로호와 소양호가 있어 내수면어업이 활발하고 수상교통과 관광적 가치가 크다.
기후는 산간분지와 1,000m 이상의 고산지가 많아 대륙성기후를 나타내며 같은 위도상의 어느 곳보다도 기온이 낮고 강수량도 적다. 연평균기온 12.3℃, 1월 평균기온 -5.℃, 8월 평균기온 24℃이며, 연강수량은 1,395.5㎜이다.
역사
구석기시대의 유적은 발견된 적이 없으나 이 지역에서 가까운 홍천군홍천강 유역의 유적에서 5만∼10만 년 전의 중기구석기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횡성군 둔내에서도 1만∼2만 년 전의 후기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어 이 지역에서도 발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서기전 108년 위만조선이 무너지고 한나라가 4군을 정했을 때 이곳은 낙랑군에 속했다. 고구려의 건국 후 본격적인 남하정책이 전개된 광개토왕 때까지 약 100년간 동안 고구려의 세력권에 속했으며, 당시에는 양구군(楊口郡) 또는 요은홀차(要隱忽次)라고 불렸다.
757년(경덕왕 16) 이 군을 양록군(楊麓郡)으로 개칭해, 태수(太守)를 두고 삭주도독부에 소속시켰다. 그리고 희제현(稀蹄縣)·치도현(馳道縣)·삼령현(三嶺縣)을 영현으로 두었다.
940년(태조 23)에 양구현(陽溝縣 또는 楊溝縣)으로 고쳤고, 1018년(현종 9)에 춘주(春州 : 지금의 春川)의 속현이 되었다. 1106년(예종 1) 감무를 임명해 낭천감무(狼川監務)를 겸임시켰고 이 때 양구(楊口)로 고쳤다. 삼령현은 방산현(方山縣)으로 개칭되어 회양부(淮陽府)에 속했다.
1393년(태조 2)낭천으로부터 분리되어 따로 감무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 관례에 따라 현감을 두었다. 1424년(세종 6)에는 방산현과 춘천에 속했던 해안소(亥安所)가 양구현에 통합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의 호구는 양구가 297호 641인, 방산이 20호 50인이었다고 한다.
1895년춘천부 양구군으로 개편되었고, 1896년강원도 양구군으로 되어 군내(郡內)·방산(方山)·수입(水入)·해안(亥安)·북(北)·서(西)·남(南)·하동(下東)·상동(上東) 등 9개 면을 관할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11월 2일양구면 연포와 학포 두 곳에서 양구의병과 왜군이 공방전을 벌였다. 11월 21일에는 방산면 선안리에서 김덕흥(金德興)과 김경화(金敬和)가 이끄는 300여 명의 의병이 일본군과 접전해 총기와 탄약 및 군마·인장·군도 등을 노획하였다.
그 해 12월 중순 이래 최천유(崔千有)가 의병 600여 명을 인솔하고 양구·화천·인제 사이를 내왕하면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공방전을 벌였다. 동면 덕곡리 출신의 의병대장 최도환(崔道煥)이 이끄는 양구의병은 1908년 1월 2일 일본군과 동면 임당리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였다.
1908년 일시 화천군에 병합되었다가 복구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서면과 군내면을 합해 군내면으로, 춘천군 북산외면 수산리를 이관받아 남면으로, 상동면을 동면으로 개칭하였다. 1917년군내면을 양구면으로 개칭하였다. 1940년화천댐 건설로 북면 일부가 수몰되자 1941년북면을 폐지하고 양구면과 방산면으로 각각 분할, 편입시켰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남면의 일부인 하수내리를 제외한 전지역이 공산 치하로 들어갔다가, 1953년 국군의 진격으로 탈환, 수복되었다. 이후 휴전협정으로 수입면을 제외한 수복지구에 군정이 실시되었다.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이 시행되고, 해안면이 인제군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남면 상수내리와 하수내리가 인제군으로 편입되고, 인제군 남면 두무리와 서화면 현리·오류리·만대리·월산리·후리·이현리가 양구군에 편입되었다. 같은 해 양구와 춘천을 잇는 소양강댐이 준공되었다. 1979년 5월 1일양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양구읍 상5리를 상5리와 상6리로, 중리를 중1리와 중2리로, 하1리를 하1리와 하3리로 분할하였다. 1981년에는 동면 오류리를 오류1리와 오류2리로, 현1리를 현1리와 현3리로 분할하였다. 1983년 2월 15일동면 해안출장소가 해안면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른다. 2021년 1월 남면은 국토정중앙면으로 개칭하였다.
1987년강원도 양구, 상무룡리파로호 상류에서 출토된 선사유적은 당시 국내 각 박물관에 소장된 구석기유물의 양보다 많은 4천여 점이 발굴되었는데 이중 249점이나 되는 흑요석의 발견으로 선사시대 문화와 사람들의 이동경로를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이밖에도 구석기인의 불씨사용을 입증하는 발화석, 희귀유물 이암, 찍개, 주먹도끼, 사냥돌, 밀개, 돌날 등 석기와 함께 30여기의 북방식 고인돌도 발견되었다.
소양강변에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은 양구읍의 고대리지석묘군(강원도 기념물 제9호)·양구고대리2지구지석묘군(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0호)·양구공수리지석묘군(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9호)을 비롯해 동면 지석리에 1기, 국토정중앙면 송우리에 2기, 국토정중앙면 죽리에 5기 등이 있다.
산성지로는 삼한시대에 쌓았다고 하는 국토정중앙면 가오작리의 비봉산성지(飛鳳山城址)와 축성 연대를 알 수 없는 양구읍 군량리의 노고성지(老姑城址)가 있다. 봉수대는 국토정중앙면 죽리·심포리·원리에 있었다.
불교문화재로 양구읍 송청리의 심곡사는 879년(헌강왕 5)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절로서 6·25사변 때 불타고 목불상 3구가 남아 있었는데, 수복 후 동면에 있었던 것을 지금의 대웅전을 재건해 불상을 봉안하였다. 그 밖에 양구읍 웅진리의 금강사(金岡寺)·선정사(宣正寺), 정림리의 의선사(義銑寺)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 양구읍 중리에 있는 양구향교(楊口鄕校)는 1405년(태종 5)에 창건되었는데, 그 뒤 퇴락된 것을 1963년과 1972년에 중수하였다. 동면 후곡리의 서암사(書巖祠)는 1587년(선조 20)에 양구현감 김현도(金玄度)의 덕을 기려 지방유림들이 건립한 사우(祠宇)이다. 6·25사변으로 소실된 것을 1959년에 중건하였다.
정자로는 양구읍 안대리 서천 옆에 세웠던 송암정지(松巖亭址)와 비봉산 산정의 봉황대(鳳凰臺)가 있다.
양구읍 공리에 유인석(柳麟錫) 격전지가 있다. 을미사변 후 의병을 일으켰던 의병장 유인석이 왜군과 격전한 곳으로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분묘로는 동면 덕곡리에 의병장 최도환묘(崔道煥墓)가 있다. 비석으로는 동면 원당리에 애국지사 동창률(董昌律)의 묘비와 방산면 송현리에 백석산지구전투전적비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로 양구읍 한전리와 동면 임당리에 걸쳐 양구개느삼자생지(천연기념물 제372호)가 있다. 군 동쪽에 대암산·대우산천연보호구역(大巖山大愚山天然保護區域, 천연기념물 제246호)이 있는데, 대암산 산정부의 늪지는 희귀한 동식물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며, 한랭하고 습한 환경에서 형성된 고층습원(高層濕原)으로 남한에서 유일한 것이다.
희귀 동식물은 열목어·어름치·개느삼·황쏘가리·금강초롱·산줄점팔랑나비·쇠솔딱새 등이 있다. 동면 팔랑리의 수령 300년 된 소나무와 방산면 현리 산악골의 수령 500년 된 소나무가 강원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1405년(태종 5)비봉산 아래에 창건된 양구향교가 최초이다. 이 향교는 1737년(영조 13)에 양구읍 하리로 이전했다가 6·25사변 후 다시 중리비봉산 기슭에 건립되었다.
동면 후곡리에 있는 서암사는 준서원격으로 1587년(선조 20)에 현감 김현도의 덕행과 치적을 추모하기 위해 봉향하였다. 이곳은 한때 유림들의 시회장(詩會場)으로 이용되었다.
신교육기관으로는 1911년의 양구보통학교가 최초이다. 이어 공립으로서 1913년수입면 문등리의 일본어강습소가 1926년에 문등보통학교로, 동면 임당리의 일본어강습소가 1921년에 임당보통학교로 설립되었다. 사립으로는 국토정중앙면 창리에 창일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일본어강습소에 불과하였다.
광복 전까지 방산면의 장평보통학교(1929), 국토정중앙면의 용화보통학교(1932), 동면의 매동보통학교(1933), 양구읍의 무룡보통학교(1935) 등이 신설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1928년에 양구공립농민학교가 개교해 초등교육을 마친 이들이 진학할 수 있었다.
1955년 양구중학교를 시발로 중등학교가 건립되었다. 사립학교로는 성애고아원생들의 진학을 위해 성애중고등학교를 설립했으나 운영난으로 폐교되었다. 영한중학교(榮翰中學校)가 주샌프란시스코 영사인 주영한(朱榮翰)의 지원으로 1960년에 설립되어 21년간 유지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10개교, 중학교 6개교, 고등학교 3개교가 있다.
1966년에 개원한 양구문화원은 매년 10월에 양록제(楊麓祭), 구국의 이념으로 수많은 피를 흘리신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고 과거의 역사적 비극을 오늘의 문화예술로 승화시켜,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을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새롭게 되새기고자 하는 뜻에서 매년 개최되는 도솔산전적문화제, 국내 최고의 대표적 겨울 민속예술축제로 우리의 민속놀이 문화를 다양하게 펼치는 대회로서 매년 설날 전에 금강산 가는 길목에 위치한 양구군 양구읍 정림교 레포츠공원 옆 특설링크에서 개최되는 동계민속예술축제 등 각종 문화예술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또한 자료의 연구결과를 출판해 향토문화의 계승과 개발에 공헌하고 있다. 기타 문화 시설로는 양구도서관, 양구향토사료관, 양구선사박물관, 박수근미술관 등이 있다. 공연장은 4곳이 있으며, 지역문화 복지시설로는 복지회관 4곳, 문화원 1곳, 청소년회관 2곳이 있다. 또 체육시설로는 실내체육관 5개소, 종합운동장 1개소, 테니스장 35개소, 수영장 2곳 등이 있다.
민속
이 고장의 민속놀이로는 기줄싸움이 있다. 조선 중엽 김현도가 현감으로 왔을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해마다 정월 보름에 주민의 대동단결과 상무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관에서 권장하였다. 면 단위로 할 때는 각 동리를 남북으로 나누어 했으며, 군 단위 때는 동면·국토정중앙면·해안면을 한 조로, 북면·방산면·수입면을 한 조로 했다.
진 편이 술과 음식을 준비하고 그 해의 도로 부역을 맡게 되므로 물질적 이해관계가 있어 모든 마을사람들이 참가하는 놀이이다. 이 놀이는 1910년대까지는 대성황을 이뤘으나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고 초등학교 운동회 등에서나 볼 수 있다.
이 밖에 가창골의 베틀놀이와 지게놀이가 있다. 돌산령 지게놀이는 당시 나무를 하러가는 팔랑마을 나무꾼들이 돌산령을 오르며 하던 놀이이다. 나무를 하러가는 한 젊은이가 지게장단을 치며 동네를 한 바퀴 돌면 나무꾼수가 점차 늘어나게 되고 장단은 점차 흥겨워진다. 40여명의 나무꾼들이 산을 오르다가 지게 상여를 꾸며 편을 갈라 싸움을 하기도 하고 장례 절차를 그대로 흉내내는 등 장난을 치다보면 어느덧 목적지에 이르게 된다. 잘 살지는 못했지만 여유와 풍류가 가득한 산간생활 문화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놀이이다.
이 고장의 동제로는 동두보제(東頭洑祭)가 있다. 보는 농사의 관개수를 끌기 위해 만든 것이다. 동두보는 지금부터 약 300년 전에 이 고장 장사였던 박제룡(朴齊龍)이 처음 만든 것으로, 매년 4월 8일에 방산면 송현리와 장평리 자월(自月, 응달말)에서 동두보를 수축하고 여기서 마을사람들이 보제를 지낸다. 주신은 산신·수신·박신(박제룡의 신위)을 모시며, 헌관은 박제룡의 후손이 하게 되어 있다.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는 도솔산과 대암산 용연(龍淵)이 유명하다. 도솔산기우제는 선조 연간의 양구현감 김현도 때부터 이미 행해졌고 한문으로 쓴 장문의 기우문이 남아 있다. 이 고장의 서낭당은 신목만으로 만든 곳도 있고 큰 마을에는 신목과 사당이 함께 있는 곳도 있다. 제를 지내는 날은 일정하지 않다.
이 밖에도 방산면 천미리에서 행해지는 강신놀이가 있는데, 100년 동안이나 계속되던 행사이다. 음력 9월 그믐날 온 동네 주민이 준비한 음식을 당목인 자작나무 고목 밑에 진설하고 악질이 돌지 않기를 바라는 제를 지낸다.
설화·민요
이 고장의 설화는 지명유래담과 인물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지명설화가 인물설화보다 훨씬 더 많은데, 이것은 양구의 지정적 조건이 궁벽한 협지인데다가 경색(景色)을 가지고 있는 곳이 많은 데에 연유한다. 그 가운데 「대정리전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마을에 포악한 지주가 살고 있었는데, 중으로 가장한 도사가 시주를 청하자 소똥 한 삽을 떠주었다. 그러자 청천백일에 별안간 폭우가 쏟아져 지주의 기와집은 물론 가족까지 몰살하고 그 자리에 큰 샘[大井]이 생겼다고 한다.
이 전설은 큰 호수 주변 마을에 흔히 전해지는 장자못전설과 내용은 비슷하나 다른 곳의 호수가 여기서는 큰 샘(우물)으로 설정된 것이 다를 뿐, 그 화소는 장자못전설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은 이 곳의 지리적 특이성 때문에 생긴 설화이다.
이렇게 지세의 특이성이나 지명에 얽힌 설화로는 국토정중앙면 용하리의 「몰구지전설(沒龜池傳說)」이 있다. 이 곳 용소에 용과 거북이 함께 살다 거북이 용에게 쫓겨 국토정중앙면 청리의 샘물골로 가려다 봉황대에서 나는 봉의 울음소리를 듣다 그곳 땅이 꺼져 거북이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렇듯 지명과 지세가 이 군의 설화에서 화소의 핵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설화로는 청리의 「상통석굴전설(相通石窟傳說)」이 있으며, 「방산(方山)의 감사구렁이」·「실학(失鶴)고개와 학조리전설」·「방산의 김등매(金登梅)아가씨와 강선대전설(降仙垈傳說)」·「소문치(小門峙)와 한씨부인」·「잔바위와 등천선녀」·「옥녀탄금대」 등이 있다.
인물설화로는 유교사회에서 생활규범으로 권장한 효행·정절의 설화와 장수설화가 있다. 효행설화로는 효성이 지극한 현감 김현도가 꿈에 신의 계시를 받아 병석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도중에 솔개가 하늘에서 가물치를 떨어뜨려 주어 그것을 달여 드려 어머니를 소생시켰다는 「김현도현감의 효행설화」가 있다.
또한 남편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본 부인이 호랑이와 싸워서 부부가 함께 호랑이에게 죽임을 당한 뒤 그 무덤에서 두 가지 소나무가 자라났다는 「열녀박씨와 송아현(松芽峴)의 정렬설화」가 있다. 장수설화는 장수와 용마에 얽힌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설화와 다를 바가 없다.
이 고장의 민요는 『한국민요집』에 채집되어 있는 편수가 13편이고 『양구군지』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 10여 편 있다. 『양구군지』에 실린 민요는 최근 작사되어 작사자까지 밝혀져 있는 것을 빼면 7, 8편이 된다. 양구지역은 북한강 상류지역으로 옛부터 농경문화가 발달했던 곳으로서 특히 이 고장 양구쌀은 임금님께 올리던 진상미로도 유명하여 "양구 흙 한 섬과 다른 지방 쌀 한 섬하고도 바꾸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또한 이곳은 대암산을 비롯한 수많은 산들이 있어서 산전을 일구며 살았던 산간 마을이 많이 남아 있다.
양구바람골농요는 산전(山田)을 갈며 소와 함께 대화 하듯 불리는 밭갈이 소리는 토속적인 멋과 맛이 짙게 배어있는데 밭매기 소리인 메나리와 얼러지 타령은 강원도 민요 선율인 메나리 소리로 이루어진 가락이고, 도리깨질 소리는 타작을 할 때 앞소리를 선소리꾼이 메기고 뒷소리를 여럿이 받는 선후창 형식으로 역동적이고 노동의 힘겨움을 극복하는 기능을 지닌 소리이다.
고사판 소리는 추수가 끝나고 천신과 농신 그리고 토지신께 간단한 예를 올려 풍년을 감사하고 제액과 발복을 비는 소리다. 이렇듯 바랑골 농요는 산간문화의 한 단면을 알 수 있게 하는 이 고장 특유의 신명과 한이 어우러진 가락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양구 지역에 현전하는 민요 가사 중 산수보다는 시사성이나 사상성을 지닌 가사가 의외로 많다.
그 예로 “흰 저고리 검정치마 입고싶어 입었나/소화(昭和)가 죽었다니 반몽상(半蒙喪) 입었네/……”라고 한 것은 일제에 항거하던 민중의 의식을 노래한 것이다. 또한 “개명세계 위반마라 연구종신 징역된다/깎고깎고 머리깎고 개명세계 나가보세/……”라고 한 것은 개화를 부추기는 개화의식을 노래한 것들이다. 이 밖에도 이러한 유의 민요가 몇 편 더 있다.
산간고을의 민요가 흔히 산수의 경색이나 산과 물에 붙인 정회를 노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강원도 양구에는 시사적이거나 사상성이 잠재한 민요가 많이 전한다. 국권 상실 당시 이 고장에 의병활동이 활발해 여러 번 접전이 있었고, 국권 상실 후에는 매동학교(梅東學校)의 항일교육과 양구신사불경사건 등이 있어 은연중에 이 고장 사람들이 이러한 사상에 감화되어 민요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산수나 지명을 배경으로 한 민요로는 “돌산령 명당구비엔 술 한잔 없어도/오가는 길손은 쉬어만 가네/……”의 가사로 되어 있는 「돌산령타령」이 한 편 남아 전할 뿐이다.
양구에는 민속놀이인 줄다리기에 곁들여진 「줄다리기노래」가 있다. 양구읍 상리·하리, 국토정중앙면 송우리·용하리 일대에서는 해마다 줄다리기를 할 때 “이겼네 이겼네 상리가 이겼네/졌네 졌네 용하가 졌네/……”라는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
두타연쪽은 코로나로 인해 출입 금지라 오늘은 도고 터널로 우회해 팔랑리 평화누리길에 접속 한다
초장부터 도로따라 하염없이 가야 한다....
민통선 안 천혜의 자연, 두타연
두타연은 한국전쟁 후 60여 년 동안 인간의 손때를 타지 않은 순수한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이다.
오랜 시간 여행자의 발길을 거부해오다가 평화의 댐이 완공되면서
관광객의 발길이 잦아지자 두타연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고,
지난 2004년 자연생태관광 코스로 개방되었다.
탐방은 두타연을 크게 한 바퀴 도는 코스다. 두타연은 금강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바위 사이를 헤집고
떨어지며 형성된 높이 10m의 폭포와 폭포 아래 너른 소를 일컫는다.
바위 뒤에서 수줍게 낙하하는 폭포도 아름답지만, 수심이 최대 12m나 되는 수정같이 맑은 소에 비친 파란 가을 하늘과 붉은 단풍이 장관을 이룬다. 폭포 주위를 병풍처럼 에워싼 암석도 두타연의 풍치를 더한다.(네이버에서 퍼온글)
**두타연**
강원도 양구군 수입천의 지류인 사태천은 북한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내려 오는 하천이다. 사태천의 유역분지는 한국전쟁 당시의 격전지로 현재도 민간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민간인 통제선 이북에 위치하고 있다. 출입의 제한으로 인하여 이 지역의 자연 환경은 군사적인 이용으로 인한 것 이외의 훼손이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출입의 제한으로 인하여 이 지역의 지형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였다. 사태천은 남북 방향의 임당 단층을 따라 흐르다가 서류하여 두타연에 도달한다. 과거의 사태천은 두타연 부근에서 북쪽 방향으로 곡류하고 있었다. 이 곡류는 침식에 강한 암석 또는 지질 구조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 곡류는 시기를 한정할 수 없는 과거에 절단 되었다. 단축된 하도는 과거 곡류의 공격 사면이었던 곡류경 부분으로 하류 방향으로부터 침식이 강화되면서 곡류의 절단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 곡류의 절단으로 과거의 하식애는 유로의 일부가 되어 폭포가 형성되었으며 곡류경의 일부는 하천에의한 침식을 통하여 마식지형 만들어졌다. 이후 하천의 유로가 안정화 되면서 유수는 좁은 구간에 집중되었으며 하도 인근의 포트홀과 러넬과 같은 지형들은 유기 되면서 하도 구간의 하부에는 대형 포트홀이 만들어 졌다. 이 포트홀들은 폭호로부터 기원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주로 퇴적물의 마식에 의하여 현제의 모습이 만들어 졌다. 현재 두타연의 상부 기반암은 폭 1~10m의 하폭의 변동을 보이는 내부 하도를 형성하면서 개석되고 있다. 폭이 넓은 부분은 상대적으로 침식에 약한 부분에 성장한 포트홀이며 폭이 좁은 부분은 포트홀간의 연결 부분으로 이부분에서 하상의 고도도 된다한다. 따라서 형상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이 내부 하도는 동상 파상 곡벽 내부 하도 중에 하나인 슬롯형 협곡으로 볼 수 있으며 후전이후 60여년동안 미개방으로 있다가 개방후 신분증확인후 출입이 가능하며 현재 코로나로 인해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정보)
소지섭길 출발지점
두타연 출입시간과 양구 특산물인 곰취 판매 선전
양구의 특산물로는 곰취, 무우씨래기, 흰민들레등이 있음
고방산 사거리: 백자모형들이...
백석산 지구 전투 전적비
**백석산지구전투**
국군 제7사단과 제8사단이 1951년 8월부터 2개월간 양구북방 백석산에서 북한군을 격퇴한 전투.그 내용
백석산 전투는 1951년 8월 중순부터 10월 하순까지 중동부 전선의 양구북방 20km 지점에 있는 백석산(1142고지)을 중심으로 한 남북으로 각각 6km 지역에서 국군 제7사단과 제8사단(9월 28일 부대교대)이 공방간 전술적 요충인 백석산을 탈취하기 위해 북괴군 제12사단 및 제32사단을 격퇴한 공격전투이다.
이 작전의 일환으로 국군 제7사단에 최초로 부여된 공격목표는 554고지였다. 이 고지는 피의 능선 좌측방의 중요고지로서, 이를 확보해야만 양구∼문등리를 잇는 29번 도로(현재31번)를 장악할 수 있었다.
국군 제7사단 제8연대는 제1대대와 배속된 전차공격대대로 공격을 개시하여 8월 26일에 이 고지를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국군 제7사단은 지난 8월 16일 이래 보류하고 있던 883고지에 대한 공격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 미 제10군단장은 국군 제5사단에 가칠봉 일대를, 미 제2사단에 단장의 능선을, 그리고 국군 제7사단에 883고지를 각각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9월 16일 제8연대가 743고지를 탈취하고, 다음날에는 사단 좌일선 제5연대가 892고지를 탈취한 데 이어 제3연대는 3일간의 격전 끝에 마침내 목표 883고지를 탈취하였다.
미 제10군단장은 북괴군이 백석산을 확보하고 있는 한 미 제2사단 지역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국군 제7사단으로 하여금 백석산을 동시에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국군 제8사단과의 진지교대를 앞두고 있던 국군 제7사단은 다시 공격준비태세를 갖추어 9월 24일부터 백석산 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또한 좌일선 제8연대는 중간 목표인 894고지를 공격하였으나 북괴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이를 탈취하지는 못하고, 그 좌측 696고지와 무명고지를 탈취하였다.
국군 제7사단은 25∼26일 양일간에 걸쳐 계속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제8연대가 백석산 정상의 2개 봉우리 중 좌측 봉우리를 탈취하였다가 빼앗기고, 27일에 다시 우측 봉우리를 공격하였으나 끝내 목표를 탈취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국군 제7사단은 국군 제8사단에게 백석산 공격임무를 인계(9월 28일 12:00부)하고 미 제10군단의 예비가 되어 캔자스선 남쪽으로 이동했다가, 9월 30일부로 육군본부 직할부대로 전환되었다. 국군 제7사단과 임무 교대한 국군 제8사단은 백석산 공격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국군 제8사단의 주공인 제10연대는 9월 30일 좌우측 능선을 따라 공격을 개시하여 목표의 지근거리까지 진출하였으나 북괴군의 집중 화력으로 저지당하게 되자 더 이상의 진출을 자제하면서 최종적인 돌격준비를 하였다. 10월 1일, 유엔 공군의 근접 항공지원 하에 공격을 재개한 제10연대는 목표정상의 좌측 봉우리를 탈취한 데 이어 우측 봉우리마저 탈취함으로써 백석산을 완전히 확보하였다. 이로써 국군 제8사단은 이날로 제3단계 작전을 모두 끝내고 어은산을 목전에 둔 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차기작전에 대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백석산전투 [白石山戰鬪]
'대한민국의 연예인길1호인 소지섭길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면
▲두타연갤러리 한쪽 벽에는 배우 소지섭의 사진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이젠 누군가와 편하게 걷고 싶습니다. 말수 없는 저 때문에 힘들었던 모든 이들과,
더디지만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마음을 열고 소통하고 싶습니다. 60년 동안 자유를 꿈꾸며
묵묵하게 자신을 지켜왔던 DMZ처럼 저 또한 그 어떤 수식어도 필요치 않은
배우로서의 길을 걸어가려고 합니다." - '소지섭의 길' 중에서
2010년 여름 배우 소지섭이 강원도 양구 일대를 여행하며 사진을 찍고 기록으로 남겼다.
자신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고민,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을 담은 이 여행길에서
그리고 2년 후 강원도 양구군에서는 '소지섭의 길' 책이 배경이 된 곳을 기념해 국내 최초로
연예인의 이름을 딴 '소지섭길'이 조성됐다.
▲소지섭길 1코스의 시작점인 '두타연갤러리'에는 소지섭길을 설명하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비무장지대(DMZ) 구간을 포함하고 있는 '소지섭길'은 천혜의 자연을 간직한 양구의 아름다움과 따뜻함에 반한 소지섭이 이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가장 좋아하는 숫자인 '51'을 총 거리로 확정했다. 소지섭은 "절반을 넘어 하나만큼"이라는 의미를 담아 '51'이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이에 포토에세이집 '소지섭의 길' 촬영지와 자연경관이 뛰어난 6개 코스 51km를 '소지섭길'로 지정해 혼탁한 도심 속
바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잠시나마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두타연갤러리에서는 소지섭의 미공개 사진, 직접 찍은 사진 등을 관람할 수 있다.
51km로 이어지는 소지섭길의 처음은 배우 소지섭의 갤러리로 꾸며진 '두타연 갤러리'에서 시작된다.
두타연 갤러리는 양구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약 16km 떨어져 있다.
차로 이동한다면 20여 분이면 이동할 수 있지만, 버스를 이용하면 45분가량이 소요된다.
▲소지섭의 손을 본떠 만든 손 조각은 관람객들에게 소지섭과 악수 할 수 있는 즐거운 기회를 제공한다.
두타연 갤러리 입구에는 '소지섭길'에 대한 안내판과 소지섭의 실제 손을 조각한 작품이 반겼다.
두타연 갤러리 안에는 소지섭의 미공개 사진, 소지섭이 직접 찍은 사진 등과 같은 다양한 소지섭 관련 작품이 전시됐다.
▲소지섭이 팬미팅에서 입은 의상을 전시하고 있지만, 관람객이 입을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소지섭이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팬 미팅에서 입었던 옷도 전시돼 있었다. 관람객들이 잠시나마 입어볼 수 있게 해준다면 좋은 추억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관리를 담당하는 A 씨는 "'소지섭길'이 처음 착공되고 이곳 두타연 갤러리도 오픈하면서 초기에는 국내 팬뿐 아니라 해외 팬들도 몰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도 줄어들고 있다"며 "특히 봄, 가을에는 볼거리가 있지만, 겨울에는 날씨는 춥고 이곳 개방도 제한적이라 관광객의 수도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A 씨는 이어 "3월부터는 두타연 갤러리를 방문하면 도자기 체험도 할 수 있다. 소지섭길의 초입에서 그의 발자취도 만나고 백자로 유명한 양구의 도자기 체험도 즐기고 일거양득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소개했다.
▲소지섭길 1코스 초입인 두타연 입구. 이곳에서 2.8km를 더 올라가면 출입 등록을 하는 장소가 나타난다.
(두타연 갤러리는 어떤 조건도 없이 방문해 무료로 관람할 수 있었지만, '소지섭길'이 시작되는 두타연 가는 길은 입장료를
내고 서약서를 작성해야 갈 수 있다. 이곳이 DMZ 구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입 신청은 양구군청 경제관광과나 두타연 입구 안내소에서 할 수 있다. 출입 신청서와 서약서를 작성한 후 신분증과 함께
제출하면 위치 추적이 가능한 목걸이를 받아 착용한 후 출입할 수 있다.
다만 하절기(3~10월)는 오후 4시까지, 동절기(11~2월)에는 오후 3시까지 출입 신청이 마감된다. 또한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 추석 오전엔 휴관한다. 입장료는 대인(만 13~64세) 3000원, 소인(만 7~12세) 1500원이다.
소지섭길은 1코스, 2코스, 3-1코스, 3-2코스, 4코스, 5코스 등 6개의 코스로 이뤄져 있다.
구간별 거리도 7~12km로 다양하다. 구간별 볼거리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만큼 미리 구간별 볼거리를 확인하고
방문하는 것이 좋다. 특히 민통선 내 구간은 군부대 작전 및 각종 긴급공사, 폭우, 폭설 등으로
5코스(8km) = 하리교 옆 공터 - 습지산책로 - 습지테크로 - 희망의 다리 - 한반도섬 - 부교 - 용의 머리 -
용머리공원 - 청소년수련관 - 비봉교
(네이버 지식 정보에서 퍼옴)
고방산 사거리백자모형이 있는 로타리
포병부대 정문도 지나고..
고방산 버스 승하차장
도로따라...
09시25분 고방산교(수입천)
**방산의 수입천**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方山面) 송현2리부터 오미리에 걸쳐 흐르는 하천.
북한강의 지류로서, 비무장지대 내 군사분계선 바로 남쪽에 있는 가칠봉(加七峰:1,242m)에서 발원한다. 이후 문등리, 건솔리, 송현리, 장평리, 현리, 금악리, 오미리 등을 우회하며 파로호로 흘러든다. 서천과 함께 북한강으로 합류하는 곳에는 평야가 펼쳐져 농업이 활발하다.
연장 길이가 34.8km에 이를 정도로 넓은 지역에 걸쳐 흐르며, 물의 양도 풍부하여 아무리 가물어도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다. 하천을 따라 갖가지 기암괴석과 함께 꽃나무들이 울창하여 찾는 이가 많다. 특히, 봄에는 철쭉꽃이 아름답고, 여름에는 수심이 낮아 물놀이하기에 좋다.
수입천 물줄기가 곧바로 떨어지는 직연폭포, 파로호와 만나는 파스탕계곡은 경치가 좋다. 오미리 구역에는 희귀어종인 어름치와 쉬리, 그리고 천연기념물황쏘가리가 서식하고 있다. 장평리의 직연폭포 지역은 관광지로 개발중이며, 그 일대는 마을관리휴양지로 지정되어 매년 여름 2개월간 운영된다.
근방에 고대리 지석묘군(강원기념물 제9호) 등 문화재와 양구선사박물관, 제4땅굴, 을지전망대, 천미계곡, 수입천, 소양호, 파로호, 양구팔랑민속관, 양구전쟁기념관 등 연계하여 관광할 만한 명소가 많다.
지게는 비탈길이나 오솔길이 많은 산간에서 화전을 일구어서 그곳에서 수확한 농작물을 운반할 때, 또 연료용 땔감을 운반하거나 퇴비를 마련하여 이동할 때 매우 유용하게 쓰이는 운반 도구이다. 산악에서는 고된 노동의 피로를 잊기 위해, 마을의 울력이나 공동 두레 조직을 중심으로 나무하기, 곡물 운반, 퇴비 마련, 그 밖에 숯을 구워서 내려오던 중에 행하던 다양한 형태의 승부 놀이가 있었다. 넓은 구릉지나 무덤가에서 하던 ‘장치기놀이’ 그리고 지게를 가지고 꾸며서 하던 ‘지게놀이’ 등으로 노동의 벅참과 고통을 극복하였다. 양구 돌산령 지게놀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첫째 마당 1) 양쪽 마을로 나뉘어 놀이마당의 두 방향에서 입장을 하고 농악은 중앙에서 입장한다. 2) 입장하는 동안 농악과 <지게장단소리>, <얼러지타령>이 함께 조화롭게 계속 나온다. 3) 각 방향에서 모인 지게꾼들은 가운데 모여 지게탑을 쌓는다. 4) 지게탑이 쌓아지면 산신에 대한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제례와 <고사소리>를 한다.
2. 둘째 마당 1) <고사소리>가 끝나면서 지게걸음놀이를 할 수 있는 대형으로 만든다. 2) 서로 편을 나눠 지게걸음으로 이동을 하여 상대방을 밀어 떨어뜨린다. 최후까지 남은 쪽이 이긴 것으로 하여 함성을 지르고 지게상여놀이 준비를 한다.
3. 셋째 마당 1) 지정된 장소에 다다르면 빠른 속도로 지게 작대기를 이용하여 지게상여를 꾸민다. 2) 지게상여를 꾸미는 동안 농악과 함께 주위에서 흥겹게 논다. 3) 상여가 다 꾸며진 마을이 지게를 치켜든다. 4) 양쪽 상여가 꾸며지면 <상엿소리>에 맞춰 이동한다. 5) 선소리와 뒷소리를 구성지게 부르고 한쪽 손은 정해진 동작을 취한다. 6) 서로 반대 방향에서 출발한 지게상여는 을자진乙字陣이 다 짜질 때면 중앙에서 만나게 된다. 7) 중앙에서 만나면 지게상여를 내려놓고 횟대를 들고 두 개의 원을 만든다.
4. 넷째 마당 1) <회다지소리>에 맞춰 늦은 소리는 횟대를 들고 선소리와 뒷소리를 맞춰가며 진행한다. 2) <자진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면 횟대를 던지고 서로의 어깨를 걸고 역동적인 동작으로 회를 밟는 동작을 한다.
5. 다섯째 마당 1) <회다지소리>가 끝나면 지게상여가 있는 자리로 가서 지게를 다시 멘다. 2) 정해진 소리에 맞춰 지게싸움 준비를 한다. 3) 지게상여가 서로 맞부딪쳐 서로 밀고 당기고 하여 힘겨루기를 한다. 4) 지게싸움이 끝나면 이긴 마을은 함성으로 환호하고 사람을 실어 놀이마당을 돈다. 5) 진 마을은 지게를 풀어 이긴 쪽의 나뭇단을 함께 지고서 이긴 마을의 뒤를 따르고 농악은 놀이대원을 이끌며 이긴 마을과 진 마을 모두와 흥겹게 춤을 추며 한마당 신명나는 놀이를 펼친다.
특징 및 의의
산이 많고 농로가 없었던 농촌과 산촌에서는 지게가 필수적인 운반 수단이었다. 곡식과 퇴비를 운반하거나 특히 화전火田을 하는 산간 지역의 농사에서는 지게는 절대적인 도구이고, 또 산에서 땔감을 마련하여 운반하는 데도 필수적이다. 지게는 가지가 옆으로 뻗은 자연목 두 개를 위는 좁고 아래는 벌어지게 나란히 세우고, 그 사이에는 지게눈과 밑에 받침대를 세운다. 그리고 위로 걸방을 달아 어깨에 메도록 한 것이다.
양구 돌산령 지게놀이는 이 지게를 이용하여 이루어진 민속놀이이다. 여기에 들어있는 지게놀이에는 지게걸음싸움과 상여놀이가 있다. 지게걸음싸움은 지게의 두 다리 위에 올라가 지게머리를 잡고 걸어가서 상대를 부딪쳐 쓰러뜨리는 놀이이다. 여러 명이 두 편으로 갈라 서로 상대를 쓰러뜨린다. 이때 쓰러진 쪽은 자기 대열에 들어가고, 이긴 쪽은 계속적으로 상대를 쓰러뜨려 나간다. 맨 마지막으로 남는 쪽이 완전히 승리하는 것이다. 상여놀이는 편을 갈라 지게를 묶어서 상여처럼 만들고 그것을 매고 구성진 <상엿소리>를 부르며 어르다가 상대의 상여를 밀어 쓰러뜨린다. 승부가 끝나면 진 팀은 이긴 팀의 지게 짐을 운반한다. 그리고 회다지놀이를 하게 된다. 지게작대기를 횟대 삼아 두드리며 노는 회다지놀이는 장례식 때 관중을 회로 다지는 풍속을 놀이로 만든 것이다. 그때는 <회다지소리>를 부르고 율동에 맞추어 다지는 발동작을 하므로 흥겨운 점이 있다. 이 회다지놀이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곧 마을 사람 중에 마을 일에 협조를 하지 않는 사람, 불효하거나 우애롭지 못한 사람, 인색한 사람 등 마을 사람들이 눈 밖에 난 사람을 회다지의 인물로 호명하면서 한바탕 놀면 본인이 그것을 알고는 개과천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양구 돌산령 지게놀이의 지게놀이는 지게 목발을 장단에 맞추어 두드리거나 화전 민요인 <양구얼러지타령> 등을 부르면서 노는 종합적인 놀이이기에 노동의 힘겨움과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즐거움을 주는 기능까지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전통적인 장례 의례와 지게를 한데 엮어 독특한 산간 민속놀이로 구성한 것이다. 회다지놀이에서 보듯이 사람에게 경계警戒하는 교훈적인 기능도 있다.
1958년 3월 15일 육군 3군단이 세운 기단 1.75m, 비신 2.1m 크기의 전적비이다. '펀치볼'이라 불리는
해안분지(亥安盆地)를 확보하기 위해 1951년 8월 29일부터 10월 30일까지
서화리·가칠봉·피의능선·1211고지·무명고지 일대에서 벌인 전투에서 죽어간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세웠다.
당시 한국군 제3·제5사단, 해병 제1연대와 미군은 인민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펀치볼과 주변 고지를 점령하였다. 당시의 전투로 인한 인명 피해는 인민군 사망자 2,799명·포로 557명,
한국군 및 미군 사망자 428명·부상자 1,062명으로 집계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구 팔랑민속관 입구
12시24분 팔랑보건 진료소
팔라리 마을 회관
팔랑2리 승하차장
12시24분 춘천상회: 양구에서 마을 버스가 여기 가지...
양구 에서 동면 이동 버스
12시26분 계속도로를따라....
도솔지맥이 한눈에...
관광안내 간판이...
대원님들이 돌산령을 향해 ...해안11키로...
12시34분 산양 사향노루 증식복원센터입구
산양증식복원센터
개요
2007년 6월28일 개장한 양구산양증식복원센터는 양구군 동면 팔랑리 일대 17만5237㎡의 자연 암벽지대에 사육장과 그늘막, 치료센터 등을 갖추어 생태계 파괴와 밀렵 등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천연기념물산양 복원기술을 자체 개발하고 산양의 유전자원 보호, 증식기술 확보, 야생동물 생장모델 및 사료개발 등의 추진으로 산양의 개체수를 늘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자연 속에 있는 산양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산양증식복원센터에서는 환경 보호의 중요성과 생태계의 신비에 대해 다시금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물 한 모금을 마시면서도 사람들을 경계하며 야생성을 잃지 않은 그들의 모습에 감탄하며, 아이들에게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철장이 아닌 들에서, 바위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산양을 바라보며 자연으로 돌아가기까지의 과정을 둘러 볼 수 있다. (출처 : 강원도청)[네이버 지식백과]산양증식복원센터
이용안내이용시간: 상시 이용 가능, 쉬는날 :연중무휴
문의및안내 033-480-2665
산중턱에 개발중인것 ... 무었일까????
글로이 펜션
부대 정문도 지나고
13시08분 돌산령 터널 삼거리(돌산령 터널0.3키로, 4.5키로이정목)
13시11분 돌산령 산채골 입구
내 꼬라지도 한번 보고
앞에 청광님이...
13시36분 쉼터(돌산령정상 3.5키로,팔랑리 5.8키로 이정목)
저멀리 도솔지맥의 봉화산이 조망되고...
저앞에 청광님이 혼자서....
13시47분 돌산령정상3.0키로 팔랑리6.7키로 이정목
13시52분 성골지맥에 접속 (도솔산에서 이곳까지와서 다시 성골지맥을 계속 진행할수 없음: 철조망으로 막음)
(민통선내 군 작전지역은 아예 지맥답사를 중단했으면 좋겠다... 산중생각)
이철문을 통과해야 성골지맥으로 가는되... 앞으로는 못가겠다(중단이 답이다)
산림 유전자원보호구역 간판
13시58분 전적비 직전의 쉼터(돌산령정상2.2키로, 팔랑리7.5키로 이정목)
먼저오신분들은 이곳에 물이 있어 몸단장....
조금더 올라가 전적비까지 ....
전적지 입구 표지석
14시22분 전적비 입구... 출입금지란다.. 그래도 잠깐다녀 온다
14시26분 도솔산 지구 전적비.. 전경
도솔산지구 전투사황
도솔산지구 전투위령비
**도솔산지구 전투**
정의
1951년 6·25전쟁 당시 한국해병대 제1연대가 북한 공산군 제5군단 예하의 제12사단 및 제32사단이 점령 중이었던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칠정리의 도솔산(1,148m)을 혈전 끝에 탈환한 전투.
내용
전투기간은 1951년 6월 4일부터 19일까지이다. 이 전투지구는 38선 이북의 강원도 양구와 인제 사이에 있는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악지역이며, 특히 도솔산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높이 1,000m를 오르내리는 높은 봉우리가 연이어 있으며, 기암절벽과 험하고 깊은 골짜기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좌우로 양구와 인제에서 북상하는 도로를 끼고 있으므로 만약 이 지역을 확보하지 못하면 좌우편에서 북상중인 한국군의 전선부대가 한 걸음도 진격하지 못하게 되므로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북한 공산군은 이러한 전술적인 이점과 천연적인 지세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 도솔산지구전투는 처음에 미 해병대 제1사단의 제5연대가 맡았으나 많은 손실만 입고 탈환하지 못하자, 1951년 6월 3일 한국 해병대 제1연대(연대장 대령 김대식)가 공격 임무를 인수하여 6월 4일 첫 공격을 시작하였다.
북한 공산군은 약 4,200명의 병력으로 무수히 많은 지뢰를 매설하고 수류탄과 자동화기를 퍼부으며 완강히 저항했으므로 한국 해병대는 한 걸음도 진격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 해병대는 치열한 육박전과 강력한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24개 고지를 하나하나 점령하면서 전진하였다.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면 적의 공격을 받아 다시 빼앗기고, 또 빼앗는 가운데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던 24개 목표 고지를 6월 19일 완전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에서 2,263명의 북한 공산군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했으며, 개인 및 공용화기 등 198점을 빼앗는 큰 전과를 올린 반면, 아군 또한 7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산악전 사상 유례없는 대공방전으로서 해병대 5대 작전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이 전투로 한국 해병대 제1연대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았다. 그 뒤 해병대에서는 「도솔산의 노래」라는 군가를 제정하여 그날의 용전의 기백을 후배 해병들에게 알리고 있다.
대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하산 후 회차하러 돌아가는데 택시는 수배되지 않고(초창기라 픽업 문제를 간과했던 시기였죠) 뜸하게 온다는 버스를 기다리기에도 막연해 도로를 탔던 적이 몇번 있었는데, 도로를 걷는게 어찌나 힘든 일이었던지 그 이후론 도로만 만나면 회피하게 됩니다. 도로에서 뿜어내는 복사열도 대단했고 내리쬐는 햇빛은 어찌나 매서운지...
내 기억의 그런 도로길을 떠올리니 산중님은 얼마나 고생길이었을까... 제 염려와 달리 즐거운 누리길이셨길!
산중님 오랜만입니다. 이번에는 달인클럽분들과 평화누리길 두타연길과 돌산령길을 지나는군요. 클럽분들의 화기애애한 모습도 반갑습니다. 이 구간 터널도 지나고 도솔산전투비를 만나 예전 지맥시절 생각도 떠올리셨겠군요. 누런 들녁도 보이고 결실의 계절에 기억 남는 여정되시길 바랍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첫댓글 평화누리길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 걸어야할길 잘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달인클럽 고수님들과 잘다녀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대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하산 후 회차하러 돌아가는데 택시는 수배되지 않고(초창기라 픽업 문제를 간과했던 시기였죠)
뜸하게 온다는 버스를 기다리기에도 막연해 도로를 탔던 적이 몇번 있었는데, 도로를 걷는게 어찌나 힘든 일이었던지 그 이후론 도로만 만나면 회피하게 됩니다.
도로에서 뿜어내는 복사열도 대단했고 내리쬐는 햇빛은 어찌나 매서운지...
내 기억의 그런 도로길을 떠올리니 산중님은 얼마나 고생길이었을까...
제 염려와 달리 즐거운 누리길이셨길!
아스팔트길22키로미터 걸었습니다
그래도 가을들녘과 종종 부는 바람이 도와주어 걸을만했습니다.
그러나 돌산령을 오르때는 조금.... ㅎㅎㅎ
감사합니다.
산중님 오랜만입니다.
이번에는 달인클럽분들과 평화누리길 두타연길과 돌산령길을 지나는군요.
클럽분들의 화기애애한 모습도 반갑습니다.
이 구간 터널도 지나고 도솔산전투비를 만나 예전 지맥시절 생각도 떠올리셨겠군요.
누런 들녁도 보이고 결실의 계절에 기억 남는 여정되시길 바랍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달인클럽 선배님들과 첫 답사였습니다
재미있게 답사 잘하고 왔습니다.
곧 추석명절이내요
추석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십시요
산중선배님!
드디어 달인클럽 본진과 합류하셨군요.^^
제가 춘천지맥을 마치고 도솔지맥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1차로 공부를 마친 상태이고요.
그래서 이 포스팅이 눈에 쏙쏙쏙 들어옵니다.^^
양구에서 동면을 지나 돌산령으로 가야 하는 그 길에 성골지맥 터널을 지나고요.
앞으로는 아쉽게도 군부대와 마찰이 잦다는 성골지맥을 제대로 잇기는 어렵게 되었군요.
두타연길, 소지섭길, 돌산령길, 양구10년장생길....
도솔지맥 봉화산, 국토정중앙산을 지나며 맞닥트리게 될 눈에 익숙한 길이네요.
덕분에 배경 지식을 든든히 합니다.^^
팔랑리 유래도 읽어보았습니다.
지게놀이,,, 그리고 갈 수 없는 해안면 을지전망대, 가칠봉전투 지역...
돌산령은 라이더들이 넘어다니는 길이고,
돌산령 정상에 코렁탕이 있다던데 아직 코렁탕이 무언지 정확하게 이해하질 못하고 있네요.
어라연 백석산전투, 그리고 도솔산전투... 치열했던 6.25전적지이구요.
날씨가 스산해져 이곳은 최전방이라 벌써 단풍이 찾아들 것만 같습니다.
달인클럽 어르신들과 함께 평화누리길 17구간 약 22km 수고 많으셨습니다.^^
도솔산내려와 도로에서 성골지맥연결지점인 철문이 있는곳에서 철문 넘어 들어 가면 군에서 고발합니다
작년에 모산악회2명이 넘어들어 갔다가 검찰까지 가서 벌금 많이 물었습니다.
차라리 월운리나, 도고터널에서 시작하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산중생각)
즐거운 추석보내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