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백산의 여름
붉은 소나무의 몸통과 달리 하얀 자작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대조를 이루며 인상적이다. 정선 고한의 ‘싸리재’로 일부에서는 ‘두문봉재’라고도 한다. 왼쪽은 야생화의 보고로 알려진 ‘금대봉’이다. 오른쪽 ‘은대봉’으로 접어들어 함백산으로 간다. 숲속으로 들어서니 밖에서 보기와는 달리 산세가 펑퍼짐한 밭 같으며 평소에는 보기 쉽지 않은 야생화가 산재해 있다. 우거진 갈참나무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어 조명처럼 환하게 비춘다. 고산지대라 공기가 산뜻하며 더위보다는 오히려 선선하여 좋다. 함백산(1573m)은 태백산(1567m)보다 6m나 더 높은데 같은 태백산 줄기로 분류되면서 어찌 보면 큰 틀에서는 태백산의 서자취급을 받아왔지 싶다. 아주 까마득한 시절 같지만 함백산에는 양질의 석탄이 많이 매장되어 있어 60~70년대 연탄시대에는 그 어느 곳보다 유명세가 붙을 만큼 각광을 받았던 곳 중에 하나이다. 석탄 산업이 몰락하다시피 되고 폐광을 하면서 지금은 어디쯤이 탄광이었는지조차 흔적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은대봉(상함백)을 지나고 중함백을 지나는 백두대간이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던 추억이 초롱초롱하다. 백두대간은 중심을 꽉 잡고 이런저런 사사로움에 흔들리지 않는다. 국토의 근간을 이루는 등뼈 역할에 여전히 늠름한 기개를 뽐내고 있다.
여러 그루 주목(朱木)이다. 온난화라는 일기의 급격한 변화 탓인가 가지가 많이 죽어 겉보기에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주목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별 다른 표정이 없다. 천년을 살아가면서 보고도 못 본 척 알고도 모른 척 그냥 표정조차 아끼고 있나 보다. 저 주목은 수백 년은 좋게 살아왔을 텐데, 좀처럼 제 모습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거대하다고 자랑스럽게 내놓지 않는다. 오히려 뭉그러진 작은 키에 몸통마저 파이고 상해 외과수술로 썩은 내장을 긁어내고 인조섬유가 대신한다. 한여름에 땡볕을 받으며 목이 마르거나 한겨울 눈보라가 몰아치는 폭풍에 시달리며 가지가 부러져도 속수무책으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을 것이다. 가슴이 패이고 몸뚱이가 썩어도 마치 수도하는 고승처럼 그날이 그날로 묵묵히 천년을 기다리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다. 고작 한 계절을 전부인 양 살아가는 야생화가 아니고 천년을 산다고 떠벌리며 시건방을 떠는 나무가 아니다. 저만한 배짱과 뚝심의 인내력이 없이 아무나 천년을 하루같이 지키며 귀티가 주르르 흐르도록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늠름한 백두대간에 귀티가 잘잘 흐르는 주목이다. 그야말로 깊은 산속 자연 속에 생생한 현장을 보고 있는 것이다. 천년 주목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이 숨을 들이마시고 있다.
오랜만에 함백산까지 어렵게 왔으니 마음껏 숨을 들이마시고 토해보자. 가슴에 가득 담아보자. 지하에는 검은 진주 질 좋은 석탄이 모습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푸른 하늘 짙푸른 산자락 저 깊은 계곡이며 불쑥불쑥 솟아오른 봉우리 하나하나에 기백이 담겨 함께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삼복더위 중 중복을 넘어 말복으로 가고 있는데 오늘 하루의 더위쯤은 그냥 백두대간 태백산줄기의 함백산자락에서 이열치열로 땀을 흥건하게 흩뿌리면서 새롭거나 잊었던 기억을 찾아 즐거워하고 있다. 아직껏 때가 묻지 않은 순수의 자연 속에서 노닐고 있다. 함백산 정상이다. ‘두문동재’에서부터 난무하던 잠자리가 ‘은대봉’까지 따라왔나 싶더니 끝내 정상에서 축하비행을 하고 있다. 오히려 저희들끼리 흥에 겨워 훨훨 춤을 추고 있다. 고지대다 보니 살랑거리는 바람에도 시원하다 못해 금세 써늘해지는 삼복의 피서지다. 함백산은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 계방산에 이어 여섯 번째로 높은 산으로 웅장하기 그지없다. 사방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산을 거느리고 있다. 중함백 너머로 은대봉과 금대봉이 의좋은 형제 같은 그림이다. 계속해 능선을 타고 백두대간을 굽이굽이 가다 보면 매봉산이다. 풍력발전기가 보이고 고랭지 채소밭이 시퍼렇게 들어온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흰 구름이 떠가고 검은 구름이 떠가고 파란 하늘과 영역다툼을 하면서 햇살이 비집고 나온다. 깊디깊은 산속에 높디높은 산위에 풀꽃 하나라도 그냥 피는 것이 아니다. 작은 체구에 씩씩한 모습이 단순히 누구에게 보여주며 자랑하기 위함이 아님을 안다. 하지만 너의 그런 모습이 그리 곱디고울 수가 없다. 저마다 앙증스럽도록 예쁜 이름을 지니고 있을 텐데 선뜻 다정하게 불러주지 못함이 못내 미안하고 아쉽다. 준비가 소홀한 탓이다. 스치는 바람 한 줌이 누구 한 사람을 위한 부채질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모두가 다함께 시원함을 느끼며 피부로 파고들게 한다. 그러고 보면 꼭 누군가를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보다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기도 하고 피해를 입기도 한다. 평상시의 그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설레도록 마냥 고마우면서 신비롭기만 하다. 어렵사리 올라온 정상이라고 해서 마냥 머물 수는 없어 미련을 내려놓고 하산길 만항재로 간다. 함백산은 야생화축제장이다. 말나리, 동자꽃, 노루오줌, 잔대, 마타리, 쑥부쟁이, 고들빼기, 개미취 등 수많은 여름 꽃들이 주황, 노랑, 보라, 혹은 하얗게 피고 진다. 비록 작은 꽃이라도 그들 나름 어찌 사연이 없으랴만 애환을 승화시켜 저리 고운 꽃빛깔을 빚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