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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빛이 되신 예수
2019. 4. 14. 이현래 목사
거두절미하고 반갑습니다.
말년에 왔다갔다 묘하게 된다. 오늘 박교수님이 영어찬송을 준비해 주셨다. 둘이 연락한 것이 없는데 나도 빛이 되신 예수를 제목으로 했는데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성령이 통하셨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 노래를 준비하셨다.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없다. 빛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있다. 그런데 이 빛은 전등불 같은 빛을 말한 것이 아니고,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그것을 처리하는 빛이다. 빛은 두 종류의 빛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장님이 보는 빛도 있고, 보통 사람이 보는 빛도 있고 다르다. 장님이 뭘 보겠느냐고 하는데, 장님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오늘 대구 교회를 갔더니 사람들이 참 좋다라거나 오늘 대구교회 갔더니 잔치가 풍성하더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봤다는 말이다. 미국 사람들은 ‘이해했다, 알았다.’는 말을 ‘I See’라고 한다. 나는 봤다는 말인데 우리말로는 이상하지만 본다는 것은 인식한다는 뜻이다. 눈은 사실은 유리창에 불과하다. 속에 들어가서 인식을 해야 이것이 뭔지를 알게 된다. 그래서 속에서 보는 것이 다르고, 겉에서 보는 것이 다르다. 그런 차원만이 아니고 인생들이 보는 차원과 하나님이 보는 것이 다르다. 또 이탈한 인간이 보는 것과 이탈하지 않은 인간이 보는 것이 다르다. 이 본다는 말이 아주 의미가 광범위 할 수 있다. 오늘 드리는 말씀은 특수한 빛이다. 요한복음 1장 4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고 말씀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것은 예수를 가리켜 한 말씀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가 우리의 빛이 되는가? 이런 문제이다. 어떻게 예수라는 사람이 우리 인류에게 빛이 되는가? 물론 세상의 개념으로는 놀라운 분들이나 위대한 분들을 보고 세상의 빛을 남긴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 빛과 다른 빛이다. 세상에 빛을 남긴 사람들은 다 어떤 노력의 결과를 말한다.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 남이 못한 일을 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을 했을 때, 이 사람은 빛을 남긴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기독교사에도 빛을 남긴 사람들이라고 하면 아주 놀라운 기독교인들이다. 기도에 놀라운 분, 설교에 놀라운 분, 아니면 품행에 놀라운 분, 다 놀라운 분들이 많다. 그런 분들을 가리켜서 빛을 남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빛인가? 그런 빛이 아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요한복음은 이 빛 가운데 써진 책이고 이 빛을 전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빛이 아니라면 별로 의미가 없는 책이다. 같은 물질이라도 어떤 빛 가운데 보면 보이고, 어떤 빛 가운데 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병원에서 세균 검사를 할 때는 그냥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염색을 해야 한다. 균을 염색해야 비로소 보이게 된다. 보는 것도 여러 가지이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는데, 그 사람이 그 생명이 우리들 안에 빛이라는 것이다. 그냥 들으면 빛을 남긴 사람이라고 들을 수 있는데 그것과는 다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요12:46)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한다. “낮이 열두 시간(열두시)이 아니냐.”(요11:9) 낮에 다니면 넘어지지 않는다. 밤에 다니니까 혼란스럽고 밤에 다니기 때문에 혼돈스러운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할 때, “낮이 열두 시간(열두시)이 아니냐.”는 말을 했는데 열두시는 제일 밝을 때를 말한다. 빛이 밝으면 모든 것이 다 보인다. 그런데 어두우면 보일락말락하기도 하고 긴가민가하기도 한다. 옛날 호롱불 밑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 그것은 전등불이 들어오면 이런 것도 볼 수 있었나 하는 많은 것들이 감춰져 있다. 하물며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이 보는 그 빛과 거기서 이탈해 버린 사람이 보는 빛은 어쩔 수 없이 다를 수밖에 없다. 위치가 이탈되어 버렸으니까 다른데서 보니까 다르게 볼 수밖에 없다. 코끼리를 봐도 너무 크니까 동쪽에서 보는 사람과 서쪽에서 보는 사람이 다 다르다.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진 것과 같다. 앞쪽에서 만진 사람, 뒤쪽 만진 사람. 코를 만진 사람 다 다르게 된다. 예수님이 나는 빛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인간은 흑암 속에 있다, 어둠속에 있다는 뜻이다. 울산에 유명한 사람이 한 사람 있다. 이 사람이 예수를 잘 믿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당신은 어둠이요.’라고 말했다. 그때는 이것이 대단한 일이다. 저쪽 동해안에 울진에서 집회를 할 때, 자기가 무슨 빛을 봤다고 한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은 어둠이요.’라고 했다. 그래서 거기서 양심이 찔려서 온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있다. 나는 그 빛이 뭔지 모르겠다. 나는 한 번도 안 해봐서 잘 모르겠다. 그런데 아마 “어둠이요, 혼돈이요.”했던 것 같다. 이 말씀도 왜 나왔는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이 많다. 혼인집에 가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주었다든가 사람이 거듭나는 이야기를 했다든가 아니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하고 묻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4:21)고 했다.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이산 저산이 아니고, 이렇게 저렇게가 아니고,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신령)과 진리(진정)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요4:23)라고 했다. 이것은 아들 자체가 예배라는 말이다. 사람 자체가 예배가 되지 어떤 방식이 예배가 아니라는 말이다. 종교마다 자기들이 드리는 예배 방식이 있다. 그런 방식이 아니라, 그것이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그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느냐 안 되느냐 이것이 예배의 문제이다. 예배라는 말은 근원이 ‘봉사한다, 섬긴다.’는 말이지만 깊이 새기면 상대방을 기쁘게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사람이 무슨 의식을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천주교 의식을 보면 기뻐하시겠는가? 개신교 의식을 보면 기뻐하시겠는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사람이다. 아무리 좋은 방법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다.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우습게 만들어 버린다. 여러분이 나에게 와서 말짱한 사람을 앉혀놓고 여기서 무슨 의식을 해서 나를 기쁘게 하겠는가? 아니면 여러분의 부모님에게 설날에 가서 무슨 의식을 만들어 가서 의식을 행한다고 부모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자기 마음에 들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아버지 마음에 들어야 기쁘지, 마음에도 들지 않는데 아버지에게 이벤트를 하고 있으면 아버지가 기가 막힐 것이 아니겠는가? 나도 생각해보니까 하나님도 그렇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옛날 옛적부터 했다. 우리 교회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뭔가를 하려고 생각하니 이상한 생각이 든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떻게 예배를 할 수 있겠는가? 사람 앞에도 안 되는데 하나님 앞에 와서 무슨 방법이 옳은 방법이겠는가? 천주교 방식이 옳은가? 개신교 방식이 옳은가? 불교 방식이 옳은가? 어디가 옳은 방법이 있겠는가? 사기꾼이 와서 말하면 다 사기다. 사기 치는 사람은 숨 쉬는 것도 사기라고 한다. 사기를 아주 잘 치는 사람은 말을 잘한다. 말 못하는 사람은 사기를 못 친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사기를 치지 말이 서툰 사람은 사기를 못 친다. 그러므로 그 말에 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도 그 말로 속일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라. 내가 살던 바닷가에 가면 김도 아니고 먹는 것이 아닌 파란 것이 있는데 가파래라고 한다. 먹지 못한다고 ‘가’자가 붙었다. 정월에 가면 바닷가 사람들은 바닷가에 제사지내는 음식을 갖다 놓는다. 짚에 무엇을 싸서 음식을 두는데 거기 꼭 들어가는 것이 가파래이다. 사람이 못 먹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 사람들이 하는 말이 가파래로 귀신 눈 속인다고 한다. 사람도 못 먹는 것을 갖다 놓았다는 말이다. 요즘 생일잔치니 돌잔치 하는데 가니까 과자를 비닐에 싸서 놓았다. 이것은 보기만 하라는 것이다. 먹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의식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아주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유치하기 이를 데가 없는 일이고, 정말 하나님을 웃기는 일이다. 하나님이 정말 바라시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풍성한 제물이 아니라 상한 심령이라고 말한다. 그 상한 심령이 오히려 필요하지 굉장한 것을 갖다 놓고 엄청나게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 있는 빛!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했을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는 이런 말이 성경에 두 번이나 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렇다고 예수님이 하신 행실을 그대로 본받아서 하면 되는가? 그것도 아니다. 예수님이라는 사람 자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뜻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하고 묻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사마리아 여자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4:21)고 했다. 그것은 아들이라야 된다는 말이다. 그 아들이라는 것은 아버지를 쏙 닮은 것이 아들이다. 그래서 아기를 낳고 아무도 안 닮았다고 하면 곤란하다. 아버지를 닮든지 엄마를 닮든지 아니면 할아버지라도 닮아야지 전혀 그 집 식구와 닮지 않았으면 곤란한 일이다. 새끼발가락이라도 닮아야 기분이 좋지 아무것도 안 닮으면 기분이 좋지 않다. 어떤 사람은 엄마만 닮았다고 하면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남자도 있다. 자기 씨가 아닌 것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자기 지은 그대로이다. 그것을 제일 기뻐한다. 그런데 자기가 지은 사람이 없다. 왜? 다 이탈되어 나갔다. 하나님 같이 되려고 이탈되어 나갔다. 오늘도 사랑방에 들어가니까 계속 만나지만 말할 때마다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계속 되풀이 한다고 누가 써 놓았다. 뭐를 되풀이하는가? 그쪽에서는 사람은 하나님하고 같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처럼 말해야한다. 의지하면 안 된다. 연합해서 하나된다는 것이 아니고 홀로 하나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써 놓았다. 그래서 됐다, 됐어. 바로 네 본색이 드러난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본색이 바로 그것이다. 너가 하나님이 됐지 않았느냐? 이것은 분명히 그 뒤에 뭐가 숨어 있는 것이다. 결국은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내가 파이팅이라고 써 놓았다. 그 형제가 이길 것을 나는 확실히 알고 있다. 그 형제가 보았다. 참 사람의 모습을 보았으니까 절대적으로 이긴다. 하나님 같은 말을 계속 하라고 해보라. 절대로 못한다. 결국 자기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만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해보라. 김**장로는 해보길 바란다. 할 말 없으면 하나님 말을 해보라고 하면 결국은 탄로 난다. 원숭이를 사람처럼 훈련시켜 놓으면 사람 비슷한 행동을 한다. 그런데 원숭이에게 계속 하라고 하면 틀려버린다. 미국에 가니 재미있는 것이 있다. 원숭이를 사람처럼 훈련시켜서 두발로 걸어간다. 그리고 사람이 때리면 자기도 때린다. 건드리면 안 된다. 내가 한 대로 원숭이가 따라 한다. 내가 쓰다듬으면 자기도 쓰다듬고, 내가 때리면 자기도 때린다. 훈련을 시키기를 사람이 한 대로 하라고 훈련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처럼 하라고 해도 결국 못한다. 사람은 사람대로 하면 너무 쉽다. 날마다 똑같이 해도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사람 아닌 다른 것을 하려고 하면 어려워진다. 그래서 긴장해야 되고, 훈련해야 되고, 연습해야 되고, 매일 갈고 닦아야 된다. 내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중에서 그래도 자본주의가 더 낫다고 하는 것은 자본주의는 그래도 뭔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것이 있다. 왜냐하면 시장경제 원리이기 때문이다. 생산과 수요가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왔다 갔다 한다. 그런데 공산주의의 통제경제는 그것이 아니다. 위에서 좀 잘난 사람들이 자기들이 계획을 해서 왔다 갔다 한다. 인간을 가지고 경영을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잘 모르고 공산주의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다. 전쟁할 때, 장군들이 군대를 배치할 때 장기판의 장기 배치하듯이 한다. 먼저 죽을 놈, 나중 죽을 놈을 알아서 배치하는 것이다. 필요할 때는 어느 부대를 투입하는데, 그것은 죽을 줄 알고 투입하는 것이다. 인간의 계획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경영한다는 것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공산당 선언 마지막에 보면 폭력의 불가피성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공산주의를 무섭게 생각한다. 경제를 잘 못하거나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결국 나도 그 경영 속에 들어가야 한다. 안 들어갈 수 없다. 부산으로 가라고 하면 부산으로 가야 한다. 서울로 가라고 하면 서울로 가야 한다. 내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없다. 왜냐하면 경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무서운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볼 때 기뻐하는 사람이다. 유대인들이 볼 때는 기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볼 때 기뻐했다. 그래서 잘 나갔는데 잘 나가다가 요한복음 7장에 가면 큰 잔치가 벌어진다. 이스라엘에 절기가 오고 큰 잔치가 벌어진다. 거기서 찬치를 했는데,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8)고 선포했다. 그런데 8장에 가니까 당장에 무엇이 나오는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3~5) 이런 까다로운 질문을 가지고 온 것이다. 예수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서 가지고 왔던 질문이다. 그 좋은 잔치를 하고 나서 이 문제가 8장에 등장한다. 왜 그런가? 인간들이 하는 모든 축제 속에는 이런 것도 들어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혼돈이다.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으니까 하나님이 와서 볼 때는 그것이 창세기 1장 2절인 것이다. 단기 몇 천 년, 서기 몇 천 년이 아니고 창세기 1장 2절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하나님이 앉을 자리가 없다. 축제는 벌어졌는데, 하나님이 있을 자리가 없다. 왜? 혼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땅에 글을 써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자기들이 싹 정리해서 가버렸다. 그 사건 후에 나면서 소경된 사람을 만났다. 그래서 눈을 뜨게 해달라고 호소를 하니까 진흙에 침을 넣어 눈에 발라 주면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다. ‘실로암’이라는 말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요한복음은 상당히 상징성을 가지고 표현하고 있다. 흙으로 침을 이겨서 그것을 눈에 발랐는데, 그것을 연못에 씻고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생겼다는 것이다. 나면서 소경된 사람은 눈이 없는 사람이다. 이럴 때는 축하를 해야 한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나면서 이런 사람이 눈을 떴다고 한다면 축하를 해야 하는데, 이놈을 끌고 다니면서 누가 너를 이렇게 눈을 뜨게 했느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해서 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이냐? 이래서 시끄럽게 되었다. 안 되니까 그 부모까지 찾아와서 이 사람이 진짜로 나면서 소경된 것이 맞느냐고 질문한다. 머리가 혼돈하여 정리가 안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창세 이래로 나면서 소경된 사람을 눈 뜨게 했던 사람은 없는데, 어디서 이 따위 소리를 하고 다니느냐고 한쪽에서는 말하고, 자기들끼리 이렇다하기도 하고 아니다 하기도 하면서 자기들끼리 혼란이 되어서 싸움이 붙었다. 그래서 이 빛이라고 하는 말이 나왔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12:46) “낮이 열두 시간(열두시)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요11:9) 낮에 행하면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왜 저런가? 저것은 다 어두워서 저런 것이다. 깜깜하니까 어두우니까 모르니까 저런 것이다. 6.25때 백마고지 이야기를 들었다. 그 고지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서 몇 번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한다. 한번은 이쪽에서 점령하고, 한번은 저쪽에서 점령하니까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겠는가? 깜깜한 밤에 전쟁을 하면 안 보이니까 아군과 적군이 구별이 안 된다. 그것을 보고 백병전이라고 한다. 총도 소용이 없고 조그마한 칼 밖에 없다. 그것을 가지고 머리를 만져보고 찌른다고 한다. 그쪽 사람들은 빡빡 깎았기 때문에 머리가 없다. 그렇게 전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강원도 저쪽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공짜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무서운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깜깜하니까 부딪히면 그냥 서로 찌르는 것이다.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이 혼돈이다. 지금 세상은 자세히 보면 혼돈이다.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 어떻게 보면 좋은 것이니까 잘하면 될 것 같고, 어떻게 보면 망할 것만 있고 뭘 해도 안 될 것 같고 딱 이런 꼴이다. 세상이 혼돈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재수 없다, 재수 있다는 말이 있다. 혼돈 속에서 어떻게 하다보니까 돈도 벌었다면 재수 좋다가 된다. 그러다 망하면 재수 없게 되었다가 된다. 서로 모르니까 그렇다. 과학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다면 재수 없다는 말이 안 나온다. 이것을 잘못해서 그렇다. 저것을 잘못해서 그렇다고 하지 재수 없다는 말이 왜 나오겠는가? 혼돈스러우니까 재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은 빛으로 아들을 보냈다. 지난번 세월호 참사 때, 수색을 하는데 깜깜한 밤에 수색을 해야 하니까 공중에 조명탄을 쏘아 올려서 그 불이 탈 때까지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예수를 보냈다는 것이다. 지금 낮이 열두시니까 지금 행해라는 그 뜻이다. 내가 지금 있을 동안에 낮이니까 나 있는데서 행해보라는 이런 뜻인데 이것도 상징적인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 모양대로 사람을 지어서 그 사람에게 자기가 창조한 모든 세계를 맡길 때 어떻게 맡기겠는가? 캄캄한 데서 맡기겠는가? 빛이 있어야 맡길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빛을 가져야 될 것이니까 사람에게 그것을 주었다는 말이다. 혼돈스럽지 않은 것을 주었다. 이것이 인격이다. 사람의 격이다. 힘이 코끼리보다 세겠는가? 이빨이 호랑이보다 강하겠는가? 사람이 잘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없는데 뭐가 중요한가? 만유를 통치할 수 있는 이 빛이 있다. 이것을 주었는데 우리가 잃어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 같이 되려고 위치를 이탈하니까 이 빛이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다시 혼돈으로 돌아갔다. 다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여기서 나온 여러 가지 종교가 있다. 종교가 거기서 나왔는데 온전하겠는가? 어두운 데서 만든 물건이 온전하겠는가? **전자에 공장 견학을 가면 반도체회사에 먼지 하나 있으면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거기는 모두 방진복을 입고 있고, 빛도 아주 밝아야 하고, 먼지가 없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인 요건이다. 어둠과 혼돈 속에서 만든 것이 뭐가 온전한 것이 있겠는가? 선진국에서 만든 물건과 후진국에서 만든 물건이 차이가 확 난다. 모양만 봐도 차이가 확 난다. 하물며 밝은데서 만든 것과 어두운데서 만든 것이 같겠는가? 그래서 이 어둠속에서 만들어진 모든 종교는 원천적으로 어두운데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해결이 안 된다. 그 종교를 가지고 해결이 안 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해결이 안 된다. 기독교도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친히 손가락으로 썼다고 한다. 십계명을 쓸 때, 여호와께서 친히 손가락으로 썼다고 한다. 그 말은 그것을 얼마나 강조하기 위해서 그 말을 썼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유대교가 되어서 또 혼돈가운데로 들어갔다. 인류를 또 혼돈 속에 넣어 버렸다. 어떤 종교가 나오면 처음에는 좀 잘하는 것 같다가 나중에 가면 사람들을 몰고 가서 어디로 가버리는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은 데로 가버린다. 답이 없다. 열심히 했는데 답이 없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은 중세 기독교에 그리고 지금까지도 유명한 기독교의 고전이다. 거기서 한 사람의 구도자가 천성문을 향해서 가는 것을 써 놓은 것이다. 험한 굽이굽이를 돌아서 그 난관을 다 헤치고 돌고 돌아서 천성문에 도달한 이야기이다. 왜 그렇게 굽이굽이 돌아서 가야겠는가? 어둡고 혼돈스러우니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 생활하는 것도 제대로 하려고 하면 굉장히 어렵다. 이번에 병원에 갔는데, 마침 수녀님들이 몇 분 오셨다. 세분 오셨는데 나이가 꽤 드신 분들이다. 마침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분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 젊은 여자가 계속 떠든다. 대합실이니까 잠깐 있다가 가는 자리니까 입 좀 다물었으면 좋겠는데 그 여자가 떠드는 바람에 놓쳐버렸다. 집에 와서 생각하니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겠는가?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내가 접근하여 ‘수녀님들 그 어려운 길을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하려고 했다. ‘들으니 굉장히 어렵다는데 어떻게 다 그런 것들을 이기고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 이야기를 하겠는가? ‘여기 쉽고 간단하고 직행하는 길이 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기회를 놓쳤다. 정**형제가 생각났다. 그 형제 부모님들이 천주교 순교자들이다. 뼈대 있는 집안이다. 여러분이 함부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 형제가 천주교 신부 말고 수도사가 되려고 했다. 그때 교회를 좀 오다가 그곳으로 간다고 했다. 마음으로는 안타까웠지만 꼭 가보겠다고 하니까 가라고 했는데, 몇 달 있었는지 몇 년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돌아왔다. 왜 돌아왔느냐고 하니까 쫓겨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감독하는 신부님이 부르더니 너는 도저히 안 되겠으니 나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저 인물이 보통 인물이 아니고 그런 인물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붙어있다. 그 형제가 우리 교회에 있는 것이 기적이다. 나는 아예 자격이 없어서 못 갔다. 수녀를 하려니까 의지가 없고 아예 생각지도 않은 일인데 이 형제가 하겠다고 나섰다. 그래서 두고 봐야지 했는데 역시나였다. 하나님 믿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모르고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해 보면 해볼수록 계속 더 어려워진다. 정말로 잘 믿으려면 더욱더 어렵다. 왜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 놓았는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위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설마 사람을 창조해 놓으시고 그 가시밭길을 돌아서 오라고 했겠는가? 자기가 창조한 모든 세계를 다 지금 위임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맡을 사람에게 그 난관을 만들어 놓고 오라고 했겠는가? 부모들이 돈을 버는 이유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에 너무너무 고생을 했으니까 자식만큼은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고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인간에게 자기 모든 것을 위임하려고 하는데, 그 위임하려는 아들에게 천로역정을 주어서 오라고 하겠는가? 뭔가 잘못된 것이다. 뭐가 잘못되었는가? 인격을 잃었기 때문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에 있다. 왜냐하면 그 인격 안에 하나님께 직통하는 길을 주었는데, 만유를 통치할 수 있는 것을 주었는데, 그것을 버렸으니까 당연하게 천로역정이 되는 것이다. 거기서 종교적인 천재들은 들어갔지만 천재 아닌 사람들은 거기까지 못 들어간다. 문 앞에까지 왔다가 도로 또 나간다. 왜? 문 앞에 왔지만 큰 호랑이 두 마리가 지키고 있다. 그것을 통과해야 되는데, 못 통과하니까 못 간다. 그것을 믿음으로 확 통과해야 되는데,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쉬운 일이 아니다. 쉽게 생각하면 아예 안 믿는 것이 낫다.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을 바다를 건너서 가려고 하면 배가 있어야 한다. 공중으로 가려고 하면 비행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배도 없고 비행기도 없으면 미국을 무슨 수로 가겠는가? 못 간다. 하나님은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을 다 주었다. 우리에게 그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었다. 창조할 때 그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소는 풀을 뜯어먹고 살도록 만들어 놓았다. 풀을 먹고 어떻게 살겠는가? 그런데 소는 풀을 먹고 산다.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니까 그렇게 산다. 소가 무슨 특별한 재주를 배웠는가? 무슨 기술학교가 있는가? 풀을 씹어서 단백질을 만들어 내는 무슨 기계가 있는가? 그런데 그것을 한다. 소는 앉아서 심심하니까 씹고 있다. 소들에게는 그것은 일도 아니다. 취미생활이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어려운가? 만들어 놓지 않은 것을 하기 때문에 어렵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하기 때문에 어렵다. 하라는 것만 하면 쉽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하기 때문에 어렵다. 다른 것이 없다. 어려우면 내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하지 말라는 것만 생각하면 할 일이 또 없다. 왜냐하면 길이 빗나갔으니까 그것을 다 제하고 나면 할 일이 없다. 이것이 답답한 인생이다. 그런데 예수는 왜 오셨는가? 바로 이 인격을 회복시켜 주려고 왔다. 이 인격으로 만유를 다스리라고 준 것인데, 이것을 뺏겼으니까 어떻게 하겠는가? 아주 간단한 무기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 6.25 전쟁이 났을 때, 북한에서는 탱크를 준비해서 왔다. 우리는 탱크가 없었다. 그리고 탱크를 잡는 포가 없었다. 탱크를 잡는 포가 로켓포인데 사람이 들고 다니는 그렇게 어려운 무기가 아니다. 그렇게 비싼 무기도 아닌데, 그 무기가 하나도 없었으니까 탱크를 잡으려니 잡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 탱크를 밀고 오니까 삼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만 것이다. 그 로켓포가 없어서이다. 로켓포는 한 사람이 매고 다니다 쏘면 탱크가 부서지는데 이것이 없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인간이 만유를 통치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인격인데, 그 인격을 버렸으니까 무슨 수로 만유를 통치하겠는가? 반대로 만유의 종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당연히 그 로켓포가 있었으면 북한군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인데 못 물리치니까 서울이 함락되었다 .대구와 부산만 남기고 전 국토가 함락되었다. 내가 사는 동네 전라남도 말단에 있는 섬까지 왔다. 그러면 다 끝난 것이다. 그때 유엔군이 상륙하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은 그때 끝났다. 얼마나 우리는 운이 좋았는지 모른다. 행운인지 모른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도 반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제 새로운 창조가 필요하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헤치고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이 사람이 빗나갔으니까 이제는 새로운 창조가 필요하다. 예수는 누구인가? 이 새 창조의 주로 왔다. 새 창조의 주로 왔다. 당연히 새 창조를 하려면 인격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을 회복해야 새 창조가 되지 이것이 없으면 새 창조가 안 된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1:3) 이것이 또 필요하다. 옛날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시 필요하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인격으로 어둠을 처리하고 질서를 잡으라는 말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굴복하면 내 주변질서가 다 정리가 된다. 이상한 일이다. 내가 그것을 경험을 했다. 내가 뭐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나님이 정말로 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있는지 없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무슨 수로 알겠는가? 내일 일도 모르는 인간이 하나님이 있는가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나는 내일 일도 모르는 존재인데, 내가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 생각이 확 밀려 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 인생의 질서가 잡혔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끝이 났다. 쫙 정리가 되었다. 참 이상한 경험을 했다. 나는 열 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그때까지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닌 셈이다. 그래서 교회를 왜 가는가 하면서 가고, 기도를 왜하는가 하면서 교회당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내가 오랫동안 세례도 받지 않고 미루고 있었다. 겸손한 줄 알지만 겸손한 것이 아니고, 내 속에서 정리가 안 되니까 받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가 정리가 되니까 세례가 뭔지 잘 모르는데 교회에서 하는 것이라면 해야지, 이렇게 뭐가 정리가 되는 것이다. 멍청한 것인지 잘한 것인지 모르지만 뭐가 정리가 되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듯이 많이 있으면 뭐하는가? 하나라도 끼워져야 한다. 새 창조도 마찬가지이다. “빛이 있으라.” 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새 창조가 시작된다. 빛이 있어야 옛것이 정리가 된다. 속아서 만든 것이 없어지게 된다. 허물어질 바벨론을 처리하게 된다. 빛이 있어야 질서를 바로 세울 수가 있다. 어두운 데서는 정리해봐야 헛일이다. 깜깜한데서 정리해봐야 정리가 제대로 되겠는가? 질서를 바로 세우려면 빛이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생명의 질서를 바로 세우려면 반드시 빛이 필요하다. 나는 예수 안에서 이 빛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분 안에 보니까 내가 틀어졌다. 내가 틀어진 것을 몰랐다. 내가 이탈 된지를 몰랐다. 성경에 있어도 내가 그것이 시인이 안 되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보고 있지만 사람이 이탈되었다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 죄를 졌다는데 무슨 죄를 졌는지 모른다. 원죄를 말하지만 원죄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나니까 내가 빗나가 있었구나. 내가 빗나간 사람이라는 그것을 알게 되었다. 빛이 와야 내가 뭐가 있는지를 안다. 빛이 없으면 모른다. 그 자체도 모른다. 칼빈주의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게 될 수 없고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여김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적으로 타락했으니까 그렇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 뭐가 잘 안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요한 웨슬레는 우리가 거듭나면 우리 안에 성령이오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협력해야 한다는 협력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가 점차적으로 성결해져서 성화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 웨슬레와 칼빈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장로교에서는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전부이다. 내가 의로워진 것은 아니니까 다음 대답이 있어야 한다. 또 감리교 요한 웨슬레 쪽에서는 사람이 승화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승화된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그러므로 답이 없는 것이다.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안에가 아니면 답이 없다. 모든 것이 답이 없다. 그런 종교적인 천재들이 아무리 연구를 해서 내놓아도 답이 없다. 사람들이 떡을 먹고 절기를 지키고 얼마나 좋았는가? 그런데 “음행(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3~5) 이 혼란스러운 질문을 가지고 왔다. 나면서 소경된 자를 어떻게 고칠 수가 있는가? 이 답답한 질문을 가지고 왔다. 제자들까지라도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9:2) 이런 답답한 소리를 하게 되었다. 왜? 그때 당시의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것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오늘과 다르지만 그때는 그랬다. 거기에 무슨 대답을 하겠는가? 죽이라고 하겠는가? 살리라고 하겠는가? 죽이라 한다고 하면 저놈 무자비한 놈이라고 하고, 살리라고 하면 율법을 어긴 자라고 할 것이다. 부모의 죄로 장님이 되었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이 있는가? 아무 방법이 없다. 이런 방법이 없는 것을 가지고 계속 떠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재수 없다. 빛이 있어야 죄와 운명을 처리하고,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있게 된다. 인격을 회복하는 것이 왜 필요한가? 인격 회복이 곧 빛의 회복이다. 쉽게 말하면 인격 안에서 볼 수 있는 세계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뛰어내리지 못하는 것은 참 비참한 것 같다. 그런데 거기서 보이는 세계가 있다. 거기서만 보이는 세계가 있다. 그 세계가 회복된 세계이다. 요한1서는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라고 말한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요한1서에서 말하는 빛은 예수이다. 너희가 예수 안에 있으면, 사귐이 있고 교통이 있다. 그 사귐 안에 있으면 모든 죄가 다 사라진다. 그 세계가 회복되게 된다. 모두가 빛이 없어서 생긴 문제이다. 모든 문제는 빛이 없어서 생긴 문제이다. 사람에게는 인격이라는 빛을 주었다. 그런데 그것이 없어지니까 모든 문제가 생긴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 답이 없다. 인간이 제시하는 모든 문제가 답이 없는 것이다. 예수 안에 밖에는 빛이 없기 때문에 “낮이 열두 시간(열두시)이 아니냐.” 지금이 열두시가 아니냐는 것이다. 내가 여기 있지 않느냐? 이 말이다. 지금은 열두시가 아니냐? 그 예수를 찾아가 봤더니, 굉장한 줄 알고 찾아 갔더니, 십자가에 못 달려 있더라는 말이다. 있는 것은 뛰어내리지 못하고 있는 예수밖에 없더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거기서 돌이켜 보니까 그 어둠이 어디로 가버리고 없고 밝히 내 인생길이 새로 보인다. 이것이 새 창조이다. 베드로는 예수와 함께 동거 동락하면서 살았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고 하면서 살았다. 그러다 예수님이 갑자기 죽어버리고 나니까 자기도 끝나 버린 것이다. 모든 인생 문제가 끝나 버리고 말았다. 옥에도 같이 가고 죽는데도 같이 가겠다고 했던 사람이 다 끝나 버렸다. 사도행전의 전반부는 베드로의 사역이고 후반부는 바울의 사역이다. 그런데 전반부에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그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었다. 나 때문에 죽었다.’고 복음을 전했다. 예수의 죽음이 생생하게 자신의 죽음이 되었던 것이다. 체험적으로 생생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방인인 우리에게는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 내가 언제 예수와 함께 죽었는가? 내가 언제 예수와 함께 죽었는가? 나는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어서 애를 먹었다. 내가 언제 예수와 함께 죽었는가? 또 예수님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어서 나를 위해서 죽었는가?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어서 나를 위해 죽어주었는가?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어서 애를 먹었다. 바울은 그 벽을 넘게 해주었다. 바울은 예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디서 무엇을 봤는지, 베드로에게서 무엇을 봤는지, 스데반에게서 무엇을 봤는지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을 때 우리도 죽었다고 한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그 안에서 우리 모든 인류가 죽었다고 한다. 예수가 죽을 때 모든 인간이 다 죽었다고 한다. 이것을 아라비아에 3년 있을 때 깨달은 것인지, 아니면 스데반이 죽을 때 보고 알았는지, 바울은 거기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말하기 어렵지만 베드로의 사역으로 감동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준 것이다. 나 같은 사람도 베드로가 아무리 외쳐보았자 그것은 당신 생각이고 당신 입장이지 나와 무슨 상관인가? 이렇게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바울이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6:4)라는 말을 해놓았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전혀 모르는 말을 해놓았다. 이렇게 한 것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는 것이다. 로마서 6장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재창조이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새 생명이라고 하면 어려우니까 새 생활이라고 읽어 보라. ‘새로운 생활 가운데 살게 하려는 것’이다. 왜 새로운 생활인가? 옛날에는 내가 모노(mono, 혼자)였다. 싱글이고 모노였다. 혼자였다. 연합이 없는 나 혼자였다. 그런데 이제는 결혼을 했다. 둘이 연합을 했다. 누구와 연합을 했는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분과 연합을 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혼자가 아닌 것은 결혼생활이다. 결혼 생활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둘이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혼을 하면 완전히 개념을 바꿔야 한다. 그런데 결혼을 해서 왜 문제가 생기는가? 옛날 모노로 있을 그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서로 안 맞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맞는데 너는 왜 저것이 맞다고 하느냐? 그때는 그것이 맞았다. 옛날에는 그것이 맞았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가 아니지 않은가? 둘이라는 말이다. 둘이 가니까 이제는 안 맞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혼하면 그날은 죽는 날이다. 죽고 다시 나야 되는 날이 그날이다. 죽고 다시 난 사람들이 결혼하면 되는데 어디 그렇게 되겠는가? 그러니까 문제가 생긴 것이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은 것은 그분의 운명과 내 운명이 일치하는 자리가 있다. 우리도 떡을 먹고 좋아하던 사람이다. 베스다 광야에서 떡을 먹고 좋아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운명적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니까 문제가 생기면 혼란에 빠져 버린다. 그런데 이제는 운명적으로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된다. 다른 것은 다 제쳐 놓고 딱 한 자리에서 보면 만나게 된다. 그 자리가 싫든지 좋든지 상관이 없다. 싫어도 할 수 없고, 좋아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자리밖에 남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도 그 자리밖에는 남지 않았고, 우리에게도 그 앞에 가면 그것 밖에 없다. 내가 ‘이것입니다. 저것입니다.’ 할 수가 없다. 없는 것을 보고 있다고 하겠는가? 전부가 다 사람이 만든 것이다. 만든 것들은 다 사라질 것이 아닌가? 그것들이 다 사라지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만 남아 있게 된다. 그것 밖에 없다. 예수는 참 진실하구나. 저분이 참 사람이구나. 참 사람은 저 사람 밖에 없구나. 그래서 내가 사람답게 되려면 그 사람 안에 있어야 된다. 이제야 내가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항상 자신감이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내 안에서 예수를 찾으니까 항상 자신감이 없었다. 어느 날은 있는 것 같은데 어느 날은 없다. 자신감이 없다. 그런데 예수 안에 내가 있는 것을 보니까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그 안에 내가 있구나. 그 안에 내가 있는 줄 모르고, 예수를 내 안에 모시려고만 생각했다. 그것은 해 보니까 안 되었다. 해 본 사람이 더러 있는지 모르겠는데 안 되고 안 되었다. 더군다나 나는 생각을 한쪽으로 집중하는 성격이 못 된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한쪽으로 집중해서 하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괴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보인다. 나는 그렇게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결심을 해도 그게 안 된다. 동성로를 가다보면 간판이 보이니까 안 된다. 어느 날 아침에 ‘하나님, 단 오늘 하루만이라도 오직 주님만을 생각하는 하루가 되기를, 이틀도 아니고 하루만,’ 그렇게 기도했다. 그런데 안 되었다.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저녁이 되니까 ‘아차, 내가 아침에 기도했는데...’ 이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다. 도저히 안 되었다. 예수를 내 안에 모시려고 하니까 되겠는가? 안 된다. 그런데 안심이 된 것은 내가 그 안에 있구나. 그 안에 내가 있다. 그 안에 있으니까 내가 시장 통에 가서 다른 생각을 하고 와도 역시 나는 그 자리에 있다. 거리에 돌아다니다 와도 역시 나는 그 자리에 있다. 이것이 요동치 못할 나라이고, 진동치 못할 나라이다. 이것은 바꿀 수가 없다. 내 마음대로 그만 두자고 할 수가 없다. 이번에 병실에 있으면서 죽을 수도 있으니까 이놈이 나를 괴롭게 하다가 나에게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 내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번뜻 생각난 것이 그래도 너는 소용이 없다. 이제는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저분 안에 있기 때문에 네가 아무리 나를 괴롭혀도 할 수가 없다. 내가 설사 너를 따라 가겠다고 해도 안 된다. 내 주소지가 정해져 버렸기 때문에, 딱 못이 박혀 버렸기 때문에, 내가 내 마음대로 이동할 수가 없다. 움직일 수가 없다. 내 운명을 어떻게 움직이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평안이 되는지 모르겠다. ‘아! 나는 예수 안에 있구나!’ 은행에 돈을 맡겨놓은 것보다 훨씬 안전하다. 기억하시겠는가? 여러분은 절대로 여러분 속에서 예수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말라. 내가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그 안에 있구나. 내가 그 안에 있구나. 저 속에 있구나. 내가 버린 저 속에 있구나. 내가 무시한 저 속에 있구나. 저게 무슨 인생이야 했던 그 자리에 내가 있구나. 이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흙이 다시 조명이 되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이것이 옛날에는 저주로 들렸다. 그런데 그렇구나 하고 생각해 보니까 흙이라야 되는구나.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니까 또 살 수가 있다. 흙으로 다시 돌아가면 다시 귤 밭이 될 수가 있다. 다시 흙이 되니까 갈아엎으면 된다. 주인만 만나면 된다. 흙은 주인만 새로워지면 된다. 새로운 씨만 뿌리면 된다. 그러니 얼마나 안전한가! 흙으로 지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흙으로 지었다는 것은 내 인생이 예수님과 함께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이보다 안전한 곳이 어디에 있는가? 이보다 안전한 데가 있는가? ‘만세반석 열리니’ 라는 노래가 있다. 만세반석이 이보다 더 하겠는가? 광풍이 휘몰아칠 때, 아까 그 노래에 있었다. 자기 가족이 다 유람선에서 죽고 혼자만 살았다. 무슨 일이 있어서 그 배를 못 탔다. 그런데 딸 둘인지 셋과 부인이 그 배에서 죽었다. 자기가 그 자리에 가보면서 지은 노래라고 한다. ‘주여 광풍이 일어나서 그럴지라도 나는 평안합니다.’라는 이 노래를 불렀다. 아까 영어 합창단에서 불러 주었다. ‘바람이 불지라도 광풍이 올지라도 내 인생에 이러한 어려움이 올지라도 나는 주 안에서 평안합니다.’ 이런 노래이다. 이것이 진실로 그 노래가 아니겠는가? 예수 안에 있는 것! 예수 안에 있는 나! 나는 없고 예수만 있는 것! 이것이 만세반석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참 평안이 아니겠는가? 땅에 글을 써서 살렸다. 진흙을 이개서 눈에 발라서 눈을 밝게 하였다. 요한이 어떻게 이런 표현을 써놓았는지 모르겠다. 아이러니 하게도 괴상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다. 이런 상징을 가져다 써놓았단 말이다. 실제로 했는지 안했는지 모르겠지만 했더라도 관심을 안 가진 사람은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에 관심을 가졌는지 땅에 글씨를 썼다는데, 무슨 글씨를 썼는지는 말이 없다. 단지 글을 썼는데 한 마디 말한 것 밖에는 없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이 한 마디 밖에는 없다. 땅바닥에 그것을 썼을 것이다.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시오. 이것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질서가 쫙 잡힌다. 각기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다 떠나가더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보다 더 심하게 진흙을 이개서 눈에 발라주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 했다. 보냄을 받았다는 연못에 가서 씻으라 했다. 씻었더니 밝아졌다는 것이다. 꾸며도 이렇게 꾸밀 수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꾸미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것이 뭔가 봐서 그렇지 무엇을 못 보고는 이런 소리를 할 수가 없다. 정말 빛 가운데 있으면 사귐이 있고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거나 한다는 말이 이런 말이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쓰면서 그랬지만 요한복음, 요한1,2,3서를 쓸 때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사람이었다. 빛은 인격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빛은 인격이다. 이 인격이 제자리에 오면 모든 것이 다 보인다. 사람이 다 제대로 보인다. 꾸민 것은 그냥 보인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은 다 보인다. 그냥 보인다. 사람이 만든 것은 사람이 모르겠는가? 다 보면 알게 된다. 인격의 빛! 빛이 되신 예수는 우리에게 참 인격이 되셔서 우리에게 빛이 되셨다.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참 이상하다. 죽은 자 가운데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안다고 생각했을 때는 아무 것도 몰랐는데, 이제는 죽은 자 가운데 있는데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모른다고 하면 죄가 없을 텐데 안다고 하니까 죄가 그냥 있다고 말하였다. 그 말도 여기다 써 놓았다. 한 말도 안 빼놓고 써 놓았다. 너무 신기하다. 하나님이 하신 일도 신기하지만 요한이 인정한 말도 너무너무 신기하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낮이 곧 열두시가 아니냐. 낮에 행하면 넘어지지 않는다. 빛 가운데서 행하면 사귐이 있다. 어떻게 빛이 없는데 살아나겠는가? 빛이 있어야 살아난다. 빛 가운데서 행하면 어둠이 없고 빛 가운데서 행하면 사귐이 있다. 빛 가운데서 행하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모든 죄가 다 씻어져 버린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둠 가운데서 빗나간 짓을 했지 밝은 낮에 하겠는가? 도둑질도 좀 어수룩한 곳에 가서 하지 빤히 보고 있는 데서 도둑질을 하겠는가? 아무도 안 한다. 사람은 다 영리하다. 빛만 있으면 아무 것도 안 한다. 빛만 있으면 잘못을 하지 않는다. 어두우니까 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언제나 똑 같이 대하신다. 창세 때 흙으로 지었으면 영원히 흙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는 감사하다. 우리가 변질이 되었으면 벽돌로 찍어 버리고 해버리면 되는데 그것이 아니다. 어찌 되었든지 간에 자기가 만든 것 밖에 모르시는 분이시다. 엄마들이 자기가 낳은 새끼들밖에 모른다. 그것이 엄마이다. 짐승도 그렇다. 자기가 낳은 새끼밖에 모른다. 천리라는 것은 정해져 있다. 하늘의 이치라는 것은 정해져 있다. 인격을 주었다. 우리에게는 인격을 주었다. 이처럼 소중한 것이 없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로켓포 하나가 없으니까 탱크가 밀고 들어온 것처럼 우리가 인격이라는 이 빛이 없으면 우리는 만유에게 종노릇 하는 것이다. 참 자유자가 되고 싶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격을 가져야 한다. 그 인격을 찾아야 한다. 그것을 예수께서 찾아 주신 것이 아닌가? 목숨을 버려서 찾아주신 것이다. 이것을 얻는 자는 구속을 받은 자이고, 구원을 얻는 사람이고, 평화를 얻는 사람이다. 이것이 참된 평화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우리의 축복을 더해 주시기 원한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이 원천적인 자리로 인도하셔서 주님 당신이 예비하신 모든 것을 주기 위해서 뛰어 내리지 못한 자리까지 가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해서 아무런 방법으로도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이 우리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만천하에 전하기 원하고 모든 사람과 공유하기 원합니다. 당신이 못 박히신 것을 만천하에 공포하기 원하고 우리가 그 안에 있는 축복을 모두가 공유하기 원합니다. 여기 있는 우리 형제들 중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기 원하고 이것이 모체가 되어서 많은 사람에게 은혜와 축복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