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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10월 20일 월요일
[(녹)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믿는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인정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시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을 믿는 우리도 의롭다고 인정받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4,20-25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은
20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23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다는 기록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24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을 믿는 우리도
그렇게 인정받을 것입니다.
25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3-21
그때에 13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식사 초대를 받아서 가끔 밖에서 밥을 먹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늘 먼저 물어 오시는 것이 있습니다. “신부님! 무슨 음식을 가장 좋아하세요?” 그런데 솔직히 대답하기 난감합니다. 아는 신부님이 신자분들에게 ‘수제비’를 좋아한다고 말하였더니 떠날 때까지 매번 수제비를 준비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인 ‘된장찌개’라고 대답합니다. 그럼에도 신자분들은 때때로 “신부님, 된장찌개 말고 다른 거요.”라고 하십니다. 아마도 너무 평범해서 누군가에게 대접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라고 생각해서겠지요.
우리는 때때로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옷을 입으며 어떤 집에서 사는지가 그 사람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나 입고 있는 옷이 그 사람의 인품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얼마나 큰 집에서 사는지가 마음의 크기를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보여 주는 것은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들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들, 다른 사람에 대한 마음 씀씀이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처럼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죽고 나면 사라질 세상의 재화를 모으기보다는 하느님 앞에서 재화를 쌓아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재화를 쌓는다는 것은 좋은 말을 하고, 자신의 인격을 닦으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하느님 앞에서 재화를 쌓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이찬우 다두 신부)
주님 만날 준비는 얼마나 하고 있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주 외진 곳이지만 피정객들께서 많이들 찾아주셔서 참으로 감사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상 거저 되는 일 하나도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합니다.
단체로 피정을 오시면 준비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식사, 강의, 청소, 침구 세팅, 냉난방 점검...그리고 최종적으로 내가 만일 손님 입장이라면...하는 마음으로 최종적인 점검을 합니다.
외부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초도 해야 하고, 훼손된 산책로도 복구해야 하고, 낙엽도 쓸어야 하고...오후에는 가뜩이나 일손도 부족한데, 엄청난 양의 잎을 떨구어, 배수로를 막는 주범인 활엽수 두 그루를 베어냈습니다. 한 그루를 잘랐는데 트럭 두 대 분량입니다.
이런 저런 손님 맞이 준비를 하면서 문득 든 생각입니다. 잘 준비한다는 것은 환대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로구나. 이렇게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더없이 철저하면서, 과연 주님 만날 준비는 얼마나 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35-36)
‘허리에 띠를 매고’라는 표현을 묵상해봅니다. 오늘도 저희 사제들은 미사를 집전하기 전에 허리에 띠를 맵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봉사할 준비가 잘 갖춰졌다는 말입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오시는 분을 향해 사랑을 실천할 만반의 자세가 갖춰졌다는 말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식들은 부모를 위해, 우리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잘 준비한다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며 복음적인 일인지 모릅니다.
큰 준비보다는 작지만 정성이 담긴 준비, 사랑과 마음이 담긴 준비에 전념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준비 중의 준비, 하느님 맞을 준비에 가장 우선권을 두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잘 준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봤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 사이에 기꺼이 서 있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보다 밝은 미래로 인도하기 위해 늘 연구하고 노력하는 일이야말로 제대로 된 준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고통 중에 있는 아이들을 찾아 나서는 일이야말로 제대로 된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변화되지 않는 그 누군가를 바라보며 한숨 쉬는 분들 많이 계시겠지요. 그러나 결코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 어디로부터 다가올지 모릅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끝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순식간에 다가온 절절한 하느님 체험은 한 사람을 완전히 뒤바꿔놓습니다. 그 기쁨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살아있는 한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노력이 하느님 체험입니다. 보다 깊은 하느님 현존 체험이야말로 우리가 지속적으로 깨어있을 수 있는 배경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전우용 교수님의 ‘잡동산이(雜同散異)’를 읽고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백과사전이고, 재미있게 말하면 만물상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교수님은 근대와 현대에 걸쳐 들어온 문물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사용하는 것들이 100년 전에는 생소한 물건들이었습니다. 그중에 ‘안경’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장애인을 부를 때 ‘절름발이, 앉은뱅이, 귀머거리’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이’는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장애인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장님, 봉사, 소경’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장님은 지팡이를 든 어른을 뜻하고, 봉사는 고려시대의 벼슬 이름이라고 합니다. 소경은 조선시대의 벼슬 이름이라고 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더 존중하는 의미로 불렀다고 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안경은 현대인에게는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강한 햇빛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선글라스도 있고, 근시와 난시로 인해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다초점 렌즈’로 만든 안경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저도 2005년부터 안경을 썼으니 20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감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욕망과 이기심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없습니다. 이웃의 아픔과 고독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헐벗은 이웃의 아픔을 모릅니다. 굶주린 이웃의 배고픔도 모릅니다. 믿음의 눈이 있는 사람은 풀잎에서도,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작은 벌레에게서도 하느님의 창조를 볼 수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의 귀로 들으면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공감하는 마음이 있으면 시냇물이 흘러가는 소리에도, 바람 소리에도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고통 중에 도움을 청하는 이웃의 외침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식당 탁자 위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을 하면서 마치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산다.’ 분명 우리는 우리에게 정해진 시간과 삶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끝이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무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착실하게 다가올 죽음을 준비합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과 연결되지 않는 신앙은 힘이 없고, 생기가 없으며, 위기와 고통의 순간이 찾아오면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연결된 신앙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신앙은 늘 기쁨이 충만하고, 즐거우며, 고난과 아픔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게 해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이야기하면서 믿음만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썩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곳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것들은 사라지고, 좀이 생기고, 남이 와서 빼앗아 가기도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 사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곳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길이와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갈 곳을 모르는 우리에게,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가장 믿을 만한 분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 이후에도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세상의 곳간에 쌓아 놓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믿고,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곳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루카 12,17)
너는
나의
곳간이라
나는
너를
채우니
너는
나로
가득하고
나는
너의
곳간이라
너는
나를
채우니
나는
너로
가득하고
모두
서로
곳간이라
모두
서로
채우니
모두
서로
가득하네
오늘의 성인
성녀 이레네 (Irene)
활동년도 : +653년경
신분 : 동정 순교자
지역 : 포르투갈(Portugal)
같은 이름 : 이레나, 이레네아
성녀 이레네는 포르투갈 에스트레마두라(Estremadura) 지방의 토마르(Tomar)에서 유력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아름다운 딸을 보호하기 위해 수도원 학교에 보내고 개인교사를 두어 가르쳤다. 그녀가 집밖에 나가는 일은 미사에 참례할 때뿐이었다. 우연히 성당에 가던 성녀 이레네를 본 한 젊은 귀족이 그녀에게 반해 청혼했으나, 성녀 이레네는 단호히 수녀로 살기 위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했다며 거절하였다.
그러던 중 그녀가 임신했다는 거짓 소문이 동네에 퍼졌고, 이를 들은 그 귀족 청년은 사람을 사서 산타렘(Santarem)에서 그녀를 살해하였다. 자객은 나이든 병자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성녀에게 접근해 한 칼로 그녀를 살해하였다. 성녀 이레네에 관해서는 사실이 아닌 신심적인 이야기라는 주장도 있으나 653년경에 사망한 베네딕토 수녀회의 포르투갈 출신 수녀가 있고, 실제로 그녀는 토마르와 산타렘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아르테미오(Artemius)
활동년도 : +363년
신분 : 사령관,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아르떼미오, 아르떼미우스, 아르테미우스
성 아르테미우스(또는 아르테미오)는 아리우스파(Arianism)의 거두임에도 불구하고 성인으로 공경을 받는 보기 드문 경우이다. 한때 그는 콘스탄틴 대제군의 사령관이었다. 그 당시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에 아리우스파인 게오르기우스 카파도치아가 부임했다. 성 아르테미우스는 아타나시우스를 찾으라는 명을 받고 이집트 사막에 산재해 있는 여러 수도원과 은둔소를 헤매었다. 그 역시 정통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지만 성 아르테미우스는 이교도의 신전과 신상을 파괴하는 등 열렬한 신앙인이었다.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그는 박해를 받게 되었다. 즉 그는 신상파괴죄로 참수형을 받았다
성녀 베르틸라 보스카르딘 (Bertilla Boscardin)
활동년도 : 1888-1922년
신분 : 수녀
지역 :
같은 이 름: 베르띨라, 보스까르딘
안나 프란체스까 보스까르딘은 비첸짜 근교에서 농부 딸로 태어났고, 1904년에 고향의 산따 도로테아회에 입회하여, 3년 동안 주방 일을 한 후, 트레비소의 어린이 병동에서 일하였다.
1917년의 대공습 때 베르띨라 수녀는 자신의 환자들을 아주 태연한 자세로 돌보게 되므로써 꼬모 근교의 야전 병원 당국으로부터 놀라운 찬사와 더불어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원장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세탁 일을 하도록 명하자, 고위 장상에게 하소하여 어린 환자들을 위하여 일하도록 간청하였다.
마침내 1919년에 그녀는 트레비소의 어린이 격리 병동의 소임을 맡았으나,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서 모든 활동을 포기해야 하였다.
큰 수술이 필요하여 실시했지만 생명을 건질 수 없었다.
성녀 베르띨라의 생애는 힘든 일로 점철된 극히 단순하지만, 그녀는 어린 환자들에게 위대한 사랑을 베풀어 깊은 인상을 심었고, 그녀의 중재로 수많은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
1961년의 시성식장에는 그녀의 간호를 받았던 당사자와 그 부모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