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중건 때 매안(埋安) 하였으나, 1998년 문화재 지정을 앞두고 고증을 위해 다시 발굴하여 세웠다.
※배향인물(配享人物)을 살펴본다.
□ 主壁 백 장(白 莊 1342~1418)
수원人으로 자는 명윤(明允), 호는 정신재(靜愼齋)이다. 포은 정몽주 문하에서 수학하여 16세 때 진사시에 입격하고 25세 때 원나라 제술과(製述科)에 장원으로 등제하여 한림원시독사(翰林院侍讀士)가 되었다. 고려 공민왕 때 광정대부 조전서 보문각 대제학 태자소보(匡靖大夫吏曹典書 寶文閣 大提學 太子少保))에 이르렀다. 원주 치악산에 은거 중, 이성계가 등극하여 公을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자 충청도 해미(海美)에 유배당하였다. 태종이 다시 불렀으나 불응하여 장수(長水)로 적거(謫居 재유배)를 옮겨 청심정(淸心亭)을 세우고 유배당한 황희(黃喜)와 어울려 시를 지으며 유배생활을 하였다. 유배지에서 졸하니 태종이 동방의 백이(伯夷)라며 의정부 영의정 겸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등을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원주시 죽림서원에 배향되고 상덕사(尙德詞)라 사액하였으며, 장수군 월강사, 장흥군 기양사에서 제향을 모시고 있다. 公의 시향일은 매년 4월 첫째 주 일요일이며 전북 장수군 장계면 황곡리에 위치한 묘(墓)와 숭의재(崇義齋) 재실에서 시향을 모신다.
□ 백수장(白壽長 1469~1543)
수원人으로 자는 팽조(彭祖)이다. 1498년(연산군 4년) 무과 중시에 장원급제, 군수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훈련원 도정(都正)에 이르렀다. 연산군의 실정에 반기를 들어 중종(中宗)을 옹립하니 반정공신으로 3등훈에 책록되고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의 칭호와 정해군(貞海君)으로 봉하였다. 이후 공조판서를 지내고 귀향하여 장재도에 백사정을 짓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안양면 수양리에 신도비가 있다.
□ 백문린(白文麟 1482~1544)
수원人으로 자는 자정(子禎), 호는 사주당(思周堂)이다. 학포 양팽손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정암 조광조와 도의교를 맺고 修己治心 理學究明에 힘써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힘썼다. 중종이 침랑(寢郞)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경전에만 전념하였다. 다시 봉자전참봉(奉慈殿參奉)에 제수되었다가 명종 원년에 졸하였다.
□ 김 윤(金 胤 1506~1571)
광산人으로 자는 찬중(纘中), 호는 남계(南溪)이다. 영천 신잠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570년(선조 3) 사마시에 입격하고 효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 임 분(林 蕡 1501~1556)
부안人으로 자는 성보(成甫), 호는 서곡(書谷)이다. 영천 신잠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540년(중종 35) 사마시에 입격하고 1540년 교수가 되었다. 평생을 경전(經傳)과 역전(易傳)을 강구하고 현량지사와 교분을 나누었다.
□ 임 회(林 薈 1508~1556)
부안人으로 자는 헌가(獻可), 호는 죽곡(竹谷)이며 초휘는 誨(회)다. 오봉 이호민 문하에서 수학하여 1534년(중종 29) 사마시에 입격하고 1540년에 문과에 등재하여 호당(湖當)에 뽑히고 공조정랑(工曹正郞)을 거쳐 남원, 상주,순창, 나주,광주,능주 등 8주 목사를 지내고 검상(檢祥)에 올랐다. 부경(赴京)사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천거되어 명나라에 들어가 그 곳 이름 있는 여러 학사들과 교유한 바가 있다.
□ 백광홍(白光弘 1522~1556)
수원人으로 자는 대유(大裕), 호는 기봉(岐峯)이다. 일재 이항 문하에서 수학하여 1549년(명종 4년)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1552년 문과에 등제하여 홍문관 정자(正字)에 임용되고 시부회(時賦會)에서 장원하여 선시십권(選詩十卷)을 특사 받고 호당(湖堂)에 뽑혔다. 1555년(명종 10)에 평안도 평사가 되어 재임하던 중 관서지방의 절경을 가사로 나타낸 관서별곡(關西別曲)은 우리나라 기행가사의 효시가 되고 있다. 35세로 졸하니 公의 시문(詩文)이 뻗지 못함을 아쉬워하면서 1987년 11월 전국 가비동호인회에서 묘가 있는 부산면 호계리 운치에 가비(歌碑)를 세웠다. 2008년 기산마을에서 마을가꾸기 사업으로 촌전에 관서별곡, 동지부등 시가비를 세웠으며 팔문장의 대표시비도 세워서 전국 대상을 받았다.
□ 백광성(白光城 1527~1567)
수원人으로 자는 대한(大捍), 호는 동계(東溪)이다. 기봉 백광홍의 종제로 1561년(명종 16)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나 과업(科業)을 버리고 은거하면서 오로지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
□ 백광안(白光顔 1527~1567)
수원人으로 자는 이수(而粹), 호는 풍잠(風岑)이다. 기봉 백광홍의 제로 과업(科業)에 나아가지 않고 재가하여 학문에 전념하여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 백광훈(白光勳 1537~1582)
수원人으로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峯)이다. 기봉 백광홍의 제로 청연 이후백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3세에 상경하여 양응남, 노수신 등에게 사사(師事하였다. 1564년(명종 19)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시서(詩書)에 열중하였다. 1572년(선조 5년) 명나라 사신이 오매 노수신을 따라 백의제술관(白衣製述官)이 되니 명나라 사신이 감탄하여 백선생이라 했다. 1577년(선조 10) 선능참봉(宣陵參奉을 시작으로 정릉(靖陵), 예빈사(禮賓寺), 소격서(昭格署)의 참봉을 지냈으나 벼슬보다는 시(詩)로 이름을 날려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하였다. 公의 유묵(遺墨)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1981년 해남군 옥천면 송산리에 옥봉유물관이 세워졌다.
□ 김공희(金公喜 1540~1604)
광산人으로 자는 지명(之鳴), 호는 지천(芷川)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입격하고 1580년(선조 13) 문과에 등제하였다. 임진왜란에 왜적과 싸워 전공을 세우고 군수(郡守)를 제수 받아 6군을 돌며 선정을 베풀었다.
□ 백한남(白翰南 1567~1639)
수원人으로 자는 자우(子羽), 호는 석담(石潭)이다. 현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에서 태어나 백사 이항복 문하에서 수학하고 1589년(선조 22) 무과에 장원급제 하여 벼슬이 府使(부사)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에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원종공신에 훈록되었다. 1598년 정절사(正節使) 이항복을 수행하여 명나라에 갔었다. 용모가 수려하여 중국인들이 公의 화상을 그려 팔 정도였다 한다.
□ 백민수(白民秀 1577~1615)
수원人으로 자는 기원(起元), 호는 술고당(述古堂)이다. 임진왜란 때 풍암 문위세를 따라 의병을 모집하고 정사제와 더불어 장수, 성주, 개령, 금산, 이현, 무주 등을 돌며 적과 싸워 큰 功을 세워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에 제수되었다. 정유재란에서도 문위세와 함께 용담에서 전투를 하여 적을 대파하므로 선무원종훈에 훈록되었다. 나주영장, 안동영장, 부사 등을 지낸 손자 백한상에 힘입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원래의 강당은 1958년(戊戌) 장흥읍 월평에 거주한 백우인(1895~? 관산읍 당동 태생)의 사랑채를 뜯어 옮겨 기양강당(岐陽講堂)을 중건하였다.
정암 위승렬 전 재경지회장님 고향이군요. 8문장의 고장이라 유서깊고 고즈넉한 여운이 감도는군요. 문림의 고장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