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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및 자료실 스크랩 제1권 상서금고문변(尙書今古文辨) 상
향민 고지완 추천 0 조회 30 08.03.18 12: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상서금고문변(尙書今古文辨) 상

 

 

《금문상서(今文尙書)》는 복생본(伏生本)이다. 요전(堯典)으로부터 고요모(皐陶謨)·우공(禹貢)·감서(甘誓)·탕서(湯誓)·반경(盤庚)·고종융일(高宗肜日)·서백감려(西伯戡黎)·미자(微子)·목서(牧誓)·홍범(洪範)·금등(金縢)·대고(大誥)·강고(康誥)·주고(酒誥)·재재(梓材)·소고(召誥)·낙고(洛誥)·다사(多士)·무일(無逸)·군석(君奭)·다방(多方)·입정(立政)·고명(顧命) ―강왕지고(康王之誥)―·비서(粊誓)·여형(呂刑)·문후지명(文侯之命)·태서(泰誓)까지 모두 28편인데, 지금의 문자(文字)로 쓰여졌기 때문에 이를 《금문상서》라고 한 것이다.
《고문상서(古文尙書)》는
공벽본(孔壁本)이다. 28편은 《금문상서》와 같으나, 반경(盤庚)을 갈라서 3편으로 만들고 고명(顧命)과 강왕지고(康王之誥)를 갈라서 2편으로 만들어 모두 31편으로 되었으며, 또 태서(泰誓)까지 아울러서 모두 옛날의 문자로 쓰여졌기 때문에 이를 《고문상서》라고 한 것이다.
또 일서(逸書) 16편이 있으니, 즉 순전(舜典)·골작(汨作)·구공(九共)·대우모(大禹謨)·기직(棄稷)·오자지가(五子之歌)·윤정(允征)·탕고(湯誥)·함유일덕(咸有一德)·전보(典寶)·이훈(伊訓)·사명(肆命)·원명(原命)·무성(武成)·여오(旅獒)·경명(臩命)인데, 사설(師說)이 전혀 없어서 전주(傳注)를 하지 못한 것이다.
매색(梅賾)의 《위고문(僞古文)》이란 것은 바로 지금의 통행본(通行本)으로서 이는 고문도 아니요 또한 금문도 아니다. 이것은 진고문(眞古文) 31편 이외에 대우모·오자지가·윤정·중훼지고(仲虺之誥)·탕고·이훈·태갑(太甲)·함유일덕·열명(說命)·태서·무성·여오·미자지명(微子之命)·채중지명(蔡仲之命)·주관(周官)·군진(君陳)·필명(畢命)·군아(君牙)·경명(冏命) 등 19편이 더 있는바, 여기에 태갑·열명·태서가 각각 3편씩이므로 모두 합쳐서 25편이 되는데, 이를 진고문 31편 가운데 섞어서 끼워 넣어서 모두 56편으로 만들었다.
요전(堯典)의 신휘오전(愼徽五典) 이하를 순전(舜典)으로 갈라놓았는데, 그러나 감히 28자(字)를 함부로 끼워 넣지는 못하였었다. 그런데 제(齊) 나라 건무(建武 제 명제(齊明帝)의 연호 494~498) 연간에 요방흥(姚方興)이 대항두(大航頭)에서 순전한 경전(經傳)을 얻었다고 칭하면서 이를 임금에게 아뢰고 올렸다. 그 전(傳)은 마융(馬融)·왕숙(王肅)의 주(注)를 채택하여 만들어졌고, 그 경(經)은 현존한 것보다 '曰若稽古帝舜 曰重華協于帝'의 12자가 더 많았는데, 이것은 그때 세상에 행용되지는 못하였다. 또 혹은 이 12자 아래에 '濬哲文明' 등 16자가 더 있기도 하여 이를 합치면 모두 28자가 되었다.
그후 수(隋) 나라 개황(開皇 수 문제(隋文帝)의 연호 581~600) 초기에 비로소 이 글을 구득(購得)하여 매색이 일찍이 망녕되이 갈라놓은 순전 첫머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또 기직(棄稷)을 익직(益稷)으로 고치고는 고요모(皐陶謨)의 '帝曰來' 이하의 글을 여기에 해당시켰는데, 익직은 또 서서(書序)의 편목(篇目)에도 들어있지 않은 것이다. 대체로 매색의 《위고문(僞古文)》은 공벽 일서(孔壁逸書) 16편과 수편(數篇)만 서로 다를 뿐이 아니다. 또 그 글이 이미 없어져서 일서(逸書) 가운데도 들어있지 않은 중훼지고(仲虺之誥) 등 10편은 바로 공벽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양한(兩漢) 시대에는 모두 금문(今文)으로 학관(學官)을 세웠기 때문에 한(漢) 나라의 여러 임금과 복생(伏生 이름은 승(勝)임)·구양씨(歐陽氏 구양고(歐陽高)를 이름)·대하후씨(大夏侯氏 하후승(夏侯勝)을 이름)·소하후씨(小夏侯氏 하후건(夏侯建)을 이름)·사마천(司馬遷)·동중서(董仲舒)·왕포(王褒)·유향(劉向)·곡영(谷永)·공광(孔光)·왕순(王舜)·이심(李尋)·양웅(揚雄)·반고(班固)·양통(梁統)·양사(楊賜)·채옹(蔡邕)·조기(趙岐)·하휴(何休)·왕충(王充)·유진(劉珍)이 모두 금문을 다스리었고, 공안국(孔安國)·유흠(劉歆)·두림(杜林)·위굉(衛宏)·가규(賈逵)·서순(徐巡)·마융(馬融)·정현(鄭玄)·허신(許愼)·응소(應劭)·서간(徐榦)·위소(韋昭)·왕찬(王粲)·우번(虞翻)은 모두 고문을 다스렸으니, 고문은 후한(後漢) 때에 시작되었으나 이와 같이 성행하였다. 사마천은 공안국에게서 수업했기 때문에 《사기(史記)》에서 고문설(古文說)을 채용하였으나, 사공(史公 사마천을 이름) 또한 금문을 다스린 사람이다.
그리고 두림(杜林) 이하 서로 전수해온 것은 바로 《칠서고문상서(漆書古文尙書)》인데, 그 편수(篇數) 또한 금문 28편에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곧 공안국이 체전(遞傳)한 본(本)으로서 그 반경(盤庚) 등 편의 나누임이 금문과 약간 다르다. 그래서 고문설과 금문설은 약간만 서로 다를 뿐인데, 어찌 매색의 본(本)처럼 일서(逸書)·망서(亡書)가 번갈아 나왔겠는가. 그러니 공벽(孔壁)에 있지 않았던 것을 매색은 어디에서 얻었으며, 사설(師說)이 전혀 없는 것을 가지고 매색은 어디에서 《공전(孔傳)》을 얻었단 말인가.
남북조(南北朝) 시대 사람들은 남학(南學)과 북학(北學)으로 나누어져 서로 원수처럼 여기었다. 이때 남학은 《위고문》을 주장하였는데, 당 태종(唐太宗) 또한 남학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공영달(孔穎達)에게 명하여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찬정(纂定)하게 하고, 마침내 매색의 본을 가지고 학관(學官)을 세웠었다. 그리하여 채구봉(蔡九峯 구봉은 채침(蔡沈)의 별호)도 이것에 따라서 《서경집전(書經集傳)》을 지음으로써 마융(馬融)·정현(鄭玄)의 진고문주본(眞古文注本)은 마침내 폐해져서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대체로 주자(朱子)가 맨 처음 매색의 《고문상서》가 위작이라는 것을 의심했었는데, 그후
매족(梅鷔) 및 염백시(閻百詩)·혜정우(惠定宇) 등 제인이 하나하나 변명(辨明)해 냄으로써 매색의 위작임이 남김없이 다 노출되었다. 그러나 오직 학관을 세워서 천여 년 동안이나 통행해온 것 때문에 갑자기 물리쳐버리지 못한 것일 뿐이다.
채씨(蔡氏)의 《서경집전》에서 '금문과 고문에 모두 들어있다……' 한 말은 극히 명백하지 못하니, 《집전》은 고작 공영달의 《정의(正義)》를 인습한 데에 불과한 것으로 이것이 곧 매색이 일컬은 고문본(古文本)인 것이다. 애당초 복본금문(伏本今文 복생이 소장했던 금문본 《상서》)의 영향은 미친 것이 없는데, 갑자기 금문을 끌어들여서 그 있고 없음을 변론하여 마치 복본 금문과 서로 증거를 대는 것처럼 해놓았으니, 어찌 소자(小子 저자 자신을 낮추어 이른 말)의 의혹이 자심한 곳이 아니겠는가. 설령 공벽의 진고문이 있다 할지라도 이는 바로 고문일 뿐인데, 어찌하여 금문을 끌어대서 함께 들어 대칭(對稱)한단 말인가. 더구나 이것은 금문도 아니요 또 고문도 아니며 바로 하나의 위본(僞本)임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주D-001]복생본(伏生本) : 복생의 이름은 승(勝)인데 일찍이 진(秦) 나라 때에 박사(博士)를 지냈다. 진 나라의 금서(禁書)로 인하여 복생이 일찍이 벽(壁) 속에《상서》를 감추어 두었다가 한(漢) 나라가 일어난 다음에야 그것을 꺼내었는바, 처음에 백편이나 되던 것이 겨우 29편만 남아 있었는데, 이것을 복생본《상서》라고 한다. 이것이《한서(漢書)》에는 29편으로 되어 있는데, 이 본문(本文)에서는 고명(顧命)에다 강왕지고(康王之誥)를 합쳐 계산하여 28편이라고 하였다. 《漢書 卷八十八》
[주D-002]공벽본(孔壁本) : 한(漢) 나라 때 공자 구택(舊宅)의 벽(壁) 속에서 발견한 고문(古文)으로 된《상서》를 이름. 앞서 진(秦) 나라 때에 공자의 9세손인 공부(孔鮒)가 진법(秦法)의 혹독함 을 두려워하여 공자의 옛집 벽 속에다 고문으로 된《상서》·《효경》·《논어》등의 서적을 숨겨 놓았었는데, 한 무제(漢武帝) 때에 노 공왕(魯恭王) 유여(劉餘)가 궁실(宮室) 치장하기를 좋아한 나머지 궁실을 넓히기 위하여 공자의 구택을 헐다가 이 서적들을 발견했다고 한다.《漢書 藝文志》
[주D-003]요전(堯典)의……갈라놓았는데 : 동진 원제(東晉元帝) 때에 매색(梅賾)이《고문상서》를 위작(僞作)하여 이를 공안국(孔安國)의 전(傳)이라며 임금에게 올렸었는바, 본디《고문상서》에는 순전이 따로 있지 않았는데, 이 책에서는 순전을 결루(缺漏)된 것으로 여겨 요전의 신휘오전(愼徽五典)부터 그 이하를 갈라서 순전으로 만들었던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04]28자(字) : 진(晉) 나라 때 매색이 이미 요전(堯典) 하나를 가지고 신휘오전(愼徽五典) 이하를 갈라내서 순전(舜典)을 더 만들어놓은 이후, 제 명제(齊明帝) 때에 이르러서는 요방흥(姚方興)이란 사람이 그 신휘오전 위에 덧붙여놓은 "曰若稽古帝舜 曰重華 協干帝 濬哲文明 溫恭允塞 玄德升聞 乃命以位"의 28자를 이른 말이다.
[주D-005]매족(梅鷟)……혜정우(惠定宇) : 매족은 명(明) 나라 사람으로 《상서》를 전공하여 《상서고이(尙書考異)》·《상서보(尙書譜)》등을 저술해서 《고문상서》의 거짓됨을 변박하였다. 염백시(閻百詩)는 청(淸) 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약거(若璩)이고 백시는 그의 자인데, 그는 《상서》를 읽다가 《고문상서》25편의 거짓됨을 의심하여 그 후 30여 년 동안 깊은 연구 끝에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을 저술해서 《고문상서》가 위작임을 밝혔다. 혜정우는 역시 청 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동(棟)이고 자가 정우인데, 그 역시 《고문상서고(古文尙書考)》를 지어 그것이 위작임을 밝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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