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동생을 찾지 않았을까?(눅15:25-32)
2024.11.3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커브(CURVE)라는 단편영화가 있다. 영화의 길이가 11분에 불과하다. 이 영화에는 대사가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사도 없고, 길이도 짧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11분 내내 주는 엄청난 긴장감과 강렬한 메시지로 인해서 제34회 부산국제단편영화제를 비롯해 수많은 영화제에서 우수 작품 후보로 올랐고, 2016년 스페인의 시체스(Sitges)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영화 속에는 한 여인은 곡선(Curve) 형태로 이루진 구조물 위에 한쪽 다리가 접힌 채 홀로 누워있다. 사방에
이 막혀있고 구조물의 밑은 알 수 없는 깊은 어둠 속이다. 구조물 밑에서는 전율감을 주는 이상한 소리도 이따금씩 들려온다. 영화가 진행되는 11분 내내 여인은 구조물 위에서 탈출하려고 처절한 몸부림을 친다. 그러나 영화의 말미에 보면 결국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곡면형태의 구조물만 남는다. 짧은 단편영화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 커브(CURVE)영화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2dD3Fawk4y0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곡면의 구조물 위에서 홀로 몸부림치는 여인의 모습과 상황이 바로 하나님 떠난 인간의 실존이다. 이 여인의 상황이 바로 각종 형태의 곡면에 구조물들(먹고살기 위한 안간힘, 질병, 삶의 질고들, 수고, 외로움, 우울증, 죄악의 구조물 등) 위에서 몸부림치는 우리(나)의 모습이고, 사랑하는 내 가족과 이웃과 잃은 양들의 모습이다.
오늘 설교본문 속에도 탐욕이라는 가파른 곡면 구조물 위에서 몸부림쳤던 형제의 이야기가 나온다. 흔히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를 탕자의 비유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자세히 보면, 사실은 탕자는 하나가 아니고, 둘이다. 하나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하고, 그것을 갖고 먼 나라에 허랑방탕하게 써버렸던 둘째 아들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아버지에게 화를 냈던 큰 아들이다. 오늘 설교에서는 이들을 “탕자”와 “탕자의 형”으로 지칭하겠다.
탕자의 형은 아버지가 날마다 마을 어귀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동생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의 마음(뜻)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찾으려는 어떤 노력이나 시도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각종 핑계들을 댔을지도 모른다(“바빠서”, “나중에” 등). 동생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탕자의 형은 동생이 돌아왔고, 아버지가 잔치를 벌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분노의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아버지에게 따지며 항의까지 했다(눅15:28-29).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8-30)
이 분노는 누구를 향한 분노인가? 언뜻 보면 동생을 향한 분노 같지만, 사실은 방탕했던 동생을 받아준 아버지를 향한 분노다. 그러면 탕자의 형은 왜 이처럼 화부터 냈을까? 그것은 아버지의 재산에만 관심이 있던 동생처럼, 탕자의 형도 사실은 탐욕이라는 곡면 구조물 위에서 발버둥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남은 재산의 모든 것이 자기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받은 것이 없는 것처럼 착각했다. 그는 동생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는 착각 속에 살았다.(“나만 부친을 봉양하고, 나만 뺑이 치고 있다. 이게 다 그 놈 때문이야”).
이런 생각 때문에 아버지가 기다리는 것을 알고도 동생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움과 증오의 마음 때문에 일을 해도 즐거움이 없고, 염소새끼 타령을 하면서 아버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러한 삐딱한 마음과 행동은 스스로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뿐이었다.
이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자칫하면 우리들도 탕자의 형처럼 되기 쉽다. 우리들이 부정적인 감정의 불에 휩싸여 있으면, 그 불이 마음과 눈과 귀를 가려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마귀 사탄은 끊임없이 부정적인 감정과 탐심과 극단적인 비교의식들을 통해 우리들의 눈과 귀와 마음을 어둡게 하려고 시도한다. 그렇기에 성경은 항상 말씀의 반석 위에 굳게 서서, 늘 깨어 근신하며, 성령충만하여 마귀의 간계를 대적해야 함을 강조한다(엡6:10-13, 벧전5:8-9 등).
다시 서두에 언급했던 영화 이야기를 좀 더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이 영화 속의 여인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 곰곰이 이 장면을 다시 보았다. 일단 이 여인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탈출할 수 없다. 이 여인의 상황처럼,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죄와 죽음으로 부터의 구원, 마귀 사탄의 공격 그리고 숨통을 조이는 수많은 고난 등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이다. 불완전한 인간에게서는 완전한 것이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외부로부터 오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위쪽에 하늘이 보인다. 다시 말하면 그 여인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위를 향해 소리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이 여인을 발견하고 위에서 밧줄을 내려주거나 119대원이 내려와서 구해주어야 한다.
우리들이 이와 같은 절망의 상태에서 하나님을 향해 소리치는 것을 “기도”라고 한다. 물론 어떤 사람은 “소리(기도)만 친다고 다 되나?”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분에게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그러한 인생의 절망의 상황에서까지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으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논리를 따지고, 자존심을 찾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살고 봐야 한다. 죄와 사망, 죽음 이후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면, 무조건 그 길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광대하신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당신을 향한 믿음에 간구에 하나님은 반응하신다는 사실이다. 누구를 통해서 어떤 방법으로 역사 하실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잠언 16장 9절과 잠언 16장 3절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우리들이 죽음의 곡면 구조물 위에서 발버둥을 치며 고통당할 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하늘의 119대원을 보내주셨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의 힘으로는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에 독생자를 보내주신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내려주신 생명의 밧줄이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 죽음의 곡면 구조물 위에서 자신이 죽음을 향해 미끄러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이나 설령 인식했다 할지라도 발버둥 치면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사랑하는 가족, 이웃, 잃은 양들 등)에게 누가 가서 생명의 밧줄을 내려줘야 하겠는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고, 손에는 십자가라는 생명의 밧줄을 손에 쥐고 있는 성도들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커브(Curve)라는 영화 속에서 몸부림치는 여인처럼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외부로부터 오는 도움이 필요하고, 하늘은 언제나 열려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 독생자라는 하늘의 119대원을 보내셨다.
그러므로 만약 자신의 현재 상태가 탕자와 같다고 생각되면, 즉시 하늘의 하나님을 향해서 소리(기도)치고, 하나님이 보내신 하늘의 119대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내미신 십자가라는 생명의 밧줄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지혜롭고 현명한 선택이다.
또한 자신의 입장이 탕자의 형과 같다고 느껴진다면, 이 또한 부정적인 감정이나 태도를 내려놓고, 영적인 119대원이 되어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나서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도 각종 곡면의 벼랑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내 가족이고, 내 이웃이고, 그들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영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순간 우리 모두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