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베이징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단체전에서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한 뒤, 도핑 파문으로 가까스로 출전한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1위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피겨 천재' 카밀라 발리예바가 그렇게 무너져 내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발리예바는 17일 밤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2번이나 엉덩방이를 찧고 여러 차례 점프 후 착지에서 불안함을 드러내면서 141.93점을 얻는 데 그쳤다. 프리스케이팅 성적만으로는 전제 25명 중 6위. 지난해 11월 국제빙상연맹(ISU) 로스텔레콤컵에서 기록한 프리스케이팅 세계 신기록(185.29점)에 44점 가까이 뒤처진 점수이고, 불과 열흘 전 단체전 프리스케이팅 점수(178.92점)보다도 37점이나 차이가 났다.
프리스케이팅을 끝난 뒤 허탈한 표정의 발리예바/사진출처:ROC 텔레그램 계정
2021~2022 ISU 피겨스케이팅 시니어 무대에 데뷔한 뒤 출전하는 대회마다 '세계 기록'을 경신하면서 '신기록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었던 '피겨 천재'의 충격적인 몰락이었다. 베이징 올림픽 사상 '최대 이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녀의 추락 원인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싱글 매치(경기)에 앞서 터져나온 도핑 논란이다. 단체전이 끝난 직후, 지난해 12월 러시아선수권대회에서 실시한 검사에서 금지약물인 트리메타지딘 양성 결과가 뒤늦게 나왔고, 그녀는 싱글 매치 출전 여부를 놓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세계반도핑기구(WADA), ISU를 상대로 스포츠중재재판소(CAS)까지 가는 대결(?) 끝에 출전권을 따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모두가 그녀에게 등을 돌린 상태였다. 단체전 2위를 기록한 미국을 필두로 국제 사회 전체가 '도핑 전과자' 러시아를 향해, 또 발리예바를 향해 비판을 퍼부었다. 그녀가 쇼트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하자 압박과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러시아 피겨의 대모'이자 명예 감독인 타티아나 타라소바는 "15살 소녀가 (경기 전에 이미) 죽임을 당했다"고 비탄해 했다. 어린 발리예바가 감당하기에는 쏟아지는 비난이 거의 '살인적'이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졌을까? 비난 속에서도 쇼트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했고, 이미 단체전에서 쇼트-프리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준 그녀가 말도 안되는 실수를 여러차례 저지른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래서 나온 게 러시아(정확히는 러시아올림픽위원회, ROC)의 의도적인 '실수론' 이다.
프리스케이팅 후 점수를 지켜보는 발리예바. 그녀는 4위로 결정되자 "이젠 시상식이 열리겠네요"라고 했다/사진출처:MOS 텔레그램 계정
싱글 매치 결과가 나온 뒤 발리예바가 한 첫마디 말이 알려졌다/얀덱스 캡처
러시아 언론들도 그 가능성을 놓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기도 했다. 쇼트프로그램 1위에 오른 뒤 이틀 사이에 발리예바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국제사회의 살인적인(?) 압박에 멘탈이 한방에 무너진 걸까? 스스로 경기를 포기한 걸까? 아니면 진짜 의도적인 실수일까?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멘탈도 멘탈이지만, 스스로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나 싶다. 그 이유는 함께 올림픽에 출전한 언니들(금메달의 안나 셰르바코바와 은메달의 알렉산드라 트루소바) 때문으로 보인다. 자신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이야 어떻게든 이겨낸다고 하더라도, 언니들이 불이익을 받는 것에 대한 심리적 부담은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자신의 도핑 논란 직후, WADA 측은 언니들을 대상으로 예정에 없던 특별 도핑검사(소변및 혈액검사)를 실시했다. 다른 선수들은 안하는 도핑검사를 또 받게 했으니, 언니들에게 민폐를 끼친 셈이다.
쏟아지는 눈물을 가까스로 삼키는 발리예바/사진출처:MOS 텔레그램 채널
더욱이 IOC는 발리예바가 메달권에 들어갈 경우, 그녀의 도핑 사안이 매듭될 때까지 메달 시상식 자체를 연기하기로 했다. 예상대로라면, 발리예바 1위, 셰르바코바 2위, 트루소바 3위가 거의 확정적인데, 함께 고생한 언니들이 자신 때문에 메달을 목에 걸고 귀국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프리스케이팅 연기 이후 메달권을 벗어난 4위로 확인되자, 뱔리예바는 옆에 앉은 에테리 투트베리제 코치에게 가장 먼저 한 말이 "이젠 시상식이 열리겠네요"였다고 한다. 시상식 무산에 따른 부담감이 적지 않았다는 증거다.
또 그녀의 올림픽 기록을 참고(*) 표시로 붙여 잠정 기록으로 남긴다고 했고, 20일 밤에 열리는 '갈라 쇼'에 초대받지 못한 한 것 등도 굳이 자신이 1등을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부담을 느끼는 상대는 또 있었다. 은메달을 차지한 뒤 "나만 금메달이 없잖아"라고 운 트루소바다. 그녀는 단체전 프리스케이팅에서 발리예바 대신 출전할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돌았다. 단체전엔 싱글 매치에도 쇼트-프리 사이에 선수 교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남자 싱글 매치에서 금메달을 딴 미국의 내이션 첸은 단체전 쇼트프로그램 1위 후 프리스케이팅에는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트루소바는 끝내 단체전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 예상하건데, 투트베리제 코치의 결정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 기회를 박탈당했을 것이다. 그녀는 싱글 매치 프리스케이팅에서 쿼드러플(4회전) 점프를 다섯 차례나 시도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면서 프리스케이팅 전적으로만 1위를 차지했다. 트루소바가 단체전 프리스케이팅에 나갔어도 러시아의 순위는 바뀌지 않았을 게 틀림없다.
경기를 마치고 눈물을 흘리는 발리예바. 투트베리제 코치는 그녀에게 "왜 경기를 포기했느냐"고 질책했다/사진출처:ROC 텔레그램 계정
발리예바가 스스로 경기를 포기했으리라는 짐작은, 연기를 마치고 나온 그녀에게 투트베리제 코치가 "왜 포기했느냐, 왜 싸움을 멈췄느냐? 설명해봐"라는 질책성 발언으로 더욱 분명해진다. 발리예바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녀는 이후 러시아 언론과의 접촉도 완전히 피했고, 모스크바 귀국장에 몰린 환영 인파를 향해 눈길도 거의 주지 않았다.
중계카메라에 생생하게 잡힌 투트베리제 코치의 발언은 그녀를 '괴물, 혹은 악마'로 만들었지만, 러시아 언론은 그녀를 '승부사' 혹은 '(승리를 향한) 포식자'로 표현했다. 투트베리제 코치는 자신과 발리예바의 결백을 믿고 있었기에 '끝까지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그 이유는 스포츠중재재판소(CAS)의 판결 때문이다.
공개된 CAS 판결문/캡처
CAS의 판결문을 보면, 발리예바가 그토록 거센 비난에도 불구하고 싱글 매치에 출전할 수 있었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CAS 청문회에 옵저버 방청권을 신청했다가 기각당한 미국반도핑기구(USADA) 측의 일방적인 주장, 혹은 매도를 그대로 받아들일 일은 절대 아니다. 물론 최종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
CAS의 재판관 3명은 7시간 가까운 청문회(심의) 끝에 △ 발리예바를 돌보는 할아버지 심장약(트리메타지딘)에 의한 오염 가능성 △ 미량(2.1ng/ml)의 트리메타지딘이 검출될 수 있는 주변 정황에 대한 전문가들의 분석 △ 2.1ng/ml는 도핑 검사의 기술적 오차범위(10ng/ml)내에 있다는 사실(트래비스 타이거트 USADA 위원장의 200배 주장은 일방적이다) △ 오차 범위안의 양성 반응은 샘플 B를 개봉할 경우, 결과가 뒤집혀질 수도 있다는 가정 △ (양성 반응이 나온) 지난해 12월을 전후해 베이징올림픽까지 실시한 몇 번(러시아 언론은 최소 3번)의 도핑검사에서 음성이 나왔다는 점 등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IOC 등의 출전 금지 항소를 기각했다.
이같은 판결문을 받은 당사자들(발리예바와 코치진)은 끝까지 승부를 겨뤄야 한다고 다짐했을 법하다. 특히 투트베리제 코치는 '포기하는 것이 (약물 복용을) 인정하고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발리예바도 프리스케이팅 전까지만 해도 투트베리제 코치와 생각을 같이 한 것 같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그녀는 지난 13일 밤 9시께부터 이튿날 새벽 3시를 넘기면서까지 진행된 CAS 청문회에서 꿋꿋하게 버텼다고 한다. 7시간 가까운 공격적인 청문회에 참석한 그녀에게 휴식 시간은 20분간, 단 한번 제공된 것으로 전해졌다. 청문회 압박감을 이겨내고 이튿날 쇼트프로그램에서 1위에 오른 발리예바였다.
언론인 바이체호프스카야: 발리예바가 의도적으로 실수를 했을 것으로 믿지 않는다/얀덱스 캡처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대로 프리스케이팅에 나갔을 즈음, 그녀의 멘탈은 이미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무너졌을 것이라는 점도 추측 가능하다. '러시아 피겨의 대모' 타라소바가 "발리예바의 몰락은 예견된 것"이었다고 주장한 이유다. 영국의 아이스댄싱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의 제인 토빌도 "발리예바가 두번째 실수를 한 뒤에는 마음이 바빠져 빨리 얼음판 위에서 도망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는 평을 남겼다.
러시아 피겨선수단은 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마지막 컨디션 점검을 한 뒤 올림픽 개막 직전 베이징으로 날아왔다. 한달 가까이 집에서 떨어져 지냈다. 발리예바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을 것이다.
러시아 측의 의도된 '실수설'에 대해 올림픽 다이빙 금메달리스트 출신 언론인 엘레나 바이체호스프스카야는 그 가능성을 일축했다. 아예 프리스케이팅에 출전하지 않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메달 획득을 포기했다면, 발리예바가 쇼트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한 뒤 프리스케이팅에 나서지 않았다면 '여왕처럼 베이징을 떠났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를 위로한 전직 유명 피겨선수들의 위로 메시지도 주목할 만하다. 평창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는 인스타그램 스토리(Stories)에 발리예바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면서 “지옥(베이징올림픽)에서 벗어나 다행이네. 항상 너의 진정한 가치를 인정하고 사랑한다"며 "이제 은반위에서 여유를 느낄 수 있기를 바라고, 맘 편히 숨 쉴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메드베데바가 올린 발리예바 응원 글/캡처
메드베데바의 위로가 관심을 끄는 것은, 그녀가 김연아 이후 세계선수권대회를 2연패 하는 등 '포스트 김연아' 시대의 '피겨 여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평창올림픽에서 동료이자 후배인 알리나 자기토바에게 금메달을 내준 뒤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울먹이는 모습은 엊그제 발리예바의 눈물과 다르지 않았다. 메드베데바는 김연아-차준환를 키운 캐나다의 브라이언 오셔 코치를 찾아가면서까지 재기를 노렸으나, 실패한 뒤 은퇴의 길을 택했고, 베이징에는 올림픽 홍보대사로 참가했다.
또 다른 유명 전직 피겨선수는 2006년 올림픽 남자 싱글, 2014년 단체전 금메달리스트인 예브게니 플루센코다. 4년을 건너뛴 뒤 다시 올림픽 금메달(단체전)을 목에 건 러시아의 전설이면서, 투트베리제 코치와 대척점에 서 있는 남자 코치다. 한때 투트베리제 코치와 이별한 (은메달리스트) 트루소바를 지도하기도 했다.
그는 발리예바를 향해 "미래에 더욱 강하게 도약하기 위해 때로는 (위기를) 넘어야 한다"며 "많은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아주 훌륭한 피겨 선수이고, 이번이 마지막(올림픽)은 아니니 포기하지 말라"고 썼다.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는 악단의 연주와 꽃다발이 발리예바를 환영했다/얀덱스 캡처
발리예바는 러시아에서 여전히 스타였다. 베이징에서 귀국한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공항에는 수많은 팬들과 언론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플래카드와 꽃다발, 박수, 악단 연주 등으로 환영을 받았다. 발리에바는 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에게 주어지는 '국가 체육표창'의 대상자로 지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