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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의 복/마 5:1-12
사람들은 누구나 복(福) 받기를 원합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복’이라는 단어를 무척 좋아하지요.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까 ‘복’이라는 말은 ‘편안하고 만족한 상태와 그에 따른 기쁨’이라고 정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전에 따르면 우리가 복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는 편안하고 만족한 상태와 그에 따른 기쁨을 누리기를 원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의 결과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복의 원인입니다.
즉, ‘무엇이 우리에게 편안하고 만족한 상태와 기쁨을 가져다주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그것이 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겠지요.
또 어떤 사람들은 몸이 건강하면 그것이 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큰 권력을 소유하는 것이 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많다고 해서, 몸이 건강하다고 해서, 높은 지위와 큰 권력을 소유했다고 해서 다 편안하고 만족한 상태와 그에 따른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 진정한 복을 가져다주는 것인지는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오직 복의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복에 관한 관념이 한국의 전통적인 샤머니즘 등에서 볼 수 있는 기복 신앙과 적당히 혼합되어 한국 교회 안에 스며들었고,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의 개념이 완전히 왜곡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복을 받은 사람들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식의 왜곡된 의식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면, 실제로 어떤 목사가 “정말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복을 받기 때문에 결코 가난할 수가 없다. 가난한 사람은 무엇인가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소리를 제가 직접 들은 적도 있습니다. 신년 벽두부터 무슨 축복성회다 해서 이산 저산 깎아서 세운 기도원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두둑한 감사헌금 봉투를 내밀면서 신령하기로 이름난 목사의 안수 기도를 받으려 머리를 들이대는 이유가 오직 복을 받기 위한 것이며, 예배도, 직분도, 봉사도, 헌금도 모두 복을 받아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면 지나친 말이겠습니까? 과연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진정한 복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팔복(八福)’으로 잘 알려진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팔복이 포함되어 있는 마태복음 5-7장은 예수께서 산 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소위 ‘산상수훈’이라고 불리고, 산상수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치들이 잘 집약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저자 마태는 산상수훈을 기록하면서 여덟 가지 복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것은 여덟 가지 복의 개념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치들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께서는 첫 번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가 하면 천국이 그런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가난해 보지 않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가 경기도 성남시에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당시 ‘논골’이라는 동네에서 살았습니다.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궁색한 산동네였는데,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가난한 사람이 그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대부분 교육 수준도 아주 낮고, 막노동이나 날품팔이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삶에 어떤 극적인 변화가 생긴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더 비참한 것은 자신들의 가난을 자녀들에게도 대물림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가난의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난다는 것은 로또 대박을 터뜨리거나, 사기를 치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가난의 굴레에서 구제해 주지 않는 한 스스로의 힘으로 가난이라는 짐을 벗어버리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내 스스로 내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 내가 영적으로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 내가 죄인이라는 것, 내 스스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내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한 번은 예수께서 이런 비유를 드신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하나는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토색하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또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이 비유 끝에 예수께서는 충격적인 한 마디를 덧붙이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요, 이 세리다.”
참으로 역설적인 비유입니다. 바리새파는 종교적으로 흠이 없고 완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대로 세리는 당시 창기나 다른 죄인들과 같은 부류의 죄인들로 취급당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함께 기도한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 중에서 세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세리의 마음이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세리는 부끄러워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가슴을 치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대로 바리새파 사람은 종교적으로 흠 잡을 데가 없이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이 그의 마음을 부유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이 기도한 내용을 살펴보십시오. 비록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했지만 어느 한 곳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곳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한 의로운 일들로 인해 마음이 부유해져 있었고, 그의 부유한 마음은 자신의 의로 가득 차 있었을 뿐 하나님이 계실만한 자리가 없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불의한 일을 행한 적이 없고, 율법에서 정한대로 정기적으로 금식하며, 소득의 십일조를 빠짐없이 드렸던 바리새파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따르면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했던 세리가 복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이 가난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인정하고, 그것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천국은 무엇을 말합니까?
먼 훗날 죽은 다음에 가는 영혼의 안식처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본문의 시제를 잘 살펴보면 미래의 어느 날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 천국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언젠가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여기서도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 어느 시점에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람들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마음에 임한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리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가 마태복음을 시작하면서 1:1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선언한 것에서 더욱 명확해 집니다.
마태는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선포했는데 여기서 다윗의 자손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 곧 왕 되심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곳곳에 보면 마태는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 곧 왕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국이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는 말씀은 자신의 영적인 무능력과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자들의 마음에 예수께서 오셔서 왕이 되시고, 사랑의 법으로 그들을 다스리시고, 은혜의 법으로 그들을 통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2:5을 보면 야고보 역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야고보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말씀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것이 바로 진정한 복이며, 여덟 가지 복 중에서도 가장 첫 번째 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역시 예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자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가난합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구하는 것은 결국 내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내게 복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은 “내게 가난한 마음을 주십시오. 내가 죄인임과 영적으로 무능력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시오.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임을 고백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 자신만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위해 복을 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개에게 복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무개에게 가난한 마음을 주십시오. 아무개가가 죄인임과 영적으로 능력하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게 해 주십시오. 아무개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시오. 아무개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임을 고백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자만이 작은 일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에게 빵 한 조각은 하찮은 것이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빵 한 조각의 가치와 의미는 대단히 큰 것처럼 마음이 가난한 자만이 지극히 작은 일에도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만약 우리 신앙의 열정이 식어가고,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지루해지고, 말씀이 잘 들리지 않고,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우리 입술과 마음에서 감사와 찬송이 사라져가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만 눈에 들어오고 있다면 그것은 지금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이 아닌 다른 어떤 것들로 몹시도 불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임과 우리 자신의 영적인 무능력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다스리심과 통치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것 중의 하나가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부유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참된 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아 누려야할 진정한 복은 그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먼저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지는 복입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의 사랑에 배가 고프고, 하나님의 은혜에 목이 마르고, 하나님의 구원에 주려있는 그런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천국은 바로 그런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어느새 하나님 앞에서 부유해진 내 마음을 들여다보십시오. 그리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다시 나아가십시오.
배태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