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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의대정원을 2000명으로 늘린다는 정책발표 이후로 의료 대란이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에 반대하는 의료계의 반발로 인해, 사직서를 제출한 전공의가 약 75%가 넘은 이후, 지난 추석 연휴동안은, 온 국민이 긴장 상태였습니다. 의사는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을 치료하고 고쳐 낫게 하는 인술을 펼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사가 모든 병을 다 고쳐 낫게 하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현대의술이 발달하고 의료기술이 뛰어난다고 하더라도 지구상의 모든 병을 다 치료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의사가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될 것입니다. 의사는 전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의사도 사람이고 유한한 존재이기에 능력의 한계를 가집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어떤 이가 “내가 고쳐 낫게 하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고쳐 낫게 하리라”고 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 입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은 사방이 막힌 사면초가와도 같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성도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입을 모아 걱정하는 소리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밤이든 낮이든, 교회에서든,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길에서든, 어디서나 성도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바리새인들처럼 손을 들고, 큰 소리를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마음 속으로 조용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든 종교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우리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단지, 기독교의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지금도 우주 삼라만상을 주관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기에,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앞의 32: 16 - 25절을 보시면, 예레미야의 기도가 나옵니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을 고백하며, 순종하지 않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것에 대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간구가 없다는 겁니다. 그저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심판의 하나님이시고, 회복의 하나님으로 범죄한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포로로 넘기실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우리는 이게 무슨 기도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으로, 그분이 행하시는 모든 일을 내가 온 몸과 삶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곧, 현재로서는 무서운 심판이 있지만, 그 심판까지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요즘, 세계적인 경기침체의 끝은 보이지 않고, 수출은 막히고 내수는 침체되어, 실업률의 증가와 극심한 취업난 등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어렵습니다. 이와 같이,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한 지금, 우리가 할 일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을 믿고, 응답을 확신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이 언약을 굳게 잡고, 현재 우리가 처한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반드시 들으시고 응답하시며 우리나라와 우리 가정을 위해 일하실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하시며 그에게 크고 은밀한 일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에서 예레미야를 향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에게 기도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레미야에게 그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한 일을 그에게 보이시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였습니다. 그러한 그도, 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지만, 그 역시 유한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계시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주어진 계시를 통하여 알았지만, 어떠한 형식으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인지는 알지 못하였고, 따라서 그에 대하여 궁금했을 겁니다.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기도할 것을 권고하시며, 그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약속하신 겁니다. 이처럼 기도는 우리가 현재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가를 알게 해줍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향한 명령이 아닙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사 55: 6을 보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였고, 살전 5: 17을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기도는 모든 성도들을 향한 명령이자 성도들이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성도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으로 주어진 의무요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통로이자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이는 중요한 방편입니다. 시 34: 15을 보시면,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라고 합니다. 성도들 중에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도,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경험하지 못해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대부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기도의 사람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되 구하지 않은 것까지 받음으로,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요 은혜로우신 분임을 깨닫기에, 그 삶이 역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기도의 날개를 펼쳐 보셨습니까? 큰 일이라고 걱정하며, 왜 기도는 하지 않습니까? 가장 어려운 지금이야 말로 기도할 때가 아닙니까? 그냥 기도할 때가 아니라 부르짖어 기도할 때입니다. 모두가 어렵다고 불안해하며 염려에 사로잡혀 있을 때, 성도된 우리는 믿음으로 깨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모든 소망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넘치도록 풍성한 응답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6 - 8절을 보시면,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고 합니다. 죄로 인해 치명상을 입은 우리를 고치실 유일한 분은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입니다.
본문은 죄악으로 인해 파괴된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입니다. 앞에서 살핀 것처럼, 예루살렘은 죄악으로 인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처참한 살육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은 누가 보아도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폐성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예루살렘을 치유하여 다시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특히,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다시 회복시키시는데 어떤 조건도 달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인 은혜로, 예루살렘을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은 악행으로 인해, 하나님의 얼굴 앞에 담을 쌓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감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입지 못해 대적들에 의해 치명상을 입고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처럼 하나님을 떠나감으로 치명상을 입은 예루살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측은하게 여기사, 스스로는 자신들을 구원할 수 없는 그들에게 찾아가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겁니다. 이 약속은 B.C. 444년경 느헤미야의 주도로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됨으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신음하는 가운데, 멸망할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망 없는 예루살렘을 찾아가 창조적인 권능으로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여 다시 회복하신 것처럼, 이번에는 죄 가운데 빠져있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해 사람들 가운데로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성육신을 통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이 우리를 살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이 불안과 고통 속에 사는 우리로 평강과 안식을 누리며 살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특히,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찾아오시고 자신을 희생하신 성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단지, 이스라엘의 구원으로만 언급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질 교회를 통해, 찬송받으실 것이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셨던 크고 은밀한 일 중에 하나는 “치료”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병들어 멸망당해 죽은 것 같지만, 도리어 고쳐서 회복시켜 주겠으니, 이를 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도들이 죄악으로 멸망당하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요,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이신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병들었을 때, 사회가 병들었을 때 또, 우리의 삶에 병든 부분이 있을 때, 그 어떤 의사보다 우리를 치료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는 이제, 우리의 부르짖음을 듣고, 우리를 치유하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9절을 보시면,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고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쁜 이름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이 성읍”이란 일차적으로는,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그리하여 본문은 일차적으로, 장차 회복될 예루살렘이 열방 앞에서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고, 열방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 예언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회복하시고, 그로 인해, 열방들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베푸신 놀라운 일로 인해, 이스라엘을 두려워함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또 다시 범죄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세계 열방 앞에서, 영영히 하나님의 기쁜 이름과 찬송과 영광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일차적인 예루살렘의 회복과만 관련시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루살렘은, 보다 궁극적으로는 사망 권세를 이기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워진 신약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렇게 볼 때 본문은 하나님께서 세우실 신약 교회가 세계 열방 앞에서, 하나님의 기쁜 이름과 찬송과 영광이 되며, 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의 증거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을 보시면,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교회가 세워지고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교회를 두려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온 백성은 교회를 칭송하였습니다. 결국 이로 말미암아 교회는 하나님의 기쁜 이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가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영광받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예루살렘을 택하여 그곳을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곳으로 삼으신 것은, 예루살렘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러한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예루살렘은 가증한 우상 숭배로 더럽혀지고 백성들의 도덕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보다는,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심판하셨던 겁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통해, 영광받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교회를 통해서도 영광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루살렘은 “화평의 성읍”이라는 의미를 지닌 곳입니다. 이러한 곳이 이제는 더 이상, 화평과는 거리가 먼 곳, 죽음과 저주, 절망과 공포의 땅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러한 예루살렘이 어떻게 회복될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회복의 놀라운 역사는 성도된 우리에게도 소망의 말씀, 축복의 말씀을 신뢰할 근거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나, 현재 세상의 형국을 보면 절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답답한 형편 가운데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야말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광과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개탄스런 현실을 결코 묵과하지 말고, 분연히 일어나서 각성함으로,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는 일, 교회 본연의 위상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것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성도를 향한 크고 은밀한 일들이 있고 진행하고 계십니다. 병에서 고침을 받고,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정함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도된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언제 볼 수 있고, 언제 확신할 수 있고, 언제 경험할 수 있습니까? 본문 3절을 다시 보시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빌 1: 6에서 언급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이미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믿음 안에서 나감으로,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획하신 선하신 일들을 이루시는 것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