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을 보는 눈
거제고현중 교사위원 주중연
얼마 전에 우리반 아이들에게 ‘내 삶에 나침반이 되는 말’ 이런 제목으로 자기 책상 앞에 붙여놓고 마음에 새길 만한 글을 찾아오라고 했다. 찾아온 글을 보고 참 좋다 싶은 것도 있고 아니다 싶은 것도 있었다.
“빈자루는 똑바로 설 수 없다.”, “운명은 노력하는 사람에게 우연이라는 다리를 놓아준다.”, “독수리도 땅에선 날 수 없다.” 이렇게 빗댐도 좋고 뜻도 깊은 글을 많이 찾아 왔다. 하지만 아니다 싶은 것도 꽤 있었다. “한방인생 올인”, “10분 더 공부하면 마누라 바뀐다.”, “쉬는 시간 공부하면 남편이 바뀐다.”, “인생 뭐 있나.” “공부가 전부거든.” “엄마가 지켜보고 계셔.” 분명히 어딘가에서 보고 재미도 있고 마음에 남았기 때문에 찾아 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말을 보면서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하고 또 한 편으로는 이런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어떡하나 겁이 나기도 한다.
우리 아이들이 한방 인생을 좇아 살지 않길 바라고, 학벌만을 좇고 우러러 보는 사람이 되지 않길 바라고, 허무주의자가 되지 않길 바라고, 성적만 아는 사람이 되지 않길 바라고, 부모님과 조금 더 따뜻한 관계를 맺어 나가길 바란다. 이런 생각을 나 혼자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우리 나라에서 진짜 ‘한방’은 학벌이란 생각을 한다. 결혼도 취업도 승진도 대우도 학벌에 따라 달라진다. 신분은 아니지만 신분 비슷한 구실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학과 공부 잘해서 성적 잘 받고 수학능력 시험 잘 보면 남편과 아내가 바뀐다는 이 말에도 학벌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들어가 있는 듯 하다.
학벌이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를 하면 저 사람은 무슨 콤플렉스가 있다. 아마도 저 사람은 학벌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저렇게 변명을 하고 자기 위안을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사회에서 학벌에 대해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씩 모습은 다르겠지만 학벌에 따른 편견과 차별은 우리 사회 곳곳에 퍼져 있다는 생각을 한다. 도올 김용옥 선생님이 TV강연에서 자신이 젊은 시절 서울대 콤플렉스에 시달렸음을 얘기하고 또 뜻한 것은 아니겠지만 에둘러서 하버드대나 동경대 학위를 들먹이는 이중성을 보면서 저렇게 훌륭한 철학자도 학벌에서 자유로울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학벌과 관련한 질문을 가끔 받는다. 대수롭지 않게 묻는 질문이지만 마음 한 켠에 늘 걸린다. "몇 학번이세요?", "어디 대학 나왔어요?", "어디 고등학교 나왔어요?" 고향을 물어보고 나이를 물어보고 그 다음 물어보는 것이 이런 것들이 아닐까 한다.
학번을 물어보면 제 때에 학교를 못간 사람들은 꼭 나이를 붙여서 다시 이야기를 한다. 학벌을 부추기는 이 물음도 나이에 따른 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 대답도 듣는 맛이 씁쓸하다. 어디 대학을 나왔느냐는 말은 대학을 졸업 못한 사람은 대화에 끼워주지 않겠다는 뜻이 들어있는 말 같다.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대학이냐, 수도권에 있는 대학이냐, 지방 국립대냐, 지방 사립대냐, 이렇게 어디에 있는 대학을 나왔느냐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한다.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느냐는 질문은 5-60대 어른들한테 자주 받는 질문이다. 그 어른들이 학교를 다닐 때는 그야말로 고교학벌이 중요한 때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이다. “내가 00고 몇 회고 지금 무슨 일하는 누구는 몇횐데...” 이런 말을 듣고 있으면 괜시리 불편해진다.
나는 고등학교를 ‘이류 학교’를 다녔다. 중 3때 한 반에서 절반 정도는 연합고사로 묶여 있는 지역의 고등학교를 가고 나머지 학생들은 2류라 할 수 있는 연합고사로 묶여 있지 않은 고등학교나 실업계고등학교를 가야 했다. 거제 지역으로 따지면 중앙고와 제일고 같은 학교라 할 수 있겠다. 같은 처지에 있어 보았기에 중앙고와 제일고 그리고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갖고 있는 마음의 상처를 볼 수 있는 것 같다. 또, 고등학교에 가서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운이 따랐던지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하고 내가 가고 싶어 하는 대학교를 갔다. 또 군대를 병사가 아닌 장교로 가서 근무를 했다. 여기서 길게 얘기하기는 그렇지만 거기에서 느끼는 잘못된 우월감, 선민 의식, 패거리 의식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잘못된 학벌 의식을 심어주는 첫 단추가 바로 고등학교 입시라 생각한다. 더구나 우리 지역처럼 인문계 고등학교가 비평준화인 곳에서는 그 갈등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좋은 고등학교 갔다고 제 잘난 느낌을 갖는 아이도 썩은 학교 갔다고 놀림 받고 못난 느낌을 갖는 아이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잘못된 우월의식과 패배의식 이 둘 다가 그 사람과 사회를 병들게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고등학교 교복을 입었는가로, 대학교를 졸업했느냐로, 어떤 대학교를 나왔느냐로 그 가능성과 사람됨을 차별하는 짓을 이제는 그만 두어야 한다. 학력에 의한 출세만을 높이 보고 땀 흘려 일하는 많은 사람들을 실패자로 보는 잘못된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학벌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진짜 유치하고 추한 사람으로 여기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뭔가를 내세워 자랑을 일삼고 남을 깎아내리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차별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 거제 지역에 인문계 고등학교를 평준화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지난 10월 27일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평준화 지역 학생들이 비평준화 지역 학생보다 학업성취도와 고교 3년 동안의 성적 향상률이 더 높다'는 연구 결과도 여기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아이들을 바르게 멀리 보고 더 큰 사람으로 키울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2005.11.15. |
첫댓글 신랑 회사 사람들을 만나면 학벌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낍니다. 문제는우리가 늘 만들어 가는거죠. 남들에겐 그러면서 자기자식에겐 안되는 부분도 있고요. 내년이면 5학년인 울아들이 멀리 보고 크게 컸으면 싶고 공부도 잘했으면 싶네요. 중학굔 공부보다 책도 보고 지가 좋아하는 운동도 많이 할 수 있는 곳이면 좋은데.
정말 마음에 와 닿는 글이네요. 가운데 부분에 나만의 생각은 아닐거라 생각한다.는 말은 나혼자만 하는 생각은 아닐것이다. (아닐 것 같다.) 그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얼마전 신문에서 평준화 지역 학업성취도가 높다는 글을 읽으면서 거제에서도 큰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학교운영위원들은 우리 지역 사회에서 힘있는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글 쓰면 평준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쓴다고 했습니다. 나름으로 고쳤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