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있는 말과 행동
바리사이들은 율법 가운데 이혼법과 관련하여 ‘남편이 부인을 버리는 일’에 대해 주님께 묻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르 10,2)라는 질문의 목적은
주님을 “시험하려”(마르 10,2)는 것 이었습니다.
이 물음에는 주님께 악의적인 올가미를 씌우려는 음모가 깔려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맞아들여 혼인하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어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신명 24,1)라는
율법 내용을 근거로 이혼 허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혼은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창 세 1,27.2,24)라는
창조의 본래 질서를 깨뜨리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주라고 한 이유는
남자에게는 간음죄가 잘 적용되지 않던 당시에 물건 취급을 받던 여성의 권익을 옹호하여
여성에게 재혼의 길을 열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취지에도 바리사이들은 이혼 불가 아니면 이혼 가능,
이 두 견해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주님께 올가미를 씌우려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혼이 율법에 비추어 정당한가를 묻는 바리사이들의 트집에 말려들지 않으시고,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마르 10,5)라고 일축하십니다.
그리스어로 ‘완고함’이란 표현은 문자 그대로 ‘마음이 돌처럼 굳은 상태’를 말합니다.
완고함은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난감한 현실을 돌아보게 합니다.
서로를 향한 존경과 품위는 점차 사라지고, 자기중심의 아집만이 뚜렷하게 있을 뿐입니다.
완고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유익하고 선한 사랑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방해하며
오히려 악용할 궁리만 하게 합니다.
사실 혼인은 바오로 사도의 권고처럼, 인격적 결합을 넘어서 주님과의 관계를 표상하는 영적인 의미도 지닙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에페 5,32-33)
그래서 바리사이들의 저의를 간파하신 주님께서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십니다.
그 이유는 혼인의 결실인 어린이가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듯이,
주님 앞에서 인간은 자녀로서 주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마르 10,16) 주시는 행위는
주님과의 긴밀한 사랑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품에 안겨 축복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주님의 사랑과 은총,
곧 주님의 개입이 필요할 정도로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혼인 배우자가 되기까지 수 없이 쏟아낸 선하고 아름다운 말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에게 올가미를 씌워 상대방의 마음을 찌르고
상처를 주며 아프게 하는 도구로 전락하곤 합니다.
혼인의 진가가 드러나려면 서로의 품위를 높여주고
서로의 부족함을 품어주는 사랑이 근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이 바탕이 된 혼인의 신비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게 하고,
주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실현하는 출발점이 되게 합니다.
홍승모 미카엘 몬시뇰 인천성모병원 병원장
연중 제27주일 주보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