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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승희, ‘천지창조의 말씀’, 2008, 안티크글라스 라미네이팅 기법. |
현대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에는 두 가지 딜레마가 있는 듯하다.
전통적인 기법에서 벗어나 현대 건축물에 더욱 잘 어울리는 자유롭고 회화적인 작품을 디자인하고자 글라스페인팅 위주의 작품을 계획했다가도
투명도가 높은 아름다운 난반사 효과를 보여 줄 수 있는 마우스 불로운(mouth-blown) 안티크글라스의 색과 빛을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 비용 문제까지 더해지면 선택은 더욱 어려워진다.
환경 문제, 현대 건축물과의 조화, 제작의 난이도와 내구성 문제 등 여러 이유로 전통적인 납선기법을 구사하는 작품들은 줄어드는 추세다.
독일 쾰른대성당의 우측 트렌셉트(Transept, 翼廊)에 새로 현대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설치하던 당시 경연을 벌였을 때에도 첫 번째 조건이 납선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작품은 안티크글라스를 실리콘으로 접합한 라미네이팅 기법(코팅 처리를 통해 광택이 나게 하고 수명을 길게 하는 기법)으로 완성됐다.
납선 기법 벗어난 새로운 시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납선기법이 가장 선호되고 있지만, 새로운 기법이 적용된 사례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중 부산 가톨릭대 신학대학교 성당의 출입구 전면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는 2008년 완성된 작품으로, 성당 출입문과 그 옆으로 이어지는 창에 히브리어로 된 창세기 말씀을 빛과 색으로 연출해 낸 대형 작품이다.
작품 디자인을 맡은 손승희(소벽 막달레나) 작가는 이탈리아 로마 국립미술원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라벤나에서 유리 모자이크를 연구한 뒤 귀국해 국내 여러 성당에 스테인드글라스와 모자이크 작업을 진행했다.
히브리어로 창세기 표현
작가의 대표작인 부산가톨릭대 신학대 성당의 ‘천지창조’는 전통적인 스테인드글라스에 사용되는 안티크글라스에 모자이크기법을 도입한 작품이다.
나무 합판 문과 민 유리창으로 이뤄져 있던 대성전 출입구 전면을 색유리의 빛과 색이 연출된 디자인으로 변신시켰다. 작가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2장 4절의 천지창조 말씀을 주제로 텍스트 전체를 히브리어로 새겨넣었다.
창세기 말씀을 히브리어 원어로 작품에 넣기로 한 것은 하느님 말씀을 인간의 글로 옮긴 첫 번째 언어인 히브리어 성경 텍스트가 신학대 성당 입구에 걸맞은 품격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품은 중앙에 커다란 씨앗을 배치하고 그 씨앗을 향해 빛이 밝게 퍼져나가는 밑바탕에 히브리어 창세기 말씀을 겹쳐 접착해 두 개의 층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작은 유리조각을 일정한 크기로 재단해 접착제로 붙이는 방식은 모자이크 방식과 동일하지만, 불투명한 벽체가 아닌 유리창에 부착해 색유리 본연의 투명성과 색 그림자가 그대로 유지되는 작품이 됐다.
전체적으로 다양한 톤의 노란색과 갈색으로 구성된 화면을 통해 실내로 드리워지는 빛은 태양 자체의 빛이자 황금빛을 상징하는 색으로 천지창조에 등장하는 빛의 창조와 그 고귀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도전으로 태어난 천지창조
작품에서 큰 그림을 이루는 색유리 조각 하나 하나는 작은 씨앗을 상징하며 인간 개개인의 모습을 나타낸다.
즉 신자 한 명 한 명이 씨앗이며, 그 작은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기쁨과 사랑의 씨앗이 돼 다시 세상에 널리 퍼진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작가가 색유리로 이뤄낸 성경 말씀은 세속의 세계와 하느님 현존의 표징인 성전 내부 공간의 경계로, 일종의 나르텍스(narthex, 성당 정문 안의 현관 홀)로 존재하고 있다.
빛이 통과하는 색유리로 된 투명한 말씀의 벽이 만들어내는 경계는 성전과 성전 밖 세상을 구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두 공간이 긴밀하게 연결돼 서로 통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이 공간을 지나는 사람들은 빛으로 형상화된 말씀을 몸소 체험할 수 있다.
손승희 작가는 자르기가 어려운 곡선들로 된 히브리어 텍스트를 색유리로 일일이 재단해 다듬고, 모자이크 방식을 투명창에 도입하기 위한 여러 접착 실험들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이뤄냈다.
다소 무모할 수도 있었던 시도를 작품으로 완성해내기까지 여러 사람의 노력과 협력이 필요했을 작품 ‘천지창조’를 마주하며 앞으로 우리 스테인드글라스의 새로운 도전과 발전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몇 해 전 독일의 대표적인 스테인드글라스 스튜디오 대표에게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몹시 어려운 프로젝트를 매우 좋아합니다. 그 프로젝트가 끝났을 때 또 하나의 새로운 노하우가 우리 것이 됐기 때문입니다.” 실험 정신으로 새로운 도전을 주저하지 않는 모든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