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3) 교육, 공론장, 문화
공동체 쇄신하려면 참교육과 건강한 담론이 문화로 구축돼야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세상이 더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예전에 비하면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경제적 양극화의 심화와 미래를 희망하지 못하는 청년들의 모습은 암울한 전망을 낳는다. 기후위기라는 거대담론이 아니라, 기후가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일상에서 확인한다. 모든 것이 수도권 중심으로 돌아가고 지방은 점점 소멸의 과정을 겪고 있다. 주변에 젊은 사람들보다 나이 든 사람들이 더 많이 보인다. 언제부터인지 ‘요양병원’이라는 간판을 쉽게 발견한다. 고령화와 출생률의 현저한 저하 현상이 어두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은 이기적으로 변해가고 소수 집단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부족주의 현상이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자꾸만 불가능하게 한다. 개인의 감정과 욕망을 중요시하는 세상의 추세는 연대와 공동체 의식의 부재를 초래한다. 타자는 그저 경쟁 상대이거나 혐오와 분노의 대상이 될 뿐이다. 사방 어디를 돌아봐도 우울한 풍경만 보인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민주적 선거를 통한 정치권력의 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지지만, 가난한 계층의 삶이 나아지는 것 같지 않다. 세상은 여전히 권력과 자본의 힘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슬픈 진실을 목격한다. 언론을 통해 생산되는 뉴스는 늘 권력과 자본의 동향에만 민감하다. 일상의 소박한 이야기들은 뉴스에서 전혀 취급되지 않는다. 약자들의 고통과 아픔의 소리는 여전히 은폐되고 있다. 교회 언론에서도 고위 성직자들의 동정과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힘을 가진 사람들의 기사만 보인다. 일반 시민들과 일반 신자들의 이야기는 그저 가끔 미담과 약자 돕기라는 시혜적 차원에서 구색 맞추기용으로 사용될 뿐이다.
매체와 공론장의 풍경 역시 희망적이지 않다. 언뜻 보면,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인터넷이라는 공론장의 발생은 대중민주주의의 승리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인터넷 매개의 장이 얼마나 교묘한 방식으로 관리되고 있는지 말이다. 기술과 권력과 자본의 결합은 사람들의 사유방식(정신)과 통교방식(환경)마저도 길들이고 있다. 권력의 통치는 ‘지배’에서 ‘관리’라는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기계, 권력, 사회」)
사회의 풍경, 정치의 현실, 공론장의 환경, 그 모두가 암울한 느낌으로 온다. 너무 비관적인 전망일까. 정치학자 얀-베르너 뮐러의 정직한 진술이 시사적이고 외려 희망으로 다가온다. “현시점에 민주주의에 대해 낙관적이어야 할 이유는 딱히 없다. 민주주의의 수호자들이 위기대응 매뉴얼을 펴내느라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민주주의를 뒤집어엎으려는 자들도 포퓰리즘-권위주의 통치 기술을 완벽하게 다듬기에 여념이 없다. 경험했다시피 이런 상황에서 법원이 반드시 우리를 구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종국에는 결집한 시민만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민주주의 공부」) 거듭 반복되는 결론이지만, 세상의 변화와 쇄신은 시민의 변화와 성숙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민의 변화와 성숙을 담보할 수 있을까. 인간의 선한 본성과 능력을 믿고(「휴먼카인드」), 이성과 과학과 휴머니즘의 힘을 긍정하면 되는 것일까.(「지금 다시 계몽」)
의식과 문화의 변화, 구조와 제도의 변화 사이에서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기보다는 구조와 제도가 사유와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 구조와 제도의 변화는 중요하다. 하지만 구조와 제도의 변화를 초래하고 견인하는 힘은 사유와 의식의 변화에서 발생한다. 구조와 제도의 변화는 긴 여정의 사업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사유와 의식의 변화는 새로운 문화를 낳고, 새로 탄생한 문화는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구조와 제도를 요청한다.
구조와 제도의 변화, 법과 규범의 변화는 정치적 영역에 속한다. 정치적 힘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변화가 앞당겨질 수 있다. 변화와 쇄신을 위해 전위적 선구자들과 정치적 운동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구조와 제도의 변화는 의식과 문화의 변화와 함께 가지 않으면 늘 실패한다. 단기적으로는 구조와 제도의 우선적 변화가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의식과 문화의 변화가 담보될 때만 진정한 변화와 쇄신이 이루어진다. 사회(공동체)의 진정한 변화와 쇄신을 위해서는 선도적 정치가, 선구적 지식인, 깨어있는 시민들의 결합이 필요하다. 물론 시민 스스로가 좋은 정치인과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시민 의식을 담아내고 표현해내는 참다운 지식인, 시민들의 의식을 정치적 힘으로 구현시킬 수 있는 진정한 정치인이 가끔 그립다.
교육의 정상화, 공적 담론의 형성, 대안 문화의 구축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는 학교와 종교, 언론, 대중문화의 장에서 형성된다. 하지만 오늘날 이 모든 자리가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학교에서, 성당과 교회와 절에서, 공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언론과 공론장에서, 공동체적 가치와 문화가 제대로 전수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시민의 변화와 성숙은 교육과 종교와 언론의 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회의 문화적 토대가 형성되는 영역들의 변화와 쇄신이 긴급히 요청된다.
진정한 교육은 일방적 가르침과 지시와 훈육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참다운 교육은 공감과 인정의 방식으로, 대화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함께 하는 공부가 교육이다. 성공과 출세 지향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한 세상의 변화와 쇄신은 요원하다. 교육의 목적과 지향, 교육의 방식과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쇄신이 필요하다.
건강한 사회는 그 안에 좋은 공적 담론이 형성되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사회다. 성문화된 규칙과 규범을 넘어 진정한 가치와 정신을 담은 어떤 공적 담론이 형성되어야 한다. 올바른 가치와 삶에 관한 담론들이 공적 자리에서 이야기되고 또 사람들 마음 안에 자리 잡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공적 담론은 사람들을 이끄는 메시지로 작동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연대와 돌봄에 대한 공적 담론의 형성은 사람들을 더 연대하게 하고 타자에 대한 관심과 우애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우리는 문화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은 문화를 만들지만 동시에 문화 속에서 형성된다. 건강한 가치와 정신은 공적 담론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문화적 차원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사회의 변화와 쇄신은 새로운 정신을 담아내는 대안 문화의 구축에 달려있다.
교육 시스템의 쇄신, 건강한 공적 담론의 형성, 새로운 대안 문화의 구축이 공동체의 변화와 쇄신을 담보한다. 예수의 삶을 봐도 그렇다. 예수는 진정한 교사였고, 공적 담론의 예언적 선포자였고, 새로운 삶의 방식과 문화를 구축한 선구자였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2) 공부, 성찰, 일상의 수행
변화와 쇄신 위한 노력들이 세상과 교회를 바꾼다
개인의 변화와 성숙
늙어가면서 뼈저리게 절감한다. 삶의 연륜이 깊어간다고 자동으로 인격이 성숙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생활의 기간이 길다고 신앙이 저절로 깊어지지 않는다. 잘 늙는 일이 힘든 만큼, 신앙의 깊이와 성숙을 위해서도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삶의 영역이나 신앙의 영역이나 일종의 지불비용 없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으랴.
사제로서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았다. 거의 매일 미사를 한다. 성체성사의 은총을 매일 충만히 받는다. 하지만 내 신앙과 인격이 성품성사를 받고 초보 신부로 살았던 그 시절보다 더 나아지고 깊어졌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솔직히 고백하면, 빛나던 그 시절의 순수한 열정과 신앙이 이젠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다.
성사의 은총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지만 우리의 인격적 변화는 가져오지 못하는 것일까. 신학적으로 보면, 구원은 우리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 성취와 인격적 성숙은 구원과 별개의 문제다. 구원은 은총과 신앙 안에서 선물로서 주어진다. 구원과 은총이라는 차원에서 성사의 사효성을 우리는 믿는다. 하지만 우리의 인격적 변화와 성숙은 성사의 인효성 영역에 더 많이 좌우되는 것 같다. 정성과 마음의 집중 없이 그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성사 거행은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의미다.
지난 선거 과정을 지켜보면서 느껴지던 감상이 있다. 국가의 수준과 품격은 시민의 수준과 품격과 같이 간다는 것을 확인했다. 시민의 모습과 수준이 국가의 모습이며 수준이다. 탁월한 정치 지도자가, 어떤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 국가의 모습과 수준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다. 시민의 전체적 역량이 강화되지 않는 한, 국가의 진정한 변화와 품격의 향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한다.
교회의 변화와 쇄신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신앙인들의 모습이 교회의 모습이다. 신앙인들 스스로 신앙과 영성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진정한 변화와 쇄신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흔히 지위가 높고 권력이 있는 누군가가 선도적으로 변화와 쇄신을 주도해주기를 갈망한다. 물론 때때로 전위적 선구자들에 의해 동기가 유발되고 변화의 계기가 마련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공동체 구성원들의 전반적인 모습과 수준의 변화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변화와 쇄신의 움직임은 금방 동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세상과 교회의 역사 안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공동체의 변화와 쇄신은 그 구성원들의 변화와 쇄신과 함께 가야 한다. 그런데 과연 개인의 변화와 쇄신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흐르는 세월은 그저 타성과 관성만을 낳는다. 무엇이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있을까? 사람의 변화를 위해 개별적 차원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공부와 사람의 성숙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만이 머물지 않고 늘 변화하고 쇄신된다. 물론 지적 권력을 쌓아 인정 욕망을 채우고 지위를 추구하는 것으로서의 공부도 있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늘 열린 자세와 겸손한 태도로 배우고 공부하는 사람만이 그래도 조금 변화되고 성숙해진다는 것을 발견한다. 공부하고 탐구하지 않는 사람은 늘 자신의 기존 관점을 대상에 투사만 할 뿐이다. 대상과 관점의 상호작용에 따른 역동성을 놓친다. 언제나 같은 입장과 견해만 반복할 뿐이다.
공부란 타인의 생각과 경험을 듣고 배우는 일이다. 좋은 공부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세상과 교회의 모습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성찰하는 것이 공부다. 세상의 삶과 신앙의 삶에 대해 다양한 각도와 관점에 질문을 던지고 성찰하는 것이 참 공부다. 좋은 공부는 새로운 상상을 하는 일이다.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기존의 방식에 대해 균열을 일으키고 다른 방식으로 상상해보는 것이 공부다. 이러한 공부를 통해서만 우리는 조금씩 변해가고 성숙해질 수 있다. 공부가 전부는 아니지만, 변화의 기미는 공부에서 시작된다.
자기성찰과 쇄신
공부와 성찰은 경계가 애매하다. 생각하고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측면에서 공부와 성찰은 닮아있다. 성찰은 근본적인 질문들을 자기 자신에게 던진다는 데 그 방점이 있다. 성찰은 곧 자기성찰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찰의 진정한 의미는 타자 성찰, 즉 타인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때때로 타자의 옳고 그름을 식별하고 사회의 구조적 악을 식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성찰이라는 말보다는 비판의식과 비판적 사유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성찰은 먼저 자기를 돌아보는 일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 그래서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일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타자와의 공감과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자기성찰만이 변화와 쇄신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
일상의 수행
일상 삶의 모든 자리가 수행의 장소다. 수행의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선 자리, 자신이 살아가는 그 자리가 수련과 수행의 장소다. 우선, 일상의 수행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대응 방식에서 드러난다. 운명으로 다가오는 것들은 내가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응대하는 방식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 대해 신앙의 방식으로 응대하는 것이 수행이다.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 대해 신앙의 시선과 자세로 응대하는 일이 수련이며 수행이다. 둘째, 일상의 수행은 자신이 하는 일에 마음을 싣고 지향을 두는 일이다. 그저 반복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의 목적을 상기하고 기억하면서, 그 일에 건강한 신앙적 지향을 두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마음을 집중하고 정성을 들이면서 그 일을 수행한다면 그것이 곧 수련이다. 셋째, 일상의 수행은 연극적 수행의 형식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연극적 수행이란 하느님이 감독이며 제작자이고 우리는 삶이라는 연극 무대에서 공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모든 것을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삶의 무대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온 힘을 다해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연극적 수행이다.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응대 방식, 하는 일들에 대한 목적과 지향과 정성을 싣는 일, 연극적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변화되고 쇄신될 것이다. 공부와 성찰과 일상적 수행만이 우리를 성숙하게 할 것이다. 세상과 교회의 변화와 쇄신이 공부와 성찰과 일상의 수행에 달려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축소 환원일까. 변화와 쇄신을 위한 효과적이고 기발한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삶의 진실은 언제나 단순한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변해야 교회와 세상이 변한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1) 사회적 자아와 일상의 자아 사이에서
시민의 사회·정치적 의견 표출의 장… 선거가 끝났다
선거철 마음의 풍경
선거는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다. 정치적 사건은 사회적 파장을 낳는다. 선거는 선택과 결정의 장이지만, 그 결과는 어쩔 수 없이 후유증과 상처를 남긴다. 결과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민주주의 핵심이다. 하지만 사회적이고 외적인 수용과 승복과는 별개로 결과에 따라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힘듦과 아픔은 남는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는 사람들은 기쁠 것이고, 자신의 선택이 수용되지 않은 사람들은 좌절과 실의에 빠질 것이다. 냉정하게 살펴보면, 자신이 당선되거나 낙선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투표 하나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투표 하나에 얹혀놓은 생각과 마음과 감정과 의지의 무게만큼 기쁨과 좌절의 무게도 큰 것 같다.
왜 우리는 그 투표 하나에 그 많은 마음과 감정을 싣는 것일까.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는 않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저 무심히 지나가는 하나의 선거일 수 있다. 선거의 후유증은 정치적 관심, 사회적 관심이 깊은 사람들에게만 발생하는 것일까.
선거는 한 실존적 개인이 사회적, 정치적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공동의 장이다. 민주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에서 얼마든지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적, 사회적 주장과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국가와 사회의 방향 설정에 구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장은 선거다. 대의제 민주주의 사회에서 한 시민이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장은 그리 많지 않다. 시민은 선거 때만 주인의 역할을 한다. 오래 억눌려 있었던 주인의식을 선거라는 매개에 모두 쏟아부어야 한다. 그래서 선거철은 늘 정치적 과잉의 시기다.
나 역시 그랬다. 우리 세대는 젊은 세대보다 분명 정치에 민감한 세대다. 물론 그 정치적 예민성이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아무튼, 선거기간 동안 내 마음은 늘 롤러코스터를 탔다. 대선이라는 사회 사건과 현상 속에서 내 마음과 감정의 결이 어떤 진폭으로 움직이는지, 그 궤적을 기록하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생은 늘 기대와 희망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일부러 비관적 상황을 그려보기도 하고, 가능한 한 낙관적 생각을 하지 않는 모습을 발견한다. 생은 꼭 예상 밖으로 그 궤도를 더 많이 그린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재의 수요일에 잠시 반성했다. 우리 삶과 운명은 먼지와 재일 뿐인데, 뭐 그리 정치에 온 마음을 투사하며 살고 있는지. 선거의 장만이 정치의 현장은 아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일상 삶 속에서 더 나은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구체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참다운 정치 참여라는 말이다.
그저 마음으로 기도했다. 사람에 대한 예의와 존중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 당선되기를, 혐오와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펴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타자와 약자의 고통과 아픔에 연대할 줄 아는 사람이 당선되기를, 갈등과 분열을 넘어 평화와 통합을 추구하는 사람이 당선되기를, 생명과 환경의 문제를 깊이 성찰할 줄 아는 사람이 당선되기를.
선거의 영향과 정치적 동일시 현상
솔직히 고백하면, 꽤 오래전부터 정치와 권력의 뉴스를 잘 보지 않는다. 사회적 흐름과 현상들, 문화 영역의 움직임만을 눈여겨볼 뿐이다. 직업적 정치의 세계는 늘 소수의 권력자들과 정당 세력에 의해 좌우된다. 정치적 세력의 교체가 사람들의 개별적 일상 영역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에게 정치세력의 교체는 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가정방문과 봉성체를 다녀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시기에 약자들을 향한 복지혜택이 확연히 줄어드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선거에서 선택된 정치적 권력이 사회의 흐름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지, 사회적 약자들을 어떻게 돌보는지에 대한 관심과 감시의 눈길을 놓치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어떤 교체이든, 정치적 권력의 교체는 늘 정치적 힘과 경제적 부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막대한 이익과 혜택을 낳을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점 사람들은 물질적 이익과 혜택의 여부에 따라 정치적 선택을 한다. 이기적 개인주의와 부족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공동선과 사회적 가치를 지향하며 투표하지 않는다. 선거가 사회 공동체의 방향과 흐름을 올바르게 선택하는 축제의 장이라기보다는 이익을 추구하는 욕망들이 충돌하는 장이 되고 있다. 선거철에 우리는 권력과 이익에 따라 변해가는 사람들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정치학자들이 분석했듯이, 선거라는 현장에는 정치적이고 경제적 동질성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이념적이고 심리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어떤 정치적 세력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선거의 결과에 따르는 심리적 대리 만족과 위안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 기쁨과 만족은 허상일 때가 많다. 왜 가난한 이들이 계급적 동질성보다 심리적 동질성을 더 추구하는 것일까. 이념과 정서와 지역이라는 매개를 통해 심리적 동질성을 확보하려는 것은 인정 욕망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확장되고 연장된 자아를 통해 인정 획득의 영역이 확대되기를 원한다. 기득권 선망(羨望)이 ‘강자동일시’ 현상을 낳는다. 일상에서 인정 욕망을 채우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의 장에 욕망을 투사하는 것일까. 강자인 타자가 얻는 인정을 왜 자신이 받는 인정으로 착각하는 것일까.
일상, 실존, 운명을 생각한다
선거는 끝났다.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사회적 삶과 일상적 삶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또 어떤 관점에서 보면, 분명 다른 현장이다. 몸을 지닌 우리는 일상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거시 정치의 영역에서 일상의 미시 정치 영역으로 돌아와야 한다. 사회적 자아와 일상의 자아 사이에는 비판적, 심리적 거리가 필요하다. 정치적 현상과 사건에서 일종의 동일시 행위를 통해 희비가 교차하는 것과 실제 삶에서 우리가 직접 겪어야 할 운명들의 무게를 어떻게 감히 비교할 수 있을까. 일상에서 마주해야 할 실존적 삶의 무게들을 생각하면, 정치적 삶의 현장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은 부질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생계의 힘듦, 늙음, 질병의 고통,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운명을 생각한다.
선거의 결과는 우리에게 던져졌다. 정치적 사건의 결과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언젠가 죽음도 그렇게 다가올 것이라는 뜬금없는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아득하고 답답해졌다. 일상의 시간들을 더 소중히 보내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자고 결심한다. ‘신학서원’ 운동을 통해 사람들의 신앙적 성찰과 사회문화적 성찰의 힘과 우애와 연대의 감성을 키우는 데 노력을 기울이자고 다짐한다. 세상의 변화는 정치적 사건과 행위들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일상의 사회문화적 토대 안에서만 가능하다. 한 사회의 정신적, 문화적 토양의 구축과 변화에는 교육과 언론과 종교의 역할이 중요하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던가.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0) 사람과 책의 경계가 옅어지는 순간 - 읽기의 미학
읽기란 글 쓴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거룩한 의식
시 읽기에서 꼬리를 무는 생각들
습관적으로 시집을 산다. 시골에 살다 보니 서점에서 읽어보고 살 수 없다.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서 새로 나온 시집들에 대한 소개문과 간략한 내용을 보고 구입한다. 신문 문화면의 책 소개도 시집 구입에 영향을 미친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새 시집이 나오면 어김없이 산다.
책을 샀다고 해서 그 즉시 바로 다 읽는 것은 아니다. 책상에 쌓아두게 된다. 정독하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책들은 목차와 머리말과 일부 내용을 발췌해서 읽고 바로 책장으로 보내진다. 논문이나 글을 쓸 때 참조용 책들이다. 문학책들은 아무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물론 설렁설렁 읽지만 말이다. 젊은 날에는 평론과 소설을 많이 읽었다. 우리 젊은 시절에는 문학 평론가들이 당대의 지식인 역할을 담당했었다. 그 시절에 우리는 문학평론을 통해 지적 갈증을 채웠다. 하지만 이제 다양한 영역의 지식인들이 활동하는 시대다. 신형철처럼 탁월한 지적 역량을 보여주는 문학 평론가들이 있지만, 어느 시점부터 문학평론을 거의 읽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이젠 소설도 잘 읽지 않는다. 이성우, 김연수, 은희경, 황정은의 소설들만 듬성듬성 읽는다. 그래도 여전히 시집은 읽는다. 시집은 짧기에 그리 많은 시간의 품을 팔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집을 소설처럼 읽는다. 책상에 쌓아둔 시집들을 자주 숙제하듯이 읽는다. 시를 좋아하지만 불량하고 불경한 독자인 셈이다. 시를 낭독하는 즐거움, 암송하는 기쁨을 잘 모른다. 그저 시에서 사람들의 무의식과 미세한 감정의 숨결과 삶의 비의를 엿보려는 이기적인 애독자다. 가끔은 자신에게 변명한다. 내가 늙어서 감정과 정서가 건조해져서 그렇다고, 너무 많이 읽어서 오히려 긴장감을 잃어버려서라고, 요즘 젊은 시인들의 감성과 인식을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해서라고 말이다.
그래도 가끔은 확 다가오는 시들을 발견할 때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최근에 읽은 두 개의 시가 그랬다. “세상에서 가장 낡은 한 문장은 아직 나를 기다린다.” “나는 방금 씻어낸 글자들이 닿고 있을 생의 한 구절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지금 나는 그 세상에서 오래도록 낡아갈 하나의 문장이다. 언젠가 당신이 나를 읽을 때까지 목소리를 감추고 시간을 밀어내는 정확한 뜻이다.” 이동욱 시인의 시, ‘연금술사의 수업시대’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내가 쓴 한 문장을 네가 읽으면 두 문장이 된다.” “내가 읽은 문장이 네가 들으면 한 문장이 되지 않아도/ 우리를 주어로 삼으면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충분한 말이다.” 이종민 시인의 시, ‘우리가 문장이라면’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이 두 시의 화두와 구절들이 오래 머리를 맴돌았다.
읽기, 이해, 인정
사람을 읽는다. 글을 읽는다. 사람이라는 텍스트를 읽는 것과 책이라는 텍스트를 읽는 일은 묘하게 겹쳐 보인다. 책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사람과 삶을 읽는 것과,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과 몸짓과 표정을 통해 그와 그의 삶을 읽는 일은 적어도 나에게는 시작점과 지향점이 같다. 둘 다 사람과 삶에 관한 관심에서 출발하고 사람과 삶의 신비를 이해하려는 목적을 지향한다. 사람이라는 책에서 말과 행동은 글의 이야기 같고, 몸짓과 표정은 문장처럼 여겨진다.
사람과 책의 경계가 옅어지고 흐릿해지는 순간을 자주 경험한다. 나에게, 책 제목과 표지는 자신을 발견해달라는 요청의 신호이며, 문장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암호이자 기표다. 시인 진은영과 상담가 김경희는 「문학, 내 마음의 무늬 읽기」에서 “문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돌보는 활동”과 “문학과 만나서 스스로 변화하는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책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려는 시도다. 책을 통해 자신을 읽고, 타인을 읽고, 마음을 읽고, 삶을 읽는다. 어쩌면 읽기란 존재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인정하려는 포괄적인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발견하고 인정하고 이해하는 일만큼 아름다운 행위가 또 어디 있을까. 책을 펼쳐 본다는 것은 그 안에 담긴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고, 그 책을 쓴 사람의 운명을 긍정하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읽어주지 않은 삶은 서럽고 서글프다. 말을 듣고 글을 읽는 일은 말한 사람과 글 쓴 사람의 정체성과 삶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거룩한 의식(儀式)이다.
읽기, 만남, 돌봄
도서관과 서점과 책장의 책들은 사람과 삶이라는 우주의 신비를 발견해달라고 보내오는 미지의 신호다. 책을 꺼내어 읽는 일은 ‘미지와의 조우’다. 읽기는 만남이며 대화다. 읽기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개인적 세계에서 미동도 않은 채 타인과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다.” 읽기는 공감이며 “타인의 관점으로 옮겨가기”다. 읽기를 통해 “우리는 타자를 내면의 손님으로 맞는다. 때로는 우리 자신이 타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더욱 확장되고 강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적으로 감정적으로도 바뀌어 있다.”(매리언 울프, 「다시 책으로」)
읽기는 교감이며 연대다. 읽기는 타인과 공감하는 일이며 나아가 타인을 돌보는 일이기도 하다. 읽기와 돌봄을 연결하는 것은 너무 많이 나간 주장인가? 현대는 주체성의 시대라기보다는 타자성의 시대다. 개체성과 자율성보다 관계성과 상호의존성을 더 강조하는 시대다. 인간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이지만 또한 동시에 상호의존적이고 관계적 존재다. 이기적이고 개별적인 주체들은 계약을 통해 협력하고 살아간다. 계약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계약이 올바르게 수행되는가에 있다. 즉, ‘공정’과 ‘정의’가 중요한 미덕이 된다. 하지만 공정만으로 유지되는 계약사회의 한계와 문제점들을 우리는 코로나 시대에 쉽게 목격한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보살핌을 통해서만 우리는 생존할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공존한다. 관계성의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 덕목은 ‘연대’와 ‘돌봄’이다.
사목(pastoral care), 사회 복지(social care), 보편적 돌봄(universal care). 모두 돌봄을 매개로 사용되는 개념들이다. 신자들을 돌보는 일,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일,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를 향한 마음으로 돌봄을 실천하는 일”(김정희원 교수)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목의 지평은 세상을 향해, 자연과 우주를 향해 확장되어야 한다. 통합 생태론과 생태적 “신념, 태도, 생활 양식”을 강조하는 오늘의 가톨릭교회는 이 돌봄의 확장성을 먼저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읽는 일은 그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일이며, 그와 교감하고 그를 돌보는 일이다.
(시 두 편을 읽고 생각이 뜬금없이 너무 멀리 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읽기의 매력 아닐까?)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9) 사회 안에서 신앙의 모습과 역할
종교인들이 먼저 바람직한 삶을 사는 모범 보여야 한다
정치와 종교
선거의 계절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정치와 선거라는 블랙홀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정치인들이 메시아처럼 행동한다. 사람들도 정치와 정치인들에게 일종의 메시아 대망 사상을 투사한다. 자신이 지지하거나 선호하는 사람이 당선되어야 원하는 세상이 온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특정 정치인에게 투사해서 일종의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듯한 인상도 받는다. ‘강자 동일시’와 ‘기득권 선망’의 심리가 선거라는 장에서 어지럽게 춤을 춘다. 왜 선거는 난장판처럼 보이는가? 선거가 축제일 수는 없을까? 선거가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토론하고 판단해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선택의 장이 되질 않고 왜 감정과 욕망의 퇴행적 한풀이와 집단적 갈등의 장으로 변해가고 있는가?
선거 주자들이 종교 지도자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자주 접한다. 사회의 바람직한 방향 설정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세상을 향한 종교 지도자들의 비전과 지혜를 경청하기 위해서일까? 아닌 것 같다. 정직하게 말하면, 그 종교가 갖는 사회적 힘에 대한 인정과 그 종교에 소속된 사람들의 표를 계산한 정치적 행동에 불과하다. 정치인들이 종교 지도자를 방문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종교가 사회 안에서 상당한 정치적 힘을 가진 집단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현실의 반증이다. 현대의 거대 종교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회 안에서 하나의 커다란 힘으로 기능한다. 힘은 언제나 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 과연 오늘의 종교는 자신이 가진 사회적 힘을 건강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신앙의 관점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식별하고 그것을 용기 있게 선포하는 일은 중요하다. 가톨릭교회는 사회교리의 이름으로 이를 수행해왔다. “교회가 고유한 사회교리를 발전시키고, 사회교리와 거기에서 나오는 책임과 임무로써 사회와 사회 구조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야말로 교회의 권리이자 의무이다.”(「간추린 사회교리」, 69항) 하지만 이제 단순히 정치적 올바름만을 선언한다고 해서 왜곡된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치적 올바름마저도 한쪽 편의 이념으로 치부해버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후기자본주의 체제는 모든 것을 이기심과 욕망의 문제로 환원시켜버린다. 정당한 비판도, 억울한 사정의 호소도, 그저 모두 한쪽 편의 이기적 주장과 이념으로 매도해버린다. 심리학자 키스 스타노비치의 지적은 서늘한 느낌으로 온다. “우리 사회의 고통은 ‘우리편 편향’ 때문에 발생한다. 바로 자신의 기존 신념·견해·태도에 편향된 방식으로 증거를 평가·생성하고 가설을 검증하는 현상이다. 우리는 탈진실 사회가 아니라 우리편 편향 사회에서 살고 있다.”(「우리편 편향」)
정치적 올바름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사회적, 시대적 의제와 비전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소설가 김훈은 “대선에서 생명과 안전의 의제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화려한 정치적 구호만 난무하고 있다. 가난한 시민과 노동자들은 여전히 힘든 삶을 견뎌내야 하고 생명을 담보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종교가 더 넓고 열린 시선으로 정치의 장을 이성과 합리적 선택과 사회적 조율의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고 또 어떤 역할을 담당했으면 좋겠다.
세상 안의 신앙
탈진실의 시대, 우리편 편향의 사회에서 신앙은 어떤 모습으로 서 있고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가? 신앙은 사회적 삶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동성애, 낙태, 사형제도 문제 등 사회문화적 영역에서 신앙은 교리의 이름으로 가치관 형성과 제도 변화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정치와 경제의 영역에서 신앙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인상이다. 사람들은 정치와 경제의 영역에서는 철저하게 세속의 논리와 방식으로 살아간다. 정치적 삶과 경제적 삶에 있어서 신앙인들은 자신의 신앙적 가치와 신념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가? 권력(힘)과 자본(돈)의 문제에 있어서 신앙인들은 신앙의 시선으로 식별하고 행동하는가? 냉정하게 말하면, 신앙은 교회 안의 삶과 사회문화의 영역에서만 작동될 뿐이다. 신앙은 성당 경계를 잘 넘어서지 못한다. 성사와 전례 안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수행하지만, 세상의 삶 안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신앙은 삶의 모든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과 방식으로 삶을 살아내는 일이다. 교회의 담장을 넘어서면 사라지는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다.
오늘의 세상 사람들에게 신앙과 신앙인들의 모습은 어떻게 서술되고 있을까? 물론 영웅적 신앙인들과 일상의 성인들도 있다. 하지만 혹시 신앙은 오늘의 사회 안에서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작은 방법”인 「별것 아닌 선의」(이소영)나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문유석)로서의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희덕 시인은 최근 발간한 시집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피, 땀, 눈물. 이 세 가지 체액은 늘 인간을 드나든다. 마음이 기우는 대로, 피와 땀과 눈물이 흐르는 대로 가보면, 통증과 배고픔과 추위를 느끼는 영혼들 곁이었다. 시는 영원히 그런 존재들의 편이다.”(「가능주의자」) ‘시인의 말’은 오늘의 종교와 신앙이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신앙이 세상의 모든 자리에서 이성적 성찰의 힘으로, 선의의 힘으로, 고통과 슬픔을 공감하고 연대하는 힘으로 작동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종교와 신앙의 모습에 대한 반성
종교인들은 반성해야 한다. 종교에 부여된 도덕적 우위의 지위를 통해 말의 올바름만 추구했었다는 것을 말이다. 일상의 구체적 삶의 증거로서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했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겸손하게 경청하는 삶의 자세와 태도를 보이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종교인들이 제대로 신앙을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은 그저 종교의 영역에서만 작동되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신앙이 올바른 삶을 살아가게 하는 내적 힘으로 작용하지도 않는다. 신앙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종교 역시 하나의 이익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사회적 삶 안에서 신앙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 신앙은 그저 성당과 교회와 절에서만 작동될 뿐이다. 사람들은 실제 삶에서 외적으로는 자본과 권력의 힘을 추구하고, 내적으로는 감정과 욕망을 건드리는 우상과 미신에 더 의존한다. 내적 욕망을 자극하는 우상과 미신에 대한 추종은 자본과 권력의 어두운 면을 더 강화할 뿐이다.
종교인들의 선포와 선언은 언제나 실천 속에서 힘을 얻는다. 먼저 종교인들이 구체적으로 더 나은 삶, 바람직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 호소력은 언제나 모범과 열린 태도에서 나온다. 종교인들이 더 열린 자세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자신이 먼저 실천하며 모범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종교인들의 선포와 선언은 더 설득력 있게 될 것이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8) 가톨릭 지성과 세상 읽기
오늘날 교회, 경청과 식별 위한 신앙적 지성 절실히 요청
경청, 읽기, 식별
오늘날 ‘경청하는 교회’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주장하고 가르치려는 경향이 강한 세상에서 경청하고 배우는 행위는 중요한 미덕이다. 하지만 경청의 행위는 많은 수고와 노력을 요청한다. 경청한다는 것은 단순히 타인의 말을 듣는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경청의 행위 안에는 말하지 않는 것, 발화되지 못한 말도 들을 수 있는 태도와 능력이 포함된다. 경청은 타자의 말과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진정한 의미와 의도를 정확히 읽어낼 수 있어야 하고, 타자가 말하지 않거나 말하지 못한 것들마저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경청은 대상을 향한 정밀한 읽기 행위다.
교회의 문맥에 있어서 경청의 대상은 사람들의 생각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경청의 대상은 무엇보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이다. 경청은 성경을 읽고, 역사와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읽는 것이다. 성경과 교회의 역사적 전통과 오늘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읽어내는 일은 해석과 식별의 과정을 내포한다. 성경을 해석하는 일, 교회 전통을 이해하는 일, 오늘의 세상을 식별하는 일은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경청은 읽기와 식별의 행위를 포함하는 고도의 작업이다.
정확히 읽는 일, 섬세하게 식별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식별은 판단과 비판이라기보다 섬세하고 정확하게 읽는 일이다. 식별은 하느님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다. 세상을 읽는 일, 시대의 징표를 읽는 일은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 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다. 복잡한 사회와 복합적인 사람들을 읽고 식별하기 위해서는 인문사회적이며 자연과학적 역량과 지성이 필요하다. 전통적인 철학과 신학의 시선으로 읽어내기에는 현대 사회와 문화는 너무 복잡하다. 변해가는 세상을 읽어낼 수 있는 지성적 역량의 부재를 교회 안에서 자주 실감한다.
교회 안의 신앙적 지성 부재 현상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급속한 변화를 따라가면서 시대를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과학기술과 미디어 문화의 발전을 통해 매우 복잡해진 인간 삶의 현상들은 교회의 역량만으로 분석하고 읽어내기 어렵다. 현대 교회 역사가 마시모 파지올리는 한 칼럼에서 오늘의 교회에서 자주 발견하는 지성의 부재와 문해력(literacy) 부족을 뼈아프게 지적한다. 세상을 정확히 읽고 복음의 진리와 가치를 설득력 있게 선포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더 세상과 대화하고 세상의 현자들에게서도 배울 수 있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파지올리는 진단하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레트로토피아」에서 서술했듯이, 복잡하고 변덕스런 현재와 불확실하고 불안한 미래에 대한 전망은 과거로 도피하려는 경향을 낳는다. 오늘의 교회 역시 시대와 문화의 도전에 맞서 싸우지 못하고 과거로 회피하려는 태도를 은연중에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파지올리는 교회가 “거대한 문화적 도전 앞에서 지적 무장해제”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교회 안에 지성적 열정은 사라지고 부정적 뉘앙스의 경건주의만 강화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물론 경건주의 자체는 종교에서 소중한 흐름이다. 하지만 때때로 경건주의는 형식주의와 엄숙주의 형태로 작동된다. 종교적 감정만을 강조하는 왜곡된 경건주의는 혐오와 배제를 기반으로 하는 이념화된 종교의 모습으로 전락할 위험이 많다.
교회 안의 신앙적 지성의 부재는 다양한 원인에서 비롯된다. 정직하게 말하면, 신앙의 전통을 정확하게 읽고 해석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읽고 식별하기란 어렵다. 교회의 역량만으로는 세속의 급격한 변화를 따라잡지도 못한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자칫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도 있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의 본업에 집중하려는 전략적 태도를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앙적 전통에만 집중하고 세상의 문화를 단순히 세속주의로 치부하고 배격하는 것은 오만한 무지다. 교회는 신앙적 전통과 세상의 문화를 언제나 함께 안고 가야 한다.
교회 안의 신앙적 지성의 부재는 성직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파지올리는 주장한다. 그는 신학교 교육의 문제점을 말한다. 오늘의 신학교 교육이, 성직자의 성적 스캔들에 대한 예방적 방법으로서, 강화된 인성 교육과 심리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경향은 어쩔 수 없이 신학적이고 인문사회적인 지성 교육의 소홀로 이어질 수 있다. 성직자들의 지속적 양성 교육의 부재, 고위 성직자들의 고령화 현상은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신앙의 시선으로 식별할 수 있는 교회의 능력을 위축하게 하고 있다고 파지올리는 진단한다.
가톨릭 지성의 부활을 위하여
역사를 돌아보면, 시대 안에서 지성이 언제나 바른 역할을 수행한 것은 아니다. 지성과 지식이 삶과 연결되지 않아 공허한 앎으로 전락한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성과 지식이 권력과 자본과 결탁해서 올바른 사회적 힘으로 작동되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더욱이 오늘의 시대는 이성보다 감정과 욕망이 더 중요한 시대다. 그래서 더 역설적으로 이성이 요청되는 시대다. 감정과 욕망에 충실한 현대인들이 빚어내는 현상들을 우리는 쉽게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의 모든 자리에서 이성은 사라지고 감정과 욕망만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다고 스티븐 핑커(「지금 다시 계몽」)와 조지프 히스(「계몽주의2.0」)처럼, 계몽주의적 이상을 다시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지성(이성)의 역할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가톨릭의 빛나는 전통은 언제나 신앙과 지성(이성)을 두 축으로 움직여 오지 않았던가.
지성의 부활이 지성주의(intellectualism)의 귀환을 뜻하지는 않는다. 지성과 지식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지성주의는 지식인들의 한 시절의 오만일 뿐이다. 지적 우월주의가 아니라 신앙적 지성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신앙은 이성을 포함하지만, 지성은 언제나 이차적이다. 신앙도 삶이 먼저다. 앎은 삶에서 나온다. 지성적 행위로서 신학은 이차적 작업이다. 신학이 신앙보다 앞설 수는 없지만, 올바른 신앙을 위해 신학은 필수적이다. 시대의 징표를 읽어내고 식별할 수 있는 신학의 부재가 교회 안의 신앙적 지성의 부재를 알리는 증거다. 사실, 가톨릭 신학은 그 본성상 전통과 시대를 동시에 읽으려는 노력의 산물이 아니던가?
공부하는 지성이 절실히 요청된다. 지식이 단순히 정보의 취득으로 전락하고, 공부가 욕망 실현의 수단으로 전락한 시대이기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지성과 신앙의 일치와 균형을 강조하는 가톨릭 신앙의 이상(理想)이 더 매혹적이지 않을까? “리터러시가 공동체적으로 갖춰지면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된다.”(조병영) 교회의 지성, 교회의 문해력이 성장하기를 희망한다. 경청과 읽기와 식별을 위해 신앙적 지성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