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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효과적인 스피치
우리 중에 스피치를 잘 하는 사람들이 많지를 않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수 있는가?
일상 대화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확인해 보면 알 수 있다. 의외로 우리가 서로의 이야기를, 말을 잘 이해 하고 있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내가 한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채, 그렇게 상대에게서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해와 갈등, 그리고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우리는 어느 정도 스피치의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다. 이 쪽의 말을 듣는 상대방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가치관의 틀로 우리의 말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내 말이 전달되는지 확인하고, 내가 잘 전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훈련은 중요하다.
이것은 대중강연, 말씀을 전한다거나, 아이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등 대중적인 스피치 뿐만 아니라 일상 대화 중에서도 중요한 일이다. 개인적인 대화를 나눔에 있어서도 어떤 사람의 경우는 상당히 재미있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의 경우는 재미없는 경우가 있다.
결국 스피치의 능력의 문제인 것이다.
대개 우리는 '스피치', 곧 '말을 요령 있게 잘 하는 것'을 대중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에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일상적인 대화에 '스피치 훈련'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실제는 한 사람에게 말하는 것 보다, 대중에게 말하는 것이 쉽다는데 있다. 용기를 가지고, 두려움을 극복한 경우라면 사람이 많은 경우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더 쉽다.
한사람을 설득시키는 것은 천명을 설득시키는 것보다 더 어렵다. 한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으면 천명을 설득시키는 것은 굉장히 쉽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일상생활 속에서 대화를 나눌 때 훈련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이제 교사로서 아이를 가르치는 스피치와 연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1. 처음부터 집중시키라.
이것은 서론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현대 설교학에 있어서는 갈수록 서론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있다. 이것은 20초, 30초 사이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오늘날의 설교 메시지나 강연은 "처음 1분이 승패를 가늠 한다"는 것이 통상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처음 1분 말을 듣고 청중은 이제 다음의 본론을 미리 판단한다는 말이다. 이 사람이 시작하는 말을 듣고, 이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경우는 듣는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옳은 자세는 '재미있든 없든 끝까지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신실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기부여에서 얘기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기 부여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교회에 참석한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사람이, 설교자가 처음부터 그들을 사로잡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냐면 이제 전해지는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전하는 자가 일방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이것을 어떻게 '듣는 이'에게 심어주어서 '아, 이 이야기는 중요한 것이구나'고 느낄 수 있도록 동기부여 하는가는 중요하다.
듣지 않는 메시지는 가치가 없다. 아무리 진리라도 들어야만 사람은 변화된다. 들어야만 동기부여 된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출발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상대방이 들을 준비를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마음을 열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마음이 열려져 있지 않는데 하나님의 진리가 심겨질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 4가지 밭을 얘기했다.' 처음부터 사로잡는다는 것'은 마음 밭을 갈아서 준비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이런 이야기를 내가 한다면 어떨까?
"여러분 살기 힘들죠? 돈 쉽게 버는 법 제가 가르켜 드릴께요."
집에 가는 사람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제가 한달 만에 특별한 방법으로 1000만원 벌었습니다. 그 특별한 방법을 공개하겠습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거리에 있는 사람까지 다 뛰어 들어올 것이다.
물론 뒤에 아무런 내용이 없는 충격적인 서론은 문제가 있겠지만 어쨌든간에 '사로잡는다'는 것은 처음 시작부터 중요하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의 책에서는 3가지를 얘기했다.
첫째, 충격적인 질문으로 시작한다.
러시아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이나 당나귀나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그들의 주위를 집중시키려면은 그들의 귀를 꽉 잡아야 한다."
충격적인 질문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의 귀를 꽉 잡는 효과가 있다.
우리도 TV를 보다가 화면이 갑자기 바뀌면서 "지금부터 긴급뉴스를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나오면 거의 대다수가 하던 일을 멈추고 TV를 볼 것이다.
실제 나도 일하다가 긴급 뉴스가 나와서 하루종일 그것을 보았던 경험이 있었다.
삼풍 백화점 사건이라던가 비행기 폭파사건등이 일어났을 때가 그 때였다. 긴급 뉴스가 나오고 난 후부터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충격적인 이야기라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진다.
유명한 설교자이면서 [강해설교]라는 책을 쓴 '하돈 로빈슨'이란 사람이 있다. 이 분은 자기 책에서 서론이란 부분에서 이런 예를 한 가지 든다.
"만약에 하나님께서도 죽으실 수가 있으셔서 오늘 돌아가셨다면 우린 얼마 만에 그 사실을 알 수 있을까?"
이건 굉장히 독특한 질문이지 않는가? 그렇지만 뭔가 생각하게끔 하지 않는가? 다음은 내가 자주 드는 예다.
"여러분 남자와, 여자 누가 머리가 더 좋겠습니까? 왜 여자가 수염이 나지 않는지 아십니까?"
또 이런 서론도 있다.
"제가 며칠 전에 병에 걸렸어요, 저는 제가 병에 걸렸던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상당히 솔깃한 내용이다. 물론 뒷부분에 가서는 이런 내용이 된다.
"전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게 되어서 상사병에 걸렸어요."
많은 좋은 설교들이 질문으로 많이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설교에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은 질문이라던가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던짐으로서 많이 시작하는 경우를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설교를, 강의를 '질문'으로 시작하지는 말라.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이런 것 하나 배워서 ,흔히 쓰는 표현대로 '칼 하나 가지고 소나 돼지나 막 잡는다.' 배운 것 하나 가지고 아무데나 다 써먹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항상 다양하게, 그리고 상황에 맞게 해야 하는 것이다. 질문이 좋다 해서 매일 질문만 던질 수가 없다.
두 번째로 예화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줌으로써 설교를 시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얘기가 있을 수 있다.
"우리의 고정 관념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을까, 1950년대 신문 기사를 보면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현실적으로 마라톤이 2시간 10분대로 뛸 수 없다. 그건 불가능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심장이 파열될 것이다] 재미있지 않는가?
지금 세계 신기록은 2시간 7분대이다. 그것도 언제 깨질지 모른다. 고정 관념은 얼마나 위험한가?"
이렇게 스토리나, 어떤 내용의 인용이라던가, 예화, 이야기 같은 것으로 서론을 시작하면서 주제로 접근해 나가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서론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사실, 처음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하냐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오늘날 설교학에서 가장 비중을 두는 것이 서론부분이다.
사실 본론에 중점을 둬야 하는데 그만큼 서론이 중요하기 때문에 서론에 중점을 많이 둔다. 말씀 준비를 다 마쳤다 하더라도 서론부분을 또 다시 준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말씀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서론은 참 흥미롭다. 오순절 날도 특별한 방법으로 서론을 시작했다. 하나님이 백성의 관심을 집중시킨 방법은 희한한 일이었다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서 사람들이 전부 방언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니 모든 사람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러고 난 후 베드로가 일어나서 이야기 한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빈정댄다. "이상한 것 아니냐?"라고. 그런데 베드로는 말한다. 이 사건은 이미 성경에 예언된대로야!라고. '그래? 이런 희한한 일이 성경에 나온다고?' 사람들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듣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그 베드로의 메시지를 다 듣고 난 후 그들은 반응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성경의 결과대로 회개하고 죄사함 받고 구원받으라고 베드로는 권면했고, 그 결과 3000명이 구원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도 사람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집중시켜서 듣게 한다. 그러므로 서론을 어떻게 시작할 것이냐를 많이 준비해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 많은 예화를 우리가 알아야 한다.
일상 생활에서 관찰훈련, 영적인 묵상훈련을 통해서 스스로가 얘를 통해서 들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좋은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고, 이런 살아 있는 이야기를 했을 때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신문 기사를 인용한다거나, 데이터를 보여 주는 등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들을 때, 설교를 들을 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서론이 잘못되었을 때나 식상한 시작을 할 때, 많은 경우 우리는 별반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너무나 상투적이고 획일적인 이야기에 질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칠때 그래서는 안된다. 늘 이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깨달음과 우리 자신의 새로운 발견을 이야기한다면 사람들은 결코 식상하지 않을 것이요, 예측할 수 없는 신선함을 느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말씀 하실거야. 뻔하지 뭐'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결론에 가 봐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처럼 우리의 메시지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도록 우리는 계속해서 연구를 해야 한다. 할 수 있는 한, 서론에 많은 생각들을 가져야 하고 연구하라.
잘못된 서론들
이번엔 잘못된 서론 몇 가지를 지적해 보자. 세미나를 하는데 참석해 봤더니 강사가 이런 얘기를 한다.
'사실 제가 많은 준비를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과 함께 많은 얘기를 해 보길 원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
'준비도 안 된 세미나를 왜 들어야 하는가?'
이것이 우리의 마음일 것이다. 얼마나 기분 나쁘겠는가? 선생님이 수업하러 들어 왔는데 '사실, 나 준비 하나도 못했다.'라고 하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가끔씩 교회에서나, 어떤 발표회에서 사회를 하는 사람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경우를 본다.
'사실 이번에 청년, 학생들이 시간이 없어서 준비를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쁘게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준비도 못 했는데 어떻게 이쁘게 봐 주는가 말이다. 그렇지 않는가? 그것은 솔직함이라기 보다는 지혜없음이다. 이쁘게 봐 줄려고 맘을 먹어도 잘 하지 못하면 이쁘게 봐 줄 수 없다. 이미 '준비 안된 내용이니 별 것 없겠군'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지켜보기 때문에 좋게 보일리 없다.
사회가 망쳐 놓는 경우다. 마음을 돌려 놓은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그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러분 정말 잘 오셨습니다. 여러분들은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감동적인 연극을 보여드릴 것입니다. 비록 많은 시간을 들여 연습하진 못했지만 온 정열을 쏟아서 연습한 이 연극을 통해서 하나님이 축복하실 줄을 믿습니다.'
다 맞는 말이다.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은 틀림없고 감동이란 것은 주관적인 것이다. 감동받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보면 감동받는다. 재미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재미가 없을 것이고 내용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고 느끼는 것은 그렇다는 것이다. 준비된 마음으로 보면 다 재미있다. 또 준비를 못한 것을 못했다라고 할 필요는 없다. 열심히 했다고 하면 된다. 연습한 시간은 적었지만 열심히 했을 것 아닌가, 시간이 부족할수록 온 정열을 받쳐서 열심히 했다고 하면 듣는 사람도 흐뭇해 할 것이다. 그러면서 보기 시작할 것이다.
사실 조그만 교회들에서 하는 연극이나 발표들이 대단하겠는가? 배우도 아닐뿐더러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다.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연습 못했다라고 하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는가? 바쁜 시간 내서 온 사람들인데 상대방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또 어떤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이렇게 얘기하는 경우를 듣는다.
'사실 저는 말씀의 은사도 없고, 말씀도 사실 아는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깨달은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의외로 이렇게 말을 시작하는 분들이 많다. 사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다. 그런 경우, 듣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앞에 했던 말은 거짓말이라 생각하게 된다. 왜냐면 시작은 그렇게 해 놓고는 침을 튀겨가면서 할말 못할 말을 다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론을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안한 마음과 대적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 그래서 그것을 겸손으로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다.
마찬가지로, 학생회 교사로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될 것이다.
'난 잘 모르지만 너희들과 말씀을 나누기를 원해'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이기 때문에 사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진리를 원한다. 확실한 것을 원한다. 교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을 전해주길 원한다. 지금과 같이 불확실한 시대에서는 교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을 전해 듣기를 원하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말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확신과 성령으로 너희에게 전했다고 말하지 않는가?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는 확신 가운데서 전했다.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이것은 분명한 진리이기 때문에 확실히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서론에서 우유부단한 표현과, 뭔가 모른다는 것과, 사과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사실 제가 준비를 못하고 왔습니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말 할 준비도 안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해있는' 내가 왜 들어야겠는가? 그렇다. 그런 경우 얼마나 인생이 아까운가?
여러분들은 교사이기에 분명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강의를 할 것이다. 혹시라도 나와서 이렇게 얘기하지 말기를 바란다.
'사실 잘 몰라요,
그것은 솔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말이다. 앉아 있는 사람은 그것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내가 확실히 아는 것, 그것을 듣고 싶어 한다. 아무리 몰라도 아는 것이 있을 테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확신 있지 않는가.
복음 전할 때도 그래야 한다. 내가 진리를 다 몰라도 복음은 확실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할 때 우리는 담대하고, 당당하고, 확신에 차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확실히 책임진다'는 태도를 가지고 말하는데 그 이야기를 누가 싫어하겠는가?
2. 내용의 전달
그러면 내용을 보자. 내용을 분명히 전해야 한다.
1. 무엇을 말할 것인지 알라.
이것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사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준비한 이야기는 확실히 얘기할 수가 있다. 무엇을 말할 것인지 알아야 한다. 본인을 보면 일상적인 대화를 잘 살펴보길 바란다..
둘만의 대화도 생각을 하고 말해야 한다. 내가 무엇을 간단한 대화를 할 때에도 1분이라도 생각해 보라. 그러면 한결 말하기가 쉬워지고 다른 소리를 안 하게 된다. 다른 사람도 듣기를 편하게 들을 수 있다. 본인은 습관적으로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무엇인가를 질문했다거나 말하려고 할 때 습관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 문제는 세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는데..."
" 그것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반대로 부정적인 면에서는..."
이렇게 대화를 하게 되면 물론 익숙하진 않을 경우지만, 듣는 사람이 너무 편하다. 이것은 훈련에 의해 가능하다. 여러분도 할 수 있는데, 질문을 받고 나서 잠깐 생각해 보면 한 두가지 할 말이 생각이 난다. 그러면 잠깐 더 생각을 하고 무엇을 말할 것인지 마음으로 정리를 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말을 하고 난 후에는 다시 한번 내가 한 말을 짧게 요약해 준다. 이것은 대단히 효과적인 스피치의 훈련이 된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고 시작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의 말씀은 준비를 해야 한다. 준비 없이 말씀을 증거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이 그렇게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우리 입에 무엇을 말하게 할 것인지 알게 하리라 하는 것은 공회에 잡혀 갈 때의 경우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오랜 시간동안 준비하시고 철저한 계획 속에 행하셨다는 것을 얘기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준비하고 계획하고, 성령님을 의지해서 능력과 확신과 성령으로 증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2.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실제로 우리들은 자신이 말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이런 경우를 우리는 '삼천포로 빠진다'는 둥, 횡설수설한다는 등의 표현을 쓴다. 말을 하는 것에는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내용은 실제로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할 때, 잘 전달되게 도와주는 방법이다.
첫째, 문장을 길게 나열하지 말라.
참 언변이 없는 분들의 특징은 문장이 길다. 글과 말도 길다. 길면 듣고 읽기가 힘들다. 어떤 사람은 정말이지 말씀을 전할 때, 알아듣기가 힘들었기에 내가 아예 연구를 해 봤다. 그 날도 나는 너무 마음의 준비가 잘 되어서, 충만한 가운데 말씀을 들으려고 나왔다. 그런데도 10분을 집중해서 들을 수 없었다.
나의 문제는 분명 아니었다. 그의 문장이 너무 길고 복잡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약 교사대학이라는 주제로 처음시간에 이렇게 말을 한다면 어떨까?
"여러분 참 반갑습니다. 제가 여기에 서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저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함께 더 나은 교사로서의 자세에 대한 성경적인 문제를 상고해 보도록 허락하셔서 제가 지금까지 상고하고 조사해본 성경적인 것과 또 이야기하면서 들어본 내용인데 많은 사람들과 얘기도 했고 상담도 해 보기도 한 내용이기도 한 그 문제를 친분이 많은 여러분들과 나누게 된 교제의 기회를 얻게 되어서 참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제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중요하다고 느끼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점들이 감동적이고 좋고 너무나 제 마음에 와 닿아서 여러분들에게 알려 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제 개인적으로 들어서 이런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우리의 문장은 주어, 목적어, 서술어 이렇게 되어 있다. 이런 문장, 사실 열 문장 짜리인데 이것을 한 문장으로 연결되어 말하면 듣는 이가 혼란스럽다. 위의 내용을 짧은 문장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교사라는 주제가 너무 중요합니다. 함께 공부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 교훈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저와 함께 이것을 나눌 때, 하나님이 놀라운 교훈을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문장을 길고 복잡한 한 문장으로 만들었을 때, 참 머리가 아프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메시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시험 삼아 여러분이 나중에 편지를 한 번 써 보도록 하자. 그리고는 여러분의 문장을 분석해 보라. 또는 여러분이 쓰는 문장이 어떤지 옛날의 편지를 분석해 보라. 그래서 그 글의 좋고 나쁨을 평가해보고, 긴 문장들을 짧은 문장으로 고쳐보라.
잘 들리는 이야기는 문장이 짧다. 문장을 연결시키는 것은 잘 해야 본전이다. 그것은 능숙한 솜씨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문장을 연결시키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문장을 연결시키는 이유는 반복적인 단어를 없애고 비슷한 내용, 또는 반대되는 것을 이해하기 쉽도록 한 문장 속에서 넣어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고도로 훈련된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짧게 해야 한다.
그것을 습관적으로 훈련을 해 보자. 카세트로 대화를 녹음해서 대화의 핀트와 주제를 파악하고 있는지, 문장이 괜찮은지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훈련된 사람일수록 이런 것을 잘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러 사람들로부터 편지나 E-mail을 받는데, 몇 줄만 읽으면 그 사람의 언어 능력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문장이 복잡하다. 복잡한 표현일수록 생각이 복잡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쉽게 말할 수 있는데 어렵게 말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혹은 잘난 척 한다거나 쉬운 표현을 어렵게 하는 류가 아니면 다들 쉽게 표현하려 한다. 그것이 커뮤니케이션의 특징이다.
예전에 청년시절, 본인이 첫 번째 메시지가 실패했다고 했지 않는가? 이것을 '죽쒔다'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제 첫 번째 메시지는 여러 사람들이 듣고 마음에 갈등도 할 수 있는 메시지고 상당히 불투명하며 주제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어렵게 생각할지도 모르는 어려운 메시지였습니다." 이런 것들을 단 한마디로 "죽썼습니다."라고 하면 애들도 알아 들을 정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경우는 굉장히 어려운 표현을 하지 않는가? 명확하게 단어를 알지 못하는 경우는 비슷한 단어를 다 써야 되지 않는가? 문장을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하자.
어떤 사람은 이런 얘기를 했다. '역시 신령한 사람들은 내용에 깊이가 있어. 내용이 잘 이해는 안 되지만 뭔가 깊이 생각하게 만들어'
그런 말을 들으면 답답하다. 얼마나 어리석은 오해인가! 좋은 내용은 '깊이 들여다보고 무슨 뜻인가' 생각케 하지 않는다. 때로 하나님의 말씀처럼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은 저 에디오피아 내시의 경우에는 그럴 수 있지만 좋은 내용의 글은 쉽게 읽히고, 쉽게 이해된다. 다만 그 내용이 너무 좋아서 깊이 묵상하고, 반성하게 만드는 것이지 무슨 말인지 몰라서 들여다 보고 앉아 있게 하지는 않는다. 외국의 성도들의 글이 깊이 들여다 봐야 이해되는 이유는 '번역된 글'이기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금방 이해하기 어려우니깐 “굉장히 수준이 높을 것이다“ 고 말하지 말라. 그렇지 않다. 성경이 어디 어려운 책인가? 이방인의 경전처럼 애매하면서 복잡한 것인가?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질 않으신다. 이 깊이 있고 생명을 바꾸는 놀라운 말씀도 실제로는 간단 명료한 표현을 쓰고 있고,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서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누가 읽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므로 복잡하고 어려운 표현이 유식하고 깊이 있는 내용이다.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평생에 소원을 가지길 '나는 쉽게 간단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라고 기도하길 바란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변화시킬 수 있다.
덧붙여서 특별히 기도할 때 쉬운 표현을 쓰자.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하여 주시옵고... 말미암아...' 이런 표현들이 우리에게 습관이 된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상 대화 속에서는 좀처럼 그런 옛날 사람들의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렇게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멋있어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때 하나님 앞에 좀더 가까워진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오해이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어린아이 같기를 바라신다. 다윗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면, 왕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처럼 말했다. 그것은 아버지 앞에 정직하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저는 정말 괴롭습니다. 저를 좀 도와 주세요'
이것은 얼마나 솔직한 표현인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지 말라.
'아버지 하나님, 제 생활의 모든 것을 아시고 앉으나 서나 다 아시고 아버지께서 다 감찰하여 주시니 이제와 제 삶의 중심을 하감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왜 그런 표현을 했을까? 요즘 누가 하감하여 달라고 말하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이런 표현을 쓰는가? '하나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고...' 조선시대에나 쓸만한 표현이지 젊은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아버지, 제 용돈이 떨어진 것을 감찰하여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질 않는다. 어려운 표현을 쓰지 말라.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고'라는 표현을 안 써도 된다. 그저 '창에 찔리셨다'고만 하는 것이 간명하다.
셋째, 논리적으로 전개하라
글이나 이야기에도 서론, 본론, 결론이 있다.
우리가 편지를 한번이라도 써 본 사람이라면 논리적으로 말을 나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안다. 말에 논리성이 없을 때 우리는 그런 것을 '뒤죽박죽 되었다'고 표현한다.
"
대화 중에도 이야기를 해 나가다 소위 말하는 '삼천포'로 종종 빠지곤 했다. 그 모든 것이 [논리적으로] 말하는 훈련이 안된 결과였다. 중요한 말과 사족을 구분하지 못해서 무분별하게 이야기함으로 빚어진 결과였다.
지금은 예전의 모습에서 많이 발전했다고 느끼지만 여전히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감성적으로 사고하기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특징상 우리는 [논리적 사고전개]에 약하다. 그냥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첫째, 둘째, 셋째...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에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끼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약점을 극복되어야 발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나은 언어 능력'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먼저 말하기 전에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어떤 순서로 말할 것인지, 몇 가지를 말할 것인지, 결론은 어떻게 맺을 것인지 미리 생각한다면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선생님은 항상 논리정연해요. 선생님이 전하는 말씀은 선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기도하고, 훈련하는 수 밖에 없다. 타고난 재능으로 가능하다면야 최고로 좋겠지만 평범한 우리는 그럴 수 없고, 주님의 도움아래서 연습하는 수 밖에는 없다.
많이 읽어야 하며, 무엇보다 [묵상]의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공상은 쓸데없는 것이지만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말씀을 묵상하되 늘 논리적인 흐름을 가지고 생각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런 결과를 [매일 성경 큐티]라는 책자의 논리적 본문전개를 통해 선보였다.
넷째, 몇가지 요점만 말하라.
때로 강단에서 실패하는 메시지를 듣고 있노라면 설교하는 이가 뭘 생각하는지 모를 때가 있다. 그것은 참으로 우리를 답답하게 한다. 그래서 더욱 [훈련]의 필요성을 느낄 때가 있다.
어떤 경우는 '많은 이야기들'을 함으로서 실패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실패한다는 것이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해주고 싶은 말이 많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해서 '듣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패로 가는 지름길이다. 몇 시간을 이야기 해보라. 과연 얼만큼의 내용을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지. 우리는 마치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분주히 애쓰던 저 마르다 처럼 할 때가 많다. 주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충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것은 다른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지만 이 주제에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많은 것으로 분주하구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눅 10:42 )
우리는 너무 넓은 초장으로 양떼들을 끌고 다닌 것이다.
그래서 양떼들은 마치 뷔페식당에 이끌려가서 이것저것 다양한 음식을 먹고 난 사람처럼 된 것이다. 각 음식들이 나름으로는 훌륭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꼴을 준 사람은 추호도 자신이 그들을 '먹이지 못했다'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양떼들은 먹은 것이 없는 것이다.
이것저것 조금씩 맛보았을 뿐, 먹은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문을 나설 때는 공허함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다. "주제가 무엇이었지? 뭘 하라고 했었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할 때나 메시지를 전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할 원칙이 있다.
그것은 "요점을 몇가지로 제한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영국의 저 유명한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즈의 삶에서도 경험된 이야기 이다. 장래가 촉망되는 의사였던 그가 소명을 받고 설교자로 나서면서 작은 교회에 부임했을 때,그의 설교를 듣고 난후 나이많은 설교자는 그에게 이렇게 충고해 주었다.
"자네의 설교는 나무랄데 없이 훌륭했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자네는 너무 많은 짐을 성도들의 어깨에 올렸어. 너무 많은 것들을 이야기 했어. 나를 지켜보게나. 나는 오늘 저녁 설교에서 한 가지만을 말할 것이네. 단 그것은 세가지 관점에서 말하겠네"
로이드 존즈는 후일 자신의 회상을 통해 그 노설교자의 설교로 많은 것을 깨달았노라고 고백했다. 그는 너무나 많은 주제들을 한 시간의 설교 속에서 다루었던 것이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 자신은 만족되었을지 모르나(할말을 다 했으므로) 듣는 청중들은 무엇을 마음에 담아 가야 할지 몰라 당황하도록 만드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요점은 적을수록 좋다. 분명하게 요점을 밝히라. 그리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라. 유능하고, 우리의 마음에 오래 남는 메시지일수록 이 원칙이 잘 지켜짐을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구체적으로 말하라
이것은 '예'를 들어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드는 것은 설명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예를 든다는 것은 이야기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고, 집으로 비유하면 [창문]을 내는 것과 같다. 환하게 그 창으로 빛이 들어와 내부의 정경을 선명히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바로 [예]를 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어떤 것이지?"
[추상적인 개념]을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은 상대로 하여금 알아듣게 하는데 굉장한 도움을 준다. 유능한 설교자일수록 이 [예화]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재능을 가졌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유능한 전도자치고 [예화]를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도 없는 것이다.
오늘 하루 당신이 나눈 대화 속에서 얼마만큼 [예]를 들어서 설명했는가? 자신이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인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사람인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이야기 한다는 것은 특별히 감성적인 한국인들에게는 너무나 효과가 크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 사랑하신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것이 [마음]에 와 닿기는 힘들다.
그러나 좋은 예화를 이야기 해주면 사람들은 쉽게 '느낀다'. 또 감동을 받는 것이다. [감성]에만 호소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그러나 이야기는 감성에 호소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설명하는 습관은 철저히 몸에 배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렇게 훈련해 볼 수 있다.
친한 사람과 대화할 때, 의식적으로 추상적인 개념이 나오면 스스로 "예를 들면"하고 설명하기 시작해 보라. 때로는 예를 잘못 들 수도 있고, 말이 막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훈련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님을 각오하고 시도할 때, 놀라운 성과를 얻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대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정중히 "예를 들어봐 주세요"라고 요청하라.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여섯째, 동참 시키라
유능한 교사는 학생들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미국의 순회 설교자이며 WTB 선교회의 설립자, [교수법]의 대가인 브루스 윌킨스 박사는 자신의 학창시절의 은사, 곧 달라스 신학교의 [하워드 헨드릭스]에 대한 추억에서 헨드릭스 교수의 탁월한 학생들에 대한 관심을 언급한다.
그의 저서 [배우는 이의 일곱가지 법칙]에서 그는 자신이 대학원 시절 늘 감동을 받았던 그 교수의 성실함을 마지막에 시험해 보기로 작정한다. 그의 말이다.
신학원 마지막 학기 중에, 나는 헨드릭스 교수님을 시험하기로 작정했다. 학생 하나가 수업중에 막무가내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 이 위대한 교사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싶어졌다. 나는 교실 뒷편 오른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교실에서 하나밖에 없는 유리창 바로 옆이었고, 나는 수업 시간 내내 그 유리창 밖을 내다 보기로 했다. 교실에는 서른 명쯤 있었으므로 교수님은 부주의한 한 사람을 알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시계를 풀어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내 주의를 끌지 못할 때, 교수님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예상대로 그 분은 큰소리로 수업을 시작했고, 전형적인 주요 논제로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 내용을 적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슬쩍 곁눈질을 해보았을 때, 내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음을 교수님이 순식간에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교수님은 늘 하던 대로 하지 않고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농담을 했다. 웃는다면, 내가 듣고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에 나는 조심스럽게 손으로 입을 막고 계속 창문 밖을 응시했다.
2분이 지나자 교수님은 의자에서 일어나 칠판에 도표를 그리기 시작했다. 늘 하던 대로라면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그분은 그래도 내가 필기하지 않고 있자, 도표를 그리다 말고 멈추었다.
매직 펜을 내려놓고, 내가 앉은 쪽을 내려다보기 위해 교수님은 교실 구석 쪽에서 걸어왔다. 기어이 나와 눈을 맞추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마에 구슬땀이 맺혀 있었고 시계는 계속 똑딱똑딱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주의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분이 침묵을 깼다. 이 위대한 스승은 거의 뛰다시피 통로로 내려와 큰소리로 말했다. "윌킨슨,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 창문밖을 내다보는가?" 수줍은 시선으로 몸을 돌려 나는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나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궁금해 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3분 37초가 막 지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학생에게 대한 그의 참을성은 217초가 한계였다.
가슴에 그렇게 색다른 경험을 새긴 채, 나는 복도를 지나 다른 교수의 강의에 들어갔다. 그 강의는 반대였다. 그 교실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다른 강의의 과제물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수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단지 등을 돌려 교실 다른 쪽에 앉아 있는 학생들에게 강의했다.
그의 기본적인 태도는 "너희들이 배우고 싶지 않은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라는 식이었다."
그의 글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상반된 메신저를 만난다. 그들은 교사였고, 또한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듣는 이'를 향한 그들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유능한 교수는 학생들에게 집중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반응에 예민했던 반면 다른 이는 무관심했다.
'동참 시키라'는 의미는 바로 듣는 이로 하여금 나의 이야기에 참여토록 하는 것이다. 다른 곳에 신경을 뺏기지 않도록 말하는 편에서 배려해주는 노력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시선을 준다거나, 어투의 변화를 주는 것, 또는 일대일 대화에서는 상대를 터치하는 등의 행동으로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동참시킴]의 의미이다.
특별히 교수법에 뛰어난 사람일수록 이 부분을 잘 해낸다. 그들은 그냥 서서 이야기하기 보다는 강단을 왔다갔다 하면서 주의를 환기시킨다. 때로는 칠판을 이용해서 글을 쓰기도 한다. 글을 쓰는 것은 집중시키는 목적이 제일 큰 것이다. 또는 사람을 세워서 질문을 하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이 바로 상대로 하여금 '동참'케 하고, 졸거나 딴 생각을 하도록 하지 않는 것이다.
유명한 하워드 헨드릭스는 그 분야의 대가였던 것이다. 그는 학생 중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런 자세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청중들 중에서 몇사람을 마음에 선정하고 그 사람들에게만 말하듯 그들을 자연스레 주목하면서 이야기 하라. 그리하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보면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동참시키는 또 한가지 방법으로 목소리의 톤의 변화를 반드시 살리라고 권하고 싶다. 이것은 많은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어떤 경우는 너무 큰소리만 치는 분을 보기도 했는데 그것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강조할 때 외에는 큰 소리는 비효과적이다. 때로는 소곤소곤 이야기할 때가 있고, 때로는 단어를 길게 끌어줄 필요도 있는 것이다. 유능하게 스피치를 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 점에서 탁월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듣는 편에서 애쓰지 않아도 '들린다'.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의 말은 듣는 편에서 애를 써서 집중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데 반해 이런 훈련이 될 때, 그가 하는 말은 '들리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설교나 복음전도에 있어서 아주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다. 녹음기를 사용해서 많은 훈련을 해보거나,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서 연습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동참시키는 기술은 어렵다. 이론처럼 쉬운 것도 아니요, 재능이 있는 사람에 비해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배나 훈련해야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재능과, 은사도 중요하지만, 참된 애정과 열정으로 하나님 앞에 성실히 자신을 드리고 훈련했을 때 하나님은 큰 축복을 베푸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실망하지 말고 노력하라.
특별히 비언어적인 요소가 동참에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천지창조같은 어려운 주제일지라도 아이들 앞에서 참으로 진지하고 재미있는 표정으로 연극적 요소를 곁들여 이야기 한다면 아이들은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어, 이게 무슨 소리지? 어디서 들리는 거지? 이 속에 있는게 뭘까? (복화술로) 음메~, 꿀꿀~"
아이들중 절반 이상이 아무것도 없는 도화지 앞에 어느새 코를 들이대며 나와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어? 여긴 아무것도 없어요. 선생님!"
적어도 비언어적인 요소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효과적으로,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던 예는 아마도 [에스겔]의 경우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아주 특이한 명령을 하셨다. 사람들 앞에서 모형 성(城)을 그리도록 하였고, 때로는 대로에 멍석을 깔고 오른편으로 390일, 왼편으로 40일을 누워 지내도록 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 쇠똥으로 구워먹는 기행(奇行)을 연출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을 하나님께서 명하셨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충격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예상대로 백성들은 그 메시지에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교사라면, 많은 연구와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더 집중할 수 있을까?' 그것은 중요한 책임인 것이다.
나는 그것과 다른 한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애정"이다. 그것이 상대로 하여금, 청중으로 하여금 어떻게 하든지 나의 이야기에 동참시키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중요한 이야기, 이 귀중한 진리에 그가 반응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내 온 마음을 쏟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듣는 이를 향한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진정 사랑한다면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애를 써야 한다. 때로는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면서 까지 그런 정열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라'.
일곱째, 구체적으로 적용하라
특별히 메시지를 전할 때 있어서 설교자는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할 뿐 아니라, 듣는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적용시켜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 일을 잘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너무나 큰 것이다. '좋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행동이 변화되도록' 사람을 움직이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러므로 유능한 설교자일수록 [적용]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룰 줄 알고, 또 그렇게 청중들의 행동을 이끌어낸다.
오순절날 예루살렘에 모인 세계 각국의 유대인들에게 성령충만한 베드로는 놀라운 설교를 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그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3000명을 교회에 더하셨다. 그 설교의 절정은 마지막 결론의 '구체적 적용'에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양심의 가책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행2:37)라고 묻는 그들을 향해 베드로는 담대히 이렇게 외쳤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2:38)
이것이 구체적인 적용의 실례다.
때로 우리는 다른 성도와 교제할 때나 메시지를 전할 때, 추상적인 결론을 내리고 끝내는 경우가 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라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미흡하다. 왜냐면 그것은 듣는 이를 움직이지 못한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지?" 이것이 그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그것을 적용해서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과 같으며, 시범을 보여주는 효과를 낳는 것이다.예를 들어보자.
만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는 주제로 설교를 한다 하자. 여러 가지 예화라든가, 좋은 내용으로 말씀을 전했다 하더라도 그저 "그러므로 여러분 아내를 사랑합시다"라고만 말한다면 듣는 이들은 "아멘"이라고 말한 이후에 "그런데 어떻게?"라고 반드시 묻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런 식으로 제안을 하면서 적용시켜 주어 보라.
"여러분, 오늘부터 한달간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씩 퇴근길에 꽃을 사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하루에 한번 이상 집에 전화해서 아내의 안부를 물어 보도록 하세요. 또 적어도 한달동안에 두 번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아내와 외식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다소 힘들더라도 매일 아내에게 '사랑해'라고 말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어떻게 교회를 사랑했는가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습관이 안되어서 그렇지, 다소 낯간지러워서 그렇지 그런 마음씀이 바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주 한 두번씩 아내와 적어도 두시간 이상 [대화의 시간]을 가지도록 합시다. 그래서 그냥 꾹 참고 아내의 이야기를 들어줘 보세요. 한달만 그렇게 해 봅시다. 반박하고 싶고, 혼내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냥 꾹 참고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내가 반드시 실천하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그냥 들으세요. 아내가 무엇을 호소하는지, 내게서 무엇을 바라는지 들어봅시다..."
이런 구체적인 적용은 듣는 이로 하여금 '말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를 샘플로서 보여준다. 그래서 듣는 이들은 '아, 이렇게 행하면 되는구나'하고 깨닫게 되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더 나은 순종까지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사람이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순종'하는 것인지를 스스로 볼 수 있도록 하나의 기준,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라. 그것이 곧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여덟째, 확신과 열정으로 말하라.
서론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도 잠깐 언급했지만 [열정]과 확신의 문제는 메시지나 이야기에 있어서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일찍이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방식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살전1:5)
확신없이 전하는 메시지를 나는 듣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오늘날과 같은 극도로 혼란스럽고 정신없는 시대에는 '모호한' 개념들은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듣기를 원하는 이야기는 바로 "들으라! 이것이 진리다"고 외치는 그런 음성의 메시지다.
어쩌면 사람들은 저 광야의 침례 요한의 목소리를 듣기를 갈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러 이단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들은 [거짓된 가르침]을 가지고 진리를 외치듯 확신있게 소리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참 진리를 소유한 사람들은 오히려, 나약한 태도로 "여러분, 이것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어요?"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주일학교 교사든, 학생회 교사든, 아니면 설교자로서 강단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내용]의 충실함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그저 성경을 읽어주는 정도의 역할만 해놓고서 사람들이 변화되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무모한 것이다.
어떤 분은 사람들을 졸립게 하는 목소리로, 확신없는 태도와 열정없는 자세로 깨달은 말씀을 나누고 나서는 후일에 "우리가 지난 주에 배운 이 말씀..."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았다. 그렇지 않다. 성도들은 결코 그 본문과 그 주제를 배운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저, 그 주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한번 '전하려고 시도'해 본 것에 불과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전달되지 않은 메시지, 감동되지 않은 메시지는 더 이상 효력이 없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읽기만 해도, 듣기만 해도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강단]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러한 일을 바라고서가 아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성령과 능력과 큰 확신'으로 전파되며,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변화되는 심령]을 기대하기 때문에 강단은 지금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 안에 [확신]이 없다면 결코 그곳에 서서는 안되는 것이다. 열정과 확신을 나타내 보일 수 없는 사람은 [은사]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판단하고 자중해야 할 문제다.
열정과 확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둘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해도 상대는 눈물 흘리거나, 감동으로 흥분될 수 있다. 말하는 사람이 열정과 확신으로 전해주는 메시지를 들을 때,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그런 진리를 듣기를 갈망하고 있다. 우리의 귀를 긁어주는 수많은 세상 지식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심금을 울리며, 우리 자아의 욕망을 깨뜨려주는 능력과 확신의 메시지를 듣기를 원하는 것이다.
설령 그 말씀이 나로 하여금 "독사의 자식아, 네가 더러운 자요, 회개해야 할 자다. 정신차려라"고 소리치며 나로 재 가운데 엎드리도록 할지라도 나로 하나님을 느낌으로 흥분시킬 그런 말씀을 우리는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가 먼저 나를 감동시키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을 읽어야 한다. 말씀을 읽다가 울기도 하며, 뛰어 일어서기도 하며, 멍청히 앉아서 '주여, 이대로 죽어도 좋습니다' 라며 몸을 떨기도 하는 경험의 순간까지, 다윗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미친 듯이 찬양하는 경험을 할 때까지 말씀을 읽어야 한다. 말씀을 읽다가 몸을 떨며, 무릎을 꿇고 '거룩하신 하나님, 제가 얼마나 더러운 자인지... 저같은 자에게 이런 은혜를 부어 주셨나이까?'라고 외치는 두려운 경험을 할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야 한다.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진리에 대해 조심성 없게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한 많은 날들의 경험이 진정 부끄럽게 느껴질 때, 우리는 비로소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리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 때, [확신]과 [열정]은 우리 안에서 충만 할 것이다. 그 때 일어나서,선포하라!
3.무엇을 말했는지 알라
무엇을 말했는지 안다는 것은 [결론]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결론을 잘 내리는 사람은 자신이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해왔는지 아는 사람이다.
본론의 내용을 자신이 논리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론에서 삼천포로 빠지기 마련이다. 어떤 경우는 이런 메시지를 들은 기억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는데, 본론에서는 '말씀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주제가 다루어지다가 결론은 '교회 참석을 열심히 해야 한다'로 맺어지는 식이다.
그것은 마치 옴니버스와 같지 않은가! 그런 이야기는 마지막 결론을 들을 때 쯤이면 처음했던 이야기와 본론의 그 많은 시간을 투자한 내용은 다 마음에서 지워진 뒤다. 전하는 사람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무엇을 말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다시금 듣는 이에게 상기시켜 주고, 확인시켜 주고, 구체적으로 적용하도록 도와주라.
첫째, 요약하라
좋은 결론은 대개 전체적인 본론을 한번 요약해 주는 것이다.
자신이 몇가지 요점으로 이야기 했는지 안다면 요약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요약을 잘하는
사람은 "마지막으로, 끝으로, 진짜 끝으로..."식으로 질질 끄는 실수를 피할 수 있다. 내용을 그렇게 끄는 이유는 말하는 사람이 요점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지 못해서다. 결론을 내릴 시점에 새로운 요점이 생각나기 때문에 계속 음악 악보의 '코다'(Coda)와 같이 끝없이 늘여가는 것이다.
둘째, 다시 강조하라
좋은 요약은 강조점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요약을 한다고 해놓고 다시 장황하게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지루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그런 사람이 있다.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는 사람. 그런 사람과는 별로 대화하고픈 마음이 안 생길 것이다. 강조를 잘 하는 사람은 '말 많은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이다.
셋째, 분명하게 동기부여 하라
결론에서는 언제나 행동을 촉구하고, 반응을 일으키도록 마음을 써야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것은 마치 작가가 작품을 마지막 탈고하는 것과 같으며, 화가가 [화룡점정]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짧은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자신있고 분명한 태도가 필요하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를 위해 파송하시던 그 마음처럼, 내 안에서 증거된 진리가 땅에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 보내는 자세여야 한다. 그래서 [책임감]을 가지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피이드 백 하라.
이것은 이 책의 끝부분에서 다시 다룰 수 있기를 바라지만, 우리가 이야기나 메시지를 전했을 때, 대개는 그것을 끝이다. 다시금 그 말의 영향력이나 반응을 살피려 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이 끼친 영향을 한번쯤 확인해 볼 것이다.
지혜롭고 유능한 설교자는 서론을 이야기 하기 전부터 청중들의 반응에 민감하게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중간 중간 피이드 백 한다. 어떻게 느끼는지, 어떻게 반응해 오는지 확인하고 다시금 자신이 할 말을 결정하는 것이다. 상대가 듣고 있지 않다면 더 이상 무엇을 말할 필요가 있는가?
듣는 이가 졸고 있다면 대개 말하는 사람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확인하라. 다 전하고 나서도 확인하라. 내가 어떻게 전달했으며, 상대는 어떻게 알아 들었는지. 그것은 하나의 훈련이 될 것이다.
스피치훈련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작업을 해야 한다. 그것은 두가지 방법으로 행해질 수 있을 것이다. 먼저는 스스로 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나 전하는 메시지를 녹음해서 들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적나라한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거기서부터 변화의 시작을 기대하는 것이 좋다.
더 나아가서 마음을 열어 놓을 수 있는 조력자를 찾을 수 있다면 그에게 나의 스피치에 대해서 진실된 충고를 부탁하도록 하라. [설교훈련]중에는 지금까지 다룬 이런 요소들을 항목별로 냉정하게 평가해주는 것이 큰 도움이 되기도 할 것이다. 어떤 분들은 이것을 '인위적'이라고 반대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앞에서 언급한 영적인 '중심'을 망각하고 기술적인 부분에만 집착한다면 그런 지적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 중심을 살피고, 진정한 영적발전을 위해서 훈련받고자 한다면 주님께서 결코 우리의 삶의 [훈련]을 무익하게 보시지 않는다는 것을 신뢰하면서 이것들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