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하신 세존(世尊)께서 비록 열반에 드신지 오래 되었으나
이건 다보 여래를 두고 하신 말씀이죠.
보탑 안에 계시는데도 오히려 법을 위해 오셨는데
여러 사람들이 어찌하여 부지런히 법을 위하지 않는가.
아주 오래전에 열반에 드셨는데도
아직도 이렇게 불생불멸의 제법실상을 보여줌과 아울러서
또 여기서 밝히고자 하는 큰 목적은 법을 위해서 오셨다 그랬습니다.
법을 위한다고 하는 것은 법을 널리 펴고 아끼고 보호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하는 이런 것들이 다 포함 되어 있죠.
여기 이 부처님이 열반한 지는 수없는 겁이지만
가는 곳마다 법을 듣는 것은 법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니라.
다른 경전 설하는 데 다보불이 나타났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오직 법화경을 설 하는데 다보 부처님이 출현을 한 그런 이야기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것은 법화경을 듣기위해서 출현한 것이라고 그럽니다.
왜냐하면 법화경은 그만큼 만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다보 부처님은 만사를 제쳐 놓고
그것도 오래전에 열반하신 몸으로써 법화경을 설 한다고 하니까
여기에 와서 증명도 하고 법문도 들을 겸 이렇게 오게 되었다는 그런 내용이죠.
저 부처님의 본래의 소원(所願)은
내가 열반한 뒤에라도 어디든지 가서 항상 법화경을 듣고자 함'이니라.
다보 부처님이 법화경에 대한 그런 뭐라고 할까 애착과 열정과 뜨거운 신심은
내가 열반한 뒤에라도 어디서든지 법화경을 설 한다 하면
쫓아와서 듣고자하는 것, 이것이 다보 부처님의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뭘 그렇게 배울게 있고 더 공부할게 있어서
그렇게 쫓아다니면서 법화경 강의를 들으려고 하느냐
이런 생각을 우리가 떠올릴 수가 있죠.
그래서 우리는 조금 불교를 알면
"아이구 뭐 불교 다 알았다"이런 생각을 해요.
스스로 다 알았다고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그 소리가 그 소리고 그 소리지 뭐 별 특별한 게 있겠나"
이런 생각하기가 일쑤죠.
백 명이면 아마 구십 구명이 그런 소릴 할 겁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하는 그 자세 그것이 중요한 거죠.
무슨 다보 부처님이 몰라서 와서 듣겠습니까?
이것은 우리 중생들에게 교훈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반복하는데 의미가 있거든요.
이 시간에 우리들의 인생은 흘러 갈 것인데
이런 좋은 법문공부 하지 않고 뭐 하겠습니까?
뭐 더 좋은 게 있으면 여러 사람에게 당당하게 소개해서
모두 다 그 좋은 것을 함께 하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죠.
저는 학인들을 가르치면서 숙제를 잘 안 해온 사람들에게 이런 소리 합니다.
"그 동안 숙제 안하고 숙제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
이 불교 공부 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었든 모양이지?
그렇게 좋은 일이 있으면 어디 나한테 소개해서
나도 안내를 받아서 그 좋은 것을 함께 하도록 해주지 않고
왜 혼자만 그렇게 좋은 것을 즐기느냐" 이런 표현을 합니다.
글쎄요, 학인에게는 그 소리가 어떻게 들릴런지 모르지만
이 세상 그 어떤 선택보다도 아주 훌륭하고 최고 뛰어난 선택 이라고
이렇게 믿음을 갖고 어떤 행복을 누리면서 공부 하는데,
그것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 맛을 모르고 다른 곳을 기웃기웃 한다면
프로로써는 도저히 그게 이해가 안 되죠.
사실 전문적으로 불교 공부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소리를 충분히 들을 만하지 않겠나 하는 이런 생각도 합니다.
세상은 참 넓고 정보도 많고 기웃거릴 데도 많긴 하죠.
사실은 이 시대에 사는 것이 특히 보면 좋은 것이 너무 많아요.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고 또 마음을 빼앗길 만 한,
어지간히 냉정한 사람도 마음이 흔들릴 만 한 그런 일들이
이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철든 사람으로서 인생 최고의 가치는
이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고 공부한다는 바로 그것 이라는 거죠.
다보 부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법화경 설하는데 오겠습니까?
또 그것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그것을 설하는 곳에 왔다면
그건 그런대로 이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데 "부처님이 열반한 뒤에라도 어디든지 가서
항상 법화경을 듣고자 한다" 하는 이게 다보 부처님의 소원이예요.
아나율존자 하고 부처님 하고의 대화 여러분들 잘 아시겠습니다만
아나율은 눈이 어두운 분 아닙니까?
사실은 본래 게으른 사람인데 부처님께 꾸중을 듣고는 출가한 수행자로써
어찌 그렇게 낮잠만 자고 공부를 그렇게 안하면 어떻게 하느냐
아주 호된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부끄러워서 지금부터는 내가 도를 이루기 전에는
다시는 잠을 자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맹세 하고 잠을 자지 않았다는 거죠.
하루에 뭐 밥 먹는 시간 외에는 거의 자든 사람이 잠을 안자니까
멀지 않아서 눈이 짓물러 가지고 병이 나기 시작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풀로 눈이 감기지 않게 하다 보니까 눈이 짓물러서 실명을 하고 말았는데
어느 날 그렇게 열심히 공부 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고
정말 제대로 심안이 열려서
모든 인생과 삼라만상의 실상을 환희 볼 수 있는 천안통을 얻었죠.
그런 아나율이 평소에 늘 천안통을 쓰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는 옷이 떨어져서 바늘을 사용 해가지고 옷을 좀 기울려고 하는데
그 바늘귀를 손으로 더듬더듬 해서 끼니까 그게 제대로 끼어지겠습니까?
그래도 간혹은 몇 번 하다보면 끼워졌는데
어느 날은 아무리 여러 번 시도를 해도
그게 도대체 끼어지지가 않아서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답니다.
"누가 나를 위해서 바늘귀 하나 끼어 주는 복을 짓지 않겠는가?" 이런 말을 하자
어떤 사람이 와서 "아나율이여 내가 복을 좀 짓고싶다"하면서
그것을 받아서 끼워 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바로 부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나율이 깜짝 놀랐죠.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이 바늘귀 끼워주는 복을
자청해서 지으시려고 하십니까?
그러니까 부처님 하신 말씀이
"이 세상에서 나 보다 복 짓기 좋아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요즘 우리식 표현으로 하면 '나보다 복 짓기 좋아 하는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그래 봐" 이런 식으로 표현 했다는 거죠.
그렇게 부처님은 만행만덕을 갖추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복을 지으면서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 혼자 누리기 위함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에게 회향하기 위해서 그렇게 끊임없이 복을 짓고
지혜를 갈고 닦으면서 사셨다는 이야기가 아함부 경전에 있죠.
참 그런 것은 인간적이면서 아주 감동을 주는 이야기죠.
그런데 공부하기 좋아 하는 다보 부처님 같은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다보 부처님 보다 더 공부하기 좋아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봐"
이렇게 우리가 표현 할 정도로 다보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는데 와서 들어시고
또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석가모니가 열반하신 뒤에
어디서든지 누구나 법화경을 설한다면 가서 듣고자 하는 것이
다보 부처님의 소원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에도 다보 부처님께서 어디선가 이 방송을 들으시거나
아니면 멀리서 천이통으로 들으시거나
틀림없이 법화경 공부를 누구보다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리라 이렇게 우리가 이해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참 감동적인 대목이죠.
“가는 곳마다 법을 듣는 것은 법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니라.”.
성경에도 “먹을 것을 생각하지 말라 입을 것을 생각하지 말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만
정말 법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우리가 이해한다면
충분히 이런 경전의 말씀이 납득이 가는 대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검소하게만 살면 정말 공부하기 좋은 그런 시절에 살고 있습니다.
의식주 문제는 검소하게 살고 그 대신에 한껏 공부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가 다 준비가 되어있는 그러한 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