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의 문자는 모두 부처-(3)배독의 포인트
본초의 마지막에 「할 말은 많지만 이 해도 다 가고 사자(使者)도 서두르기에 이만 붓을 놓겠다」(신편어서 p.1054)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틀림없이 여러 가지로 어지남(御指南) 하시고 싶으신 것이 많으셨지만 이 해도 다 가고 사자(使者)를 기다리게 하며 쓴 답장이기에 사자(使者)를 배려한 단편의 답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우리에게 법화경 즉 어본존의 고마움과 신심의 과보(果報)를 교시하시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법화경의 문자(文字)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부처라는 것입니다.
홑옷을 공양하신 우에노(上野) 부인에게 주신 『단의초(單衣抄)』에서 「이 홑옷을 입고 불전(佛前)에 나아가 법화경(法華經)을 봉독(奉讀)한다면 경(經)의 문자(文字) 육만구천삼백팔십사자(六萬九千三百八十四字) 하나하나의 문자는 모두 금색의 부처이니라. 옷은 하나이지만 육만구천삼백팔십사 불(佛)에게 일일이 입혀드린 것이다」(신편어서 p.904)라 말씀하셨고, 『어의병단의어서(御衣並單衣御書)』에서도 「법화경의 문자는 육만구천삼백팔십사 자(字), 일자(一字)는 일불(一佛)이니라.(중략) 32상(相) 80종호(種好)의 부처보다도 법화경의 문자야말로 진실(眞實)한 부처시기에」(신편어서 p.908)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즉 법화경의 문자 하나하나가 모두 금색의 부처이므로 그 법화경을 공양하는 마음은 그대로 부처를 공양하는 것이 된다고 교시하시고 있습니다. 이 문장들을 배(拝)한다면, 매일의 근행 창제도 진심으로 행해야 합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는 듯한 근행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시간에 쫓겨 아주 급하게 근행하고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를 돌아봅시다. 한편 한편의 제목을 정확하게 발음하고, 어본존께 진심으로 제목을 공양한다고 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둘째는, 신심 강성히 어본존을 호지(護持)한다면 「불도 태울 수 없고 물도 표류하게 할 수 없다」라는 『약왕품(藥王品)』의 문장처럼, 번뇌라는 불에도 타지 않고 생사의 바다에서도 표류하지 않는 성불의 경계에서 자수법락(自受法樂)할 수 있습니다.
『왕사성사(王舍城事)』에 「대과보(大果報)의 사람을 대화(大火)는 불태우지 않았느니라.」(신편어서 p.974) 또, 「기원이 이루어지지 않음은 활은 강한데 활줄이 약하고 대도검(大刀劍)일지라도 쓰는 사람이 겁이 많은 것과 같은 것이니라. 결코 법화경(法華經)의 잘못이 아니로다.」(신편어서 p.975)라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기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법화경의 잘못이 아니라 무사가 활을 사용할 때 활시위를 충분히 당기지 않으면 활의 위력을 발휘할 수 없고, 대도(大刀)나 검(劍)을 쓸 때 겁이 많으면 대도(大刀)가 제구실을 못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신심의 힘, 확신이 약하면 제천(諸天)의 가호(加護)도 약한 것은 당연하다고 교시하시고 있습니다.
자칫 우리는 자신의 신심의 나약함을 짐짓 모른 체 하며 다른 것을 비판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앞의 금언(金言)과 같이,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닌 자신의 신심의 부족함에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을 똑똑히 반성하고 해이해지지 않는 정진과 노력을 거듭하여 「불도 태울 수 없고 물도 표류하게 할 수 없는」 신심에 머무르는 것이 간요(肝要)입니다.
대성인님의 미노부(身延) 생활을 생각할 때 만감이 교차합니다. 당시 신도들의 생활도 결코 편한 것은 아니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처럼 힘든 와중에도 외호(外護)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우리도 엄중한 상황에서야말로 신심의 정열을 불태워 대한민국의 올바른 광선유포를 위하여 연합회를 계속 외호(外護)해 나가며 불평하지 않는, 원질(怨嫉)하지 않는 신행에 머무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 격려하며 법혼불멸(法魂不滅)의 해의 절복 목표를 완수하도록 합시다.